지리다방

향로봉과 은신암

까막눈이 | 900

  난중잡록1에 나오는 향로봉과 은신암은 어디일까?


  난중잡록은 남원의병장 조경남이 임진·정유 양란 당시의 상황과 국내 외 정세 등을 기록한 야사집이다.  13세 때인 1582년(선조 15) 12월부터 쓰기 시작하여 1610년(광해군 2)까지 중요한 사실을 엮은 것이다. ‘난중잡록’이라 이름한 것은 임진·정유 두 차례의 난의 기록이 주요부문을 차지한 때문으로 여겨진다. 여기에는 정유재란 시 남원성의 함락과 운봉 주천일대의 왜군 점령으로 인해 달궁 인근지역으로 피난한 경로와 활동 그리고 아직까지 그 위치가 확실하게 밝혀지지 않은 황령동 향로봉 은신암 등의 지명이 담겨있어 여전히 풀리지 않는 궁금증을 자아내게 하고 있다. 


그래서 난중잡록에 나오는 지리산 일대의 지명들에 대해  탐구하고 그 위치를 밝혀보고자 한다.   


  ㅁ 운봉과 주천 그리고 남원성을 점령한 왜군을 피해 지리산으로 대피한 경로 중 황류동의 위치

  ㅁ 황류천을 건너 피난한 향로봉과 은신암

  ㅁ 은신암과 묘향대의 관련성 그리고 서산대사    


   난중잡록에 보이는 향로봉과 은신암을 알기 위해서는 먼저 황류천과 황류동이 어디인지를 먼저 살펴볼 필요가 있다. '달궁 두 개의 문'에서 대략 황류동과 황령사를 살펴 본 적이 있지만 조금 더 세밀히 보도록 하겠다.   


  1. 黃流洞(황류동)


  황류동이나 구천동, 백운동 화양동 등 洞의 개념은  계곡이 깊고 경관이 뛰어난 지역에 사용되었으니 현실을 탈피한 이상적인 세계로서의 동경인 洞天과 같은 의미로 사용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 난중잡록의 황류동에 대한 주석에 대한 나의 해석 


至黃流洞在智異山黃嶺寺香爐峯之間 其源出般若峯 盤回三岐眇峯而下 (황류동에 이르렀다. 류동은 지리산 황령사와 향로봉 사이에 있는데그 발원(其源)은 반야봉에서 나와 삼기(三岐)와 묘봉()으로 돌아 아래로 흐른다.)


  고전번역원 해석에는

 『지리산의 황령사(黃嶺寺)와 향로봉의 사이에 있는데, 수원(水源)은 반야봉(般若峯)에서 나와 삼기(三岐) 묘봉(眇峯)을 두루 돌아서 내려온다.』로 되어 있다. 


   둘 사이의 뜻이 다른 것은 아니지만 약간의 의역과 직역의 차이다.  원문의 '其源(기원)'울 고전번역원에서는 '물의 발원지'인 '수원(水源)'으로  번역하여 뜻을 제대로 해석했지만 한글로만 읽을 때 무슨 뜻인지 모호하게 되었다.   
  

   其源(기원)은 '그 물의 발원'를 말한다. 반회(盤回)란 물이 크게 돌아서 흐르는 것을 말한다. 삼기(三岐)의 기()란 갈림길을 말하는 것이니 세 갈림길이란 당시에는 지명이 없던 지금의 성삼재를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된다.  정석구의 두류산기2에 의하면 묘봉은 성삼재와 만복대 사이의 제2고리봉으로 불리는 곳이다


         정석구 두류산기 중 발췌
       『만복대에서 뻗은 산줄기는 조금 아래로 내려와 솟아 묘봉(玅峰)이 되니 산동의 주봉이다.  곧장 남쪽으로 뻗어내리다 약간 동쪽에 종봉(鐘峰)이 있는데....』   

