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다방

1942년 이항녕 교수(당시 하동군수)의 지리산 산행기입니다.

등산박물관 | 762

해방후 일제하 행위를 참회한 '특이한' 분으로 이항녕 교수를 든다.

그는 경성제대 법대를 졸업하고 고등문관시험에 합격후 1941년 하동군수로 부임한다.

벚꽃으로 유명한 쌍계사 길을 걸으며 쌍계사를 자주 찾았다 하고  1942년에는 지리산을 오른다.


아래는 1998년 회고한 그때 그시절 지리산 산행 노정기이다.




소고 이향녕 선생의 유고집 "작은 언덕 큰바람"에 '지리산(1992)이가 있다.

평생 4회에 걸친 지리산행을 회고하고 있는데 그 첫머리로 일제 때의 산행기를 적고 있다.


일제시절의 지리산 산행에 대한 기록은 그리 많지 않다.

그의 기억속 산행기에는 당시 지리산에 대한 팩트가 들어 있어 가치를 더해준다.


내가 지리산에 처음 오른 것은 1942년 6월 28일이었다. 당시 나는 경상남도 하동군청에 재직하고 있었다. 양곡공출을 잘못했다고 하야 도청에서 책임추궁을 당하고, 매일 울적한 시간을 보내던 터라 무슨 기분 전환의 방법이 없나하고 생각한 끝에 지리산에 오르기로 했다.


지리산의 지리를 잘 아는 군청 산림계 직원 한 사람과 같이 떠나기로 하였다. 그때 지리산에 오르는 가장 가까운 길은 산청에서 오르는 것이었다. 우리들은 우선 진주로 나가서 다시 산청군 단성(여기는 면화 시배지이다)을 거쳐 시천면 시리를 지나 중산리에 이르렀는데 당시 여기에 규슈(九州) 대학 연습림이 있었다.


여기서 다시 올라 문창대(최고운이 놀던 곳)를 거쳐 광덕사(법계사)를 지나 드디어 천왕봉 정상에 올랐다. 그때 정상에는 조그마한 나무 조각에 다만 천왕봉(天王峯)이라고 쓴 표지가 있었다. 날씨는 쾌청하고, 안계(眼界)가 광활하여 사방이 환하고 시원하게 보였다.


지리에 올랐노라 구름타고 삼천장

천상천하 억천계가 안하에 누었으니

이 몸이 우화등선하여 간 곳 몰라 하노라


천왕봉 정상에서 호연지기를 마음껏 마시고 하산을 시작하여 촉대봉(燭臺峰)을 거쳐 세석평전에 이르렀는데, 여기는 무인지경으로 빈 초가가 딱 한집 있어 하루를 잤다. 밤에는 짐승들의 우는 소리가 들렸다. 이튿날 6월 29일 세석을 출발하여 대성리와 화개를 거쳐 하동읍내로 돌아왔다.이번 지리산행은 지리산을 동에서 오른 것이다.



1) 하동에서 산청을 가려면 진주로 갔다가 다시 산청으로 가야 했다.

2) 지리산은 당시 일본의 제국대학-규슈, 도쿄, 교토의 연습림이 있었다.

3) 천왕봉 정상에는 천왕봉이라는 작은 나무 푯대가 있었다.

4) 세석평전에는 빈 초가가 딱 한집 있었다.


이 팩트는  1942년 전후 지리산에 대한 귀한 자료라 하겠다.

여기서 일제하 지리산의 사정에 대해 조금 더 보태본다.


일제하 지리산은 지금처럼 법계사에서천왕봉 올라 노고단 지나 화엄사까지 '통'으로 길이 놓여져 있지 않았다. 당시 장비로는 종주가 불가능했을 가능성도 높고, 통으로 인식한 것 같지도 않다. 그래서 지리99에 올려진 노산 이은상의 지리산 산행기를 보면 알다시피 화엄사에서 올라 노고단 지나 내려왔다가 다시 올라간다. 지리산 전체에 길이 표시된 지도는 1940년대에 들어와서야 볼 수 있다.


5,60년대 산청의 법계사 루트로 오른 이들의 기록에는 천왕봉까지의 산길을 거의 밀림으로 표현해 놓고 있다. 그렇다면 일제 때는 더했을까?  아니다. 지리99의 자료편을 보면, 일제 때 법계사 루트로 정상을 하루만에 오르내렸다는 7세 어린아이의 기록도 있다. 그때는 우리 상상 밖으로 등산로가 잘 정비되어 있었던 것이다.


