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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송사 삼층석탑은 조선시대 탑일까

까막눈이 | 368

벽송사는 1520년 벽송지엄대사가 창건했다고 전해지는 사찰이다. 현재의 벽송사는 후에 중창된 것인데 벽송지엄이 창건한 벽송사는 현재의 벽송사 뒷편 3층석탑이 있는 부지에 있었던 것으로 전한다.

 

벽송사 삼층석탑을 설명하는 안내판은 다음과 같다.


『이 탑은 원래 벽송사 대웅전 동편에 세워놓은 것인데 사찰이 아래로 옮겨져 탑만  남게 되었다이중 기단 위에 방형의 3층 탑신부를 이룬 통일신라시대 양식을 그대로 계승한 탑이지만사찰이 세워진 때가 조선시대[1520]이므로 그때 탑도 세워진 것으로 판단된다탑의 위치가 탑의 위치가 법당의 앞이 아니라 뒤편이라는 점이 특이하며신라시대의 삼층석탑의 모습이 조선시대까지 이어는 예로서 주목되는 탑이다현재 탑의 상륜부에는 복발(覆鉢)과 노반(露盤)이 남아 있으며 높이는 3.5m이다.』 

 

다음백과사전, 민족문화대백과 사전, 일부 탑과 관련된 서적 등에도 내용이 대동소이하다.

'1520년 벽송사 창건시 축조된 통일신라시대의 양식을 계승한 조선시대에 만들어진 탑'이라는 것과 , '사찰을 아래로 옮겼다'고 해 놓고는 '탑이 절 뒷편에 있어 특이하다.'라는 난해(?)한 설명도 있다.

 

산에 다니며 벽송사를 들러 뒷편 삼층 석탑을 몇 차례 보았는데 볼 때마다 소박하면서도 안정감이 느껴지고 자주 만나는 신라 후기형 탑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탑에 대해 무슨 식견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연곡사 3층탑과 닮았고 범어사 3층탑과도 비슷하여 조선시대 탑이라는 설명에 의문이 들었다.

 

벽송지엄이 벽송사를 중창했다는 설도 있는데 그에 대한 근거 제시는 없고, 다만 석탑의 양식이 통일신라 후기쯤인 것으로 보아 벽송사 이전에 폐사지가 있었던 것으로 보는 것 같다.

 

하여 몇 가지로 구분하여 살펴보았다.

 

1. 조선시대 조성된 탑의 현황


  조선의 탑은 대개 조선 초기에 조성된 것으로서 회룡사 5층 석탑, 원각사지 10층석탑(세조 111465), 낙산사 7층석탑(세조 121466), 묘적사 85층석탑 (성종 초기 추정), 여주 신륵사 7층석탑 (성종 31472년 이후), 양주 수종사 85층석탑(성종 241493), 안성 청원사 7층 석탑 등이 전하며 고려시대 양식을 계승한 듯한 다층다각의 양식이며 그리고 대개 조선 왕실과 관련이 있는 사찰인 것으로 추정된다. 여기에 벽송사 3층석탑이 통일신라 하대 모양새를 한 조선시대 탑으로 이름을 올리고 있는 것이다.


 조선왕조시대의 석조탑은 고려시대의 석조탑파 양식을 계승하여 부분적으로 세부형식에만 변화를 주었을 뿐이고조선시대 석탑으로서 새로운 양식의 발전을 보지 못하였으며건축수법도 고려시대에 비하여 쇠퇴한 것으로 생각된다조선왕조시대의 중요한 석탑들은 서울 파고다 공원 내의 원각사지 10층 석탑여주 신륵사 7층 석탑금강산 유점사 9층탑양양 낙산사 7층 석탑 등이 있다.』                                                   

                                                                                                                                    -  한국건축사 윤장섭 저 동명사 2008」  -


   『교종이 뿌리를 내리던 시기 가람배치는 탑과 금당강당이 균형을 맞춰가지만선종이 확고해질수록 가람배치는 금당위주로 재편된다그리고 선종이 득세하고 부도와 부도비가 만들어지면서부터 탑은 사찰건축에서 중심적 상징성을 상실하게 되고산문과 탑금당으로 대표성은 분산되면서 강당도 존재감을 잃게 된다이후 숭유억불 정책하에서 불교는 민간신앙으로 하강하게 되는데이때부터 탑은 완전히 사라지고부도와 부도비도 한쪽으로 치워지고승려들이 기거하는 공간은 점점 강조되고강당은 누각으로 대체되면서 다용도로 목적으로 변질되게 된다.』

