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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화산12곡] 제9곡 : 칠리대

엉겅퀴 | 1376

제9곡 : 칠리대(七里臺)

 

나는 이곳이 자릉대(子陵臺 *엄자릉의 낚시터=조대(釣臺))일 거라고 생각한다. 엄천강에 엄자릉의 고사를 끌어왔다면 당연히 자릉대도 있어야 할 터. 엄뢰 동강 칠리탄 부춘산 다 있고, 자릉대는 심증은 가는데 물증이 없다. 바위를 뚫고 길을 내면서 자릉대 각자가 떨어져 나갔을까? 잠수부를 동원하여 강물 속을 탐색해봐야 하나?

나는 강용하 어른도 아마 엄광의 고사와 관련하여 자릉대와 칠리탄 중에서 어느 것을 화산12곡으로 선택해야 할지 고민하지 않았을까 싶다. 나는 고민할 것도 없이 각자가 남아 있는 칠리대를 택하였다.

여기에 칠리대 각자를 새긴 것은, 아마 칠리탄이 시작되는 지점이기도 하거니와 벼랑 위에서 칠리탄을 한눈에 바라볼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어쩌면 칠리대와 지금의 엄천교 사이에 큰바위 하나가 우뚝 솟아 자릉대(조대)가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들지만, 지형상 그럴 가능성은 극히 희박하다. 그리하여 나는 이 칠리대가 자릉대일 거라 생각하고 이 글을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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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화산12곡 강용하(1840-1908)의 아들 강계형(1875-1936)의 『조대사(釣臺詞)』이다. 자릉대를 읊은 것이다.

 

조대사(釣臺詞)

 

「엄강 하류에 이른바 칠리탄이 있고 그 곁에 조대가 있다. 비록 엄선생이 이곳에서 낚시한 적은 없지만 그 이름으로 인하여 그를 상상할 수 있으니 사모하는 마음 절실하다. 사람이 만약 뜻이 있다면 멀리 천년을 떨어져 있어도 오히려 아침저녁으로 만나는 것과 같으니 어찌 선생이 낚시를 하고 않고를 논하겠는가? 삼가 주자의 조대사에 맞춰 읊어 애오라지 한번 크게 웃고자 한다.(*이상은 서문, 아래는 詞(노래))

 

어느 때에 엄부자(嚴夫子 *엄광의 높임)가 이 강산에 은둔했던가? 선생은 간곳없고 아름다운 풍경만 부질없이 숲가에 남아 있네. 중간에 돈대 같은 큰 바위 우뚝하여 옛날 낚싯대 드리우던 모습 완연하고, 그 마음 아는지 해오라기만 때때로 모래 위로 돌아오네.

여울은 칠리탄, 석대는 고요하여 구름과 연기도 감돌지 않고 세상 티끌도 끊어졌네. 군자가 거닐던 곳 무너지지 않고 이지러지지도 않아 시원하고 깨끗한 바람 온누리에 떨치니, 맑은 기상은 북두성 같고 보배롭기는 옥구슬 같네.

완고한 자를 깨우치고 나약한 자를 일으켜 세워 세상의 우레가 되었구나. 꽃다운 영혼을 조상하고자 삼가 술잔을 올린다오. 그 사람은 아래위로 거슬러 오르고 돌아내리는 물결 속에 있는 듯한데, 높아서 오를 수 없고 멀어서 모실 수 없으니, 천년 백년 홀로 높고 우뚝하구나.」(국역:엉겅퀴/이하동일)

 

嚴江之下有所謂七里灘而傍有釣臺雖無嚴先生之釣於斯因名想像則感慕切矣人若有志則雖千載之遠尙如朝暮遇也奚論先生之釣不釣哉謹步朱子詞聊博一粲

何年嚴夫子肥遯此江山空留精彩凝林端中有巨巖如臺屹宛垂舊漁竿知心白首鷗時時沙上還

灘兮七里維石之臺漠無雲煙廻絶塵埃君子所屨不崩不頹灑落淸風振彼八垓爽動星斗寶重瑗瑰

警頑立懦爲世地雷欲弔英靈敬酌雲罍伊人宛在下上溯洄高不可攀遠不可陪於千百年獨立崔嵬

 

강계형은 주자(朱子)의 조대사(釣臺詞)를 본받아 엄강의 조대사를 지었다 했는데, 주자의 조대사 중 사(詞) 부분은 아래와 같다.