교토 제국대학 연습림이 있던 함양 백무동쪽도 마찬가지였다. 그시절 이미 당일치기로 백무동에서 천왕봉에 올랐다가 하산이 가능했다.


등산 초보였을 지방 유지 이항녕 군수가 법계사에서 올라 세석평전에서 일박을 하고  쌍계사로 1박 2일로 오르내린 것을 잘 유념해야 한다. 지금도 그리 호락호락한 코스는 아니다. 이제 우리는 일제때 지리산은 원시시대가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아무리 그렇다곤 하더라도 6월 28일 아침에 하동출발-진주-중산리-법계사- 천왕봉-세석산장 일박이 가능할까? 

(확인해보지는 못했지만 당시 신작로는 중산리가 아니라 덕산면 사무소 정도까지 있지 않았을까 싶은데)






이항녕은 많은 에세이집에서 옛 추억을 회상하고 있는데, "작은 언덕에서, 나의 인생관"(1978)에도 하동군수 시절의 편린이 곳곳에 있다.

41년 쌍계사에서의 일화로 "쌍계사에서 일본인의 미움을 받아 피해있던 노산 이은상 시인도 가끔 만났다. 1년뒤 창녕군수로 옮겨갔다'라고 적고 있다.


노산 이은상의 역작 "지리산 탐험기"는 1930년대 지리산을 담고 있다.

1941년경 쌍계사에 머물던 시절 이은상은 분명히 다시 지리산을 찾았을 텐데, 그때의 산행기록은 없는 걸로 보인다. 1930년대와 1940년대 지리산을 비교할 수 있는 좋은 자료가 되었을텐데 영 아쉽다.


 

4 Comments
꼭대 2021.07.30 12:01  
이항녕 교수의 짧은 지리산 산행기 속에
지금으로서는 당연하고 사소한 것 같지만 <등산박물관>님 정리해 놓은 것처럼
당시 지리산의 시대상을 알 수 있는 의미 있는 정보를 담고 있군요.

그때나 지금이나 변함없는 것이 있다면, 세상(직장)에서 머리 아픈 일이 있어 훌쩍 지리산으로 떠나 산정에서 하룻밤 자고 오고 싶은 마음입니다.

이분이 평생 총 4회 지리산 산행기를 남겼다니 올려주실 산행기를 통하여 지리산을 바라보는 시선이 어떻게 변하는지 지켜보는 일도 흥미 있겠습니다.
등산박물관 2021.08.18 22:05  
꼭대님, 댓글 감사드립니다.

 '훌쩍'이라는 표현이 정말 인상적입니다.
지리산 산행 4회를 회고하고 있는데, 나머지는 정보(?)로서의 가치는 별로 없이 감회를 토로한 시들인 걸로 기억합니다.
좀 더 긴글이면 좋았을 텐데 저도 아쉽습니다...
해영 2021.08.02 07:43  
근대 산행기를 찾아 읽다 보면 의외로  작품 수가 적다는 것을 느낍니다.
물론 일제를 더치고 육이오사변을 겪어 빨치산의 아픔으로 산행기가 묻혔겠지만
기록을 중시하는 한국의 정서를 생각하면 안타까운 일입니다.
요줌 산을 막아 지정된?(누구 정해놓은 규칙인지)길로만 산객을 다니게 하는 일이
50년이 지나 지금의 시간을 되돌려 보면 과연 자연보호의 가치로 내세울까 의문이 생깁니다.
지리산길은 사람이 소통했던 길이였고 기록에 의해 귀중한 자료로 현세를 이끌어 주는 역활을 합니다.
아주 적게 남은 지리산행기를 찾아 현재와 대조 하는 작업이 러시아 곰시키들을 데리고와 돈 들여가며 학대하는것 보다
더 의미있는 작업이라 생각됩니다.
등산박물관에 있는 소중한 자료가 지리산의 의미있는 복원작업으로 이어지기를 바랍니다.
등산박물관 2021.08.18 22:07  
선배님 말씀대로 지리산을 바라볼 근대 산행기를 찾는 노력을 더 해야할 듯 하네요.

'지리산길은 사람이 소통했던 길이였고 기록에 의해 귀중한 자료로 현세를 이끌어 주는 역활을 합니다."라는 구절, 곰곰히 되새기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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