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다방
가깝고도 먼 그 곳........
어찌어찌 살아 가는 이야기를 하다가
하양댁, 대창댁, 금호댁 아지매가 어울리게 되었다.
"꼬지래기가 시게 한탕 할라카나? 날이 와 요 모양이고?"
"그캐, 할라카마 시기 하든동..... 이기 뭐꼬?"
오늘 내일 시험이라 오전으로 일과는 끝나고 마침 밥이나 묵으로 가자꼬
의기 투합이 된 국어과 아지매 선생들이 길을 나설라는데 우중충하게 꾸려하는 날씨를 두고 하는 말이다.
"뭔 말씀을 하시는 긴지..."
뒷자리에서 엉거주춤 따라나서던 대구 처녀는 뭔 말인지 알아 듣지도 못한다.
대구와 금호가 이젠 40여분 거리 밖에 안되는 지척의 곳인데도
그 곳 사람들이 만나서 하는 말씨는 평양말씨보다 더 어렵단다. 히힛!
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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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전에, 난.
경제적인 여유가 조금 생기면 금호로 가서 살고 싶어했었다.
피래미 새끼가 난닝구 속으로 끼여 들어 오던 잠수교와
쩌엉쩌엉 울리던 한 밤의 얼음 우는 소리는 지난 여름 덕성동 여울목에 빠져 죽은 누구네 집 외아들의 서러운 통곡 같아.... 그래도 땡볕 눈부신 한 낮엔 아이들 발길에 몸살 난 얼음이 휘청휘청 고무줄처럼 늘어나 어느 때 누구 발길에 빵구나나 내기하면서 달려보던 그 강물의 흐름에 다시 시선을 던지고 나는 내 살아있음을 확인하며 기뻐하며 회귀하는 평화를 누리고 싶어했었다.
외환위기로 대한민국이 어지럼증을 앓을 때
나 역시 대한민국의 백성이어서 그 배 안의 아픔을 진하게 겪어야 했을 때,
깊은 시름의 한 켠에 위로 삼고 싶어, 열 서너 살 딸아이 손을 끌어 금호 강 둑에 섰었다.
다리는 반 쯤 떨어져 나가 있었고,
과수원 둑은 새로 쌓여져 강과 밭의 경계가 확연했었다.
그 둑 위에 차를 세웠지 아마.
아이는 무표정했다.
나만 착잡한 마음을 흐름이 없는 강 위에 던져 놓고 있었다.
강은.....
우리가 예전에 타고 다녔던 '수게토'를 기억하지 못한다.
빨간 능금을 철철 흐르게 끌던 말구루마를 기억하지 못한다.
빨래통 가에 모여 들던 피래미와 메기도 알 수 없는 이름이라 한다.
냉천동 청석밭에 미끄럼을 타다 빵구낸 운동회 까만 빤쯔의 그 질긴 맛도 모른다 한다.
너무도 먼 곳으로 가 버렸다.
나는,
며칠 전에도 지리산 달궁 골짜기 마을에 서 있었다.
먼저 도착해서 미리 텐트를 치고 기다려 준 산 친구 보다
텐트 밖으로 들리는 골짜기의 물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금호생각을 하고 있었던 거다.
이른 아침, 돌멩이에 두 발을 버티며 허리 구부려 감는 머리카락에 금호를 헹구고 있었다.
달궁 동네 여염 집 담모퉁이를 끼고 오르는 정령치 가는 길에
흔적만 흐느적거리는 마을터를 보며 이 곳 사람들은 지금 어디서 어떤 추억으로 살아 가고 있을까를 생각했었다.
금호.
내 안에 살아 있는 강물 소리와,
그 둑 위에서 꼴을 뜯던 호일이네 소와,
붕어회에 간디스토마를 얻어 배가 퉁퉁 부어 있던
자전거방 털보 아저씨의 낚싯줄이 지금도 나를 끌어 당기는 곳.
그러나
나는 금호 보다 더 먼 - 지리에서 금호를 만나고 있다.
(어린 시절을 보낸 곳은 '경북 영천시 금호읍' 대구에서 지금 시내버스가 다니는 곳입니다. 하양은 금호 바로 전 읍소재지고 대구대. 경산대.효가대. 경일대. 국군 간호학교가 있는 있는 교육지로 변해 있습니다.
개발은 고향을 잃게 하더만요. 언젠가는 '지리산'도 잃어 버리지 않을까......)
