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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청문화원, 각자 모은 ‘석각명문총람’ 발간 & 우암이 산청 적벽산에 글을 남긴 사연

꼭대 | 1183

산청문화원, 각자 모은 석각명문총람발간

3년 걸쳐 집필560여 개 수록

 

 

산청문화원은 산청군 내 위치한 각자(나무·돌 등에 새긴 글)를 담은 산청 석각명문총람을 발간했다.

 

석각명문총람에는 그동안 구전으로만 전해오던 우암 송시열의 친필 각자도 실렸다. 이 적벽 각자는 숙종 즉위 초반 2차 예송논쟁 때 우암이 유배길에 오르면서 단성에 남게 됐다.

 

우암은 유배 뒤에도 남인들의 상소로 수 차례 유배지를 옮겨다녔고, 유배 도중 경신환국으로 서인이 다시 정권을 잡게 되면서 우암의 복권이 이뤄진다. 우암은 남인들의 상소로 여러차례 유배지를 옮긴 끝에 합천으로 향하던 도중 유배가 풀렸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당시 우암은 남명 선생이 쓴 시구 중 고학횡주적벽소의 뜻을 살려 산청 단성의 절벽에 적벽이라는 각자를 새겼다. 이 각자는 정확한 위치는 전해지지 않았다가 석각명문총람현장조사 중 다시 발견되면서 책에 실리게 됐다.

 

이외에도 을사늑약 체결 후 우암의 9대손 송병선이 고종에 올린 유소(儒疏)를 남긴 각자, 고운 최치원 선생의 친필을 새긴 광제암문’, 강원도 관찰사 신헌조의 이름을 새긴 각자 등이 석각명문총람에 담겼다.

 

총람의 연구 기획과 집필을 맡은 권유현 산청문화원 연구위원은 지난 2014년부터 2016년까지 3년에 걸친 현장 조사와 사료 수집을 통해 집필했다지리산 천왕봉을 비롯한 산청 전 지역에 분포한 석각 명문 560여 개를 담을 수 있었다고 설명했다.

 

이어 도로 공사나 매연 등으로 손실된 각자도 상당하다면서 선인의 유적이자 향토사인 각자를 지역에서 보존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귀현기자 k2@gnnews.co.kr

걸친 현장 조사와 사료 수집을 통해 집필했다지리산 천왕봉을 비롯한 산청 전 지역에 분포한 석각 명문 560여 개를 담을 수 있었다고 설명했다.이어 도로 공사나 매연 등으로 손실된 각자도 상당하다면서 선인의 유적이자 향토사인 각자를 지역에서 보존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귀현기자 k2@gn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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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청 석각명문총람을 집필한 권유현 산청문화원 연구위원

 

우암이 산청 적벽산에 글을 남긴 사연


 

조선 후기 성리학의 대가 우암 송시열의 각자 적벽(赤壁)’ 이 산청군 적벽산에서 확인되고 글을 새긴 배경도 함께 밝혀져 관심을 모으고 있다.

 

이 각자(돌 등에 새긴 글)는 지역의 극히 일부 인사만 소재를 알아 지금까지 정확한 위치, 글씨를 새긴 배경 등이 알려지지 않고 소문으로만 전해져왔다.

 

권유현 산청문화원 문화연구위원은 1석각명문 편찬을 위해 산청군 신안면 적벽산을 답사하면서 우암(尤庵)송시열(16071689)이 쓴 적벽각자를 찾았다고 밝혔다. 권 위원은 각자 사진과 함께 위치 배경 등에 관해 상세히 밝혔다.

 

우암의 글씨로 추정하는 근거는 연재(淵齋)송병선의 문하에서 수학한 이도복의 기록이다. 이도복은 우암이 해배돼 귀향할 때 이곳에 들러 남명의 시구 중 고학횡주적벽소의 뜻을 살려 손수 기록했다고 했다. 연재는 강누마을 안동권씨 가문의 권병구와 친분이 두터워 적벽 옆에 자신의 이름을 남기기도 했다.

