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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화산12곡] 제6곡 : 승벽담(진소)

엉겅퀴 | 543


제6곡 : 승벽담(洆碧潭, 진소)

 

엄천은 수잠탄·버끔소에서 은하사까지는 일종의 협곡을 이루어 인가에서도 멀고 사람의 접근도 쉽지 않다. 방향도 동북방 한 방향을 유지한 채 흐른다. 그러다 경기민요 유산가(遊山歌)처럼 "이골 물이 수루루룩 저골 물이 솰솰, 열의 열골 물이 한데 합수하여" 진쏘(소)에 이른다. 진소에서 한 템포 쉬며 숨을 고른 물은 크게 꺾어지고 이후 마을을 가까이 끼고 여러 번 방향을 바꿔가며 굽이쳐 흐른다.

 

진쏘 옆 바위에는 ‘승벽대(洆碧臺)’ 각자가 새겨져 있다. 승洆은 빠지다 가라앉다 젖다의 뜻이니 승벽대는 하늘도 산도 물에 잠겨 온통 푸른 물빛이 가득한 곳이란 뜻이다. 이름도 풍경도 멋지다. 바라보이는 산세는 높거나 낮고 멀리 또는 가까이 벌려 서 있으니 비녀봉능선 법화산줄기 솔봉능선 황새날등 상내봉능선이 그것이다.

승벽대 각자 아래엔 계원 21명의 이름이 새겨져 있는데 알 만한 이름 하나가 눈에 띈다. 강기대(姜起大). 강지주의 둘째아들이다. 용유담 곁 구룡정(九龍亭)의 기문(記文)을 지은 사람이기도 하다. 각자 끝에 辛丑五月이라 했으니 1961년에 새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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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위 병담에서 진소까지는 약간 경사진 여울이라 물소리를 울리며 흐르다 여기 깊은 못에서는 소리조차 가라앉아 고요하다. 산빛과 하늘빛이 어우러져 일렁일 뿐이다. 엄강에 법화산 남쪽의 법화동천과 극락동천의 물까지 받아들여 깊고 넓은 소가 되었기 때문이다. '진소'이다. 다만 진소의 끝, 와룡대 쪽으로 흐르는 물길만이 여울이라 소리가 요란하다.

진소의 '진'은 먼저 "길다"의 뜻이 있다. 김치/짐치 김/짐 기름/지름 겨릅대/지릅대 길나다/질나다 등에서 보듯 ㄱ을 발음하기 쉬운 ㅈ으로 발음하는 경향은 광범위한 지역의 사투리에서 볼 수 있다. 따라서 진소는 ‘긴 소(長潭장담)’를 뜻한다 하겠다. 따라서 밀양의 ‘긴늪’도 진늪과 같다. 다음으로 “질다”는 뜻이 있다. 즉 ‘물이 많아 질척이는 소’의 뜻으로 보면 된다. 둘을 포함하여 비슷한 사례는 많다. 진내 진골 진들 진늪 진소 등.

 

진소란 좋은 이름이 있지만 나는 승벽담이란 이름을 더하고 싶다. 진소란 보통명사로 흔하기에 하나 뿐인 이름으로! 또 대(臺)라 하기보다는 담(潭)이라 하는 게 더 어울린다. 원래, 경치가 이름을 빛내는 것이지 이름이 경치를 빛내는 것은 아니므로 이름이 뭔 상관이냐 할 수도 있겠지만 이름과 풍경이 어울린다면 금상첨화가 아니겠는가!

승벽담엔 아침 안개 피어오르는 모습도 좋고, 맑은 날 푸른 산과 흰 구름이 물에 잠긴 풍경도 볼 만한데, 날 저문 골짜기에 빗방울 날리는 풍경은 더욱 운치가 있다. 고요할 땐 산그림자 물에 어리고, 바람 거셀 땐 철썩이는 파도소리 들리는 듯하다. 멍하니 앉았으면 시간이 흐르는 것도 모른다. 송나라 화가 곽희(11C)는 《임천고치(林泉高致)》에서 “산수에는 한번 지나가볼 만한 것, 멀리서 바라볼 만한 것, 자유로이 노닐어볼 만한 것, 그곳에서 살아볼 만한 것”의 4가지가 있다고 하였는데 내 생각에 승벽담은 노닐어볼 만한 곳이라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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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이런 곳에 댐을 만든다고 하였다. 계획상 댐은 진소를 가로지른다. 뚜렷한 명분도 확실한 용도도 없이 우선 건설해놓고 보자는 식이다. 얼마전 지리산댐이 백지화되었다고는 하나, 근래 설악산 오색 케이블카 허가사례에서 보듯 세상이 바뀌었다고 관료마피아들의 생각까지 바뀐 건 아니기 때문에 정권이 바뀌면 언제 다시 들고 나올지 모르는 일이다. 또 지금도 중소규모댐은 허용가능한 걸로 알고 있다.

