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유적명소
[新화산12곡] 제10곡 : 동강대
제10곡 : 동강대(桐江臺)
동호마을을 감싸고 있는 부춘산에서 남동으로 비스듬히 흘러내린 산줄기 하나 엄천강에 멈춰 봉긋한 동산이 되었으니 동강대이다. 건너편에서 보면 가지 끝에 매달린 꽃봉오리 같다. 누가 봐도 풍수 명당이다.
여기 올라 내려다보면 맑은 강 칠리탄과 하얀 모래밭, 해오라기 날고, 강가의 오솔길과 인가의 연기, 강안개 피어오르는 아침과 비 뿌리는 저녁, 거기에 나룻배라도 한 척 자릉대까지 오르내린다면 더욱 운치 있으리라. 이러했을 옛풍경은 상상만으로도 즐겁다. 뿐인가? 건너편으로 왕산 꽃봉산 노장대로 이어지는 지리산, 멋진 이름 동강대와 어우러진 뛰어난 풍경이다. 지금처럼 잡목이 가리지 않았다면 동강과 산너울을 바라보기 참으로 훌륭한 전망대이다.
동강대라 이름붙인 이는 누구인가? 바로 적은 강지주(跡隱 姜趾周)이다. 그의 동강대기를 보자.
동강대기(桐江臺記)
「천령 남쪽 두류산 북쪽, 동호와 원기의 두 마을 사이에 돌산으로 된 돈대 하나가 있다. 부춘봉의 남쪽 줄기가 구불구불 내려와 이곳에서 멈춰 돈대를 이루었다. 뾰족하게 튀어나온 모서리는 꺾이고 굽어 흡사 용이 서리고 범이 웅크린 모습 같다. 높이는 수십 보, 길이는 백여 척으로 수백 명이 앉을 수 있다.
올라서 바라보면 멀리 두류산 천 봉우리 빽빽히 펼쳐지고 눈앞에는 솔바람과 덩굴 사이로 비치는 달이 있어 마치 아득한 희황세상(羲皇世上 *고대의 태평성대)에 드는 것 같다. 맑고 찬 동강의 칠리탄은 무릎보다 깊게 흐르고 깨끗한 모래와 흰 돌이 펼쳐져 소부와 허유의 자취를 대하는 듯하다. 이 외에도 깊고 그윽하며 고요하고 한가한 경치가 많다. 애써 찾아다닐 필요도 없이 앉거나 서도 풍경 하나하나가 스스로를 드러내니 진실로 숨어서 본성을 기르는 자들의 별천지인 것이다.
나는 약관 때부터 마천과 송대 등지를 오갈 때 매양 여기에 올라 조망하면 마음과 정신이 툭 트였고 배회하며 시를 읊조리곤 했으니 내 마음을 차지한 지 오래였다. 중년에 갑오년(1894)의 일로 인하여 세상일을 접고 마적동으로 들어가 세진대(洗塵臺)와 이안정(易安亭 *그가 마적동에 지었던 집) 사이를 오가며 세상의 근심을 떨쳤다. 그러나 꿈속에서도 넋은 항상 녹동(鹿洞 *현재의 유림면 장항) 고향집에서 놀았고 부모님의 자태가 엄연하여 흡사 살아 계신 듯하였다. 해마다 갔다가 돌아오는 것을 거의 한 달도 거르지 않았다. 지나가는 길은 이곳을 거치는데 한 번도 무심하게 지난 적이 없었으며 지날 때 머뭇거리지 않은 적이 없었다.
지난 갑술년(1934) 봄 아이와 손자를 따라 농사짓기 편한 동호로 이사하였고, 오두막은 대의 좌측 죽림 아래 임좌(壬座 *정남에서 약간 동향)에 터를 잡았다. 내 나이 일흔아홉 살 때였다. 둘째 아들 기대(起大)의 서실 또한 대의 오른편 숲 아래에 있다.
