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다방

지게와 배낭

엉겅퀴 | 650



1

 

내 아버지는 목수였다. 예수님의 아버지의 직업과 같다. 어라, 예수님 아버지 직업은 하느님 아닌가? , 하느님 말고, 예수를 성령으로 잉태하고 낳았다고 하는 마리아의 남편 요셉 말이다.

요셉이 그러했듯 내 아버지도 목수가 전업은 아니었고, 농사일 틈틈이 목수일을 했을 뿐이다. 특히 농한기 때면 집 지으러 다니기도 하였고, 평소에 남의 집 문짝도 고쳐주고 궤짝이나 쟁기도 만들고 수리하고 하였다. 대목일 소목일을 다 보았던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이 평소에는 아버지 별명을 부르다가 아쉬워 찾을 땐 이대목!”이라 불렀다. 회사 산악회에서 부려먹을 일 있을 때 나를 이대장!”하고 부르는 거와 같았다.

 

아버지가 그 잘 드는 솜씨로 내게 첫 소유품으로 만들어준 작품은 책상도 의자도 아닌 지게였다. 책상은 삼촌 형님 쓰던 거 물려받았고. 친구들은 저거 아부지 지게 질질 끌고 다닐 때, 나는 목수 아부지 덕분에 내 지게가 생겼으니 뿌듯하고 자랑스러웠다. 어쩌면 나뭇단이나 곡식단을 새끼줄로 묶어 어깨에 메면 어깨가 배겨서 아프기도 하거니와 꼴랑 까치집 만한 짐이 성에 차지 않아 내가 먼저 지게를 원했는지도 모르겠다.

당시 농촌에서는 지게를 자가용이라 부르기도 했으니, 흙수저들이 즐비한 시골에서 전용자가용을 가진 나는 적어도 금수저 아니면 나무수저 쯤은 되지 않았을까 싶다. 그때가 국민하교 4~5학년이나 되었으려나? 지금 생각해보면 그거 아동학대에 노동착취 아닌가 몰라.


 


2

 

전용자가용이 생긴 뒤로 내게 따라붙게 된 말이 있었다. “게으른 놈이 짐 많이 진다더니 니가 딱 그짝이다.” 사실 누구나 다 비슷하지 않은가? 학창시절 시험 임박해서 벼락치기 공부하는 것도 게으른 놈 짐 많이 지는 것 아닌감?

또 아버지는 덧붙였다. “똑 우리집 소 같다.” 이놈의 소는 부릴 때 논밭 중간에서는 죽으라고 가지 않다가 끄트머리에 이르면 부랴부랴 속도를 냈다. 쟁기나 써레를 돌려세울 때 쉴 수 있기 때문이었다. 누가 소를 머리 나쁜 짐승이라고 했나, 시근이 멀쩡하더만. 소가 나를 닮은 건지, 내가 소를 닮은 건지‧‧‧.

어쨌든 지게를 져본 촌놈 출신답게 등짐 지는 건 별로 겁나지 않았다. 군대에서는 완전군장 구보 때 비리비리한 전우들 군장(배낭)까지 짊어지고 뛴 적도 많았고, 한때 회사 산악회에서도 오리야기리야 하는 동료들 배낭까지 메고 오른 적도 많았으며, 애 둘 클 동안 베이비캐리어에 태워 지리산을 비롯한 전국의 산을 누볐다. 설마 그래서 무릎이 탈이 났을까?

 

세월이 가면서 지게와 헤어지고 자연스레 배낭과 친구가 되었지만 지게와는 달리 내 배낭이 생긴 건 취직 이후였다. 칠팔년 동안은 남의 배낭을 빌려서 산에 다녔다는 얘기이다. 배낭 빌릴 데가 없는 친구들은 가방을 들고 오거나 끈을 연결하여 메고 왔다. 15년전 쯤 중국 고산에 갔는데 현지 가이드가 가방 들고 등산하는 경우를 봤다. 옛날 생각이 났다.

7080쯤엔 배낭을 륙색(rucksack)이라고 많이 불렀으며 니꾸사꾸라고도 했는데 아마 륙색의 일본식 발음일 것이다. 당시 배낭은 거짓말 좀 보태서 자루에 어깨멜빵 2개를 연결해 놓은 정도였다. 프레임이 없어서 한복 벗어놓으면 가라앉듯이 빈 배낭은 혼자 서 있지도 못하였다. 각 잡기가 힘들어 꾸려놓아도 태가 나지 않았다.

자크도 없었고 덮개와 고리, 장비 연결끈은 고전적인 방식의 허리띠 버클처럼 가운데 핀으로 맞은편 끈의 구멍에 끼워 고정하는 방식이어서 추운 겨울날엔 시린 손으로 여닫기에 애를 먹었다. 게다가 올이 잘 풀리고 이음새가 끊어지거나 마찰부분이 해지는 경우도 다반사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1987, 소백산

 
  

3

 

나의 첫 배낭은 소형배낭이 아니라 80~100의 대형배낭이었다. 당시엔 교통이 불편하여 교외의 산은 대부분 1박 이상이 소요되었기 때문이다. 당일치기엔 배낭 윗부분을 접어 넣으면 되었다.