 

「엄부자를 뵐 수 없으니 부춘산도 적막하고, 공연히 천길 위태로운 바위만 높이 솟아 구름은 그 끝에서 나오네. 양가죽옷 걸치고 한번 웃으며 몸과 세상 둘 다 잊고 낚싯대 드리웠으니, 어찌 훨훨 날다 지쳐 돌아오는 저 숲속의 새와 같겠는가.

중흥 군주의 큰 위업 이루느라 귀밑머리 희끗해졌네. 일세의 인물과 어려운 시국을 힘써 구제하고자, 오직 미치광이의 심사에 맡기려 했네. 어리석은 아이가 삼공에 오른 것도 부러워하지 않고, 달아나 고집스런 어리석음에 몸을 맡겼으니, 상쾌한 기운이 별자리를 움직여 영원히 숲과 산을 비추네.」

不見嚴夫子寂寞富春山空留千丈危石高出暮雲端想象羊裘披了一笑兩忘身世來揷釣魚竿肯似林間翮飛倦始知還

中興主功業就鬢毛斑驅馳一世人物相與濟時艱獨委狂奴心事未羨癡兒鼎足放去任踈頑爽氣動星斗終古照林巒

 

주자의 사(詞)는 강계형의 사보다 맛이 덜하지만, 이해를 위하여 필요한 엄자릉의 고사를 다시 한번 요약하면 이렇다.

「엄광(嚴光 BC.39-AD.41)은 자가 자릉(子陵)인데 어릴 때 후한 광무제(재위 : 25-57) 유수와 동문수학하였다. 유수가 황제가 되자 이름을 바꾸고 숨었다. 이에 유수가 그의 현명함을 생각하여 찾았고, 양갖옷을 입고 낚시하던 그를 찾아내어 세 차례나 사신을 보낸 끝에야 왔다.

관사에 머무는 그를 사도(司徒)인 후패(侯霸)가 그와 평소 친분이 있었던 터라 사람을 시켜 서찰을 보내 초청하였다. 엄광은 그 서찰에 답장도 쓰지 않고 구두로 답하기를 “군방 족하! 지위가 삼공(三公)에 이르렀다니 매우 좋겠소. 인(仁)을 품고 의(義)를 북돋워 천하가 기뻐하지만 황제에게 아부하여 그 뜻을 따르느라 허리와 목이 끊어지겠구려.” 하였다. 군방은 후패의 자이다. 후패가 이 말을 적어서 광무제에게 보이니 광무제가 웃으며 말하기를 “미치광이의 본래 태도이다(狂奴故態).” 하였다.

어느 날 같이 잘 때, 자릉이 황제의 배에 발을 올렸다. 이튿날 태사(太史)가 “어젯밤 객성(客星)이 어좌(御坐)를 침범하였다.”고 아뢰자, 황제가 웃으며 “짐의 옛 친구 자릉과 잤을 뿐이다.” 하였다

벼슬을 마다하고 부춘산(富春山)에 은거하여 밭 갈고 낚시하며 일생을 마쳤다. 부춘산 앞의 강이 동강(桐江)이고, 그가 낚시하던 곳은 동강의 빠른 물살이 7리나 곧게 흘렀으므로 칠리탄(七里灘)이라고 불렀으며, 후인들은 그의 낚시바위(*釣臺)를 자릉대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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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중국 역대 최고 여류시인 이청조(李淸照 1084-1155)의 『밤에 엄탄을 떠나며(夜發嚴灘 야발엄탄)』이다. 엄탄 엄뢰 동강 칠리탄, 다 통하는 말이다.

    巨艦只緣因利往(거함지연인리왕)  큰 배는 단지 이익 때문에 가고

    扁舟亦是爲名來(편주역시위명래)  조각배 또한 명성을 위해 오는구나

    往來有愧先生德(왕래유괴선생덕)  오고 가는 것이 선생의 덕에 부끄러워

    特地通宵過釣臺(특지통소과조대)  일부러 밤중에 조대(釣臺)를 지나가네.

 

엄자릉이 은거했던 중국의 부춘산 아래 동강은 매우 커서 큰배 작은배가 오갔던 모양이다. 다른 식으로 말해보면, 큰 배(*출세)가 이익을 위한 것이라면 조각배(*은거) 또한 명성을 위한 것일 수도 있는데 선생의 덕은 어떤 것일까?