대의 꼭대기에서 마주 보이는 언덕은 매우 그윽하고 고요하며, 대 뿌리 사이의 작은 샘은 수원(水源)이 깊고 맛은 차고 달아 마적동의 청량하게 샘솟는 석정(石井)과 방불하니 이 또한 하나의 기이한 일이다. 안개 끼는 아침과 달이 뜨는 저녁이면 매양 이곳을 소요하며 옛날을 생각하며 슬픔에 젖었다. 말세에 세월을 잊게 하였기에 망령되게도 대 앞 바위에 '동강대 적은만장(桐江臺 跡隱晩庄)'이라는 7자를 새겨 표시하였다.
부춘정(富春亭)과는 서로 바라보며 가까이 있다. 부춘정이라 이름 지은 것은 그 산의 칭호로 인한 것이고, 동강대라 이름 지은 것 역시 전해지는 강의 이름을 따른 것이다. 산과 물, 둘의 이름이 각기 닮은 것은 우연이 아니다. 대개 우리나라의 땅이름은 중국을 본뜬 것이 매우 많다. 서로 상응하여 그런 것이다. 천년 뒤에 그 풍모를 듣고 그 행적을 거슬러 올라가보면 엄공(*엄자릉)은 광무제의 성세(盛世)에도 이와 같은 맑고 고결한 지조가 있었는데 하물며 삼강오륜이 끊어져 사람과 짐승의 구분이 없는 이 시대에는 어떻겠는가?
이어서 시 한 구를 지어 말한다.
江風山月照心上(강풍산월조심상) 강바람과 산 위의 달이 마음을 비추어
外累胸中一點無(외루흉중일점무) 바깥의 때는 한 점도 흉중에 남아 있지 않네
대의 전말을 간략히 기록하여 후대에 보이고자 하며, 후세에 나를 좇아 여기에 오는 자가 있어 혹 선조의 당시의 심사를 생각한다면 다행이리라.」(국역:엉겅퀴/이하동일)
天嶺之南頭流之北桐湖院基兩里之間有一岨墩富春峯南脈逶迤而下止此而成墩稜角屈曲如龍盤虎踞之像高可數十步長可百餘尺上可以坐累百人登臨望之頭流千峯杉羅當顔松風蘿月如入羲皇之世桐江七里淸冷過膝明沙白石如臨巢許之跡外此數多深邃幽閒之景不費身力而一一呈露於坐立之際實潛居養眞者之別區也余自弱冠往來于馬川及松臺等地而每登斯眺望心神快豁徘徊嘯咏心占久之中歲甲午因世故捲入于頭流之馬跡消遣世慮于洗塵臺易安亭兩間然而夢魂則常遊乎鹿洞桑榟之下怙侍儀形儼然若在堂歲歲往還殆無虛月歷路過此一未嘗無心而過躕躇無已曩於甲戌之春從兒孫耕稼便宜搬移于桐湖廬于臺之左側竹林下壬基時則余年七十有九也次子起大書室亦在于臺之右便樹林下臺頭正案甚幽靜竹根小泉源深而洌甘彷佛乎馬跡之淸瀉石井亦一奇事也煙朝月夕每杖屨乎此感古悲今俾爲叔季忘甲之資妄以桐江臺跡隱晩庄七字揭刻于臺前石面與富春亭相望接武亭以富春爲名因其山之稱呼臺以桐江爲名亦從其江之傳言山水二各似非偶然蓋我國地稱倣中國者許多相應其然而千載之下聞其風溯其蹟則嚴公當光武盛時有如此淸介之志況綱倫斁絶人獸無分之時乎繼之一句詩曰江風山月照心上外累胸中一點無略記臺之顚末以示來後後仍之來此者倘念祖先當日心事則幸矣哉
다음은 그의 동강대 시 2수이다. 이미 소개한 바 있다.