지리산 남쪽의 물줄기는 묘봉과 종봉에서 발원하여 숙성치(宿星峙)에서 월천(月川)으로 흘러내린 물줄기와 합류한다. 남쪽으로 흘러가서 구례에 이르러 천은사와 화엄사에서 흘러나오는 물과 합류하고, 또 호남 좌도의 여러 물줄기가 문강(汶江)으로 합류한 것과 만난다. 동쪽으로 가서 오봉(五峰)을 지나 남쪽으로는 백운산의 여러 계곡에서 흘러나온 물과 만나고, 북쪽으로 흘러 문동(文洞) . 연곡계곡 . 화개계곡 . 악양계곡의 물과 합쳐지고, 다시 남쪽으로 흘러 섬강(蟾江)이 되어 남쪽 바다로 흘러 들어간다. 이것이 이 산 주변 수세(水勢)의 대략이다.』 

종봉(鐘峯)이란 종석대를 말함이다.
 

 ■ 여지도서3猪淵(저연)에 대한 주석 


   猪淵在智異山 般若峯下發源于南原黃嶺洞中至實相寺下合楓川下流 (저연은 지리산에 있는데 반야봉 아래에서 발원하여 남원 황령동 안에서 실상사 아래까지 흐르며 풍천하류와 합류한다.)


  저연는 돼지소(猪淵) 돗소, 즉 대소의 방언이다. 풍천은 남원시 아영면 성리 산지에서 발원하여 인월면 인월리 남천 합류점에 이르는 하천이다.


  둘다 지금의 만수천을 가르키고 있다. 지도상에서 보자면 다음과 같다. 따라서 황류천은 황류동과 같은 개념으로 보면 되겠다.

  ※ 사전적 의미에서의 洞은 골짜기라는 의미도 있지만, 물가에 함께 모여 산다는 '지역'의 개념으로 볼 수도 있다.  

황류동물길.jpg

   2. 사라진 이름 향로봉


   ■ 난중잡록의 향로봉에 관한 기록 


    이때에 영남 사람 임걸년(林傑年)이 또한 도당을 모아 지리산 반야봉에 주둔하고 출몰하며 도적질을 하였다.』


   
임걸년(林傑年)이 지리산의 여러 절을 다 무찌르니 중들과 인민이 피해를 입음이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었고 향로봉(香爐峯)에 주둔했다가 운봉 군사에게 밤에 습격을 당하여 패하여 달아났다.』


    이날은 바로 청정(淸正)의 군대가 함양으로부터 운봉으로 넘어 들어갈 때이다. 황산(荒山) 상하에는 적병이 가득 찼고, 밤중에 고촌(高村)으로 내려가 보니 적병이 넘쳐나 길을 건너기 어려운 형세이므로 바로 그대로 돌아왔다. 즉시로 양형과 이공직 등 여러 사람과 같이 황류천을 건너 은신암(隱身庵)의 옛터(향로봉의 북쪽기슭 아래 있다) 들어가 막을 치고 머물렀다.』

    2일 양형과 이공직의 형 등 여러 사람과 같이 도로 은신암으로 내려갔다. 이때에 왕래하는 왜적이 끊어지지 아니하고, 산골짜기를 날마다 수색하게 되어 길이 꽉 막혀버려 식량주머니가 텅 비었으나 어쩔 수 없이 향로봉으로 해서 도로 은신암으로 돌아왔다. 하루를 머무르니 왜적의 형세가 약간 멎게 되었다. 이공직의 형 등은 운봉으로 나갔다가 연상산(煙象山)으로 내려가고, 우리들은 밤에 황류천을 건넜는데, 늙은이와 어린이들이 병들고 고단하여 행보가 더디었다. 밤새도록 가서 겨우 정령성(鄭嶺城)에 도달하여 잠깐 쉬고, 아침에 서운암(瑞雲庵) 터에 내려가 매복하여 날이 저물기를 기다리니 올라왔던 산적이 모두 내려갔다.』 

    황류천이 지금의 만수천 상류인 것은 지도에서도 알 수 있는만큼 고촌(지금의 고기리)에서 돌아와 황류천을 건너 은신암으로 갔다는 것과 은신암에서 나와 황류천을 건너 밤새 정령성까지 갔다는 것은 향로봉이 지금의 반야봉 쪽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영남의 도적 임걸령이 반야봉과 향로봉에 주둔하며 도적질하거나 인근 사찰에 막대한 피해를 입혔다는 것은 반야봉과 향로봉이 서로 멀지 않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닐까? 도적이 산채를 여러 곳으로 옮겨 다니지는 않을 것이기에


   그러자면 황류천에서 반야봉으로 올라오는 곳에 가까운 곳 어딘가에 향로봉이 있을 터인데 달궁에서 올라가면 지금의 투구봉과 중봉 뿐이다. 그렇다면 투구봉과 중봉  둘 중 하나가 향로봉일 가능성이 있다. 


