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다방
[이상향에 관한 추억} -3. <유년 시절>
19세기 후반
일본의 기풍있는 어느 귀족 집안사로부터 이야기는 시작됩니다.
미루어 짐작할 수 있듯이 일본의 귀족 집안이라면
엄격한 규율 속에서 자제들은 정해진 코스대로 명문학교를 졸업하고
반듯하게 사회로 진출하게 되지요.
그런데 그 집안에 어긋난 막내가 있었는데
천하 한량으로 풍류를 찾아 세상을 유랑하며 젊은 시절을 보냅니다.
그런 그가 만주에서 상당한 돈을 모으게 되고
드디어 자신의 꿈을 실현하기 위하여
눈 여겨 보아둔 부산의 금정산 남쪽 끝 자락
지금의 만덕터널 아래쪽 넓은 땅을 구입하여
자신의 성을 만듭니다.
자신이 살 집은 소박하게 짓되 엄청난 넓이의 땅에 호수와 정원과 농장을 지어
금정산 자락과 조화롭게 이상향을 만들어 나갔습니다.
두개의 넓은 개울이 가운데로 흘러갔으며 학교 운동장만한 호수가 있었으니
그 넓이가 짐작이 될 법 합니다.
그리고 그는 주변 마을 사람들의 세금을 몽땅 대신 내어줍니다.
아침에 말을 타고 주변을 돌라치면 마을 사람들이 고마움에 머리를 조아리니
영주의 기분을 누리며 이상향을 가꾸어 나갔습니다.
해방이 되면서 그 땅은 두 개로 나누어져
한쪽은 원예고등학교가 자리 잡고 다른 쪽은 원예시험장이 들어섭니다.
우장춘 박사가 귀국하여 씨 없는 수박을 만든 곳이 바로 이곳입니다.
제가 세상의 기억을 시작할 무렵
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금정산과 두 기관이 만나는 한가운데 자리한
학교 관사로 들어와 살게 된 이래
사춘기가 한창일 무렵까지 저의 유년시절을 이곳에서 보내게 됩니다.
집으로 가기 위해서는 학교든지 시험장이든지 관청의 정문을 통과해야 했으므로
아무나 들어올 수 없는 곳이어서
학교를 파하고 들어오면 그 곳은 우리들만의 별천지였지요.
금정산은 우리의 어깨가 굵어진 놀이터였으며
홍길동의 율도국과 피아골의 전쟁터가 되기도 하였고
학교의 축사와 농장은 산책로였으며
한참이나 큰 형들을 통하여 가끔은 세상을 배우는 통로가 되기도 하였지요.
시험장의 온갖 나무와 화초와 숲과 호수 속에 파묻혀 가슴을 키우며
호수에서 수영을 배우고
연구원 순찰용 자전거를 훔쳐 자전거 타기를 배우며 성장한 곳이기도 합니다.
봄이면 정문을 들어서자마자 세상을 뒤덮어버린 북실북실한 연보라 꽃잔디에
몸을 던져버리고 싶은 유혹을 참느라 침을 삼켜야 했으며
이랑을 갈아놓은 농장의 풋풋한 흙 냄새에 봄이 느껴져
무어그리 재미있었는지
뒤퉁거리며 아득한 골의 끝까지 몇 번을 갔다 오곤 하였지요.
색색의 연산홍이 눈을 물들이면 천리향 짙은 향기가 코를 멈추게 하고
산호수 큰 잎 새싹이 만든 연두빛에 가슴 시려지기도 하였습니다.
여름이면 호수에서 멱을 감거나
드럼통을 몇 개 엮어 배를 만들어 두개의 섬을 돌기도 하였으며
개울을 막아 어린 동생들을 담구어 놓고
길가 지천으로 널린 자두랑 복숭아 감 따위를 따서
간식을 하기도 하였지요.
장마철 개울을 건너다 빠뜨린 고무신을 찾아 헤매다가
비가 그친 후 동네아이들 동원하여 개울을 수색하다 보면
한참 내려간 바위사이 끼어있는 고무신을 찾아내는 재미도
만만치 않았던 재미였으며 큰 비가 오면 괜히 개울로 나가
고무신 신은 발을 담구어 보기도 하였습니다.
키가 좀 자란 후에는 큰 나무 가지 위에 판자를 대고 우리들만의 세상을 만들어
더위를 쫓으며 책을 보거나 낮잠을 자기도 하였지요.
도룡알 빼먹기나 미꾸라지 잡기가 심심해질 때면
고급 야채를 키우는 온실에 몰래 들어가
그 당시 시중에는 볼 수도 없었던 메론 서리를 하였으니
그 당시 또래의 누가 꿈이나 꿔 봤겠습니까.
