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다방
지리산팔경의 제1경이 과연 '천왕일출'일까요? 또는 지리산 십경을 외우는 방법에 대해서.
아래 이야기는 지리산 십경에 대한 잡설입니다.
지리99에 선보이기는 좀 부끄럽긴 하지만, 심심풀이삼아 한번 읽어주세요~
지리산 팔경 또는 지리산 십경이 있습니다.
이 글은 지리산을 좋아하지만, 지리팔경이 잘 외워지지 않은 분들을 위한 것입니다.
그건 우리의 둔한 머리 탓이 아닙니다. 지리산 사랑이 부족해서도 아닙니다.
처음 만들고 또 왜곡해 온 이들 때문입니다.
그들의 의도를 간파(!)하면 쉽게 외울 수 있게 됩니다.
이 의문의 결을 조금 달리 한다면 이렇습니다.
많은 분들이 지리8경의 제1경이 '천왕일출'이라고 알고들 계실 겁니다.
그러나 이는 후대에 자의적으로 재구성된 것입니다.
지리팔경하면 천왕일출, 노고운해, 반야낙조, 세석철쭉 등은 당장에라도 떠올릴 수 있습니다.
특히 천왕일출은 지리산 등산의 한 정점이기도 하여 '삼대가 덕을 쌓아야 한다는' 이야기도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팔경 하면 곧바로 조선시대 관동팔경이 떠오르기에 지리산팔경도 상당히 오래된 걸로 착각하게 됩니다.
허나 뉴스 사실은! 반세기가 조금 지났을 뿐입니다.
지리산권 최초의 산악회라고 하는 전라남도 구례군의 연하반 산악회의 우종수 선생이 만들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다 알죠.
"지리산과 구례연하반"은 그들의 열정과 헌신의 기록물입니다.
같은 시기 다른 어떤 산에도 이런 분들이 없었습니다. 책에는 그들의 회보 "지리산"을 모아놓고 있습니다
1966년 창립한지 11년만에 만든 "지리산 2호"에는 "지리산 팔경"이라는 제목으로 우종수의 글이 있습니다.
우리가 아는 그 팔경의 출발점이라고 보여집니다. 팔경의 순서를 유의해서 볼까요.
1 노고운해.
2 직전단풍(피아골)
3. 반야낙조.
4 벽소야월
5. 세석철쭉(척죽)
6 불일현폭
7 연하선경.
8 천왕일출
뭔가 이상한 느낌이 오지 않으신지요? 왜 노고운해가 제일 처음이고 천왕일출이 맨 마지막이지?
맞습니다. 지리팔경의 선정에는 구례군민이었던 구례연하반의 '입장'이 그대로 담겨 있습니다.
화엄사에서 출발하여 동쪽 천왕봉으로 향하는 동선에서 만들어진 거라는 거죠.
팔경 중에는 세석평전과 장터목 사이에 그들의 이름을 따서 지은 연하봉의 아름다운 풍경을 뜻하는 '연하선경'도 있습니다.
아무튼 이 사실을 알고나면 지리산 팔경은 외울 필요도 없습니다.
지리산을 조금만 알면 노고단에서 등산지도를 따라 천왕봉까지 차례차례 8경을 머리로 그릴 수 있으니까요.
그로부터 또 14년이 지나 1980년에 나온 지리산 3호에서 우종수는 지리산 십경을 말하고 있습니다.
기존의 지리8경인 노고운해, 피아골 단풍, 반야낙조, 벽소명월, 세석철쭉, 불일현폭, 연하선경, 천왕일출은 그대로이고요.
9번째가 칠선계곡입니다. 1964년 12월 경남권 산악인들이 등산로 개척을 했으니 새롭게 등장한, 한국을 대표하는 계곡이니 당연히 들어가야겠죠.
이또한 '서쪽에서 보자면' 천왕봉 지나 당연한 동선입니다.
문제는 10번째, 과연 10경의 마지막은 무엇일까요? 대원계곡? 남해바다? 남명조식?우종수는 놀랍게도 '섬진청류'를 넣고 있습니다.^^
물론 섬진청류도 충분히 지리산의 대표 경관이 맞습니다.
짐작컨대, 구례사람으로서 노고단을 오르다 돌아보는 섬진강의 아름다움, 천왕봉에서 구례로 되돌아가면서 떠올릴 고향의 강이라 더 반가울 수도 있습니다.
저는 우종수에게 처음 팔경을 만들 때 섬진강의 유연한 흐름을 넣지 못한걸 계속 아쉬워 하지는 않았을까 추측도 해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지리산팔경이나 십경을 외우지 못할까요?
지리산 팔경 또는 지리산 십경이 있습니다.
그건 무의식적으로 천왕봉일출을 첫번째로 꼽고 싶어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천왕봉이 있는 경상도쪽에서는 당연히 천왕봉을 처음으로 놓으려 하고 싶어할 거고요.
지금 이 사진 속 지리산10경은 경상남도 함양군에서 소개하고 있는 방식입니다.
보세요. 1. 천왕봉 일출, 2, 피아골 단풍, 3. 노고단 운해로 왔다리갔다리 뒤죽박죽으로 해놓고 있습니다.
암기는 맥락을 알면 쉽습니다. 천왕일출을 제1경이라 하는 순간, 맥락은 사라집니다.
우리가 지리산 십경을 잘 외우지 못하는 것은 우리의 지리산사랑이 부족해서도 아니고, 무디어진 두뇌탓이 아닙니다.
그들^^ 탓입니다.
저는 지리산에서 몇개의 대표 명승을 선정해야 한다고 보면, 칠선계곡과 섬진청류가 반드시 들어가야 된다고 보고,
따라서 지리산팔경과 지리산 십경 중에 선택해야 한다면 지리산 십경이 더 낫다고 봅니다.
1955년 구례에서 일군의 젊은이들이 '서시천'을 건너며 지리산을 향해 행보를 시작합니다.
지리산 10경을 외우시려면 그들의 발걸음과 함께 해야 합니다.
자 눈을 감으시고, 화엄사에서 출발하여 속세와 단절시키는 노고단의 구름바다에서부터 출발합니다.
노고단을 지나 직전 해에 보았던 피아골 단풍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어 지리산 제2봉인 반야봉에서 낙조를 보고 외길 따라 벽소령에서 밝은 달을 본 다음, 세석산장에서 야영을 합니다.
세석산장의 남쪽에는 지리산 최고의 폭포라고 할 불일폭포를 언젠가 보아야지 다짐하며 잠을 잡니다.
꿈길같은 연하선경을 지나 천왕일출을 기다립니다.
이어 북쪽에는 지리산 최고라고 하는 칠선계곡이 당연히 십경에 들어가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돌아서서 고향의 섬진청류를 떠올리며 하산길을 서두릅니다.
관동팔경이 서울양반들이 추가령구조곡길 따라 관동에 가자니 당연히 순서가 제일 북쪽인 통천의 총석정부터 시작합니다.
만약 경주귀족들이 지배했다면, 삼척 죽서루에서 시작해서 북쪽으로 올라가겠죠,
지리십경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탄생의 계기가 된 구례 쪽에서 봐야 합니다.
이제 이런 맥락을 알았으니 한국에는 지리산십경을 못외우는 분이 계셔서는 안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