                                                                                                                                   -  블로그 자하미 고구려 사찰건축과 가람배치에 대하여」 에서 인용 -

  

2. 조선불교 선종 그리고 벽송암기


벽송 지엄은 서산 대사 휴정(15201604)의 직계 스승이다. 벽송사의 개창주이자 조선 불교 임제종 제5대 정통(正統)을 지낸 조선 초기의 고승으로서 경암집(경암응윤鏡巖應允

(1743~1804) )에 다음과 같은 간략한 벽송암기가 전한다.


 『벽송암기碧松庵記

  나의 10대 법조이신 벽송碧松 대사께서는 벽계碧溪의 심인心印을 전해 받고 정덕正德 경진년(1520) 3월에 지리산에 들어가 초가 암자를 엮고 거주하였는데후인이 더 넓혀서 대난야가 되었고 인하여 벽송암이라고 불렀다함양군에 속해 있다대사께서는 지혜의 눈으로 널리 지리에 통하여 수행을 돕는 밝은 터로 이곳보다 나은 곳이 없음을 보시고 드디어 법계를 열었으니전후로 마음을 깨친 자를 헤아려 보면 일곱 분이나 된다. 4대 법조이신 회당 화상晦堂和尙께서도 또한 이 암자를 평생의 도량으로 삼아 암자의 수승한 명성이 더욱 세상에 드러났다.

 

  천왕봉의 한 맥이 오른쪽으로 돌아 50여 리를 뻗어 흐름을 거슬러 터를 맺어 동북쪽으로 계좌癸坐에 조산祖山(주산)을 둘러 안고 동남쪽 사좌巳座와 서남쪽 신좌申坐의 여러 봉우리가 둥글고 빼어나며주작朱雀안팎의 층상層翔이 평요平拗하고 단정하여 괘방掛牓의 형국이다순봉唇峰은 앞에서 마주하고 병사屛砂는 뒤를 에워싸며 대판천大坂川과 송대천松臺川은 승룡乘龍이 되고금대수襟帶水와 추성뢰楸城瀨는 빗장과 문호가 된다종고수鐘鼓水의 용이 못에 놀고 장추長湫가 몇 리를 돌아 흘러 현무수玄武水가 된다효귀봉孝鬼峯이 오도산悟道山을 쌍으로 지탱하여 즐겨 그 속을 빛내고금대산金臺山은 화표華表가 되어 터에 들어가는 길을 막아 주는 문이 되니 평정하고 화락하고 그윽하다토맥土脈이 황토이고 두꺼우며 터의 외부는 다 석각石角과 높은 고개이다.

 

  거주하는 스님의 마음이 자연히 담박하여 탐진貪嗔을 일으키지 않고 도량을 쓸고 닦지 않아도 티끌이 일어나지 않는다혹 범행梵行을 훼손하는 이가 있으면 반드시 재앙을 만난다이 때문에 재물을 경영하는 무리는 가지 않고 표주박 지닌 납승도 저녁에 들어가 아침에 나와 거의 지키지 못하니 가끔 풀만 깊다는 탄식이 있었다.


 벽송·서산·회당 세 조사의 진영을 중당에 모셔 놓고 불초한 내가 전후로 향화를 받든 지 11년이었다.

 

 임자년(1792) 여름 덕유산 은신암隱身庵에서 드디어 기록하다.

                                                                                                                                                                                     「 불교기록문화유산아카이브

 

벽송 지엄 이후 200년도 더 지나 지어진 기록이지만 내용으로 보아 당시의 형편으로 벽송 지엄이 탑을 조성할 수 있는 환경이라 보기 어렵다.

