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다방
일제시대, 난리도 아니었던 지리산 화엄사 봄맞이 풍경입니다.
지금은 구례 봄맞이하면 노란 산수유 말고 다른 게 연상되기 쉽지 않은데. 이것도 시절인연입니다.
6,70년대까지만 해도 이른 봄 구례하면 거자수가 앞섰고, 산수유는 늦가을 약재채취때나 언급되는 게 보통이었죠.
8,90년대에만 해도 봄이 오면 외지인들이 말린 오징어 한축 들고 구례의 농가 온돌방에서 밤새도록 고로쇠물을 마시는 문화가 있었다 합니다.
물마시면 싱거우니까 오징어 씹고, 오징어가 짜니까 다시 고로쇠 물마시고...
이거 재미로 하면 재미있는 이야기인데요.
한때 인기높았던 소설 "야인"이던가에서는 고문 중의 고문이 대충 이런게 기억이 납니다.
창문이 없는 골방에 위스키나 소주하고 오징어 말린 거를 던져놓는다.
그러면 배고프면 오징어 먹고, 짜니까 소주마시고, 소주마시니 안주로 오징어 먹고, 배고파서 오징어 먹고 목말라 소주먹고...
사흘쯤 지나면 완전히 폐인되어 술술 비밀을 불게 되어 있다네요.
각설하고 다시 돌아가 고로쇠라는 것 이전에는 물론 거자수 축제가 있었는데, 이게 일제때로 올라가면 1.4후퇴는 난리도 아니었습니다.
아래 육당 최남선 선생의 1925년 "심춘순례" 맨 마지막장 장탄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탄식이 사실 상당히 재미있습니다.
그당시 우리네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 양반네들이 아닌- 어떻게 봄을 즐기고 싶어했는지를 볼 수 있으니 말이죠.
심춘순례 마지막은 순천에서 구례로 들어와 화엄사 동구에서 끝맺습니다.
무엇이 그리 급했을까요.
만약에 시간이 쫓기지 않았다면 분명히 노고단에 올랐을 거라는 건 그의 그 이전 여정을 보면 확신할 수 있습니다.
이어 하동 쌍계사 등에 관한 글도 남겼을 텐데 애석한지고.
글의 말미는 사성암에서 내려와 나룻배를 이용해서 섬진강을 건너 구례읍내로 들어오는 부분부터입니다.
이 글 이전에는 지리산 쪽의 봄맞이로 거자수문화를 언급하는 구절이 있고요.
찬찬히 읽으시면 재미있을거라 생각합니다.
이렇게 해서 심춘순례"는 아쉽게도 끝을 맺습니다.
그는 분명히 노고단에 올라 만장의 소회를 풀어냈을텐데 아쉽습니다.
아무튼 일주문 안에까지 갈비를 내다 걸고 파는 화엄사 봄맞이 풍경.
분위기 지금으로서는 절대 상상할 수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