그러다가 프레임이 들어간 배낭, 조임끈을 장갑 끼고도 간단하게 조작할 수 있는 배낭, 등과 배낭 사이로 바람이 드나드는 배낭, 내 몸에 맞출 수 있는 배낭 등 배낭의 신세계가 도래하더라. 과거의 배낭이 등 뒤로 뻗대며 울고 패악질 치는 아들놈을 업은 것 같다면, 새로운 배낭은 목을 부드럽게 감싸안고 가벼우면서도 등에 착 감겨드는 딸애를 업은 것 같다고나 할까.

그 유혹에 못 이겨 배낭을 자주 바꾸었고 그참에 소형배낭으로 갈아타게 되었다. 자가용도 생기고 도로도 편리해져 웬만한 산은 당일산행이 가능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사실 당일산행에서는 배낭은 별로 큰 차이가 없다. 그러나 한번 익숙해지면 불편한 건 참기 힘들어진다. 그랜저 타다 티코 타기가 어디 쉬운가?

 

몸으로 짐을 져 나르기에 지게만큼 훌륭한 도구는 없을 것이다. 지게는 세계에 없는 우리의 발명품이라 한다. 게다가 땅이 좁고 산이 많아 수레보다는 더욱 지게가 발달하였을 것이다.

6.25에 참전한 미군들이 지게의 뛰어난 효용성을 경험하고서 그것을 본떠 외장 프레임을 적용한 군장(배낭)을 개발하였다 하며, 그것이 일반사회로 전파되어 외장 또는 내장 프레임이 있는 배낭으로 발전되었을 것이다. 아시다시피 칠팔십년대까지만 해도 군대가 사회에서 가장 앞서가는 시스템이었으니까.

말하자면 세계 등산계는 우리의 지게에 빚을 지고 있는 셈이다. 지게에서 돌고돌아 개량된 배낭을 메고 산에 다니는 나는 가끔 울아부지 생각이 난다. 지게밖에 모르던 촌놈이 여름용 겨울용 배낭에다 당일배낭 박배낭까지 갖췄으니 이만하면 출세한 것인가? <>

 

설날과 계묘년 새로운 날들 마니마니 받으십시오^*^.


 1980, 덕유산
4 Comments
까막눈이 01.21 17:09  
옛적부터 지게를 져서리 힘이 장산가?
세월이 시도 때도 없이 막 가니 이제는 부려먹을 일도 없어 "이대장!" 소리 하기도 힘드오.
나무할려고 가벼운 알루미늄 지게를 마련했는데 그늠마저 나이를 먹으니 끈도 헤져 떨어지고  내 배낭끈도 헤지고,
근데 제일 아래 누구 사진인지 잘 모르겠소

강호원 01.22 05:47  
1, 거 참, 이선생. 선친께서 목수일을 하셨다는 얘기는 금시초문입니다.

2, 지게와 배낭을 연결하여 풀어나가는 이야기가 시골에서 나고, 아직도 농촌에서 살고,
나이 묵어 도토리 배낭만 메고 나서는 제 모습이 오버랩 되네예.

3, 80년대 청바지 입고 등산하던 모습도 그립고,
그 많던 머리숱은 오데로 다 가삣으까 아쉽고,
( 동서양 고전을 비롯해 성경, 불경, 주역, 풍수지리 공부한다꼬 다 빠져버린 게 확실하고.)

4, 고성 촌넘이 도방하고도 직할시에서 좋은 직장 정년까지 마치고 지리산 주능선이 보이는 자락에 지겟자루 놓았으니 성공한 인생임이 틀림 없고.

5, 젊었을 때부터 짐 마이 져서 무릎 나간 것도 옳은 말씀이고.

6, 맛깔스런 설날 인사 잘 읽었습니다.
레테 01.24 14:18  
바지작대기에 맞을라 도망댕기는 친구들 보고 자라서
지게이야기에 공감도 되고예.

저 또한 첫배낭을 박배낭으로 시작했는데요
그 이유가 딱 말씀하신 그대로이네예.
저도 한참 젊었을땐 꼭 산중박이 아니더라도
당일치기는 거의 없었던것 같습니다.

오랜만에 엉겅퀴님의 맛깔스러운 글을 대하니
반갑고 좋습니다. 잘 보았습니다.
황하주 01.25 17:59  
어렷을적 산에 나무하러 가면서
지게 몇번 져 봤습니다 ^^
가리나무라고 ~소나무 잎을 갈퀴로 긁어 모아서
새끼줄로 묶여서 지게에 지고 왔었죠 
그때는 산에 국수 버섯이 많아서
국수버섯으로 국을 끓여 먹었었는데
그 맛이 참 좋았던 추억이 있습니다
지금은 나무를 하지 않아서 국수 버섯이
없다고 하더라구요 ~~
1980년 덕유산 사진이 멋져 보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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