 

  『대사는 태고보우로부터 벽계정심-벽송지엄-부용영관-서산휴정으로 이어지는 해동 임제종의 정맥을 이은 분이며,현 조계종의 법통을 전해준 분이다.1508년 가을에 금강산으로 들어가 {대혜어록}과 {고봉어록}을 연구했고 평생동안 그 선풍을 진작하였다또 초학자들을 지도할 때에는 먼저 {선원집}(선원제전집도서)과 {별행록}(법집별행록병입사기)으로 여실지견(如實知見)을 세우게 한 후에, {선요}(禪要)와 {어록}으로 지해(知解)의 병을 제거하고 활로를 열어주었다고 한다.

 

대사로 대표되는 조선조 재야선문은종단의 유지보존과 관련된 심각한 위기의식 속에서그 과정에서 고려중기 수선사의 엄격한 수행정신과 철저한 출세간주의의 흔적을 발견했다그리고 그러한 수선사의 선풍을 진작하는데 핵심적인 이론이 돈오점수와 간화선에 있었음을 알고지눌과 대혜 그리고 종밀의 선사상을 조합하여 강원의 교육과정으로 삼았던 것이다.조선조와 현 조계종 전통강원의 뼈대를 세우신 분이 대사이시다대사의 법손인 휴정서산대사의 찬술이 있다.』

                                                                                                 

                                                                                                                                                                                 「쌍계사 역대조사에서 발췌

 

  선종이 장악한 조선의 절집은 수행에 집중되었을 뿐 교리와 그에 따른 절집의 꾸밈에는 별 관심이 없었고, 탑 대신 제자들은 스승의 부도와 부도비 조성에만 열심이었을 것이다. 벽송 지엄은 임제종의 정맥을 이은 분 아닌가?

 

  성리학의 나라 조선에서 억압받던 불교가 번듯하게 절집을 짓고 탑을 조성할 만한 재정도 되지 않았을 것이다. 조선시대 석탑이 없는 주요 이유일 것이다.

 

 

    ※ 서편 금당 추정지에서 동쪽으로 본 탑 

 

3. ()벽송사 법당과 석탑의 위치 관계 추정


벽송 지엄이 창건했다는 건물(대웅전) 위치는 자리는 구전과 안내판에 의하면 지금의 벽송사 가장 뒷편인 미인송과 도인송이 있는 장방형 부지의 석탑 서쪽에 있었다고 한다.


   

 

○     창건 당시 법당과 석등 석탑이 동시에 조성되었다면 금당의 주불 중심으로 일렬로 배열하였을 터인데, 석탑의 위치가 언덕 쪽으로 지나치게 치우쳐 있다

 

        법당의 방향이 터인 산 아래가 아닌 막혀있는 동쪽으로 향하고 있어 일반적인 사찰 건축의 예에 어긋나는 점으로 보인다. 아래 사진에서 보듯 현재 벽송사 주 건축물은 산 아래로 향하고 있다절집이 아닌 개인 집이라 하더라도 시야가 좋은 쪽으로 건축을 하는 것은 상식이고, 더구나 불상을 모시는 금당의 방향은 거개의 사찰들이 터인 산 아래로 방향을 잡는 것이 기본이다. 물론 부석사 무량수전과 같이 서방정토 아미타불을 의도적으로 서쪽에 배치하는 경우도 있긴 하지만 일반적이지는 않다.

 

하고 싶은 말은 벽송 지엄이 창건하여 전해졌다는 건물과 탑의 위치 및 방향이 매끄럽지 않다는 점이다.


또 경암집에서 보듯이 단촐한 초막 정도였을 것인데 석탑의 아우라와는 어울리지 않는 점도 느끼게 된다. 번듯한 3층 석탑을 조성할 정도라면 어느 정도 규모있는 사찰이라야 가능한 것 아닐까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따라서 제법 그럴듯한 규모의 폐사되어 석탑만 남은 터에 벽송지엄이 초막을 지은 것이 아닐까?