    ■ 현행 지도상의 향로봉골   

    그런데 뜻밖에 지금의 지도에 향로봉골이 있다. 다음 네이버지도에 향로봉골을 검색하면 투구봉 바로 아래 계곡 '광산우골'이 바로 향로봉골이다. 산내면 덕동리. 국토지리정보원의 지도 검색에도 동일한 결과다. 아마 달궁지역에서는 산 이름은 잊혀졌지만 계곡이름은 살아 남았던 모양이다. 옛날에는 지금의 여타 계곡 이름은 없었고 향로봉골만 있었을 것이다. 지도상 향로봉골의 아래 하점골이 만수천과 닿는 지점은 달궁의 '달달궁팬션' 앞이다.  달달궁팬션 주인장 내외는 심원마을에서 '숲속의 집'을 운영하던 분인데 국공에 의해 심원이 헐리면서 이곳으로 이사를 온 분이다.            


향로봉골1.map.png


여지도서.jpg


    ■ 여지도서의 향로봉


     여지도서에 『달궁은 지리산 향로봉 아래에 있다. 達宮在智異山香爐峯下』에 있다는 구절도 이를 뒷받침한다. 


     ※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는 香爐峯이 아닌 香煻峯으로 표기되어 있다. 읍지를 취합하여 여지도서를 편찬하는 과정에서 그렇게 된 것인지 오기인지 오독인지는 잘 모르겠다.  


    그렇다면 투구봉이 향로봉일까? 산 봉우리에 큰 바위가 있으면 그 모양이 투구인지 향로인지 상투인지는 부르는 사람들 마음이다. 투구봉 보다 그 위의 중봉이 이름이 없는데 투구봉이 이름을 얻었을까. 중봉은 산 이름이라기 보다는 그냥 반야봉 다음 높이 산이라는 개념으로 불렸을 것이다. 천왕봉(상봉)  중봉 하봉 이런 식으로... 


   ■ 반야중봉이 향로봉일 가능성


    따라서 투구봉 보다는 중봉이 향로봉이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보며 또 한가지 '향로봉 북쪽 기슭에 은신암이 있다'는 구절이다. 지금의 중봉 아래에 묘향대의 존재와 맞다. 

    『囊橐空虛 不得已由香爐峯。還下隱身庵 식량주머니가 텅 비었으나 어쩔 수 없이 향로봉으로 해서(由)도로 은신암으로 내려왔다.


     달궁쪽에서 가려면 중봉을 거쳐서 묘향대로 내려가는 상황과 일치한다.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따라서 향로봉은 지금의 반야중봉이라는 추정이 가능하게 된다. 왜냐면 반야봉과 중봉 투구봉 일대에는 산이 험해 알려진 그외 절터라 할 만한 곳이 없기 때문이다.

황류동1.png


   황령암기와 난중잡록에 달궁에 대한 언급이 없이 향로봉이라 한 것은 당시 마을 자체가 없었던 듯하다. 난중잡록의 『황류동은 지리산 황령사와 향로봉 사이에 있다.는 말은 황령사와 향로봉골 사이, 그러니까 지금의 달궁에서 거꾸로 거슬러 올라 심원까지'라는 말이 성립된다. 달궁과 심원사이에는 계곡외에는 달리 황령사 절터로 상정할만한 곳이 없다.    


   그리고 운성지의 『황령골... 지리산 향로봉 아래에 있는데 달궁의 남쪽에 있다.』는 것과도 일치한다. 

