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유적명소
세석의 [청학연못]
세석은 지리산의 심장이요 지리산의 얼굴이다.
智異山에서 세석 만큼 섬세하고 아름다운 곳도 드물다.
세석은 우람한 지리산의 광활함과 웅장함을 보여주는 가운데서도
느낌은 산이 아니고 그냥 부드러운 숲으로 다가온다.
그래서 고원이란 수식어가 붙어있다.
자갈돌이 많아서 세석이라고 부르는 이곳에는
깔린 자갈 만 큼이나 신화도 많고 그 많은 신화들을 잉태한 신기한 곳도 많다.
[청학연못]도 그 중의 한곳이다.
*청학연못
촛대봉 아래 새미(泉)보다는 크고 저수지보다는 작은 못이 하나 있다.
저절로 생긴 물구덩이가 아니고 한쪽 면은 바위에 닿아있고
나머지 3면은 돌과 흙으로 방죽을 쌓아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연못이다.
못의 크기는 대략 20 미터 x 5 미터 이며 깊이는 1미터 남짓의 직사각형 모양을 하고 있다.
*청학연못에서 촛대봉 방향의 한쪽면을 막아주는 거대한 바위
1879년 8월에 지리산을 다녀와서 [두류산기]를 남긴 <송병선>은
당시에 [청학연못]을 본 정황을 다음과 같이 적었다.
[중략....녹나무 상수리나무들이 고사해서 만들어진 마루의 대들보 같은 곳을 지나가니
와암(臥巖) 벼랑에 [鶴洞壬(학동임)] 3자가 새겨져 있다. 이것은 근세에 설을 좋아하는 자의 일이다 .
바위 아래는 작은 못이 축조되어 있다.
못 아래로는 샘이 있어 연수대(延壽臺)라 한다. 못 뒤로는 촉봉(燭峯)이 솟아있다. ]
학동임(鶴洞壬)이라는 각자는 연못에 뿌리박은
대슬랩 형태의 바위 상단에 새겨져 있다.
위의 [두류산기] 자료가 아니면 마지막 각자 [壬] 字 외 나머지 [鶴] 과 [洞]은 식별이 어려울 정도이다.
특히 [鶴] 字는 바위 부분이 깨어져서 파자가 된 상태이다.
*청학연못의 바위 위에 세겨진 각자
사진으로 잘 보이지 않아 각자에 물을 뭍여 찍었다.
각자의 뜻은 정확한 것은 알 수 없지만 대개 이곳이 학동 즉 청학동이며
육십갑자 천간이 壬으로 시작되는 어느 해 (임진..임자 .임오..등)에 새긴 것이 아닐까 추측해 본다.
이조 명재상 <유성룡>의 형 <유운룡>의 문집 [겸암일기]에 보면
지리산 청학동을 찾아 가본 기록이 아래와 같이 실려있다.
[하동의 화개현에 이르러 유숙하고 이른 아침에 떠나면 점심 겨를에 등촌에 닿는다.
그곳에서 사흘간 먹을 양식을 마련한 후 노숙을 사흘동안 하면 커다란 돌문에 이르고
그 돌문을 지나 40리 가량 가면 1천섬을 거둘 수 있는 논과 밭이 펼쳐지는데 넓이가 1천호 쯤은 살만하다 했다.
그 골짜기에 돌샘이 하나 있는데
고려 때 <청련거사>가 20년 동안 속세와 단절하고 이곳에 살았는데
이곳에 살면 병화가 이르지 않아 보신하는데 길지라는 <도참>의 글이 새겨져 있다.
대대로 이곳에서만 자라는 청련(靑蓮)을 기르고 살았기에 그를 <청련거사>라 불렀다 한다.]
*청학연못
<유운룡>이 열거한 곳이 바로 세석이다.
<청련거사>가 청련을 기르며 살았던 돌샘이 [청학연못]을 가리킨 것 같다 .
<유운룡>은 지리산을 다녀온 연대 표시를 하지 않아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으나
그의 활동시기로 봐서 대개 1570년경으로 추정이 된다.
<유운룡>이 보았다는 각자는 [高麗樂雲居士李靑蓮書(고려낙운거사이청련서)]이며
연못의 바위에 새겨진 [鶴洞壬(학동임)]을 소개한 <송병선> 역시 이 각자를 보았다고 하고,
1851년에 지리산을 다녀온 진주선비 <하달홍>은
[촛대봉 능선 [청학연못] 부근이라고 추정되는 곳에서 위의 각자를 보았다.]
고 그의 저서 [월촌집]에 기록해 놓았다.
이후로 일제 강점기인 1934년의 지리산 자료에서도 위의 각자를 본 사실을 언급하고 있다.