 

 

4. 벽송 지엄, 그 너머의 시간


 

    ※ 탑 윗쪽 언덕에서 아래로 내려다 본 이미지 


  시각을 바꾸어 보자. 여기서 보니 벽송사도 없고, 벽송 지엄도 없고, 부처도 없고, 중생도 없는 말 그대로 如如한 자리다. 눈 앞에 펼쳐진 이 장면이 폐사지에서 만날 수 있는 아름다운 정경이니, 과거로 거슬러 폐사되어 흙에 묻혀 푸르른 소나무로 화했을 금당의 부처가 앉았을 자리다.

 

창암능선과 소지봉 능선 장구목 너머로 주능선이 아득한데 저곳이 피안이고 이곳이 차안인지 구분되지 않는 이곳에 터를 잡은 이들은 누구일까? 탑이 가르키는 시간을 따라가면 과거의 한 지점을 만날 수 있을까?


 

  ※ 숲 쪽으로 본 전경  


  ※ 뒷편 언덕 전경 : 넓은 평지다. 



 

  지금의 삼층석탑이 있는 윗쪽 숲은 등고선의 간격이 넓어 비탈지지 않아 폐사지 절터로 추정되기에는 현재의 삼층석탑이 있는 부지보다 크다. 금당 자리가 위에 있고 탑이 아래 쪽에 있는 것은 여러 절터에서도 보아 왔지만 대표적으로 합천 영암사지를 들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은 일반적인 절집의 건축양식이다. 따라서 현재의 석탑 위쪽 숲에 석등과 금당이 그리고 석탑이 있는 부지를 포함하여 절터를 이루며 좌우로 요사체 등 부속 건물이 있었을 것으로 미루어 짐작이 가능하다. 그러고 보면 벽송사 그 너머의 시간에 존재했던 사찰의 규모가 작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탑 앞에는 석등 받침돌로 보이는 석재가 놓여 있는데 복련의 조각이 엉성하고 석질도 탑과는 맞지 않는다. 영암사지에서 보듯이 석등은 언덕 위 금당 앞에 배치하여 탑과 일직선상에 있었을 것이다.


  ※ 합천 영암사지 삼층석탑 (사진) 

 

  벽송사 삼층석탑의 위쪽 지금은 수풀이 무성한 이곳이 벽송사를 세우기 이전 신라하대 폐사지터라고 상상을 해 보자. 현재 삼층석탑이 서 있는 곳보다 높아 축대가 쌓여있고 수목이 무성하여 언뜻 보기에는 절터라고 보이지 않는다. 아마 큰 비에 산사태 등으로 뒤편 언덕부터 매몰되면서 폐사가 되었고 오랜 세월 사람 손길이 닿지 않는 바람에 어느 듯 숲으로 변해 버렸을 수도 있다.

 

그러나 울창한 한꺼풀 숲을 벗겨내고 중앙에 금당을 좌우로 부속건물을 앉히고 금당 앞으로 석등을 세우면 멀리 창암 능선 너머로 주능선을 조망하는 장방형의 멋진 절집 배치가 된다.

 

탑은 금당과는 떨어진 아래쪽에 있게 되지만 신라 하대의 합천 영암사지 삼층석탑, 화엄사 각황전과 대웅전 앞 석탑도 마찬가지다. 이것이 벽송사 이전의 절집 배치이고 벽송사 3층석탑이 현재 위치에 존재하는 이유인 것이다.

 

5. 벽송사터의 지리적 위치와 신라와 백제간 전쟁 그리고 지명


  벽송사는 주 시선이 산 아래 창암산과 소지봉 사이 장구목 낮은 재를 지나 주능선을 아득하게 바라보고 있다. 시선이 지나는 길목에는 계절따라 각각의 능선과 계곡이 햇살도 받고 구름과 안개와 비를 품으니 아름다운 절터다.