 3. 황령사의 위치는 심원인가

     ■ 황류동은 반야봉에서 발원하여 대소골을 지나는 만수천 상류지역

     ■ 황령사와 향로봉의 끝자락인 달궁사이를 황류동으로 부름

     ■ 폐사가 되어도 중창을 거듭할만큼 절집으로서의 주위 풍광이 수려

     ■ 용담선사의 중창기 묘사에 가장 어울리는 곳

          

      심원터 밖에 없다.  

 

     용담선사의 황령암 중창기의 내용으로 보아도 묘봉능선과 만복대능선이 우측과 뒤로 연결되고 앞으로 반야봉, 좌로는 '수레 자취를 끊어버리고 암자 좌측을 빙 둘러싸고 있는 것은 실상동이다.'라는 내용이 가장 부합한다.   


    용담선사가 중창기를 쓸 당시에도 실상동까지 우마차가 다닐 만한 임도가 있었던 모양이다. 구글맵에서 보면 지금의 도로도 수레 바퀴의 자취같이 느껴지는데, 비슷한 이야기는 이태의 남부군에도 나온다.         

황령암23.jpg

    

    빨치산 수기인 이태의 '남부군'에는 달궁골 피신한 남부군 기동사단이 인근 지역으로 보급투쟁 즉 식량탈취를 다니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보급투쟁은 운봉 주천 방면면과 산내면 분지의 마을들로 몇 차례 다녔다. 주천방면으로 가자면 1,200M대의 서북릉을 넘어야 했고 언제나 강력한 경찰대의 요격을 받아 부상자를 내고 때로는 사망자를 냈다. 산내면 쪽은 길이 좀 멀고 농가의 비축 식량이 워낙 없었지만 그 대신 적정이 대단치 않고 우마차가 다닐 만한 임도가 있어 신체적으로 편한 코스였다.』


    이상과 같이 보자면 향로봉은 중봉이고 황류동은 만수천의 상류인 황령사가 있던 심원마을터에서 달궁까지로 정의된다. 정석구가 두류산기에서 말한 "만복대 동쪽으로 낮아지는 산줄기는 황령의 주능선"이란 말도 만복대에서 달궁이나 심원 방향으로 뻗은 동릉이나 남릉 모두 황령동으로 이어지므로 이해가 되는 것이다.   


    황령사는 1818년 정석구의 두류산기에 이름이 보이니 그때까지는 존재했다고 보여지고  황령암에서 계사년에 간행된 大方廣佛華嚴經疏演義鈔1893년으로 알려져 있지만, 판식의 특징으로 보아 대암정사 간행본과 시기가 비슷함을 알 수 있고, 이 때문에 1773년 간행본으로 추정된다.고 주장하는 학자도 있다


    심원에 심원사가 있었다고는 하나 그 생멸시기도 알 수 없고 그것이 위 사실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도 모르겠다. 황령암이 폐사된 뒤에 생겨났을 수도 있고, 간판을 바꿔 달았을 수도 있고...     

남원소재 사찰의 개판 불서4

사찰

서명

내원정사

大方廣佛華嚴經疏鈔(1774)

대암정사

龍潭集(1768), 大方廣佛華嚴經普賢行願品疏(1774), 大方廣佛華嚴經疏鈔(1774)

실상사

南岳集(1753), 大方廣佛華嚴經疏鈔(1777)

황령암

大方廣佛華嚴經演義鈔(1773)


  4. 향로봉 피난경로 

   

  ■ 정유재란시 왜군의 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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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난중잡록의 지리산 피난경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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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함양을 거쳐 들어온 왜군에 남원성이 점령당하고  황류동으로 피난와 계곡에 머물던 일행은 간간히 문현(門峴 고개마루)에 올라 불타는 남원성을 바라보고 탄식했을 것이다. 만복대 능선에 올라서면 남원이 보인다. 그리고 왜군이 운봉 황산 고촌 일대에 넘쳐나므로 황류천을 건너 더 깊은 곳, 향로봉 쪽으로 피신할 필요성이 생겼다. 황류동은 운봉에서 왜적이 넘어오자면 반나절도 안 걸리는 곳이다.

