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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화산12곡] 제12곡 : 빙허대

엉겅퀴 | 982

 

제12곡 : 빙허대(憑虛臺)

 

이곳은 백산님이 자혜들판 물돌이 사진을 찍었던 곳이다. 강용하 선생의 화산12곡도 그렇고 新12곡의 나머지 11곡도 모두 엄천강을 끼고 있는데 비하여 빙허대는 엄천에서 멀리 높이 떨어져 있다. 그럼에도 12곡으로 선정한 이유는 아래 빙허대기에서 언급하였지만 전망 때문이다. 만약 엄뢰대가 남아 있고 그 위치를 알았다면 엄뢰대를 12곡으로 삼았겠지만, 알지 못한다. 이에 나는 제법 들락거린 빙허대를 마지막 12곡으로 삼아 기문(記文)을 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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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는 백산님 작품   ▽ 아래는 내가 찍은 사진 (*세번째(위)와 네번째(아래) 사진 속의 바위가 바로 빙허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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빙허대기(憑虛臺記)

- 짐짓 옛사람의 어투를 흉내 내어 -

 

「조산(祖山) 백두에서 시작된 대간은 덕유(옆)를 지나 봉화산에서 가지를 쳐 팔랑재를 넘고 투구봉 삼봉산 오도재를 거쳐 법화산으로 이어진다. 대간을 포함한 산줄기는 때로는 웅크렸다가 뛰쳐오르고 솟구쳤다가 가라앉고 구불구불 유려하게 흐르다 급하게 내닫기도 하고 앞산 뒷산 숨바꼭질하다가 얼굴을 드러내기도 한다. 끊어질 듯 이어지기도 하고 물가름막과 사람살이의 보호막이 되기도 하고 등허리를 낮춰 산너머 세상을 이어주기도 한다.

그 기운이 서리고 엉키어 명당을 만들기도 하는데 엄천강변에 뭉친 것이 법화산이다. 법화산의 주맥은 엄강과 나란히 굼실굼실 동으로 흘러 부춘산을 지나고 당두재에서 한껏 엎드렸다가 베리산에서 꼿꼿이 일어나 앉아 모실 강변들로 빠져드는 산줄기를 전송한다. 산은 벼리봉(*매봉산)에서 행치재로 길게 몸을 낮추면서 엄천의 북쪽 산등성이 위에 돈대 하나 우뚝 세웠으니, 저절로 높은 누대를 이루었다.

대(臺)는 아래로 엄천강 물굽이를 굽어보고 멀리 지리산 능선을 한 눈에 담고 서 있다. 허공을 가로질러 공중에 떠 있어 능허(凌虛)라 해도 좋고 빙허(憑虛)라 해도 좋고 어풍(御風)이라 해도 좋을 것이다. 나는 “넓은 허공에 의지하여 바람을 타고 가는 것 같아 그 멈출 바를 모르겠고, 훨훨 날아 속세를 버리고 홀로 서서 날개가 돋쳐 신선이 되어 오르는 것 같다.(浩浩乎如憑虛御風 而不知其所止 飄飄乎如遺世獨立 羽化而登仙)”고 한 소동파의 적벽부를 따와 '빙허대'라 하였다.

너무 가까우면 숲을 보지 못하고 너무 멀면 나무를 보지 못하는데 빙허대는 멀지도 가깝지도 않다. 한 줄기 엄천이 내달리다 깎아지른 벼랑에 부딪쳐 휘돌고 자릿들(*자혜들판)은 물돌이 따라 펼쳐졌는데 병풍 같은 벼리산과 함허정은 물에 잠겨 풍경 더욱 기이하고, 아스라이 창공을 받친 지리산은 덕스러운 왕산과 뭇산들에 둘러싸여 있다. 어찌 보면 엄뢰에서 한참 높이 멀리 떨어져 있지만, 엄천강을 폭넓게 바라볼 수 있고 엄천강이 지리산과 어떻게 어우러져 굽이굽이 흘러가는지를 볼 수 있는 데는 이만한 곳도 없으리라. 온갖 경치를 이 대는 마련해 놓았건만 나에겐 그려낼 재주가 없음이 안타깝다.

허나 이 대(臺)는 내가 이름을 붙이기 아득한 이전부터 존재하였으리라. 그런데 하늘이 만들고도 어찌 숨겨 놓았을까? 고라니가 뛰놀고 여우와 토끼가 굴을 파고 살던 황량한 풀숲에 대가 있을 줄이야 어떻게 알았겠는가? 그러나 궁궐도 성(城)도 나라도 무너지고 사람도 왕조도 사라진다. 흥하고 망하는 운명이야 이미 정해져 있고 그런 운명 또한 끝없이 반복되는 것이 자연의 이치일 것이다. 이 대는 사람이 쌓은 것이 아니고 조물주가 만든 것이라서 상전벽해의 세상에도 끄떡없을까? 요즘 세상에 끄떡없는 자연이 있을까만, 끄떡없다 해도, 또 지금 조망을 가리는 나무 몇 그루를 베어낸다 한들 금방 웃자라 대는 묻혀버릴 것이니 훗날 누가 이곳이 엄천강의 가장 훌륭한 조망처였음을 알겠는가?