가을이면 은행이나 호두 껍질 벗겨내느라 손이 시커멓지 않은 때가 없었으며
물 빠진 호수의 방죽을 돌며
만덕 고개 마루에 걸린 저녁노을에 걸음을 멈추곤 하였지요.
간혹은 엉뚱하게도
호수에 물을 대려고 개울 상류에 배수 구멍을 용머리 형상으로 만들어
용못이라 이름 붙여진 조그만 저수지에서
추석도 지난 서늘한 날에 친구들이랑 옷을 벗고
하늘색보다도 더 시퍼런 한길 물속으로 뛰어들며 용맹을 견주었던 객기를 부리며
나이를 먹어갔지요.
겨울이면 우선은 뒷산 솔밭에서 갈비 한 다발을 해 놓은 후에
점심 먹는 줄도 모르고 얼음지치기에 빠졌으며
물이 말라버린 개울가 바위 틈새에 온실 덮는 짚단을 훔쳐와 둘러쳐 놓고
친구넘이랑 아무 하는 일 없이 쭈그리고 앉아 있기가 뭐 그리 즐거웠던지.
그래도 난방시설이 갖추어진 온실 안에는 겨울도 아랑곳 없이
보고싶을 때 항상 철철의 꽃을 볼 수 있었으며
서리할 만한 먹거리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가끔 학교의 악대부가 가두행진을 나갈 때면
뒷꽁무니에 따라 서서 아주 먼 거리를 돌아 오는데도 불구하고
지칠 줄 모르게 따라 다니며 신에 겨워하기도 하였지요.
그당시 우리가 살았던 일본식 관사는 오래되어
비만 오면 세숫대야와 그릇에 떨어지는 빗소리를 음악 삼아 잠들곤 하였으나
유년인 저의 가슴은 세상의 즐거움으로 가득 채워져 있었으며
즐거운 내일이 기다려 져 밤이 아까운 지경이었지요.
영원히 나이 들지 않고 유년으로만 사는 줄 알았습니다.
이상향처럼 말이지요.
그러던 그 곳도 저의 유년시절이 끝남과 동시에
시험장은 고급주택지로 팔려버렸고 넓은 학교는 세 개의 학교로 나누어지게 됩니다.
길 건너 조폐공사는 대전으로 이전하면서 그자리에 낯선 아파트가 들어서고
용머리 근엄하던 용못은 만덕터널이 뚫리면서
바로 위로 길이 나 버리는 바람에 위용을 잃고 맙니다.
저의 몸도 변하면서 나이를 먹어 성장한다는 것을 깨닫게 될 무렵
결국 우리는 주위를 좁혀오는 고급 주택들 틈에 버티기도 어려워
유년시절을 꼬박 보낸 그 곳을 떠나게 됩니다만
정문 옆의 쪽문을 들어서면 길게 드리워진 길을 지나 펼쳐졌던 그 곳이
아직도 저에겐 이상향의 모델이 되고있으며,
지리에 돌아다니며 [나 돌아갈 곳]을 찾을 때
다른 것은 부족하여도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만
집 앞으로 흐르는 개울이 없다면
저는 그 곳을 이상향이라 부를 수 없습니다.
제가 기억을 시작하면서부터 보아온 광경이며
제가 기억하는 세상은 개울 건너 펼쳐진 그 곳으로부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후기>
그 곳을 떠나온 지 6년뒤 저는 다시 그 곳을 찾을 기회가 있었지요.
동래산성 아래 부산대학교에서부터 이틀째 계속된 데모대는 온천장 까지 진출하였고
우리는 주민들의 전폭적인 지지 속에
[독재타도 유신철폐]을 외치며 거침 없이 거리를 휩쓸고 나아갔지요.
전날 허술하게 방어망이 뚫린 경찰은
전국에서 긴급 보강이 되어 데모대를 강력 저지하였고
온천천을 보루로 하여 버스를 타고가든 걸어가든 모든 젊은이를 연행해 가고 있었습니다.
역시 유년시절 놀이터의 한 부분이었던
온천장 시장통 뒷골목의 지리를 훤하게 꿰차고 있었던 저는
골목을 요리조리 피하여 저의 이상향이었던 곳의 옆 마을인 차밭골로 잠입합니다.
전자공고로 바뀌어진 학교의 담을 넘고 들어가
유년시절 놀이터였던 학교뒤 금정산을 넘어
만덕으로 빠져 포위망을 빠져 나갔지요.
고급 주택가가 내려다 보이는 초라해진 용못 옆에 서서 긴장을 해소를 하면서
이제는 흔적도 없이 사라진 유년의 꿈을 떠올리며 씁쓸해 했던 그 때가
79년 어느 가을날 이었으며
그로부터 딱 10일 뒤 대통령의 유고 사태가 발생했던 그 무렵의 이야기 입니다.