'꼬지레기'-> '소나기'
하양댁, 대창댁, 금호댁 아지매가 어울리게 되었다.
"꼬지래기가 시게 한탕 할라카나? 날이 와 요 모양이고?"
"그캐, 할라카마 시기 하든동..... 이기 뭐꼬?"
오늘 내일 시험이라 오전으로 일과는 끝나고 마침 밥이나 묵으로 가자꼬
의기 투합이 된 국어과 아지매 선생들이 길을 나설라는데 우중충하게 꾸려하는 날씨를 두고 하는 말이다.
"뭔 말씀을 하시는 긴지..."
뒷자리에서 엉거주춤 따라나서던 대구 처녀는 뭔 말인지 알아 듣지도 못한다.
대구와 금호가 이젠 40여분 거리 밖에 안되는 지척의 곳인데도
그 곳 사람들이 만나서 하는 말씨는 평양말씨보다 더 어렵단다. 히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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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전에, 난.
경제적인 여유가 조금 생기면 금호로 가서 살고 싶어했었다.
피래미 새끼가 난닝구 속으로 끼여 들어 오던 잠수교와
쩌엉쩌엉 울리던 한 밤의 얼음 우는 소리는 지난 여름 덕성동 여울목에 빠져 죽은 누구네 집 외아들의 서러운 통곡 같아.... 그래도 땡볕 눈부신 한 낮엔 아이들 발길에 몸살 난 얼음이 휘청휘청 고무줄처럼 늘어나 어느 때 누구 발길에 빵구나나 내기하면서 달려보던 그 강물의 흐름에 다시 시선을 던지고 나는 내 살아있음을 확인하며 기뻐하며 회귀하는 평화를 누리고 싶어했었다.
외환위기로 대한민국이 어지럼증을 앓을 때
나 역시 대한민국의 백성이어서 그 배 안의 아픔을 진하게 겪어야 했을 때,
깊은 시름의 한 켠에 위로 삼고 싶어, 열 서너 살 딸아이 손을 끌어 금호 강 둑에 섰었다.
다리는 반 쯤 떨어져 나가 있었고,
과수원 둑은 새로 쌓여져 강과 밭의 경계가 확연했었다.
그 둑 위에 차를 세웠지 아마.
아이는 무표정했다.
나만 착잡한 마음을 흐름이 없는 강 위에 던져 놓고 있었다.
강은.....
우리가 예전에 타고 다녔던 '수게토'를 기억하지 못한다.
빨간 능금을 철철 흐르게 끌던 말구루마를 기억하지 못한다.
빨래통 가에 모여 들던 피래미와 메기도 알 수 없는 이름이라 한다.
냉천동 청석밭에 미끄럼을 타다 빵구낸 운동회 까만 빤쯔의 그 질긴 맛도 모른다 한다.
너무도 먼 곳으로 가 버렸다.
나는,
며칠 전에도 지리산 달궁 골짜기 마을에 서 있었다.
먼저 도착해서 미리 텐트를 치고 기다려 준 산 친구 보다
텐트 밖으로 들리는 골짜기의 물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금호생각을 하고 있었던 거다.
이른 아침, 돌멩이에 두 발을 버티며 허리 구부려 감는 머리카락에 금호를 헹구고 있었다.
달궁 동네 여염 집 담모퉁이를 끼고 오르는 정령치 가는 길에
흔적만 흐느적거리는 마을터를 보며 이 곳 사람들은 지금 어디서 어떤 추억으로 살아 가고 있을까를 생각했었다.
금호.
내 안에 살아 있는 강물 소리와,
그 둑 위에서 꼴을 뜯던 호일이네 소와,
붕어회에 간디스토마를 얻어 배가 퉁퉁 부어 있던
자전거방 털보 아저씨의 낚싯줄이 지금도 나를 끌어 당기는 곳.
그러나
나는 금호 보다 더 먼 - 지리에서 금호를 만나고 있다.
(어린 시절을 보낸 곳은 '경북 영천시 금호읍' 대구에서 지금 시내버스가 다니는 곳입니다. 하양은 금호 바로 전 읍소재지고 대구대. 경산대.효가대. 경일대. 국군 간호학교가 있는 있는 교육지로 변해 있습니다.
개발은 고향을 잃게 하더만요. 언젠가는 '지리산'도 잃어 버리지 않을까......)
'꼬지레기'-> '소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