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다방
장난이 아니다
아버님댁에서 저녁을 먹고 안마의자에 앉아 멍 때리는데
정면에 걸려있는 달력이 무심코 눈에 들어온다.
27일자에 '서울'이라 적혀있다.
그저께 작은시누형님 네가 다녀가셨으니 분명 형님내외분이 적어두신 것이겠다.
아버님께 여쭤보니 2박3일간 서울에 가자 하셨다고 한다.
아마 청와대 구경을 가시려나보다.
아버님의 출타는 우리에겐 휴가, 살다살다 때를 만났다.
강원도 울산바위 다녀옵시다.
키서방한테 질러본다.
무슨소리 그렇게나 멀리까지 가서 고작.... 공룡능선 정도는 타야지.
키서방이 장난하나?
설악산이라면 그 동안 설악동 케이블카나
장수지구 쪽 복숭아탕이나 보면서 변죽만 울렸지
설악산의 진면목을 접해보지 못했다.
그런데 국립공원 제 1경이라는 공룡을 타겠다닛!!!
이것은 틀림없는 생시겠지.
심장이 나대기 시작하고 머릿속이 온통 공룡으로 가득찬다.
유투브로 공룡능선을 보기 시작한다.
키서방도 바싹 당겨앉아서 본다.
키서방 장난이 아니었구나...
새벽 세 시에 산 문이 열리단다.
거리는 20킬로미터 12~3시간이 소요되고.
해낼 수 있을까.... 해낼 수 있겠지.
걱정과 자신감이 번갈아가며 마음을 휘젓는다.
일기예보도 챙겨본다.
날이면 날마다 일기예보를 검색한다 계속 맑음이다.
오늘도 또 오늘도 맑음 기분이 좋다.
또 새로운 오늘 해가 뜬다.
헉, 27일자에 비 그림이 보인다.
전국이 맑은데 딱 설악산만 비 그림이다.
모든 날이 다 맑은데 딱 그 D-day(목, 금요일)만 비가 오신단다
장난하나?
분명 누군가가 내 마음을 들여다보고 장난을 치는 거다.
또 새로운 오늘 내 마음은 먹구름이지만 해가 쨍 밝았다.
티브이를 켠다. 뉴스에서 설악산에 눈이 온단다.
대설특보까지 발령됐단다.
눈이 십센티미터나 쌓였단다.
10월 대설특보는 17년만의 일이란다.
장난하나...
저 눈이 얼어붙어서 안 녹으면 큰일인데...
눈이 오고 부터는 설악산 일기예보를
실시간으로 들여다보기 시작한다.
하루종일은 물론이고 잠이 든 한밤중
오줌 누러 일어나서도 실시간 날씨부터 들여다본다.
대청봉이 온통 흰눈 투성이다.
키서방이 크게 낙담한다.
아직 몇 날 남았으니 그 동안 눈이 녹고
비 예보도 맑음으로 바뀔 수 있을 것이다.
나는 계속 희망을 품는다.
수요일이 되어서도 여전히 목, 금의 날씨는 비다.
그럴수록 더욱 희망을 품는다.
희망이 망상이 되지않도록...
악천후는 피할 길이 없음이 자명해졌고
무슨 좋은 수가 없을까 궁리한다.
옳거니, 토요일이 맑음이네.
날을 토요일로 바꾸면 되겠다. 우떻소?
나의 묘책에 키서방이 말이 없다.
이제야 황금알이 황금새 될 일만 남았는데
저이가 포기할까 겁이 난다.
하지만 괜찮다.
본디 알을 품는 것은 암탉이 하는 일이니까.
또 실시간 예보를 보니
설악산 대청봉이 온통 뽀얀 곰탕이다.
내 마음은 새까만 흑임자죽.
님아 그 희망을 포기마소서.
잔뜩 염통이 쫄아있는데
키서방이 심설산행용 스패츠를 살 거란다.
아, 다행이다. 키서방도 희망을 놓지않았었구만.
