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다방

살구

강호원 | 277


살구

        ―유홍준(1962~ )

 

저수지 밑
축사에 수의사가 온다
어린 돌배기 송아지에게 다가가 앞발을 묶고
뒷발을 묶고 자빠뜨려 고환을 찾아낸다
어린 송아지 어린 송아지 돌배기 송아지
고환을 잃어버리는 송아지가 지르는 비명을
나는 짧게 듣는다
서둘러 수의사는 떠나고 저수지 밑
축사 주인은 어린 송아지의 고환을 뒤꼍 살구나무 아래 묻는다
풋살구만 한 고환이다
여물지 않은 고환이다
봄이 오면 살구나무, 울음처럼 애틋한 꽃을 피울 것이다
조그만 열매들을 다닥다닥 맺을 것이다
어린 송아지 고환처럼
조그만 살구

 

'살구꽃 핀 마을은 어디나 고향 같다'던 시가 있었습니다. 

집마다 뒤꼍에 살구나무, 복숭아나무 한두 그루 없는 집이 없었습니다. '향수'를 호출하는 여유로운 구절입니다. 

하나, 조금 더 들어가 그 찬란하던 꽃과 열매의 풍경 속에 서러운 '동영상' 하나쯤 숨어 있지 않은 집도 없었습니다. 

신산한 가계(家系)를 묵묵히 지켜본 나무들이죠. 여기 또 다른 아픈 사연을 품고 살구나무가 풋살구들을 맺고 서 있습니다. 

참 서글픈 풍경입니다.

 

그놈의 '생산성'이라는 것 좀 어떻게 해볼 수 없을까요? 짐승 듣는 앞에서는 값을 말하지 않던, 분명 지금보다 '높은' 시절이 있었습니다. 

끝없이 비루해지는 것을 '부자'가 되는 것이라고 착각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풋살구, 그 즙을 마음에 쏟아붓습니다.

 

장 석 남  시인. 한양여대 교수
출처 : 장석남의 시로 가꾸는 정원


위 유홍준 시인은 문화재청장을 지낸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저자가 아니고,

경남 산청 출신으로 1,998년 등단했습니다.

시집으로 [상가에 모인 구두들], [나는, 웃는다], [저녁의 슬하]가 있습니다.

 

하동 북천면에 있는 [이병주 문학관]에 근무합니다.

몇 년 전에 유키와 함께 방문해 주변 명소도 소개받고 감태나무차와 식사대접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1 Comments
꼭대 2020.06.12 20:29  
우연찮게 오늘 청량리 난전에 늘려진 딱 그만한 살구를 유심히 바라보았는데,
<금농>님 올려주신 시를 읽으면서 애잔한 살구를 생각하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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