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다방

어떤 연상

객꾼 | 716

청호님이 이런 시를 보내 오셨다



<> “정말”/이 정록(1964~, 충남 홍성 태생, 시인, 고교 여고사)


"참 빨랐지! 그 양반!" 

신랑이라고 거드는 게 아녀 

그 양반 빠른 거야 근동 사람들이 다 알았지


면내에서 오토바이도 그중 먼저 샀고 

달리기를 잘해서 군수한테 송아지도 탔으니까


죽는 거까지 남보다 앞선 게 섭섭하지만 

어쩔 거여 박복한 팔자 탓이지


읍내 양지다방에서 맞선 보던 날 

나는 사카린도 안 넣었는데 

그 뜨건 커피를 단숨에 털어 넣더라니까


그러더니 오토바이에 시동부터 걸더라고 

번갯불에 도롱이 말릴 양반이었지 

겨우 이름 석자 물어 본 게 단데 말이여


그래서 저 남자가 날 퇴짜 놓는구나 생각하고 있는데 어서 타라는 거여

망설이고 있으니까 번쩍 안아서 태우더라고 

뱃살이며 가슴이 출렁출렁하데 

처녀적에도 내가 좀 푸짐 했거든


월산 뒷덜미로 몰고 가더니 밀밭에다 오토바이를 팽개치더라고 

자갈길에 젖가슴이 치근대니까 피가 아랫도리로 쏠렸던가 봐 

치마가 훌러덩 뒤집혀 얼굴을 덮더라고 

그 순간 수욱~ 이게 이년의 운명이구나 싶었지


부끄러워서 두 눈을 꼭 감고 있었는데 정말 빠르더라고 

외마디 비명 한번에 끝장이 났다니까! 


꽃무늬 치마를 입은 게 다행이었지 

풀물 핏물 찍어내며 훌쩍거리고 있으니까 

먼 산에다 대고 그러는 거여 

시집가려고 나온 거 아니였냐고


눈물 닦고 훔쳐보니까 

불한당 같은 불곰 한 마리가 밀 이삭만 씹고 있더라니까


내 인생을 통째로 넘어뜨린 그 어마어마한 역사가 

한순간에 끝장나다니


하늘이 밀밭처럼 노랗더라니까 

내 매무새가 꼭 누룩에 빠진 흰 쌀밥 같았지


얼마나 빨랐던지 

그때까지도 오토바이 뒷바퀴가 하늘을 향해 따그르르 돌아가고 있더라니까


죽을 때까지 그 버릇 못 고치고 갔어


덕분에 그 양반 바람 한번 안 피웠어

가정용도 안 되는 걸 어디가서 상업적으로 써먹겠어 

정말 날랜 양반이었지...


정체 불분명한 이의 촌평, 

남편과 일찍 사별한 슬픔을 역설적이고, 풍자적이고, 유머러스하게 표현 했지만 읽다보면 마음이 짠~ 해지는, 전혀 외섭스럽지 않고 잔잔한 감동을 주는 시입니다 



마침 이런 서물을 읽고 있던 참이었다
내 영혼이 따뜻했던 날들(포리스터 카터) 중에서~

  고향 산에서 멀어져가자 사람들이 하나둘 죽어가기 시작했다. 비록 체로키의 혼은 죽지도 약해지지도 않았지만, 어린아이와 노인들과 병자들이 그 까마득한 여행길을 견디기는 힘들었다. 
  처음에는 병사들도 행렬을 멈추고 죽은 사람을 묻을 시간을 주었다. 하지만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죽어갔다. 그 수는 순식간에 몇 백 몇 천으로 불어나, 결국 전체의 3분의 1이 넘는 체로키들이 행진 중에 숨을 거두었다. 그러자 병사들은 3일에 한 번씩만 매장할 시간을 주겠노라고 했다. 하루라도 빨리 일을 마치고 체로키들에게서 손을 떼고 싶은게 병사들의 심정이었다. 병사들은 죽은 사람들을 수레에 싣고 가라고 했지만, 체로키들은 시신을 수레에 누이지 않고, 자신들이 직접 안고 걸었다.
  아직 아기인 죽은 여동생을 안고 가던 조그만 남자아이는 밤이 되면 죽은 동생 옆에서 잠이 들었다. 아침이 되면 그 아이는 다시 여동생을 안고 걸었다. 
  남편은 죽은 아내를, 아들은 죽은 부모를, 어미는 죽은 자식을 안은 채 하염없이 걸었다. 병사들이나 행렬 양옆에 서서 자신들이 지나가는 걸 쳐다보는 사람들에게 고개를 돌리는 일도 없었다. 길가에 서서 구경하던 사람들 중 몇몇이 울음을 터뜨렸다. 하지만 체로키들은 울지않았다. 어떤 표정도 밖으로 들어내지 않았다. 그들에게 자신들의 마음을 내비치고 싶지 않았다. 체로키들은 마차에 타지 않았던 것처럼 울지도 않았다.
  사람들은 이 행렬을 눈물의 여로라 부른다. 체로키들이 울었기 때문이 아니다. 낭만적으로 들릴 수 있기 때문에, 또 그 행렬을 옆에서 구경하던 사람들의 슬픔을 표현해주기 때문에, 그들은 이 행렬을 그렇게 불렀다. 하지만 죽음의 행진은 절대 낭만적일 수 없다.
  과연 누가 어미의 팔에 안긴 채 뻣뻣하게 죽어 있는 아기, 어미가 걸어가는 동안 감기지 않은 눈으로 흔들거리는 하늘을 노려보고 있는 아기를 소재로 시를 지을 수 있겠는가? 
  과연 누가 밤이 되면 아내의 주검을 내려놓고 온밤 내내 그 옆에 누워 있다가 아침이 되면 일어나 그 주검을 옮겨가야 하는 남편과, 장남에게 막내의 시신을 안고 가라고 말해야 하는 아버지......그리고 쳐다 보지도.....말하지도......울지도......고향 산을 떠올리지도 않는 이들을 소재로 노래할 수 있겠는가?
  그것은 절대 아름다운 노래가 될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 행렬을 눈물의 여로라 불렀다(1938~1939년에 걸쳐 1만 3천여 명 정도의 체로키들이 차례로 오클라마호의 보호구역으로 강제이주 당했다. 1,300킬로미터의 행진 중에 추위와 음식부족, 질병, 사고 등으로 무려 4천여 명 정도의 체로키들이 죽었다 한다) 