    

    그러나 많은 인원의 식량사정도 큰 문제이므로 적의 세력이 뜸해진 기회를 보아 도로 향로봉에서 내려와 황류천을 건너 정령성에 도착하여 기회를 엿보다 아랫마을(서진암)으로 내려 갔을 것으로 추정된다. 여기 나오는 서진암은 정령치 아래 어떤 암자를 말하는 듯 하다.  

    그렇다면 향로봉은 반야봉 쪽이 될 수밖에 없고, 중봉이 향로봉일 가능성이 높은 것이 바로 아래가 달궁이고 중봉 아래 기슭에  은신하기 좋은 묘향대터가 있기 때문이다. 향로봉 아래 은신암 옛터는 그래서 중봉의 묘향대일 가능성이 높아지는 것이다.     

    15우리 군대와 중국 군대는 맞아 싸우느라 잠자고 밥먹을 틈도 없었다. 이때 심산궁곡까지도 왜적의 발굽에 거의 짓밟혔고, 운봉(雲峯)주성(周性)의 무리들도 모두 약탈을 당했다. 나와 양형(梁兄) 및 백암(白嵓) 이공직(李公直)의 부형과 가족 수백 명이 돌의 모서리를 붙잡고 기어서 내려갔다. 황류동(黃流洞)에 이르러 밤을 지냈다. 날마다 고성(孤城)을 바라보니 적병이 달 무리처럼 에워싸 위급하였다. 포성은 하늘을 진동하고, 불빛은 낮과 같이 밝았다.


     『16일 흉적(兇賊)이 남원을 함락했다. . ~중략~ 양형이 말하기를, “성이 함락된 뒤에 적은 반드시 대거 산을 수색할 것이요, 그대는 모름지기 노복을 인솔하고 산을 내려가서 양식을 운반하여다 산에 머무를 밑천을 장만하시오.” 하여, 나는 곧 하인 10여 명을 인솔하고 문현(門峴)에 올라가 망을 보았다. 이날은 바로 청정(淸正)의 군대가 함양으로부터 운봉으로 넘어 들어갈 때이다. 황산(荒山) 상하에는 적병이 가득 찼고, 밤중에 고촌(高村)으로 내려가 보니 적병이 넘쳐나 길을 건너기 어려운 형세이므로 바로 그대로 돌아왔다. 즉시로 양형과 이공직 등 여러 사람과 같이 황류천을 건너 은신암(隱身庵)의 옛터로 들어가 막을 치고 머물렀다.

     『 2일 양형과 이공직의 형 등 여러 사람과 같이 도로 은신암으로 내려갔다. 이때에 왕래하는 왜적이 끊어지지 아니하고, 산골짜기를 날마다 수색하게 되어 길이 꽉 막혀버려 식량주머니가 텅 비었으나 어쩔 수 없이 향로봉으로 해서 도로 은신암으로 돌아왔다. 하루를 머무르니 왜적의 형세가 약간 멎게 되었다. 이공직의 형 등은 운봉으로 나갔다가 연상산(煙象山)으로 내려가고, 우리들은 밤에 황류천을 건넜는데, 늙은이와 어린이들이 병들고 고단하여 행보가 더디었다. 밤새도록 가서 겨우 정령성(鄭嶺城)에 도달하여 잠깐 쉬고, 아침에 서운암(瑞雲庵) 터에 내려가 매복하여 날이 저물기를 기다리니 올라왔던 산적이 모두 내려갔다.』 
 

  5. 香爐峯  隱身庵  隱神庵   
     

   그런데 중봉이 향로봉이고 그 아래에 은신암(隱身庵) 터가 묘향대(妙香臺)라면 묘향대가 서산대사와의 어떤 연관성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스친다. 출가 후 의신 마을 주변에서 청허스님이 머물렀던 마지막 암자 은신암(隱神 )이 난중잡록의 은신암(隱身庵)이 아닐까하는 것이다. 