일본의 기풍있는 어느 귀족 집안사로부터 이야기는 시작됩니다.
미루어 짐작할 수 있듯이 일본의 귀족 집안이라면
엄격한 규율 속에서 자제들은 정해진 코스대로 명문학교를 졸업하고
반듯하게 사회로 진출하게 되지요.
그런데 그 집안에 어긋난 막내가 있었는데
천하 한량으로 풍류를 찾아 세상을 유랑하며 젊은 시절을 보냅니다.
그런 그가 만주에서 상당한 돈을 모으게 되고
드디어 자신의 꿈을 실현하기 위하여
눈 여겨 보아둔 부산의 금정산 남쪽 끝 자락
지금의 만덕터널 아래쪽 넓은 땅을 구입하여
자신의 성을 만듭니다.
자신이 살 집은 소박하게 짓되 엄청난 넓이의 땅에 호수와 정원과 농장을 지어
금정산 자락과 조화롭게 이상향을 만들어 나갔습니다.
두개의 넓은 개울이 가운데로 흘러갔으며 학교 운동장만한 호수가 있었으니
그 넓이가 짐작이 될 법 합니다.
그리고 그는 주변 마을 사람들의 세금을 몽땅 대신 내어줍니다.
아침에 말을 타고 주변을 돌라치면 마을 사람들이 고마움에 머리를 조아리니
영주의 기분을 누리며 이상향을 가꾸어 나갔습니다.
해방이 되면서 그 땅은 두 개로 나누어져
한쪽은 원예고등학교가 자리 잡고 다른 쪽은 원예시험장이 들어섭니다.
우장춘 박사가 귀국하여 씨 없는 수박을 만든 곳이 바로 이곳입니다.
제가 세상의 기억을 시작할 무렵
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금정산과 두 기관이 만나는 한가운데 자리한
학교 관사로 들어와 살게 된 이래
사춘기가 한창일 무렵까지 저의 유년시절을 이곳에서 보내게 됩니다.
집으로 가기 위해서는 학교든지 시험장이든지 관청의 정문을 통과해야 했으므로
아무나 들어올 수 없는 곳이어서
학교를 파하고 들어오면 그 곳은 우리들만의 별천지였지요.
금정산은 우리의 어깨가 굵어진 놀이터였으며
홍길동의 율도국과 피아골의 전쟁터가 되기도 하였고
학교의 축사와 농장은 산책로였으며
한참이나 큰 형들을 통하여 가끔은 세상을 배우는 통로가 되기도 하였지요.
시험장의 온갖 나무와 화초와 숲과 호수 속에 파묻혀 가슴을 키우며
호수에서 수영을 배우고
연구원 순찰용 자전거를 훔쳐 자전거 타기를 배우며 성장한 곳이기도 합니다.
봄이면 정문을 들어서자마자 세상을 뒤덮어버린 북실북실한 연보라 꽃잔디에
몸을 던져버리고 싶은 유혹을 참느라 침을 삼켜야 했으며
이랑을 갈아놓은 농장의 풋풋한 흙 냄새에 봄이 느껴져
무어그리 재미있었는지
뒤퉁거리며 아득한 골의 끝까지 몇 번을 갔다 오곤 하였지요.
색색의 연산홍이 눈을 물들이면 천리향 짙은 향기가 코를 멈추게 하고
산호수 큰 잎 새싹이 만든 연두빛에 가슴 시려지기도 하였습니다.
여름이면 호수에서 멱을 감거나
드럼통을 몇 개 엮어 배를 만들어 두개의 섬을 돌기도 하였으며
개울을 막아 어린 동생들을 담구어 놓고
길가 지천으로 널린 자두랑 복숭아 감 따위를 따서
간식을 하기도 하였지요.
장마철 개울을 건너다 빠뜨린 고무신을 찾아 헤매다가
비가 그친 후 동네아이들 동원하여 개울을 수색하다 보면
한참 내려간 바위사이 끼어있는 고무신을 찾아내는 재미도
만만치 않았던 재미였으며 큰 비가 오면 괜히 개울로 나가
고무신 신은 발을 담구어 보기도 하였습니다.
키가 좀 자란 후에는 큰 나무 가지 위에 판자를 대고 우리들만의 세상을 만들어
더위를 쫓으며 책을 보거나 낮잠을 자기도 하였지요.
도룡알 빼먹기나 미꾸라지 잡기가 심심해질 때면
고급 야채를 키우는 온실에 몰래 들어가
그 당시 시중에는 볼 수도 없었던 메론 서리를 하였으니
그 당시 또래의 누가 꿈이나 꿔 봤겠습니까.