거기다 산에 눈이 와도 가겠다는 의지까지 품고 있었다니.
10.27. 수요일 저녁
아버님과 저녁밥을 먹는다.
내일이면 아버님이 서울로 출타하신다.
속옷이랑 여벌옷을 챙깁시다.
키서방이 옷장으로 걸어가는데 아버님이 말씀하신다.
안 갔으면 싶으다.
오 마이 지절스... 아버님이 왜 이러실까?
당신 한마디에 간이고 염통이고 다 떨어져나가는 기분이다.
몸도 안 좋고 내 체면이 있다아이가.
정녕 아버님이 왜 이러실까......
서울 가실 거라고 나들이옷 깨끗히
향기나게 세탁해서 걸어두기까지 해드렸는데.
쿵, 속에서는 콩팥까지 떨어지는데
내색은 못하고 입술만 탄다.
체면상 괜히 저러시는 것이겠지.
설마 그 좋은 서울구경을 마다하시겠어?
아버님댁에서 집으로 오는 길, 걱정이 눈앞을 가린다.
진짜로 안 가시면 어카노.
2박4일치 짐 싸둔 거 다 풀어야지.
뭐슨소리 나는 짐 못 풀어. 멘붕이 와서 뒤로 넘어갈긴데 짐을 우찌 풀겠소.
10.27. 목요일 날이 밝았다.
설악산행 출발준비를 모두 마쳤다.
점심 때 먹을 김밥도 쌌고 떡국거리랑 김치 멸치볶음까지 쌌다.
아주버님께서 아버님을 11시에 모시러 온댔으니 11시가 지나기를 기다린다.
설마 아버님이 안 간다고 하시진 않으셨으리라....
11시 넘어 키서방이 아주버님께 전화를 건다.
과연 두 분은 서울로 출발을 하신 것일까? 하셨겠지!
통화를 끝낸 키서방이 짐을 풀랍신다.
에이 장난이제?
나는 믿지않는다.
짐을 바깥으로 들어내는데 키서방이 거든다.
꺄악~! 장난친 거 맞네.
지금 아주버님은 아버님을 모시고 육십령 고개를 넘어가는 중이시란다.
기분 째진다. 드디어 모든 어려움을 극복하고 설악산으로 출발이다.
이따가 설악산에 비가 온댔으니 지금 가봐야 헛탕.
먼저 경북 청송 주왕산으로 달린다.
청송은 온통 바알갛게 익은 사과로 뒤덮였다.
10.27. 목요일 오후 4시
주왕산 주산지 입구에 도착한다.
주산지가 그렇게 좋다지, 기대가 만발한다.
무거운 등산화를 신고 전속력으로 걷는다.
김기덕 감독 영화를 통해 주산지를 봤지만 실제 풍경은 어떨꼬.
오후햇살에 풍경이 온통 바래져서 그런지 별 감흥이 없다.
시방은 때가 아닌가벼.
아침 물안개 필 때는 제대로 아름다울 것이다.
어여 주왕산 대전사로 가자.
10.27. 목요일 오후 5시
역시 대전사 쪽 단풍은 화사하고 화사하다.
이러니 작년에 이어 올해도 와보지 아니하지 아니할 수가 없다.
해가 뉘엿이 눕는다.
금새 깜깜해지겠다. 들어갈까말까... 입구에서 서성이게 된다.
무료라면 입장하고 보겠는데 목돈을 지불하려니 망설여지는 것이다.
저 앞에 돈을 받아챙기려고 눈이 떼꼰해서는 이쪽을 보고 섰다.
망설여봤자, 표를 사는 것보다 발길 돌리는 것이 더 어렵다.
계곡을 끼고 깊이 들어갈수록 정신을 못차리겠다.
이렇게 좋을 수가.
역시 큰 돈 주고 들어오기를 백 번 잘했다.
꽤 늦은 시각인데도 탐방객들이 끊이질 않는다.
