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유적명소
[新화산12곡] 제12곡 : 빙허대
제12곡 : 빙허대(憑虛臺)
이곳은 백산님이 자혜들판 물돌이 사진을 찍었던 곳이다. 강용하 선생의 화산12곡도 그렇고 新12곡의 나머지 11곡도 모두 엄천강을 끼고 있는데 비하여 빙허대는 엄천에서 멀리 높이 떨어져 있다. 그럼에도 12곡으로 선정한 이유는 아래 빙허대기에서 언급하였지만 전망 때문이다. 만약 엄뢰대가 남아 있고 그 위치를 알았다면 엄뢰대를 12곡으로 삼았겠지만, 알지 못한다. 이에 나는 제법 들락거린 빙허대를 마지막 12곡으로 삼아 기문(記文)을 짓는다.
△ 위는 백산님 작품 ▽ 아래는 내가 찍은 사진 (*세번째(위)와 네번째(아래) 사진 속의 바위가 바로 빙허대이다.)
빙허대기(憑虛臺記)
- 짐짓 옛사람의 어투를 흉내 내어 -
「조산(祖山) 백두에서 시작된 대간은 덕유(옆)를 지나 봉화산에서 가지를 쳐 팔랑재를 넘고 투구봉 삼봉산 오도재를 거쳐 법화산으로 이어진다. 대간을 포함한 산줄기는 때로는 웅크렸다가 뛰쳐오르고 솟구쳤다가 가라앉고 구불구불 유려하게 흐르다 급하게 내닫기도 하고 앞산 뒷산 숨바꼭질하다가 얼굴을 드러내기도 한다. 끊어질 듯 이어지기도 하고 물가름막과 사람살이의 보호막이 되기도 하고 등허리를 낮춰 산너머 세상을 이어주기도 한다.
그 기운이 서리고 엉키어 명당을 만들기도 하는데 엄천강변에 뭉친 것이 법화산이다. 법화산의 주맥은 엄강과 나란히 굼실굼실 동으로 흘러 부춘산을 지나고 당두재에서 한껏 엎드렸다가 베리산에서 꼿꼿이 일어나 앉아 모실 강변들로 빠져드는 산줄기를 전송한다. 산은 벼리봉(*매봉산)에서 행치재로 길게 몸을 낮추면서 엄천의 북쪽 산등성이 위에 돈대 하나 우뚝 세웠으니, 저절로 높은 누대를 이루었다.
대(臺)는 아래로 엄천강 물굽이를 굽어보고 멀리 지리산 능선을 한 눈에 담고 서 있다. 허공을 가로질러 공중에 떠 있어 능허(凌虛)라 해도 좋고 빙허(憑虛)라 해도 좋고 어풍(御風)이라 해도 좋을 것이다. 나는 “넓은 허공에 의지하여 바람을 타고 가는 것 같아 그 멈출 바를 모르겠고, 훨훨 날아 속세를 버리고 홀로 서서 날개가 돋쳐 신선이 되어 오르는 것 같다.(浩浩乎如憑虛御風 而不知其所止 飄飄乎如遺世獨立 羽化而登仙)”고 한 소동파의 적벽부를 따와 '빙허대'라 하였다.
너무 가까우면 숲을 보지 못하고 너무 멀면 나무를 보지 못하는데 빙허대는 멀지도 가깝지도 않다. 한 줄기 엄천이 내달리다 깎아지른 벼랑에 부딪쳐 휘돌고 자릿들(*자혜들판)은 물돌이 따라 펼쳐졌는데 병풍 같은 벼리산과 함허정은 물에 잠겨 풍경 더욱 기이하고, 아스라이 창공을 받친 지리산은 덕스러운 왕산과 뭇산들에 둘러싸여 있다. 어찌 보면 엄뢰에서 한참 높이 멀리 떨어져 있지만, 엄천강을 폭넓게 바라볼 수 있고 엄천강이 지리산과 어떻게 어우러져 굽이굽이 흘러가는지를 볼 수 있는 데는 이만한 곳도 없으리라. 온갖 경치를 이 대는 마련해 놓았건만 나에겐 그려낼 재주가 없음이 안타깝다.
허나 이 대(臺)는 내가 이름을 붙이기 아득한 이전부터 존재하였으리라. 그런데 하늘이 만들고도 어찌 숨겨 놓았을까? 고라니가 뛰놀고 여우와 토끼가 굴을 파고 살던 황량한 풀숲에 대가 있을 줄이야 어떻게 알았겠는가? 그러나 궁궐도 성(城)도 나라도 무너지고 사람도 왕조도 사라진다. 흥하고 망하는 운명이야 이미 정해져 있고 그런 운명 또한 끝없이 반복되는 것이 자연의 이치일 것이다. 이 대는 사람이 쌓은 것이 아니고 조물주가 만든 것이라서 상전벽해의 세상에도 끄떡없을까? 요즘 세상에 끄떡없는 자연이 있을까만, 끄떡없다 해도, 또 지금 조망을 가리는 나무 몇 그루를 베어낸다 한들 금방 웃자라 대는 묻혀버릴 것이니 훗날 누가 이곳이 엄천강의 가장 훌륭한 조망처였음을 알겠는가?
더구나 저 아래로 굽이도는 호수 같은 동강은 사람들이 배를 띄워 고기잡이 하고, 나룻터는 사람들이 만나고 헤어지고, 함허정은 시를 읊조리던 곳이 아니던가? 그 옛시절의 사람들은 지금 다 어디로 갔는가? 우리네 삶은 잠깐이지만 강은 오래도록 흐르고, 세월은 변하여도 여전히 상쾌한 바람 불어오네. 조각구름 산등성이를 날아 넘고 푸른 강산 아름다운 들녘에 바람 이는 풍경은 오래도록 바라보아도 질리지 않아 종종 돌아가는 것도 잊게 하지만, 이 흥도 언젠가는 사라지리니 즐길 수 있는 동안 한잔 술 기쁘게 마시려 하네. 기해년 1월 삼가 엉겅퀴 쓰다.」
과거 엄천강엔 화산12곡 외에도 연화평 조은대 한오대 엄천사터 부춘정 자혜나루 섶다리, 그리고 이름만 남은 회란암 엄뢰정 자릉대 엄뢰대 등 수많은 명소들이 있었다. 어찌 12곡 뿐이겠는가? 화산12곡이든 新12곡이든 사람마다 다를 수 있을 것이니, 어떤 것을 보느냐의 문제라기보다는 어떤 마음으로 보느냐의 문제에 가깝지 않을까 싶다. 누구든 사랑한다면 어찌 12곡에 그치겠는가?
신12곡 덕분에 한동안 소일거리가 있어 행복하였고, 엄천강의 차가운 바람 양소매에 가득 채워 왔지만, 꿈속에 산천을 밟은 듯 깨고 나니 아쉬움 가득하다. <끝>
[이 게시물은 꼭대님에 의해 2019-03-18 21:17:24 지리다방에서 복사 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