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다방

'사기 결혼'이 성공할 수 있을까요?...

산돌림 | 1777
언젠가도 얘기한 적이 있지만, 내게 오는 이메일의 대부분은 쓰레기들입니다.

평생 외국이라곤 가본 적이 없음에도 어떻게 내 주소를 알았는지,
영어로 된 메일도 심심찮게 들어옵니다.
물론 그 장황한 영문 중에 내가 아는 단어는 몇 개 되지 않아
- 예를 들면 "Big", "Strong", "Viagra" 정도 -
그 전체 뜻을 알 수가 없으니, 아무리 고상한 내용일지라도 내게는 쓰레기 메일에 불과할 뿐이고...

"어젯밤엔 잘 들어가셨나요?"라는 제목에서부터, "가끔은 들러주세요",
"그쪽 분들 생각은 어떤지 궁금하네요", "동창회 나올 생각 없니?" 등등..
동양적인 은은함(?)을 물씬 풍기는 한글로 된 메일들 또한,
내가 먹고 사는 데 하등의 영양가도 없으니 쓰레기일 뿐입니다.

다만 영문 메일과의 차이라면, 제목을 "읽을 수" 있으니,
'삭제'할 때, 마우스를 누르는 손가락에 자신감이 덧실린다는 정도라고나 할까요...

오늘, 메일 목록에서 "○○○, 장가 간다!"는, 마치 선언과도 같은 제목을 봤을 때 맨처음 든 생각은,
'이야! 이젠 아는 사람 이름까지 도용할 정도로 스팸메일 기술이 발달했구나!' 하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내용을 읽어보니, 적어도 스팸메일이 아닌 건 분명했습니다.
아는 선배가 뒤늦게 결혼하겠다는 "통첩장"이었으니까요.

그런데... 뭔가 좀 찜찜했습니다.

늦게나마 자기 반쪽을 찾아 잘 살아보겠다니 축하의 마음이 생긴 건 물론 당연한 노릇이지만,
한편으론, 이 게시판에서 한때 화제가 됐던 "결혼과 자유와의 역학관계"가 떠올라,
뭣하러 굳이 고생을 자초하는가 하는 안타까움도 일었던 것이지요.

그런데... 그게 전부가 아니었습니다.
반갑고도, 또 안타까운 마음을 이해 못할 만큼 내가 어리석은 게 아니건만,
그럼에도 끊임없이 내 마음이 불편한 건 도대체 무엇 때문이었을까요?

메일을 한참 들여다본 끝에, 마침내 그 원인을 발견했습니다.
바로 이런 대목이었지요.

- - - - - - - - - - - - - - - - -
(아참, 신부 측 부모님이 내가 65년 생이라고,
따라서 아직 30대라고 착각하고 있으니 - 하하하 -
머리 '허연' 친구들은 반드시 염색하고들 오시라요 ~~ ^^;)
- - - - - - - - - - - - - - - - - -

그렇습니다!!
내 가슴을 짓눌렀던 그 어두움의 정체는 바로 그것이,
"사기 결혼"이었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다소 나이 차이가 있을 것이 분명하고,
약간의 불법행위를 감수하고서라도 결혼을 하고야 말겠다는 그 선배의
애타는 심정을 헤아리지 못할 것은 없지만,
결과적으로는, 평생을 푸른 소나무처럼 고고하게 살겠다고 (아주 가끔씩) 생각하는 저에게,
사기 행위에의 동참을 강요하는 글이었으니 결코 제 마음이 편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설령 한발 더 나아가서,
당사자야 원래 동안인 데다가 싱싱하게 혼자 살았으니 나름대로 자신이야 있겠고,
저 또한 귀밑머리 염색하고나면 30대 후반이라 해도 어느 정도는 통할 성싶지만,
그 날 결혼식 하객의 주류를 이룰 또 다른 선배들은 어찌하란 말인지...
듬성듬성한 머리칼과 갈수록 넓어지는 이마, 툭 튀어나온 배로 고민하는 그들에게,
30대 후반으로의 변신을 요구하는 것이 과연 가능할 것인가...

어쨌거나 선배의 구체적인 요구가 있으니만큼,
저의 솟구치는 "도덕적 결벽성"을 잠시 억누르고 "사기행위"에 동참을 해야겠지만,
과연 잘 될 수 있을 것인가 솔직히 의문스럽습니다.

"희대의 사기극"을 치러야 할 2003년 연말을 앞두고,
영화 <스팅>의 명장면들이 새삼 눈앞을 마구 스쳐 지나가는군요.

경험이 있으신 분들의 조언 기다리겠습니다.

* * * * * * * * * * *
음~. 오늘은 그런 대로 글의 마무리가 잘 된 것 같아서 흡족합니다.
그래봤자 헛소리이긴 합니다만...(^^)
4 Comments
꼭대 2003.11.25 15:43  
음~ 나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오늘은 그런 대로 글의 마무리가 잘 된 것 같다]고... 게시판의 경직성에 대하여 글을 한참 쓰다가 잠시 쉬는 틈에 들어와 보니 [지리99]의 꽁트 전문 작가 님의 톡 튀게 분위기 살려주는 글이 있어 경직성에 대한 경직된 글을 올려야 할지 고민됩니다.
임우식 2003.11.25 17:18  
마무리가 잘된것 같다구요...? [연구대상]의 글이라고는 믿기지가 않습니다. 연구대상은 연구대상일때 가장 연구대상답습니다....ㅎㅎㅎ
산돌림 2003.11.25 17:55  
하하, 형님! 저도 제가 왜 맨날 길을 잃고 헤매는지 연구해 봤는데요, 결론은 "모르겠다"였습니다. 하지만 이것만은 분명히 말할 수 있습니다. "내게 똑같은 상황이 닥치더라도 나는 또다시 길을 잃고 말 것이다! 누가 나에게 돌을 던질 것인가?"라고...(^^)
임우식 2003.11.26 08:25  
혹시했는데.... 역시 연구대상 답습니다...ㅎㅎ

Tota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