   도솔산에서 묵대사에게 인가를 받고 지리산으로 돌아와 삼철굴 대승사 의신 원통 원적 은신(隱神) 등 여러 암자에서 머물렀다.』


   난중잡록에는 "은신암 옛터(隱身庵 舊基)에 장막을 쳤다"는 것으로 보아 은신암은 그때 이미 폐사된 것으로 보이므로 정확한 암자명이 아닌 소리나는 대로 적었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묘봉을 예로 들자면 정석구의두류산기에는 묘봉(玅峰), 용담스님의 황령암 중창기에는 妙峰, 난중잡록에는 眇峯으로 표기되는 식이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관련성으로 연결하기에는 약하지만 청허스님이 의신에서 용성의 도반을 찾아가는 길목에 은신암이 있었다면 가능성은 좀 높아지지 않을까.

서산대사 봉성 이동경로 상상도.png 

  청허스님은  용성(龍城)의 성촌(星村)5 가는 산길을 상상해 보면 의신 - 은신암(묘향대)  - 향로봉(중봉) - 황령암(심원) - 황령(묘봉치) -  산동(鳳城)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이때는 지리산에서 청허스님이 오대산으로 가기(1546년) 전 이고, 임진왜란(1597년)이 일어나기 훨씬 전이므로 일단 수행처로서의 은신암이 온전할 수도 있었을 것이므로 거쳐 가거나 아니면 은신암에서 기거하다 용성으로 갔을 경우도 상상해 볼 수도 있겠다. 스님은 용성(龍城)의 도반을 찾아 성촌을 지나다 한낮의 닭소리를 듣고 문득 게송을 읊기도 하였다. 그때 용성에 가서 지은 몇 수 중 '봉성의 늙은 원 글에 차운 한 시'6 중에 다음과 같은 시가 있다. 


   『曾栖地異㝡高峯  却愧身遊道路中  일찍이 지리산 높은 봉에 깃들었으나    도리어 몸은 길 가운데 머무르니 부끄럽구나 

    今宿古城隣古寺  暮天風送一聲鐘  지금 옛 성에 이웃한 옛 절에 유숙하니  저문 하늘은 바람에 종소리를 보내는구나』 

 

    地異㝡高峯(지리 최고봉)의 㝡(최)는 가장 이라는 뜻이다. 지리산 최고봉에서 수행하고 있으나 아직 몸은 깨닫지 못하고 있다는 뜻을 나타내고 있다.     우리나라 절집 중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곳이 1,500m인 묘향대이고 그 다음이 노고단 아래 문수대 1,310m 설악산 봉정암이 1,200m라고 한다.  가히 하늘이 감춘(隱神)의 땅들이다.  청허스님이 젊은 시절 향로봉 아래 은신암(묘향대)에서 수행했다는 암시가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서산대사는 1557년 서른 일곱에 선교양판사라는 조정의 직책을 던지고 금강산으로 가 반 년, 그리고 지리산 내은적암에서 3년을 주석했으며 그리고 황령암을 지나 능인암 칠불암 등에서 다시 3년을 보냈다고 [완산 노부윤에게 올리는 글上完山盧府尹書]에 그의 행적을 세세히 기록해 놓았다. 


   아마 이 때 의신과 황령암을 오가며 반야봉과 은신암을 지나다녔을 것이고 황령암기는 이즈음 지어졌을 것이다. 황령암기는 당시 황령동에 전해 내려오던 이야기를 서산대사가 풀어낸 이야기이지만 내용이 사실인지 아닌지의 문제보다는 서산대사의 생각을 엮어낸 의미가 중요하다. 진지왕 원년(576년) 운집대사가 중국에서 귀국하여 황령사를 세웠다던지 마한의 피난도성을 쌓았다던지 하는 것은 의미 없는 이야기 일 수는 있으나 '황령의 남쪽에 황령정사가 있다'는 등의 인식은 분명한 것이다. 


   서산대사가 황령암기에서 말라빠진 전설의 뼈에다 살을 붙이고, 아름다운 문장으로 피를 돌게 한 그 이유로 지금 우리는 황령암과 황령의 위치를 확인해 보는 것 아니겠는가. 따라서 청허스님이 반야봉에서 황령암으로 오르내리며 본 좌우의 황령과 정령은 만복대를 중심으로 좌측 능선에 있는 황령은 황장군이 지키고, 우측 능선의 정령은 정장군이 커버한다는 개념있는 스토리인 것이다. 만복대 좌측의 묘봉치가 황령이 되는 이유도 그것이다.     