더구나 저 아래로 굽이도는 호수 같은 동강은 사람들이 배를 띄워 고기잡이 하고, 나룻터는 사람들이 만나고 헤어지고, 함허정은 시를 읊조리던 곳이 아니던가? 그 옛시절의 사람들은 지금 다 어디로 갔는가? 우리네 삶은 잠깐이지만 강은 오래도록 흐르고, 세월은 변하여도 여전히 상쾌한 바람 불어오네. 조각구름 산등성이를 날아 넘고 푸른 강산 아름다운 들녘에 바람 이는 풍경은 오래도록 바라보아도 질리지 않아 종종 돌아가는 것도 잊게 하지만, 이 흥도 언젠가는 사라지리니 즐길 수 있는 동안 한잔 술 기쁘게 마시려 하네. 기해년 1월 삼가 엉겅퀴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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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엄천강엔 화산12곡 외에도 연화평 조은대 한오대 엄천사터 부춘정 자혜나루 섶다리, 그리고 이름만 남은 회란암 엄뢰정 자릉대 엄뢰대 등 수많은 명소들이 있었다. 어찌 12곡 뿐이겠는가? 화산12곡이든 新12곡이든 사람마다 다를 수 있을 것이니, 어떤 것을 보느냐의 문제라기보다는 어떤 마음으로 보느냐의 문제에 가깝지 않을까 싶다. 누구든 사랑한다면 어찌 12곡에 그치겠는가?

신12곡 덕분에 한동안 소일거리가 있어 행복하였고, 엄천강의 차가운 바람 양소매에 가득 채워 왔지만, 꿈속에 산천을 밟은 듯 깨고 나니 아쉬움 가득하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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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게시물은 꼭대님에 의해 2019-03-18 21:17:24 지리다방에서 복사 됨]
12 Comments
까막눈이 2019.01.21 11:06  
들을  감싸고  도는 유려한 물줄기, 그 사이 허공을  가르며 흘러도는  바람, 함허정에서는 볼 수 없는  또 다른 아름다움입니다.  달리 볼  수도 없고 느낄  수도 없고 묘사할 수 없는 글을 여기서 봅니다.

함허정과도 잘 어우러지는 멋진 이름, 빙허대
다우 2019.01.21 11:08  
화산12곡에 빗대어 굳이 신화산12곡이라 이름 짓지 말고 `이재구 12곡`, `엄천12곡` 등 독립된 이름으로 해도 괜찮지 않을까
강용하 때와는 시대가 변했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강용하와는 별개의 식견으로 바라보고 이해한 것일 테니....

난 옛사람들의 고사와 학문에 대한 지식도 없고 아우와 같은 식견도 없을 뿐더러 심안마저 없으니
내가 그곳을 찾은들 아우가 말한 12곡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을지 모르겠네
대마초라도 구해 피운 후 몽롱한 환각의 눈으로 바라보면 아우가 말한 모습들이 내눈에도 나타날런지...

곧 새집을 지을 때는 그동안 상상으로 그려왔던 모습을 충분히 반영한 서재가 마련될 수 있기를 바라네
이 글을 완성하기까지 얼마나 그곳으로 발품을 팔았을지 적이 짐작이 가네
아마 발바닥 굳은 살마저 닳아 없어졌을 테지...
유키 2019.01.21 11:43  
절앞들숲...
화남초교에서 봄소풍 자주 갔었지요.
소풍지에는 아이들이 좋아하는 물건을 실은 리어카 대여섯대가 출동했지요.
부모님이 주신 용돈으로 리어카에서 파는 것들을 샀는데 제가 제일 좋아한 것은 '환타'였어요.
그 시절 때보다 지금 숲이 많이 축소되었지요.

빙허대가 엉겅퀴님의 조명으로 억만불짜리 전망대인 줄을 알겠습니다.
톱을 들고가 웃자란 나뭇가지들을 잘라야겠어요.

너무 고생하셨고 많이 감사합니다.
산거북이 2019.01.21 14:44  
신화산 12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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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명깊게 잘 보았습니다
엉겅퀴님의 그간의 노고에 깊이 감사 드립니다
가객 2019.01.22 06:30  
옛 사람들의 어투를 흉내 낸 <빙허대기> 가
역작의 말미를 장식해 주어서  新화산십이곡의  가치가 훨씬 돋보입니다.
이제 날 잡아 엄천강의 새로운 명승지를 발굴하고 조명한 이선생의  탐방안내를 받는 일만 남았나 봅니다.