주왕산은 작년에 와 보고, 해마다 이맘때 쯤이면 꼭 와봐야하는 곳 1위로 뼛속깊이 박혔다.
10.27. 목요일 6시 50분
헐레벌떡 구경을 끝내고 대전사를 빠져나온다.
그 많던 차량이 다 빠져나가고 주차장이 텅 비었다.
주차장 앞 노전에서 사과 두 봉지를 사고 떡국을 끓여 먹는다.
주왕산 국립공원 주차장에서 끼니를 끓여먹어도 되는지 알쏭달쏭하다.
아무도 말해주지않고 물어볼 데도 없다.
밤 8시 뒷좌석을 눕히고 침낭을 펴서 잠자리에 든다.
따뜻하고 아늑하다.
차창 바깥으로 별들이 빛난다.
차박은 처음이다.
6시 30분
뭉기적거리고 있으니 키서방이 생생우동을 끓여내온다.
피 터지는 결혼생활 어언 30년,
남편한테 밥 받아먹기는 처음이다.
이러니 내가 주왕산을 안 와?
생생우동 국물에 오뚜기밥.
따끈하니 좋구마.
10.28. 금요일 7시
빨간 단풍 아래서 길 떠날 준비를 한다.
주왕산이여 내년에 또 보자고.
청송 읍내 목욕탕을 검색하니, 솔기 온천탕이 있다.
샤워만 하고 서둘러 출발한다.
쾌청한 날씨 매끄러운 피부 기분이 좋다.
10.28. 금요일 10시 50분
차를 달려 영주 부석사에 도착한다.
부석사도 온통 단풍물이 들어 화사하고 찬란하다.
천 수백년 전, 의상대사께오서 사용하시던 지팡이는
지금 저렇게 조사당 앞에서 '선비화'라는 이름으로 잘 자라고 있다.
부석사가 부석이라는 이름을 갖게 만든 바윗돌을 본다.
양쪽 끝을 제외하고 가운데는 절묘하게 실이 통과할 만큼 돌이 떠있는 것 같다.
10.28. 금요일 11시 50분
사과 축제준비가 한창인 영주를 빠져나온다.
청송 영주 등등 경북엔 사과가 많구나.
네비게이션에 설악동을 치고 경제경로를 선택한다.
한 번도 가보지 않은 산길을 달린다.
고개를 넘어서자 아름다운 계곡이 나온다.
뭐 이런 데가 다 있노.
영월군 김삿갓 계곡이란다.
역시 우리나라는 삼천리가 모두 금수강산이라.
때마침 쉼터가 나온다.
밥 끓여먹기 좋은 곳이다.
키서방이 코펠에 목욕물을 부어났다.
물이 거차이 많네.
뭣이, 이 정도면 딱 맞다.
면을 한 덩이 넣고 그제서야 물의 양이 가늠이 되는 키서방.
물을 쪼르르 따라낸다.
봐라 물 많은 거 맞제.
뭣이 물은 딱 맞게 부었지.
키서방은 끝까지 물 많음을 인정치않는다.
피 터지게 싸워보까 오늘.
아니된다 아니돼.
여기서 한마디만 더하면 키서방은 네비에 설악동을 지우고 '우리집'을 선택할 것이다.
피 터지는 결혼생활 어언 30년,
남편한테 두 번 째 밥을 얻어먹는다.
배를 든든히 채웠으니 또 길을 나서보자.
갈길이 먼데 주변 풍경이 예사롭지가 않다.
그러면 그렇지 여기가 소금강이란다.
소소한 금강산이라....
영주 부석사에서 속초나 강릉 가실 일 있거든 꼭 경제도로(지방도)를 선택하시라.
10.28. 금요일 오후 3시 30분
강릉에 들어선다.
맑던 하늘이 뒤로 물러나고 저 앞 비구름이 닥쳐온다.
실시간 설악산을 검색하니 온통 곰탕이다.
비나이다 비나이다, 제발 내일은 산신령님이 저 곰탕을 몽땅 들이켜주시길.
