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칼럼

추억과 애환의 능선 / 류영하

 

추억과 애환의 능선

 

류 영 하1)

 



1954년 경남 의령출생인 백남오는 현재 서정시학회 회장으로 창원시 무학여고 국어교사로 재직 중이다. 작가는 2004년 「지리산의 만추」 외 3편으로 서정시학에서 추천 완료했다. 2009년 <지리산 황금능선의 봄>을 출판하였고, <지리산 빗점골의 가을>은 두 번째 저서다. 작가의 첫 번째 수필집 <지리산 황금능선의 봄>에 게재되었던 수필「겨울밤 세석에서」 전문은 2011년 고등학교 국어(지학사, 방민호 외 지음)에 실렸다.

 

 

<지리산 빗점골의 가을>은 3부에 걸쳐 총 30편의 수필이 실려 있다. 그는 20여 년간 200여 회에 걸쳐 지리산에 올랐다. 산행을 하면서 느낀 감회나, 자연의 웅장함, 역사적 사연들이 담겨 있다. 우리나라에는 명산이 많다. 이 산 저 산 골고루 섭렵한다면 말하기도 좋을 것 아닌가, 나는 안 가본 산이 없다고. 그런데 그는 왜 유독 지리산만 오르는가? 그걸 처음부터 털어놓았다. 지리산에서 위안을 받는다고, 세상사람 모두 질책한다 해도 지리산만은 따뜻하게 감싸준다고. 그래서 어머니의 품 같고, 어머니 산이라 부른다고.

 


천왕봉은 북쪽 길이다. 잠시 후 촛대봉에 선다. 눈앞에서 거대하게 우뚝 서 있는 천왕봉, 그 모습은 마치 용맹스러운 장군이 천군만마를 거느리고 호령하는 모습이기보다는 고향집 어머니가 마을 어귀에서 사랑스러운 자식을 애타게 기다리고 인자함이다. 어서 오라고, 빨리 오라고, 모든 것을 잊고 내 품에 안기라고 손짓하는 것만 같다.

— 「천왕봉의 겨울 밤」 부분


그러나 정작 화자가 지리산에서 만나는 것은 그의 아버지다.


머릿골, 그 척박한 두메산골에서 태어나, 14세에 아버지를 여의고 가장이 되어 일자무식으로 33세의 청상 어머니와 세 명 동생을 부양하시고, 당신의 6남매를 키워내신 그 이력만으로도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은 아닐 것이다.<중략> 모든 것을 생략하고도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나는 아무 것도 아버지만큼 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자식을 키우는 일도 가정을 지키는 일도, 우애를 만드는 일도, 세상을 사는 지혜도, 글 한 자 모르는 아버님을 따를 수가 없음이다.

— 「외로워서 걷는 길」 부분


객관적으로 볼 때, 누가 뭐라 해도 화자가 그의 아버지보다는 낫다. 하지만 화자가 느끼는 심적 아득함은 전쟁전후에 태어난 세대가 느끼는 절박함은 아닌지. 그가 말하는 고달픈 현대인, 이들은 뭘 해도 자기 아버지를 넘어설 수는 없다는 생각을 할 것이다.

 

화자는 살아가면서 이유 없는 억울함과 현실에 대한 분노가 치솟을 때, 세상에 없는 이상향, 아무 데도 없는 나라, 유토피아를 꿈꾼다. 완벽한 사회란 궁극적으로는 실현 불가능한 사회인줄 알면서도 그래도 유피피아를 꿈꾸는 는 결국 지리산에서 존재하지 않는 세상의 대안을 기대한다. 그는 또 지리산에서 문학의 유토피아를 찾고 싶어 한다. 그래서 지리산으로 가고, 지리산에서 그는 삶의 진정성에 대해 고뇌하고, 또 위안을 받는다.

 


또 다른 큰 봉우리 국수봉에 선다. 전망이 일품이다. 그 중에서도 중봉골이 압권이다. 그 은밀한 알몸을 훤히 드러내 보인다. 아무 것도 숨길 수 없는 황홀한 나신을 더듬고 또 더듬는다. 보고 또 보고 넋을 잃고 바라보기도 한다. 꿈결 같은 순간이다. 행복하고 미안하다.

굽이치는 능선들은 강인한 근육질이 요동치는 듯도 하고, 천왕봉인 임금을 향해 모여드는 신하들의 모습으로도 보인다. 충신들은 왕의 알현을 간청하건만 천왕은 끝내 검은 구름 속에 깊숙이 쌓여 그 모습을 보여주지 않을 성 싶다. (중략)

낮게 드리운 석양 무렵의 황금능선, 그림자의 움직임에 따라 명암의 대비로 능선과 봉우리들의 입체감은 분명 살아 움직이는 생명체다, 붉은 햇살에 반사되는 능선은 반짝반짝 황금처럼 빛난다. 스팩트럼의 조화로 보아도 옳다. 황금능선의 진면목이자 지상의 걸출한 예술품이라고 탄성을 지른다.

— 「첫눈 내리는 날은 황금능선에서 만나요」 부분


서러워할 것도 원망할 것도 없다. 내 인생의 계단이 저 찬란한 단풍처럼 무르익었다면 얼마나 숭고하고 아름다운 일인가. 이대로 흩어져 사라진다 해도 무엇이 안타깝고 서러울 것인가. 모든 욕망 내려놓고 저 낙엽처럼 살라한다.

— 「조개골에 가을비는 내리고」 부분

 

화자는 지리산은 남성이라고 하지만 그의 필체는 섬세하고 화려했다. 책 곳곳에 숨어 있는 지리산의 절경을 찾아 글을 읽어가는 재미가 쏠쏠하다. 화자가 이야기하는 대로 길을 잡고, 화자가 이끄는 대로 간다면, 문득 인간의 발이 잘 닿지 않은 지리산의 깊은 골짜기의 비경과 만나게 될 것이다.