 

  지리산에는 신라때 지었다는 무수한 절집들이 있으니 일일이 내역을 들먹이는 것은 불가능하다. 벽송사가 위치한 추성楸城에는 말달린평전, 국골, 어영대, 두지터 영랑대 등의 지명이 전해져 내려오는데, 그 어원을 딱히 증거 할 근거는 모호하나 신라 진평왕 24(602) 때 운봉고원을 넘어 함양으로 진출하려던 백제의 4만병력과 신라 간의 1차 전투, 진평왕 38(616) 2차 백제군 8천명과의 전투 관련이 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산 속에 옛 성이 있는데 하나는 추성(楸城)이고하나는 박회성(朴回城)이라 일컫는다의탄소(義呑所)와 56리 거리인데 우마가 능히 가지 못하는 곳이나창고 터가 완연히 남아 있다세간에서 신라가 백제를 방어하던 곳이라 전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정령치와 함양의 백운산으로 이어지는 백두대간이 국경선이며 1차 전선이고, 2차 방어선이 서북능선과 인월의 팔령재(팔령산성)로 이어지는 것으로 본다면 그 뒤편 마천 추성 등이 보급기지가 아니었을까. 아막성(모산성)을 아영의 복성이재 인근으로 보는 견해와 인월의 팔랑치로 보는 두 견해가 있지만 서로 멀지 않은 지역이다.

 

두 차례의 전쟁기간 간격이 14년이므로 최소한 수십 년간 배후지역에 신라의 군사들과 지원인력들이 들끓었다는 의미이고, 추성의 여러 지명들도 이 때문에 생긴 것이다. 전쟁으로 죽은 군인들의 원혼을 달래기 위해 사찰도 짓고...

 

  『날이 이미 정오를 넘어서야 비로소 재에 올랐다함양에서 바라보면 이 봉우리가 가장 높은데여기에 와서는 도리어 천왕봉을 우러러본다영랑(永郞)이란 자는 신라 화랑의 우두머리로서 삼천 명의 무리를 거느리고 산수를 즐겁게 유람하다가 일찍이 이 봉우리에 올랐기 때문에 그런 이름이 붙여졌다.

  소년대(少年臺)는 영랑재 봉우리 곁에 있는데 푸른 절벽이 만 길이다이른바 소년이란 영랑의 무리를 가리킬 것이다돌 모서리를 안고 아래를 살펴보던 나는 꼭 추락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따르는 자들에게는 절벽 언저리에 가까이 가지 말라고 일렀다.』

                                                                                                                                                                                               「김종직 유두류록

 

 유두류록에 영랑대와 소년대에 대한 설명이 전하는데, 신라 화랑들이 전국 산천을 유람하며 즐겼다는 이야기는 구전하던 지명에 누군가 살을 붙였을 것으로 보인다. 실제 화랑들이 백제와의 전쟁에 참여하기 위해 추성에 머물며 지리산을 오르내렸을 터이니 그런 이름이 붙었을 개연성이 높다. 실제 삼국사기에는 원광법사로 부터 세속오계를 받은 귀산과 추항이라는 화랑이 602년의 1차 전투에 참여했다가 전사했다는 기록도 나온다.

 

   『〔진평왕 24(602)〕 가을 8월에 백제가 아막성(阿莫城)을 공격해왔다왕이 장수와 사졸들에게 맞서 싸우도록 하여 크게 무찔렀으나 귀산(貴山)과 추항(箒項)이 전사하였다.』

 

   『추항(箒項) : 귀산(貴山)과 어릴 때부터 친구로 지냈고귀산과 함께 가실사(加悉寺)에 주석(住錫)하던 원광법사(圓光法師)를 찾아가 종신토록 교훈이 될 만한 말을 해달라고 부탁하자원광법사가 추항 등에게 세속오계(世俗五戒)를 지어 주었다진평왕 24(602)에 백제가 아막성을 공격하자신라군이 이를 물리쳤고천산(泉山근처에서 벌어진 백제와의 전투에서 소감(少監)이었던 추항이 귀산과 함께 전사하였다진평왕이 여러 신하들과 함께 아나(阿那들판에서 맞이하여 시체 앞에 나가 통곡하고 예를 갖추어 장례를 치르게 하였으며추항에게 대사(大舍관등을 추증(追贈)하였다.』

 

  『〔진평왕 38(616) 〕 겨울 10월에 백제가 와서 모산성(母山城)을 공격하였다.』

                                                                                                                                     - 삼국사기」에서 인용 -  

     ※ 아막성은 백제가모산성은 신라에서 부른 이름이다.