한때 마천면을 ‘지리산면’으로 행정지명을 바꾸겠다는 해프닝도 있었고, 지금도 도로명을 ‘천왕봉로’ 등으로 정하여 도와 군에서는 지리산을 알리려고 안달이다. 그러면서도 지리산댐은 문정댐으로 명칭을 축소하여 부르는 등 꼼수를 쓰는 걸 보면 댐 건설이 떳떳치 못한 것임을 스스로 고백하는 셈이다. 여기서 언급하는 것은 적절치 않지만, 인근에서는 댐 예정지에 누구누구가 땅을 투기해 놓았다는 소문이 짜하다. 내 삶과 직접적인 관계가 없고 내 힘으로 어쩔 수 없다고, 산꾼들은 눈 감고 귀 막고 산에나 열심히 다니면 장땡일까? 시인 김광규는 시 「보고 듣기」(1979, 부분) 에서 이렇게 말하였다.

 

    눈을 감은 동안에도

    事件들은 쉴새없이 일어나고

    귀를 막은 동안에도

    電波는 공중 가득히 날아다닌다

 

그러거나 말거나 산천은 말이 없다. 붉은 꽃 피어나던 때가 엊그제인데 푸른 잎 낙엽 되어 지고 눈발 흩날릴 제면 한바탕 봄꿈을 꾼 듯하여 서글퍼지지만, 이런 아름다운 물가에서 배회하다 보면 어느덧 흐르는 물과 함께 근심은 멀어지고 마음도 씻긴다. 봄 여름 가을 겨울과 낮과 밤은 누구에게나 공평하지만 여긴 해와 달도 한가한 곳이니 분주하게 오가는 사람들은 잠시 겨를을 내어 쉬었다 가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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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게시물은 꼭대님에 의해 2019-03-18 21:10:03 지리다방에서 복사 됨]
3 Comments
강호원 2019.01.12 18:42  
우찌 이 선생 인생이 길 잃고 헤맨 인생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수십 년 지리산 품에 안긴 것만 해도 대단한 일이고
그 덕에 지리산에 신혼여행도 가고.
지금까지 이루어놓은 것만해도 훌륭한 삶입니다.

올해 말 은퇴하시면 엄천강 은하사, 승벽담에 누워 속세의 번민을 씻으며 막걸리나 한 사발 들이키며
구도자의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위 글을 보면 이미 득도한 것 같기도 하다만.

잘 봤습니다.
가객 2019.01.14 01:35  
엄천강의 숨은 비경들에 대취하신 것 같습니다.
자연을 대하는  상념과 지식이 이토록 탁월하기에  신화산십이곡이라는 대작을 꿈꾸었나 봅니다.

지난 봄인가,
 진소의 수문장같은 승벽담을 보고서 어찌  화산십이곡에서 빠졌을까? 했었는데 이선생 덕분에 신화산십이곡의 범주에 들게되는군요.
 운치없는 운서보에 만 앉아 있어도 반선이라도 된 듯 한데, 은하사와 승벽담에서 엄천강을 만끽하는 경지는 오죽하겠습니까.

고향도 아니시면서,내 중.고 학창시절 단골 소풍지였던 밀양의 진늪숲(솔밭)은 우찌아시고...?
백산 2019.01.14 17:15  
"아는 만큼 보이고 보이는 만큼 느낀다."
예사로 보면 별 볼일 없을 것 같은 돌들과 물웅덩이도 그렇게 아름답고 고매한 이름을 붙이니 그럴 듯해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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