  6. 妙香臺 妙香山  妙香山人  
       

   아함경과 유마경 등 여러 경전에 나오는 말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바람을 거슬러 향기를 풍긴다'는 묘향대라는 이름과 무슨 상관이 있을까?  묘향대에 서면 영신봉 능선 그 너머로 천왕봉이 정상 언저리 부분만 아스라히 보인다. 이름 붙이기 나름이지만 나는 그 때문에 묘향이 아닐까도 생각한 적도 있다. 그런데 그럴리가.   


   1780년의 개운조사의「개운당유서(開雲堂遺書)」에 처음 나오는 "~ 지리산 묘향대로 떠난다. ~ 智異山妙香臺”는 의미로 보아  개운조사가 창건한 것이 아닌 그 이전에 이미 묘향대가 있었다는 것이다. 지리산 거개의 사암들이 신라 때부터 있어왔던 것 아닌가? 


   청허스님은 지리산을 떠나 태백산 오대산 풍악산을 밟은 뒤에 묘향산 보현사 등 여러 곳에 주석했며 말년을 묘향산에서 보냈고 묘향산 향로봉에 올라 지은 시도 있다. 西山大師의 西山은 妙香山을 말함이다


   登 香盧峰                                               향로봉에 올라

   萬國都城如蟻垤  千家豪傑若醯鷄    만국의 도성은 개밋둑 다름없고             천가의 호걸들도 초파리와 한가질세.

    窓明月淸虛枕     無限松風韻不齊    창 가득 밝은 달빛 맑고 텅 빈 베개맡에  끝없는 솔바람은 곡조도 갖가지라.    

   지리산에서 암자의 이름으로 묘향이란 말을 사용한다는 것은 서산대사와 관계되지 않고서는 상상하기 어렵다. 선불교의 도제식 제자 양성방식에서 스승은 절대자에 가깝다. 제자는 스승의 그림자 근처에도 얼씬거릴 수도 없다. 질문조차 쉽지않다. 곧바로 화살이 날아들기 때문이다. 스승은 친절하지 않고 다감하게 알려주지도 않는다. 불교는 이해의 종교가 아닌 깨달음의 종교이고 그것은 스승도 대신 해 줄 수 없는 본인의 처절한 노력으로만 성취 가능한 것이다. 그렇지만 스승의 영향은 절대적이다.
 
   지리산은 서산대사의 출가지이자 스승과 제자들이 즐비한 스님의 고향 같은 곳이고 더구나 왜란을 겪으면서 그의 영향력은 세월과 종교를 뛰어넘는 것이 되었다. 1564년 후학들을 위해 금강산 백화암에서 쓴 선수행의 지침서인 「선가귀감禪家龜鑑」을 비롯한 여러 저서들은 저술했고, 조선시대 모든 승려들의 스승이기도 하다.    

   청허스님이 지리산을 떠난 이후에도 스님들과 서신을 주고 받은 글이 있다. 
 

    두류산 제사(諸師)의 글에 답하면서

     금기金氣가 수승殊勝하고 아름다운 시절에 여러분의 근황은 어떠하신가. 산승은 여러 대덕스님들의 바람과 구름같은 법시法施를 받으면서도 한갓 밥과 죽을 낭비하고 있을 뿐이다. 지난 행에는 혹은 서찰을 받고 혹은 선물을 받아 옛벗(道伴)을 잊지 않고 간담을 기울여 통하여 주었으니 만약 신의가 아니라면 누가 능히 이와 같이 할 수 있을 것인가. 더욱 감사하고 감사하다. 산승은 한편으로 法의 등불이 장차 꺼지려 하는 것을 슬퍼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전하여  이어질 후일의 불꽃을 기쁘게 여길 뿐이다. 삼가 감사함이로다.』        

    지리산을 떠난 이후에도 서산대사의 계속 영향력이  유지되었고,  지리산에서는 선물도 보내고 했던 것이다.  