꿈의 서재를 갖는 날도 머지 않아 보이는데 ...구경할 일에 기대가 큽니다.
해영 2019.01.22 09:45  
늘어 놓는 악취미가 있는 저에게 깔끔 떠는 아내는 좀 버리고 비우며 살자고.....늘 타박입니다.
머리 속은 비어 가는데 실생활은 쌓여만 갑니다.
그저 쌓아 놓은 짐 보따리(언젠가 싸들고 나가야 하는 물건들이기에)를 쳐다 보는게 언제부턴가는
휴식입니다.
몇년 더 살아 형님 처럼 꿈꾸는 서재를 드려 놓을 수 있을까?
열심히 읽고 던 벌어야 겠습니다.
잘 지어 놓으셔요.
술병 하나 차고 휴식공간에 쳐 들어 갈 생각에 벌써 마음이 설래입니다.
진주물푸레 2019.01.22 16:30  
"버리고 갈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 하다"라는 박경리님 시집을 보다가

"꽃도 꽃피우기 위해서 애를 쓴다"는 정목스님 책을 보다가

엉겅퀴님의 글 을 읽으니  일하기가 싫어집니다
소개된 강가로 들녘으로 달리고 싶습니다

정리된 소중한 장소
그 곳을 가게 되면 노고도 기억 하겠습니다
지루한 겨울 밤 . 낮
일용할 양식을 주시어 감사합니다^^
백산 2019.01.22 19:46  
11곡 "절앞들숲"
"전쟁통에 사람들이 땔나무로 베어다 쓰고 논이 조금씩 숲을 잠식하고 제방을 쌓고 둑길을 내면서 숲은 쪼그라들었다. "
안타깝게도 멋진 방풍림이 본래 모습을 잃었지만 엉겅퀴님이 글로서 되살렸군요.

12곡 "빙허대"
그곳을 "허공을 가로질러 공중에 떠 있다"고 표현하셨네요. 그럴싸 합니다.
빙허대에서 바라 본 자혜들, 마음에 드는 사진을 담아야 하는데....

(신)화산 12곡, 절묘합니다.
수고하셨습니다.
몽화 2019.01.22 22:36  
열심히 읽고..공부 합니다.. 감사드립니다
산유화 2019.01.23 23:49  
참 재미난 글을 읽게 해 주어 아우님이 정말로 고마워요.
그저 열심히 읽고 또 읽을랍니다.
강호원 2019.01.24 18:36  
무수히 발품을 팔아 탄생한 신화산12곡에 갈채를 보냅니다.
앞에 여러 번 언급했지만 필력이 상상을 초월합니다.

얼마나 많이 다녔든지 12곡의 사계절 사진을 담았군요.
작심하고 그랬겠지만

특히 마무리하는 절앞들숲과 빙허대의 글은 뛰어난 작가의 솜씨입니다.
소설가로 등단하여도 손색 없는 명 문장입니다.

그런데 빙허대는 우찌 찾았을꼬?

뛰어난 심미안과 洋의 동서와 時의 고금을 아우르며 깊은 통찰력을 지닌 이선생과
간간이 소주 한 잔 나누는 것도 큰 영광이고 지리99의 품격을 높이는 좋은 글에
큰 기쁨을 느낍니다.

화산12곡의 발굴과 신화산12곡의 선정에 수고하셨습니다.
이선생이 꿈꾸는 서재가 곧 지어지기를 기원합니다.

잘 봤습니다.
꼭대 2019.01.29 09:39  
역시 아름다움은 바라보는 마음과 눈이 있는 사람에게만 보이기 마련입니다.
절앞들숲의 아름다움이 <엉겅퀴>님의 심미안 덕분에 저의 눈도 비로소 밝아집니다.
무심히 지나치고 마는 흔한 풍경도 어떤 마음으로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명품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여러 계절에 걸쳐 찍은 사진을 통해서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소소한 아름다움이 채워져 큰 지리산이 된다는 것을 일깨워주는 좋은 글을 통해서 정말 멋진 지리산이며 지리산 사람입니다.

<엉겅퀴>님의 신화산12곡에 대한 최고의 보답/찬사는 지도까지 첨부하여 올려주신 정보를 가지고 유람하며 널리 알리는 일입니다. 엄천강변 봄바람이 불면 유람기 생산해 낼 위인들 두어분 모시고 <엉겅퀴>님의 풍류 흉내내 보겠습니다.

오래기간 기획하고 수차례 발품하여 완성한 멋진 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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