주산지를 걷고 나서부터 키서방 다리가 아프다.
청송 약국을 들러 약도 먹고 파스도 붙였지만 낫지를 않고.
이러다간 공룡도 못보고 둘리 만화나 봐야하나.
강릉 약국에 들러 소염진통 효과가 있는 분사용 파스와
다리를 압박할 수 있는 손목용 아대를 구입한다.
내일 새벽까지는 어떡해서든 다리를 정상화 시켜야한다.
10.28. 금요일 오후 다섯 시, 설악동에 도착한다.
설악동은 낮 동안 내린 비로 온통 젖어있다.
숙소에 짐을 부리고,
여섯 시, 매식을 하려는데 더 이상 손님을 받지 않는다.
먼저 온 손님들은 맛있게 식사를 하고 있구만.
몇 군데 더 가봐도 마찬가지.
뭐 이런 동네가 다 있노.
25시에 들러 어묵탕과 오뚜기밥을 전자레인지에 데워갖고 숙소로 돌아온다.
25시 편의점도 새벽 1시까지만 영업한단다.
저녁 8시 못되어 잠자리에 든다.
새벽 1시에 일어나야 하니
잠이 안 오더라도 잠든 척 누워있기로 한다.
밤새 가수면 상태였지만 거뜬히 기상한다.
떡국이 끓는 동안 배낭을 꾸린다.
꼭두새벽, 꼬꼬댁과는 달리 내 목구멍이 열리지를 않는다.
먹어둬 먹어둬
키서방이 강조한다.
무려 공룡능선을 걸어야하니 아니 먹을 수가 없다.
숙소를 빠져나온다.
설악동이 축축하고 빗방울이 하나씩 떨어진다.
설악동 소공원 주차장에 도착하니
편의점에 불이 환하고 사람들이 많다.
하늘 가운데엔 별들이 총총 빛나고 있다.
토요일엔 날씨가 쨍했으면 좋겠다는...
<봄이>의 기도가 산신령의 마음을 움직인 것이 틀림없다.
10.29. 토요일 3시 정각
소공원에 설치돼있는 대형 입간판 안내지도를 본다.
신흥사 비선대 마등령삼거리 1275봉 희운각대피소 천불동계곡 비선대....
우리가 걸어야하는 코스를 한 번 훑어보고는
신흥사를 지나 금강교를 건너 비선대로 간다.
초입 길을 잘못들면 울산바위로 가기 십상이니 정신 바짝 차려야 한다.
어느 유투버가 말하길, 갈림길이 나올 적마다 왼편으로 들어서라 하였으니 그리한다.
다행히 경험이 많은 듯한 남녀가 앞서 걷고 있어서 맘 편하게 따라간다.
반 쯤 가니 화장실이 보인다.
마지막 화장실인 만큼 그냥 갈 수 없잖아.
소공원을 출발한지 50분만에 비선대에 도착한다.
비선대까지는 무장애 등로여서 키서방의 헤드랜턴 하나로 50여분 걸었지만
여기서부터는 각자 헤드랜턴을 써야한다.
다음 목적지는 마등령삼거리이다.
비선대에서 왼쪽은 천불동계곡 가는 길이고 우리는 마등령 삼거리가 나오는 오른쪽으로 간다.
하산할 때는 왼쪽 천불동계곡으로 빠져나올 것이다.
가볍게 올라선다.
길을 잃을까봐 우리 둘만 걷게 되면 어떡하나 하는 걱정이
내내 키서방을 옥죄었는데 다행히 등산객들이 많다.
까만 밤, 마등령 삼거리까지 3.5킬로미터
치열한 오르막길을 두고 키서방이 전략을 짠다.
앞서지도 말고 뒤처지지도 말고 산객들 속에 껴서 걸으랍신다.
길은 온통 돌너덜인 한가운데에 있는 돌계단이어서
너덜과 계단의 구분이 희미하다.