    旃檀(전단)7을 욺겨 심으면 다른 물건에도 향기가 난다."는 서산대사의 글이 있다.  묘향대는 묘향산의 전단 향기에 실려 그들의 꿈을 이루고자 했던  두류산의 제자들이 은신암(隱神庵) 터에 세운 西山大師 즉 妙香山人에 대한 흠모의 표현은 아닐까. 

   그래서 妙香臺의 妙香은 경전 속의 "바람을 거슬러 향기를 풍긴다'는 뜻을 취했다기 보다는 서산대사의 호에서 이름 지은 것으로 나는 해석한다. 7. 맺는 말 '예전에 쓴 '달궁 두개의 문'에서 심원이 황령암이 있던 곳이고 묘봉치가 황령일 것이라는 글을 쓴 적이 있다. 이 글은 향로봉과 은신암이 어딜까 하 는 궁금증에서 출발했고, 그러다보니 황류천을 건너 향로봉으로 또는 정령성으로 오갔으며 따라서 황류천과 황류동의 위치에 대해 확실하게 정리할 필 요가 있었다. 또 조경남 일행의 발길을 따라 가다보니 향로봉이 반야중봉 쪽이고 그 아래 은신암(隱身庵)이 지금의 묘향대일 가능성이 매우 높았다. 그렇다면 청허스님 이 젊은 시절 수행했다는 은신암(隱神庵)이 아닐까는 궁금증이 들었고 묘향(妙香)이름은 청허스님의 다른 호 妙香山人과 연결된다. 또 묘향대는 의신과 황령암 가는 길의 도중(途中)에 있다.
그러나
황령암지나 향로봉 은신암옛터 등은 똑부러지게 증명할 증거물은 없다. 옛 사람들이 써 놓은 몇 자의 글들을 조합해서 이리저리 머리를 굴려보고 추론해 보는 것 말고는 뾰족한 수도 없고, 더구나 누구에게도 관심 밖의 일이다.  

    해서 자다가 봉창두드리고, 남의 뒷다리 문지르는 짓이라. 중언부언을 끝낸다.      


각주 1

亂中雜錄. 조선 중기의 인물로 임진왜란 당시 의병장으로 활약했던 조경남(趙慶男, 1570년 ~ 1641년)이 선조 15년인 1582년 12월부터 인조 15년인 1637년까지 약 57년간 국내외에서 일어난 주요한 사건들을 일기체의 형식으로 기록하여 남긴 기록물. 속잡록까지 합쳐 총 8권 4책. 현재 전라북도 남원시 주천면 은송리에 거주하는 후손들이 소장하고 ..

각주 2

정석구((丁錫龜 ) : (1772-1833) 자는 우서(禹瑞), 호는 허재(虛齋)이며, 본관은 창원(昌原)이다. 전라북도 남원 지사방(只沙坊) 내기(內基)에서 태어났다. 그의 선대 중 상호군(上護軍)을 지낸 정연방(丁衍邦)이 처음 남원에 거주하였다. 만현(晩軒) 정염(丁焰)의 후손이다. 1790년 성암(省嵒) 이석하(李錫夏)에게 수학하였고, 18..

각주 3

1757년∼1765년에 각 읍에서 편찬한 읍지를 모아 성책한 전국 지방지. 읍지.

각주 4

* 지리산권불교의 사상과 문화’ 『지리산 소재 사찰의 조선시대 개판 불서 연구』 송일기, 박민희

각주 5

지금의 구례 산동(鳳城)

각주 6

走次李鳳城老倅韻 二首

각주 7

향나무의 일종



2 Comments
해영 2019.06.24 10:58  
까막눈이님의 향로봉을 읽고 산행기방에 엉겅퀴님의 향로봉을 리뷰 했습니다.
쉽지 않은 탐구를 고전에 대입해 풀어 주시니 재밌고 유익합니다.
반야 중봉을 향로봉이라 추정하시니
마빡을 치게 했던 엉형님의 향로봉과 대입해 읽는 맛이 솔솔합니다.

지리산이 즐거워 집니다.
임우식 2019.06.26 16:26  
정독해 보려고 프린트했읍니다
시간을 들여 찬찬히 연구하여 보겠읍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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