사족,
문득 이런 느낌이 든다
시라는 것을 쓰는 것도 팔자 좋은 타령 일 수도 있지 않을까?



 
7 Comments
레테 05.26 15:09  
음...
듣도 보도 못한 시와 글입니다.
책이라꼬 펼쳐본지가 까마득하기도 하지만
행님의 다양한 내공들 때문이겠지요.

한참 닭뱅걸리가 눈까풀 스르르 떨어지려는 참에
묘한 여운이 정신을 차리게 만드네예.

내일은 비 안오것지예?
비 오기전에 한바리 해야지.
모모장 08.07 11:25  
시골 경로당에서 할머니들께 문해 교육을 시켜드리는데
이제 갓 한글을 뗀 할머니들의 글과 그림을
시화로 만들어서 연말에 전시도 하고 책으로도
펴내는데 위와 같은 글들이 있어 참 재밌더라.

"수문양반 왕자지" 라는 시도 찾아서 읽어보시라
객꾼 05.30 09:04  
세석평전에 철쭉이 제철이더만
건데 비와 안개와 바람이 같이 심해요
엉겅퀴 05.26 23:44  
아따! 그 능청스러운 시어(詩語)가 참 감칠맛 나네요.
그라고 내 얘기 같아 공감이 가네요.
그렇다고 저 세상에는 날래게 가지 않아야 할텐데...

요새도 손으로 모내기 하는 동네가 있나? 학생들 실습인가?
저 모습 보니 나도 연상되는 거 하나.
젊었을 적 모내기 하다 새참에 막걸리 벌컥벌컥 마시고 물논에 엎드리면
막걸리가 신물과 함께 목으로 거꾸로 올라와
허리를 펴고서 막걸리를 꾹꾹 눌러준 다음에 다시 엎드리곤 했지...
객꾼 05.30 09:08  
저는 손모내기 할 시절에는 막걸리 마실 군번이 아니어서 그런 경험은 못했봤습니다만,
상상은 능히 가네예
건데 제가 좀 더 커고나서 느낀일입니다만,
우리 어릴적에는 모내기 일꾼이 100% 여성일꾼, 어머님들 이셨는데,
육지쪽에서는 남자들이 주로 모내기를 하시데예
그거 제법 문화적(?) 충격이었습니다~^^
강호원 05.28 00:03  
첫 번째 글은 몆 년 전 어디서 읽은 적이
있습니다.
표현이 적나라하고 절묘합니다만
남편 먼저 보낸 여인의 슬픔이 배어있습니다.

두 번째 글은 처음 봅니다.
체로키, 미국 원주민의 아픔을 이아기한 거군요.
가슴 아픈 사연입니다.

요즈음도 권농일 행사를 저렇게 합니까? ㅋ

마지막 사진은 자장구 라이딩하다가
빵구가 났습니까?
객꾼 05.30 09:12  
저는 저 시를 읽으며 따로 느낀 감정이,
64년생이면 한창 개화이후의 세상인데.....
보리밭에 데꼬가 강제로 치마 얼굴에 뒤집어 쒸우고 일 치룬다고 그게 넘어가는 세상이었나예^^

미국의 역사는 레드 인디언들의 피로 얼룩진 것이라는 말도 있지예
체로키는 우리 민족하고도 피가 좀 섞인 민족이라 알고 있습니다

요즘도 권농일 행사 저렇게 하는데 대신 막걸리병은 없어졌고예
자전거 빵꾸 마침 그늘에서 놔 주데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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