수십명이 줄 지어 고개를 숙이고 한 발 앞에 한 발 내딛는 일을 반복한다.
이렇게 가다보니 엉뚱한 길로 빠지려는 일이 생긴다.
앞사람이 길을 잘못 들면 뒷사람들이 그대로 따른다.
그 때마다 사람들이 잘못된 방향이라고 알려준다.
나는 몸이 가벼워서 암만이라도 가겠는데
한 팀이 쉬었다 간다고 선두를 내어준다.
활기차게 앞서 걸어가는데 길섶에서 숨을 고르던 사람이 그 쪽 방향이 아니란다.
길도 모르는 게 왜 선등을 햇.
번개가 날아온 쪽을 돌아보니 키서방이 도끼눈을 뜨고 도사리고 있다.
시선을 발 앞에만 두다가,
수시로 고개를 들어 머릿불로 사방을 살피면서 걸으니 길이 명확하게 눈에 들어온다.
2~30분 올랐을까 어디서 목탁소리가 들려온다.
저 위 금강굴에서 스님이 목탁을 치시나보다.
비선대, 마등령 삼거리 구간의 중간 지점이다.
비선대에서 1.8km를 걷는 데에 1시간 35분이 걸렸다.
앞으로 마등령 삼거리까지 1.7km를 걸어야한다.
아직 체력 이상 무.
마등령은 보이지않고 1km 더 걸어라한다.
뭐 괜찮다. 걸으면 걸을수록 힘이 나는 걸(girl).
양쪽으로 높이 솟은 기암 사이에 선다.
금강문이다.
금강문에서 길은 아래로 툭 떨어진다.
이제 길의 전모가 얼추 드러날 만큼은 밝아졌다.
.
물을 5리터나 지고왔는데.... 그러지않아도 되었을 것을.
샘물을 지나니 마등령 삼거리는 나오지않고 계단이 나온다.
6시 22분 계단을 오르는데 대청봉 왼쪽에서 여명이 시작된다.
지리산의 여명과는 사뭇 다르다.
해뜨는 쪽이 망망대해 바다여서 그런지
여명만으로도 벌써 하늘이 온통 환해진다.
일출을 볼 수 있으려나 가슴이 뛴다.
계단길을 오른다.
속초는 먹구름에 갇혀있다.
여명만이 환하고 해가 보이지 않는다.
올라온 길을 뒤돌아본다.
금강문 사이로 사람들의 머릿불이 보인다.
우리가 저기를 지나온 것이야 저렇게 멋드러진 곳으로.
드디어 신선들의 아지트에 입장한 것인가.
아니지, 이 곳에 발을 들였으므로 우리가 신선이지 안그래?
마등령 삼거리에 도착한다.
배낭을 내리고 간식도 먹고 쉬어가는 곳,
백담사에서 오세암을 거쳐 오는 신선들도 만날 수 있는 마등령 삼거리.
소공원 주차장에서 4시간여 소요되었다.
깎아온 감이 봉지 가득하고
단호박떡이 무려 열 개에다가 초코바 다섯 개. 거기다 물 5리터
이것은 회치 짐이 아닌가.
회치 한 판 벌이자.
이것들을 메고 공룡능선을 넘다간 영원히 신선되는 수가 있으니...
감 봉지를 열어젖힌 채 옆사람에게 공손히 다가간다.
한 입 하시지요.
여신선이 두 쪽을 집어든다.
다른 사람한테로 이동, 한 입 하시지요.
남신선이 다섯 쪽을 집어든다.
감을 얻어먹었으니 제 케이크도 좀 드시지요.
남신선이 내미는 케이크는 정말 먹음직 스럽다.
여기는 공룡능선이 시작되는 마등령 삼거리,
선계의 오가는 인정에 흠뻑 취해 콧노래가 나올 지경.
간식이 줄어서 배낭이 좀 가벼워졌으려나.
지금 키서방의 배낭 속엔 물 5리터, 무거운 비옷 두 벌, 무거운 아이젠 두 켤레, 스패츠 두 켤레가 들어있다.