 

  그러하다면 7세기부터 추성을 뻔질나게 드나들었던 신라 사람들이나 이후에 살던 사람들이 좋은 절터를 그냥 두고서 수백 년 후 조선의 벽송지엄에게 양보했을 리가 없지 않을까?

 

6. 벽송사 삼층탑의 양식

 

 탑에 대한 지식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여러 탑들을 눈팅해 온 바로는 초기 석탑들은 어딘가 조금 날카롭고 고압적인 느낌이 들었고, 9세기 정도에는 탑에 조각들이 많으며후기 탑들은 모든 장식들이 단출해 지는 경향을그리고 고려시대 석탑들은 양식화된 뭐 그런 느낌을 받곤 한다그리고 신라 말기 고려 초기 정도의 탑을 보면 단순하면서도 안정감을 준다하여 나의 눈으로 보는 탑의 예술미는 나말여초의 것이 심플하여 좋다요즘 한국의 단색화가 중 세계적으로 잘 나간가고들 하는데 비슷한 것인지대교약졸 


 『우리나라 석탑은 연대가 내려옴에 따라 석재 조립 수효가 적어지는데이것은 석탑의 규모가 축소됨에 따른 것이다. 7세기 탑들은 탱주가 3우주가 2개 일반적으로 기단에 나타난다통일신라 중기에 접어드는 8세기 중엽이 되면 석탑 표면에 여러 가지 불교상을 조각하여 장엄하는 일이 시작되고 9세기 이후에는 크게 유행한다.

 통일신라 하대 9세기 후반에 들어서면 석탑은 세부구조 면에서 약간의 변화가 생기고 크기도 전체적으로 작아지는 경향을 보인다예를 들어 지붕돌받침이 5단에서 3, 4단으로 줄어들거나 기단부 면석의 탱주가 2주에서 1주로 줄어들거나 줄거나 없어지기도 한다.』

                                                                                                                       「한국의 탑 한국학술정보() 2009

 

   벽송사 삼층탑은 기단부에 중간 기둥처럼 보이는 탱주 하나, 지붕받침돌이 1층 4, 2층 4, 3층에 3개로 전형적인 후기 양식을 나타낸다.      


 

7. 닮았지만 닮지 않았다.


  벽송사 삼층석탑은 신라 하대의 범어사 삼층석탑(835)이나 연곡사 삼층석탑과 또는 합천 영암사지 삼층석탑과도 닮았다는 느낌이 든다. 각각의 탑신의 기둥돌 역할을 하는 우주와 탱주 그리고 상륜부와 지대석 등 세부적인 면에서는 약간씩의 차이가 있어 비슷하지만 같지는 않다. 통일신라시대의 양식을 계승한 짝퉁 사이비 조선의 탑이 아니라 나말여초에 세워진 지금은 이름도 남기지 않은 채 폐사 된 절터에 덩그마니 남겨진 유산이다.


                                                                                                          ※ 연곡사 3층석탑 : 통일신라 후기  

 

 조선의 유교문화에서 아름답다 하여 천 마리의 학이 새겨진 고려 청자를 굽지 아니하였 듯, 미켈란제로의 그림이 아름답다하여 인상파 화가들이 르네상스 시대 그림을 모방하지 않듯이 문화란 시대를 거스러지 않는다. 선의 문화에 익숙한 조선의 불교가 교의 문화 중 하나인 탑을 조성할 리도, 그럴 여건도 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나말여초의 탑을 조선의 탑이라고 우기고 있을까? 실제로 그리 믿는지는 모르겠지만 통일신라후기 탑이라고 인정은 하나 기록이나 다른 유물이 없으니 알려진 기록대로 벽송 지엄 창건시 (1520) 세운 탑이라며 방치하는 것일 수도 있다. 그런 것이 역사나 문화재를 대하는 전문가들의 태도일 수도 있고...

 

  벽송 지엄은 폐사지 절터에 들어와 초막을 짓고 수행으로 조선의 선불교의 혈맥을 드날리고자 했던 선승이지, 절집을 창건하고 탑을 짓고 큰 불사를 일으킨 분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선불교의 전통이 그러하다.

 

  숲을 파헤치며 주춧돌들을 찾아낼 수까지는 없지만 오직 그 터에 남겨진 벽송의 숲은 진실을 알고 있지 않을까?