[청학연못] 주위에 새겨진 파자 형태의 각자가 <이청련>이 도참설을 기록한 문구인지
아니면 역시 고려 시대에 세석을 청학동으로 알고 왔다가 청학동은 찾지 못하고
칠언절구 시 한수를 바위에 남기고 돌아섰다는 널리 알려진 파한집의 저자 <이인로>의 각자인지는
탁본 등 다방면의 탐구가 이루어지면 밝혀질 듯 하다.
한편 <이인로>는 그의 [청학동기]에서
[지리산에 청학동이 있는데 그곳으로 가는 길이 어찌나 비좁고 꼬부라졌는지
엎드려가다가 기어가길 수 십리하면 광활한 지경이 나오는데,
사방이 비옥하여 곡식을 가꾸어 먹기에 족한데다 난세 때 이곳에 피난와 살았던 흔적이 완연하다.]
고 했다.
<이인로>가 열거한 곳도 역시 세석으로 추정되며, 연못 주변에는 집터와 경작지의 흔적이 역력하다.
지리산에 청학동을 찾으러 왔다가 청학동을 찾지 못한 안타까움을 시로 읊어서
아래와 같이 바위에 새겨 놓고 돌아 섰다 한다.
頭流山逈暮雲低 萬壑千巖似會稽
杖策欲尋靑鶴洞 隔林空聽白猿啼
樓臺縹 ㅁ三山近 苔蘚依희四字題
試問仙源何處是 落花流水使人迷
두류산은 아득하고 저녁구름 낮게 깔려 천만 봉우리와 골짝이 회계산을 닮았네
지팡이를 짚고서 청학동을 찾아가니 숲속에선 부질없이 잔나비 울음소리뿐
누대에선 삼신산이 아득히 멀리 있고 이끼 낀 바위에는 네 글자가 희미하네
묻노니 신선이 사는 곳 그 어디 메인가? 꽃잎 떠오는 개울에서 길을 잃고 헤매네.
세석의 [청학연못]이 지닌 역사도 지리산 청학동의 역사와 궤도를 같이 하고 있다.
*청학연못의 바위에서 바라다 본 남부능선
세석평전의 한켠에 자리한 연못 주변을 청학동이라 이를 만하다.
조금 있으면 세석에 흐드러진 철쭉의 향연이 열릴 것이고 꽃 보다 많은 사람들이 세석을 찾을 것이다.
그때는 [청학연못]에 행복의 상징인 청련도 같이 필려나.
智異山에서 세석 만큼 섬세하고 아름다운 곳도 드물다.
세석은 우람한 지리산의 광활함과 웅장함을 보여주는 가운데서도
느낌은 산이 아니고 그냥 부드러운 숲으로 다가온다.
그래서 고원이란 수식어가 붙어있다.
자갈돌이 많아서 세석이라고 부르는 이곳에는
깔린 자갈 만 큼이나 신화도 많고 그 많은 신화들을 잉태한 신기한 곳도 많다.
[청학연못]도 그 중의 한곳이다.
*청학연못
촛대봉 아래 새미(泉)보다는 크고 저수지보다는 작은 못이 하나 있다.
저절로 생긴 물구덩이가 아니고 한쪽 면은 바위에 닿아있고
나머지 3면은 돌과 흙으로 방죽을 쌓아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연못이다.
못의 크기는 대략 20 미터 x 5 미터 이며 깊이는 1미터 남짓의 직사각형 모양을 하고 있다.
*청학연못에서 촛대봉 방향의 한쪽면을 막아주는 거대한 바위
1879년 8월에 지리산을 다녀와서 [두류산기]를 남긴 <송병선>은
당시에 [청학연못]을 본 정황을 다음과 같이 적었다.
[중략....녹나무 상수리나무들이 고사해서 만들어진 마루의 대들보 같은 곳을 지나가니
와암(臥巖) 벼랑에 [鶴洞壬(학동임)] 3자가 새겨져 있다. 이것은 근세에 설을 좋아하는 자의 일이다 .
바위 아래는 작은 못이 축조되어 있다.
못 아래로는 샘이 있어 연수대(延壽臺)라 한다. 못 뒤로는 촉봉(燭峯)이 솟아있다. ]
학동임(鶴洞壬)이라는 각자는 연못에 뿌리박은
대슬랩 형태의 바위 상단에 새겨져 있다.
위의 [두류산기] 자료가 아니면 마지막 각자 [壬] 字 외 나머지 [鶴] 과 [洞]은 식별이 어려울 정도이다.
특히 [鶴] 字는 바위 부분이 깨어져서 파자가 된 상태이다.
*청학연못의 바위 위에 세겨진 각자
사진으로 잘 보이지 않아 각자에 물을 뭍여 찍었다.