그리고 김치 한 통과 발열도시락 두 개까지.
비가 올까봐, 잔설이 얼었을까봐, 잔뜩 챙겨온 것인데
이것들은 선계 구경 1도 못하게 되었다.
10.29. 토요일 7시 자 공룡 등짝을 향하여 출바알.
걷다가 우리가 걸어온 길을 뒤돌아본다.
마등령 삼거리가 아침햇살을 받아 환히 빛나고 있다.
세존봉 뒤로 울산바위가 보일락말락한다.
속초시는 여전히 먹구름에 잠겨있다.
노상 카메라를 손에서 놓지않는다.
사진을 찍는 것은 물론이고 동영상까지 찍는 데
설명까지 곁들이고 있으니
역시 사람은 공룡능선에 오고 볼 일이다.
담고 싶은 것이 많아 뒷걸음치기 바쁘다.
눈에도 담고 가슴에도 담고 또 카메라에도 담아야지.
큰새봉이 손에 잡힐 듯하지만
저기까지 가려면 웬만한 산 하나를 넘어야 한다고 보면 맞다.
희운각대피소 가기 200미터 전, 무너미 고개에서 천불동으로 내려설 것이다.
유투브로 공부 많이 했다.
저멀리 높이 귀때기청봉이 거느리는 서북능선이 보이고 그 아래쪽 용아장성이 보인다.
유투브로 공부 참 많이 했다.
지나온 나한봉이 햇살을 받아 새하얗게 빛나고
가야할 새로운 봉우리의 등장에 눈이 환히 열리고 콧구멍도 커지고 입이 따악 벌어진다.
와아 와아 와아... 장난이 아니다아아아아...
시선을 어디에다 던져도 감탄사가 터져나온다.
재미있고 즐겁고 찬란하여 힘겨울 새가 없다.
이 순간을 영원히 붙들고 말리.
키서방은 내가 요청하는대로 사진을 다 찍어준다.
됐어라든가, 씰데없이라든가 하는 평소 즐겨쓰는 말들을 하지 않는다.
이것만 보아도 키서방은 신선이 된 것이 틀림없다.
볼거리가 많아서 운행을 못하겠다.
공룡은, 크고 작은 산을 열 개도 더 품고 있다하던데...
1275봉 왼편으로 아주 살짝 천화대를 거느린 범봉이 보인다.
천화대를 거느린 범봉이, 대양을 가르는 범선의 모양 같다하여 범봉이란다.
유투브로 공부 많이 했다.
키신선이 된 오늘 만큼은 얼굴을 맘껏 개방해주신다.
공룡능선은 산행 난이도가 장난 아니라던데
우리는 오히려 길이 금방 끝날까봐 두렵다.
다리를 돌보는데 위쪽 바위 하나가 키신선을 겨누고 있다.
벌써 공룡능선을 1.7km나 갉아먹었네.
촤안~!
아니 이것은 그 유명한 킹콩바위가 아닌가.
극강의 풍경이 펼쳐진다.
생각지도 않게 느닷없이 안구를 무차별 강타한다.
그 동안 내질렀던 탄성을 다 보탠 것 보다 더한 강도의 탄성이 저멀리 몸 속 끄트머리에서 솟구쳐올라온다.
이것은 미친 풍경이다.
유투브로 수십 번을 봤지만 그것은 실제의 만분의 일도 표현이 아니된 것이다.
한 삼십분 머물다 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꼬.
하지만 1275봉이 기다리고 있다. 어여 갑시다 키신선.
1275봉으로 가는 막바지 오르길을 걷는다.
1275봉 가는 길이 다들 힘들다고 하더라마는
나는 길이 점점 줄어드는 것이 아깝기만 하다.
도대체 언제 이 곳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무슨 일이 있었길래 바위들이, 저 모냥으로 굳어져있게 된 걸까.
1275봉에 도착한다.