가을이면 은행이나 호두 껍질 벗겨내느라 손이 시커멓지 않은 때가 없었으며
물 빠진 호수의 방죽을 돌며
만덕 고개 마루에 걸린 저녁노을에 걸음을 멈추곤 하였지요.
간혹은 엉뚱하게도
호수에 물을 대려고 개울 상류에 배수 구멍을 용머리 형상으로 만들어
용못이라 이름 붙여진 조그만 저수지에서
추석도 지난 서늘한 날에 친구들이랑 옷을 벗고
하늘색보다도 더 시퍼런 한길 물속으로 뛰어들며 용맹을 견주었던 객기를 부리며
나이를 먹어갔지요.
겨울이면 우선은 뒷산 솔밭에서 갈비 한 다발을 해 놓은 후에
점심 먹는 줄도 모르고 얼음지치기에 빠졌으며
물이 말라버린 개울가 바위 틈새에 온실 덮는 짚단을 훔쳐와 둘러쳐 놓고
친구넘이랑 아무 하는 일 없이 쭈그리고 앉아 있기가 뭐 그리 즐거웠던지.
그래도 난방시설이 갖추어진 온실 안에는 겨울도 아랑곳 없이
보고싶을 때 항상 철철의 꽃을 볼 수 있었으며
서리할 만한 먹거리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가끔 학교의 악대부가 가두행진을 나갈 때면
뒷꽁무니에 따라 서서 아주 먼 거리를 돌아 오는데도 불구하고
지칠 줄 모르게 따라 다니며 신에 겨워하기도 하였지요.
그당시 우리가 살았던 일본식 관사는 오래되어
비만 오면 세숫대야와 그릇에 떨어지는 빗소리를 음악 삼아 잠들곤 하였으나
유년인 저의 가슴은 세상의 즐거움으로 가득 채워져 있었으며
즐거운 내일이 기다려 져 밤이 아까운 지경이었지요.
영원히 나이 들지 않고 유년으로만 사는 줄 알았습니다.
이상향처럼 말이지요.
그러던 그 곳도 저의 유년시절이 끝남과 동시에
시험장은 고급주택지로 팔려버렸고 넓은 학교는 세 개의 학교로 나누어지게 됩니다.
길 건너 조폐공사는 대전으로 이전하면서 그자리에 낯선 아파트가 들어서고
용머리 근엄하던 용못은 만덕터널이 뚫리면서
바로 위로 길이 나 버리는 바람에 위용을 잃고 맙니다.
저의 몸도 변하면서 나이를 먹어 성장한다는 것을 깨닫게 될 무렵
결국 우리는 주위를 좁혀오는 고급 주택들 틈에 버티기도 어려워
유년시절을 꼬박 보낸 그 곳을 떠나게 됩니다만
정문 옆의 쪽문을 들어서면 길게 드리워진 길을 지나 펼쳐졌던 그 곳이
아직도 저에겐 이상향의 모델이 되고있으며,
지리에 돌아다니며 [나 돌아갈 곳]을 찾을 때
다른 것은 부족하여도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만
집 앞으로 흐르는 개울이 없다면
저는 그 곳을 이상향이라 부를 수 없습니다.
제가 기억을 시작하면서부터 보아온 광경이며
제가 기억하는 세상은 개울 건너 펼쳐진 그 곳으로부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후기>
그 곳을 떠나온 지 6년뒤 저는 다시 그 곳을 찾을 기회가 있었지요.
동래산성 아래 부산대학교에서부터 이틀째 계속된 데모대는 온천장 까지 진출하였고
우리는 주민들의 전폭적인 지지 속에
[독재타도 유신철폐]을 외치며 거침 없이 거리를 휩쓸고 나아갔지요.
전날 허술하게 방어망이 뚫린 경찰은
전국에서 긴급 보강이 되어 데모대를 강력 저지하였고
온천천을 보루로 하여 버스를 타고가든 걸어가든 모든 젊은이를 연행해 가고 있었습니다.
역시 유년시절 놀이터의 한 부분이었던
온천장 시장통 뒷골목의 지리를 훤하게 꿰차고 있었던 저는
골목을 요리조리 피하여 저의 이상향이었던 곳의 옆 마을인 차밭골로 잠입합니다.
전자공고로 바뀌어진 학교의 담을 넘고 들어가
유년시절 놀이터였던 학교뒤 금정산을 넘어
만덕으로 빠져 포위망을 빠져 나갔지요.
고급 주택가가 내려다 보이는 초라해진 용못 옆에 서서 긴장을 해소를 하면서
이제는 흔적도 없이 사라진 유년의 꿈을 떠올리며 씁쓸해 했던 그 때가
79년 어느 가을날 이었으며
그로부터 딱 10일 뒤 대통령의 유고 사태가 발생했던 그 무렵의 이야기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