우리의 마음은 노상 번뇌 망상 욕망 따위로 들끓고 있다. 주인은 혼미하여 간데없고 밖에서 침입해 온 도둑 또는 마군(魔軍)이 주인행세를 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그리하여 동서고금의 뭇 성인(聖人)들이, 깨어 있으라 하고 그 마음을 지키라 하였다. 그 마음을 지키면 맹자가 말한 “부귀도 그 마음을 방탕하게 할 수 없고, 빈천도 그 뜻을 변하게 할 수 없으며, 권세도 그를 굴하게 할 수 없는” 대장부가 되는 것일까? 엄자릉의 덕은 그런 덕일까?

지금 여기는 큰 배 작은 배도 없는 지리산 엄강, 엄자릉의 낚시터는 어딘지 모르겠지만 칠리대만 천년백년 흘러가는 푸른 물과 불어오는 맑은 바람 지켜보고 있는데, 나는 부끄러움도 없이 백주에 지나다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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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칠리대, 칠리탄, 동강대

 

6 Comments
가객 2019.01.17 00:03  
화산십이곡의 명소들보다 新화산십이곡에 비정된 명승들이 훨씬 돋보입니다.
동강대기가 몇 가지 역사를 실증해 주어서 다행입니다.  이선생의 옛글 국역에서 늘 느끼는 바이지만  동강대기 역시 아름다운 산문으로 읽혀집니다.
칠리대를 조대로 생각하기에는 수면과의 고도가 너무 높은것 같은데요. 자릉대각자를 보았다는 권정용의 글도 있고. 제 생각입니다.

근데 칠리대각자는 언제 누가 새긴것인지가 궁금합니다.행여 자료가 있는지요?
엉겅퀴 2019.01.17 10:35  
낚시야 바위 중간에서 하면 될 테고요.
동강다리까지 강변을 훑어봤지만 단서나 증언을 찾을 수 없었고,
그 주변 동네 선대의 알려지지 않은 문집에 기록이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현재로선 칠리대 각자나 자릉대 흔적에 대하여 알지 못합니다.
백산 2019.01.17 16:05  
칠리대가 엉겅퀴님의 (신)화산12곡에 들었군요.

함께 나선 화산12곡 탐사길에 칠리대 각자를 발견할 당시 기억이 생생합니다.
천길(?) 벼랑 위 경사면에 흙과 낙엽에 파묻힌 "七里臺" 각자를 긁어 내다 "형님, 찾았습니다!"며 기쁨의 환호성을 지르던 그 순간을요!
저는 여차하면 뽑힐 것 같은 잡목 잔가지를 한 손으로 부여잡고 각자를 긁어내던 그 모습이 너무 위험해 보여 내내 간담이 서늘했지요. 

역사의 현장(?)에 함께 있었던 사실만으로도 기쁩니다.
다시 가봐야 할 명소가 되어 더욱 좋습니다.
산유화 2019.01.19 14:25  
큰 배도, 작은 배도 없는 엄강을 부끄러움도 없이 백주에 걷고 있다는 아우님의 진지하면서 쌀찍 재미난 표현에
난 다음에는 엄천강에 다다르면 살짝 부끄러워하며 걸어야겠다는 생각을 해 보네요.^^
아우님의 힘든 걸음걸음 따라 꼭 걸어보고 싶어요.
즐겁고 재미나게 잘 읽었어요.
강호원 2019.01.20 11:27  
저도 이선생 따라가 칠리대  각자 보는데 오금이 저려 식겁했는데
저 벼랑에 파묻힌 걸 우찌 찾았을꼬?
그리고 백산 강선생 말씀대로 무신 고층빌딩 청소부처럼 작업했다니.....

집착하면 눈이 뜨이는가봅니다.

엄자릉의 고사도 잘 배웠습니다.
수고하셨고, 노고를 생각하면서 항상 고맙게 봅니다.


참,
이 풍진 세상에 얼굴에 철판 깐 사람이 울매나 많은데
이 선생께서 부끄러워할 필요 없습니다. ㅎㅎㅎ
유키 2019.01.21 12:56  
저는 성장기적 내내 동강대 부근에서 바라보이는 풍경에 가슴벅차했었습니다.
지금의 풍경과는 그 정취가 사뭇 달랐습니다.
선인들도 제가 자라면서 눈이 시리도록 보았던 풍경들을 보고 저와 같은 심정이었다니 신기하기만 합니다.

오늘날 지리99와 엉겅퀴님  덕분에 시간을 초월한 고향의 정취를 맛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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