 

3 Comments
엉겅퀴 08.05 14:07  
나는 7~8년 전에 벽송사 얘기를 하면서 벽송사 3층석탑에 대하여
"탑 전체의 비례와 균형미가 많이 떨어지고, 2·3층 탑신석의 비례가 급격히 줄어들고, 기단부와 탑신석 각층의 우주가 아주 가늘고, 기단부 갑석의 두께가 매우 얇으며,
옥개석은 전체적으로 두께가 얇고, 층급받침이 1·2층은 4단인데 비해 3층은 3단에 그쳤으며, 귀솟음이 뾰족하게 치솟아 있다.
이런 형태는 통일신라 석탑에서는 거의 찾아볼 수 없는 것이며, 더구나 이런 예외적인 특징들이 한 석탑에 모여 있다는 것은 통일신라 석탑에서는 상상하기 힘든 일이며,
크기도 불교 융성기의 통일신라시대에 걸맞지 않게 작다"고 하여
통일신라 석탑을 모방하여 규모를 축소하여 건립한 조선시대의 석탑이 아닐까? 라고 하였는데

까막눈이님의 말을 쭈욱 듣고 보이 또 까막눈이님의 말이 맞는 것 같기도 하네요...
까막눈이 08.05 21:16  
우주  탱주를 조각한 윤곽선이  조금  명확하지 않고 수가 줄어드는 등 그런 점들은 오히려 양식화가 진행되는  즉 매너리즘에 빠지는 말기적  현상이  아닐까 생각됨돠. 

이 글을 써 놓은 것은 일 년도 더 되었는데  얼마전  마천 갔을  때  잠시 들렀던 암자 스님이 본인도 벽송사에서  젊었을 때  있었다고,  탑은 나말여초라고  말하길래  생각나서  올렸슴돠.
꼭대 08.15 17:57  
불교미술의 시대구분을 할 때 기록에 앞서 기본이 양식사인데,
벽송사 삼층석탑을 조선시대탑이라 주장한 미술사학자는 양식적 구분의 설명 없이
벽송당행장에 나오는 벽송대사가 초암을 지었다는 기록만을 근거로 대고 있습니다.
그 당시 지리산 골짝에 석탑까지 새로 세워 사찰을 창건할 여건이 되지 않았음은 <까막눈이>님의 글에 충분히 설명을 해주셨네요.

의복 문화로 비유하자면, 조선시대 나팔바지가 나올 수 없고, 복고풍이라 해도 신라시대 의복이 500년 뛰어넘어 큰 변형 없이 나올 수 없듯이, 시대별 석탑의 양식을 철저히 분석해본다면 조선 시대에 통일신라 말기 (늦어도 고려초) 양식이 돌연변이 혹은 타임머신을 타고 온 듯 등장할 수는 없는데, 왜 일부 학자들이 단순하게 그런 주장을 하는지 의문입니다.
조선시대 석탑은 나름대로 대부분 기단부에 명확한 시대적 양식을 담고 있는데 말이지요.

유사한 오류는 백장암 삼층석탑에서도 일어나고 있습니다.
실상사가 통일신라 때 창건되었으므로 (양식의 설명에 앞서 내세우는 근거가) 실상사도 아닌 현재의 부속암자인 백장암도 이때 같이 창건되면서 석탑을 세웠다는 주장입니다.
통일신라 때는 기미도 보이지 않던 고려시대 석탑의 특징을 여러 군데 달고 있는 양식사적 설명은 없습니다.

벽송사 삼층석탑은
갑석 위의 탑신 받침 (하대기단 갑석 위의 상대기단 받침 포함), 옥개층급받침 등의 치석이 정연하지 않고, 부연이 쇠퇴했으며, 옥개석 상부가 살짝 외반곡선을 그리며 미끄러지다 치솟듯 전각에 이르러 반전을 일으키며 과도하게 치켜 올라간 점, 처마선이 양쪽 끝에서 살짝 올라간 점 등을 보면 고려초까지 내려볼 수도 있겠습니다.

관련 자료들을 집대성해주셔서 유용한 정보가 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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