어느새 공룡능선의 절반을 지나와버렸다.
1275봉은 공룡능선 상에서 제일 높은 암봉이다.
1275봉 꼭대기까지 다녀오는 사람들이 암봉 중간에 보인다.
아래쪽에는 1275봉을 올려다보며 열렬히 응원하는 일행들로 가득하다.
우리는 떡이나 먹읍시다.
1275봉에서 조금 내려서는데
아이고 깜짝이야, 갑자기 촛대바위가 나타난다.
누가 미사일바위라고도 하더만.
촛대바위를 지나는 길이 또 흥미진진하다.
조심조심 내려간다.
오랜 세월 사연을 품었을 만한 암봉들을 우러러 보며 조심 조심 내려선다
촛대바위 빠져나온 길을 뒤돌아보니 오름길이 장관이다.
나는 이런 길이 참 좋다.
키서방이 참지 못하고 그만 배낭을 벗어던지고는 바위를 기어오른다.
저너머 내가 보지 못하는 압도적 풍경을 실컷 바라다보다가 내려온다.
우떻더노?
절벽에다가 낭떠러지더라.
운무 사이로 비치는 곱디고운 하늘빛을 머리에 이고 키신선이 하강한다.
길이 자꾸만 줄어들고 있다.
우리에겐 아직 신선대랑 천불동이 남아있잖아요.
연꽃을 올려놓은 듯한 저 바위는 이름이 있을 것 같은데...
연꽃에 홀딱 반한 키신선이 깜빡 잊고 온 스틱을 되찾아온다.
연꽃을 한 번 더 보려고 일부러 스틱을 흘린 것이 분명해.
불현듯 깜찍한 의부증이 발동한다.
10.29. 토요일 11시 키신선이 바위를 보고 한마디 한다.
코바위네.
4형제가 되었다가 5형제가 되었다가 한다.
저러다 코바위 떨어져 나가겄다야.
내가 코바위랬다고 코바위라카나.
잉, 저 바위 이름이 코바위 아니었어?
내가 그냥 코바위라케봤지.
마음에 들어오는 바위에게 이름을 불러주고 싶다.
1275봉과 숨바꼭질을 한다.
마지막 봉우리인 신선대가 눈앞이다.
신선대에 오르면 지나온 공룡능선 봉우리들을 모두 거느리고
일생일대의 인생사진을 찍을 것이다.
이정목이 공룡능선이 얼마남지 않았음을 알려준다.
외설악 쪽에서 자꾸만 운무가 넘실넘실 넘어와 공룡을 삼켰다 뱉었다 한다.
날름날름 키스 하나...
소청 중청이 넌지시 대청봉에 기대어있고
대청봉은 운무에 휘감겨있다.
물을 붓고 발열제를 넣어주면 부글부글 요란하게 끓는 핫앤쿡.
김치곱배기로 준비했다.
저 아래 가야동계곡이 까마득하다.
갑자기 등골이 오싹하고 밥맛이 달아난다.
여보 그 동안 내가 잘못했소, 섭섭했던 일 있거든 싹 다 잊고 용서하시오. 잉.
키서방이 발을 뻗어 나를 저 아래로 보낼까봐 싹싹 빌어놓고 본다.
그나저나 이 운무가 쇼를 끝내야 공룡을 거느리고 인생샷을 건질 것인데...
밥을 먹고 짐을 다 싸도록 춤을 추고 지랄이다.
하는 수없지 내년에 또 온다.
무너미 고개까지 800m만 걸으면 공룡능선이 끝이 난다.
아껴서 무너미고개까지 살살 가자.
조금 내려서니 시냇물이 나온다.
시냇물은 졸졸졸 낙엽들은 왔다갔다~
편안한 길이 시작된다.
공룡능선이 끝나고 무너미고개에 도착한다.
이제부터 본격 하산길이 시작된다.
비선대까지 5.3km
기나긴 하산길이지만 고단함보다는 하산길에 대한 기대감에 설레임이 북받친다.