각자의 뜻은 정확한 것은 알 수 없지만 대개 이곳이 학동 즉 청학동이며
육십갑자 천간이 壬으로 시작되는 어느 해 (임진..임자 .임오..등)에 새긴 것이 아닐까 추측해 본다.
이조 명재상 <유성룡>의 형 <유운룡>의 문집 [겸암일기]에 보면
지리산 청학동을 찾아 가본 기록이 아래와 같이 실려있다.
[하동의 화개현에 이르러 유숙하고 이른 아침에 떠나면 점심 겨를에 등촌에 닿는다.
그곳에서 사흘간 먹을 양식을 마련한 후 노숙을 사흘동안 하면 커다란 돌문에 이르고
그 돌문을 지나 40리 가량 가면 1천섬을 거둘 수 있는 논과 밭이 펼쳐지는데 넓이가 1천호 쯤은 살만하다 했다.
그 골짜기에 돌샘이 하나 있는데
고려 때 <청련거사>가 20년 동안 속세와 단절하고 이곳에 살았는데
이곳에 살면 병화가 이르지 않아 보신하는데 길지라는 <도참>의 글이 새겨져 있다.
대대로 이곳에서만 자라는 청련(靑蓮)을 기르고 살았기에 그를 <청련거사>라 불렀다 한다.]
*청학연못
<유운룡>이 열거한 곳이 바로 세석이다.
<청련거사>가 청련을 기르며 살았던 돌샘이 [청학연못]을 가리킨 것 같다 .
<유운룡>은 지리산을 다녀온 연대 표시를 하지 않아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으나
그의 활동시기로 봐서 대개 1570년경으로 추정이 된다.
<유운룡>이 보았다는 각자는 [高麗樂雲居士李靑蓮書(고려낙운거사이청련서)]이며
연못의 바위에 새겨진 [鶴洞壬(학동임)]을 소개한 <송병선> 역시 이 각자를 보았다고 하고,
1851년에 지리산을 다녀온 진주선비 <하달홍>은
[촛대봉 능선 [청학연못] 부근이라고 추정되는 곳에서 위의 각자를 보았다.]
고 그의 저서 [월촌집]에 기록해 놓았다.
이후로 일제 강점기인 1934년의 지리산 자료에서도 위의 각자를 본 사실을 언급하고 있다.
[청학연못] 주위에 새겨진 파자 형태의 각자가 <이청련>이 도참설을 기록한 문구인지
아니면 역시 고려 시대에 세석을 청학동으로 알고 왔다가 청학동은 찾지 못하고
칠언절구 시 한수를 바위에 남기고 돌아섰다는 널리 알려진 파한집의 저자 <이인로>의 각자인지는
탁본 등 다방면의 탐구가 이루어지면 밝혀질 듯 하다.
한편 <이인로>는 그의 [청학동기]에서
[지리산에 청학동이 있는데 그곳으로 가는 길이 어찌나 비좁고 꼬부라졌는지
엎드려가다가 기어가길 수 십리하면 광활한 지경이 나오는데,
사방이 비옥하여 곡식을 가꾸어 먹기에 족한데다 난세 때 이곳에 피난와 살았던 흔적이 완연하다.]
고 했다.
<이인로>가 열거한 곳도 역시 세석으로 추정되며, 연못 주변에는 집터와 경작지의 흔적이 역력하다.
지리산에 청학동을 찾으러 왔다가 청학동을 찾지 못한 안타까움을 시로 읊어서
아래와 같이 바위에 새겨 놓고 돌아 섰다 한다.
頭流山逈暮雲低 萬壑千巖似會稽
杖策欲尋靑鶴洞 隔林空聽白猿啼
樓臺縹 ㅁ三山近 苔蘚依희四字題
試問仙源何處是 落花流水使人迷
두류산은 아득하고 저녁구름 낮게 깔려 천만 봉우리와 골짝이 회계산을 닮았네
지팡이를 짚고서 청학동을 찾아가니 숲속에선 부질없이 잔나비 울음소리뿐
누대에선 삼신산이 아득히 멀리 있고 이끼 낀 바위에는 네 글자가 희미하네
묻노니 신선이 사는 곳 그 어디 메인가? 꽃잎 떠오는 개울에서 길을 잃고 헤매네.
세석의 [청학연못]이 지닌 역사도 지리산 청학동의 역사와 궤도를 같이 하고 있다.
*청학연못의 바위에서 바라다 본 남부능선
세석평전의 한켠에 자리한 연못 주변을 청학동이라 이를 만하다.
조금 있으면 세석에 흐드러진 철쭉의 향연이 열릴 것이고 꽃 보다 많은 사람들이 세석을 찾을 것이다.
그때는 [청학연못]에 행복의 상징인 청련도 같이 필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