 


지리산은 나라가 어지러울 때마다 피와 굴곡의 현장이었다. 마한의 피난 도성, 가락국의 멸망, 삼국시대를 거치면서 국경의 변방으로 늘 싸움터의 중심이었다. 고려 때는 왜구의 침입과 민란으로, 조선시대에는 임진왜란과 정유왜란, 동학란으로 해방공간에는 여순 반란과 한국전쟁의 싸움터가 되었다. 지리산은 임진왜란을 계기로 역사의 산으로 우뚝 선다. 지리산의 정기를 받는 이들이 의병장이 되었고, 지리산은 의병활동의 근거지가 된다. <중략>임진왜란 때는 최고의 격전지로 전사자의 피가 내를 이루었다 하여 안한수내’ ‘혈천 또는 피내골이라 부린다. 연곡사 위에 있는 피아골이란 지명도 이 일곱 명장들이 장렬한 최후를 맞이하며 몰살하게 되니 그 피가 개울물을 빨갛게 물들여 붙여진 것이란 얘기도 있다.

우리 현대사의 최대 비극을 안고 있는 곳도 지리산이다. 1948년 여순 반란에서 한국전쟁을 거쳐 1955년까지 계속된 빨치산과 토벌대의 치열했던 격전은 지리산 최대의 아픔이다. 피아 2만여 명 이상의 고귀한 젊은 목숨이 지리산의 계곡과 능선에서 죽음을 맞이한 것이다.


— 「지리산 감상과 여행을 위하여」 부분


작자는 지리산이 우리에게 소중한 것은 그 규모나 생태계 자연경관 때문이 아니라 민족의 성산이기 때문이라 한다. 지리산 속에는 우리의 이상향이 있고, 단군왕검 이래 좌절과 굴곡의 역사에서 민초들은 지리산 능선에 기대어 피를 흘리며 통곡하기도 하고, 또 그곳에서 새로운 삶과 희망을 기약하기도 했다 한다. 지리산 자락에서 벌어진 그 역사는 과거의 삶이기도 하지만 지금도 계속되는 현재의 이야기, 끝도 없이 이어질 미래의 역사라고 했다. 화자는 지리산은 인간이 만든 길을 가지 않으면 길을 잃는다고 했다.

 


지리산, 임진왜란 때는 의병들의 한 맺힌 죽음이 있었고, 갑오농민전쟁과 구한말, 해방공간과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꽃다운 젊은 영혼들이 수없이 스러져간 우리민족 역사의 구체적인 현장이다. 그렇다. 지리산은 우리 현대사에서 가장 처절한 동족상잔의 비국이 아로새겨져 있는 곳이다. 봄이면 약동하는 대지의 큰 기상과 진달래, 흐드러지게 피어난 철쭉, 수많은 야생화, 여름이면 무서우리만큼 짙은 녹음, 가을의 찬란한 단풍, 겨울의 환상적인 설경, 이 풍요롭고 아름다운 지리산의 모습은 피로 얼룩졌던 당시의 상처를 아는 듯, 모르는 듯 오늘도 거대한 침묵으로 초연히 서 있을 뿐이다. 가을이 성큼 느껴지는 9월 9일, 빗점골에 간다. 빗점골은 지리산 인민유격대 총사령관 이현상이 사살되면서 사실상 지리산 빨치산 투쟁의 막을 내린 골짜기다. 그 빗점골에서 아픈 현대사의 이것저것을 아무런 순서도 없이 생각해보고 싶다. 아둔하고 개인적인 소견에서 말이다.

— 「빗점골의 가을」 부분


이 책이 단순한 산행기가 아닌 이유다. 이 책을 읽는 데는 시간이 많이 걸렸다. 한 편 한 편 읽을 때마다 나는 지리산 어느 골짜기를 오르는 듯, 숨을 골라야 했고, 체력을 안배해야 했다. 그리고 불쑥 불쑥 나타나는 이전의 사람들, 역사라는 미명 아래 희생되고, 도태되었던 그들과 소통하며, 지리산 99봉에 골골에 젖어 있는 핏빛 사연들을 상기해야 했다.


몇 해 전 나는 지리산에 간 적이 있었다. 주차장에 차를 대고 한 두어 시간 올랐을까 턱까지 숨이 차서 간신히 노고단에 올라, 눈앞에 펼쳐진 산수화같은 정경을 잠시 바라보고 내려오기에 바빴다. 이후 나는 이 책을 읽기 전까지는 지리산 종주를 했었다고 생각했었다.

지리산에 가실 계획이 있다면, 이 책과 함께 하시길.




1) 류영하 

서울 출생, 2007년 에세이스트로 등단,

2008년 에세이스트 올해의 작품상 수상

   에세이스트 편집차장


3 Comments
산나그네 2012.11.20 08:45  
요즘 잘 나가는 수필전문지  격월간  <에세이스트> 2012년 송년호(통권 46호)에서
 
작품집<지리산 빗점골의 가을>(2012, 서정시학) 리뷰를 큰 지면으로 할애해 실었습니다.
 
류영하 편집차장님께서 수고를 해 주셨습니다.  큰 영광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원본은 첨부파일로 올렸습니다.
마야고 2012.11.20 10:45  
책속..곳곳으로 스며들어 봅니다..
새록새록 합니다..책을꺼내 뒤적이게도 합니다..
 
선생님..언니하고 두분이서 나들이 한번 하시죠~?^^
 
산나그네 2012.11.21 12:38  
마야고님
잘 계시지요.
늘 아련히 그립습니다
 
송년회라도 함 해야할 텐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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