비선대까지 4.4km남았다.
이제 곧 기대만발한 천불동 계곡이 시작될 것이다.
중국 장가계보다 원가계보다 훨씬 좋다.
장가계는 달력 속 그림처럼 그림의 떡이지만
여기는 몸소 품에 안겨 그림 속의 하나로 융합될 수 있으니까.
티브이 선생께서도 이르기를,
전지현보다 내 여친이 더 좋은 이유는 만질 수 있으니까라고 했다.
만질 수 있는게 최고지.
지가 먼저 내 온몸을 휘감아준다.
천당폭포에 도착한다.
몇일 전, 대설이 내렸으므로
녹아흘러서 폭포를 잔뜩 키워놓았다.
입을 다물지 못한 채 양폭대피소에 도착한다.
임금님 수랏상이 이보다 더 푸질까.
가도가도 진귀한 풍경이 비선대를 지나고도 계속 이어진다.
여기는 우리나라 3대 계곡 중 하나인 천불동계곡입니다.
이제 1km만 가면 천불동 계곡이 끝나고 비선대에 도착한다.
소염진통제를 뿌려가며 걷지만
눈앞이 선계이니 마음은 날아갈 것 같다.
아침에 도착했던 비선대 삼거리에 선다.
장장 12시간 하고도 20분만이다.
새벽 마등령삼거리로 올랐던 초입 계단이 우측에 보인다.
키신선 맘껏 원없이 즐기고 만끽했지요.
이제 그만 인간으로 되돌아갑시다.
비선대 위쪽 장군봉 직벽 중간에 사람 셋이 있다.
급히 시선을 돌린다.
오금이 다 저려온다.
소공원 주차장까지 50분 간 걷는다.
부슬비가 간간히 내리는 가운데에도 단풍이 명징하게 붉고
단풍을 즐기려는 사람들이 끝도 없이 비선대를 향해 걸어간다.
소공원 주차장에 도착한다.
새벽 이 곳을 떠난지 13시간 25분만이다.
주변 온천목욕탕을 검색, 서둘러 샤워하고
설악항에 간다.
2박3일 일정 중 유일하게 외식을 하려는 거다.
설악동까지 와서 설악항 회를 먹지아니한다면 말이 안 되지.
10.29. 토요일, 밤 8시 같은 오후 5시 50분
제방둑 너머 가열차게 밀려오는 파도소리를 들으며 설악항 활어회 센터에 들어선다.
달성호.
우리가 들어선 횟집 이름이자 배 이름이다.
여사장님이 수더분하신게 여려보인다.
달성호가 저 동해에 나아가 잡아온 광어와 우럭을 주문하고
오징어도 추가 주문한다.
투명한 오징어를 한 가닥 입에 넣는다.
쫀득쫀득 찰지다.
한참만에야 나온 회 맛도 일품이고.
왓, 이거 장난 아닌데.
정말 배에서 잡아온 자연산이 맞는겨!
회를 먹느라 차가워진 속을 얼큰한 매운탕이 따뜻히 보듬어준다.
이거 이거 매운탕 맛 쥑이는뎃! 차에 가서 코펠 가져올까 남는 거 담아가게.
쓰읍, 장난 하나...
키서방이 윗니로 아랫입술을 찍어누르면서 방울뱀 소리를 낸다.
이거 내일 아침이면 생각날 긴데.
내가 미련을 지속하자 키서방이 묘안을 낸다.
그럼 나는 갈낀께 내일 아침까지 쭈욱 먹고 있거라.
알았슈.
고분고분 자리를 털고 일어나 주차장 쪽으로 절뚝절뚝 한참을 따라가는데
갑자기 키서방이 되돌아온다.
암만케도 음식 값에서 오징어값 1만5천원이 빠진 것 같다는 거다.
그렇다면 냉큼 가서 드리고 와야지.
아무리 정신이 나갈 정도로 맛있어도 계산은 똑바로!
없다면 공룡능선으로 가시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