桐江灘七里(동강탄칠리) 동 강의 칠리탄 가에는
天作一高臺(천작일고대) 하늘이 만든 높은 대 하나 있어
登臨塵慮遠(등임진려원) 오르면 속세의 근심 멀어지고
風月共徘徊(풍월공배회) 풍월과 함께 배회하네.
閒鷗沙十里(한구사십리) 십리 모래밭에는 한가한 해오라기
白石月千秋(백석월천추) 흰 조약돌 위로는 천년의 달빛
堪憐天借厚(감린천차후) 하늘이 어여삐 여겨 빌려준 것이 두터우니
此外更何求(차외갱하구) 이 외에 더 무엇을 구하랴?
마지막으로 면우 곽종석(1846-1919)의 시, 동강(桐江)이다.
白雨蕭蕭孤(백우소소고) 소나기 내려 쓸쓸하고 외로워
棹晩一江流(도만일강류) 느릿하게 배를 저어 강 따라 흘러가네
水如藍更看(수여람갱간) 강물은 쪽빛 같고
春峀滴蒼嵐(춘수적창람) 봄 산은 푸른 안개에 젖어 있구나
投竿苔石坐(투간태석좌) 이끼 낀 바위에 앉아 낚싯대 드리우니
鷗夢冷難堪(구몽냉난감) 물새의 꿈은 차가워 견디기 어려워라.
비는 내려 울적한데 벗은 멀리 있고, 하릴없이 배를 띄워 한 줄기 강물 따라 흘러가게 내버려두었네. 비 온 뒤의 강물은 쪽빛보다 더 푸르고, 비구름 걷히는 산은 봄빛과 어우러져 푸른 이내에 싸여 있구나. 이윽고 배를 대고 낚싯대를 드리웠지만 원래부터 고기잡이에는 뜻이 없었고, 이끼 낀 바위에 앉은 나도 저 모래밭의 해오라기처럼 풍경의 하나일 뿐. 둘러선 산천을 돌아보니 이 맑고 서늘한 풍경도 감당하기 어려운데, 바위 또한 차가워 물새처럼 오래 머물 수가 없다네. 나는 이렇게 읽었다.
지금은 길가의 밋밋한 풍경에 불과할지라도 그 시절의 눈으로 상상해 보면 이런 동강의 풍경은 누구든 견디기 쉽지 않았으리라.
【후기】
이때까지 기존자료에 강지주(姜趾周)의 생몰년은 1856~1909년으로 되어 있었다. 근거는 한국학중앙연구원의 한국역대인물정보이며, 나도 그렇게 인용하였다. 그의 글 몇 개를 옮기면서 의심스런 부분이 있었으나 그의 문집 완간본을 볼 기회가 없어 그냥 넘어갔다.
가객님이 구해준 동강대기와 더불어 그의 행장을 살펴보니 생몰년은 1856~1939년이었다. 바로잡는다. 병진년(1856) 녹동(*유림면 장항)에서 태어나 갑오년(1884) 이후 송대‧장동(*장재동)을 거쳐 마적동에 정착하였다가 갑술년(1934) 동호로 이사하였고 기묘년(1939)에 졸하였다. 84세, 장수하였다.
그동안 1924년 강계형의 두류록에, 지리산으로 오르면서 마적동의 강지주를 방문했다는 얘기며, 마적동에 은거했다는데 동호에 동강대와 부춘정 등 그의 흔적이 남아 있다는 게 의문이었는데 이로써 다 풀렸다. “동강대 적은만장(桐江臺 跡隱晩庄)”의 각자도 명확하게 해명되었다.
동호마을은 엄천사터이다. 마을 뒤 당두재 당두골은 사찰용어 당두(堂頭)에서 유래했지 싶다. 당두는 방장‧주지‧큰스님 또는 그 머무는 곳을 뜻한다. 그러니 그 지명은 큰 절 엄천사와 관련이 있다고 보여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