 

각자 위치는 신안면 강누마을 경호강변(적벽강)에서 볼때 적벽산 중앙 40m높이에 있다. 이는 적벽산에 있는 10여개의 각석 중 가장 높은 곳이며 산 위에서는 접근이 어렵고 경호강변 도로에서 우회한 뒤 겨우 오를 수 있다.

 

글씨는 크게 한자로 赤壁(적벽)’이라고 새겼고 그 안에 붉은 도료가 칠해져 있다. 작은 글씨로 임술지추칠월기망각’(임술 1682)이라고 새겨 각자시기를 알리고 있다. 붉은칠은 단성면 강누마을에 살고 있던 조선 말기 유림 서인 중에서도 노론 측의 인물로 알려진 권극유(안동권씨)의 후손 권도희(90)옹이 젊은 시절 이 산에 올라 정비한 것이다.

 

그렇다면 우암이 언제 왜 무슨 이유로 이곳에 적벽이라는 글씨를 남겼을까.

 

권 위원은 거제 해배 기점인 1680년 귀향길에서 친분이 있는 단성 강누마을 안동권씨 가문에서 며칠 묵었을 것으로 예상했다. 조선 조정의 경신환국으로 서인이 세력을 확장하던 시기로 영수격인 우암이 단성을 거쳐 간다는 소식은 노선을 같이한 지역 일부 유림들로선 크게 반길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는 게 권 위원의 설명이다.

 

적벽이란 글씨를 쓴 배경은 우암이 권씨가문에 머물면서 남명 조식을 떠올렸고 그의 시구 중 고학횡주적벽소의 뜻을 살려 쓴 뒤 건넸을 것이라고 추측했다.

 

또 우암이 실제 단성을 지나간 해인 1680년과 각자시기 임술 1682(조선 숙종 8)’2년의 시차가 나는 것은 권씨가문의 위트로 추측했다. 2년을 기다렸다 새겼다는 것인데 이는 중국 소동파()의 적벽회고와 시기를 맞추기 위함이었다는 것.

 

소동파의 적벽회고가 나온 시기는 1082, 권씨가문이 적벽산에 새긴 날도 임술지추칠월기망각’(임술년 가을 칠월 16), 이는 1682년과 정확하게 600년의 시차가 난다. 실제 소동파의 적벽회고에는 손님과 함께 배를 띄우고 적벽 아래서 노는데 바람은 서서히 불어오고 파도는 일지 않았다는 내용과 함께 임오지추칠월기망이란 시기가 등장한다.

 

정리하면, 귀향하던 우암이 해배 시기를 전후해 단성 강누마을 안동권씨 가문에 잠시 머물면서 남명을 떠올려 적벽이라는 글을 남겼고 권씨가문은 2년을 기다렸다가 소동파의 적벽회고 시기와 때를 맞춰 경호강 맞은편 단성 읍청정에서 가장 잘 보이는 곳에다 각자했다는 것이다. 경호강은 예부터 유림들의 놀이나 사색공간으로 적벽강이라고 불렸다.

 

이 글씨가 잊혀 진 이유는 하상정비로 인해 강누마을이 뒤쪽으로 후퇴하면서 보이지 않게 됐고 최근에는 완전히 잊혀 진 것으로 권 위원은 해석했다. 우암은 조선후기 정치계와 사상계를 관통한 성리학자. 국내 학자 중 유일하게 ()’자를 붙일 정도로 역사상 가장 방대한 문집 송자대전을 남겼다.

 

적벽.jpg

 

 

 

-2017년 3월 1일자 경남일보에서 2건의 관련 기사를 발췌-

 
3 Comments
두류산인 2017.03.30 15:02  
어린 시절 적벽을 바라보며 낚시도 하고
그림 그리기  대회도 했었는데 적벽 글은 안보이고
도로공사로 사라진 줄만 알았으니 가막눈이 따로 없습니다.

장문의 우암 관련 글 공부삼아 잘 읽었습니다.
엉겅퀴 2017.04.02 21:29  
조만간 다시 한번 가봐야겠습니다..
세상 2017.10.22 12:40  
좋은 정보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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