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유적명소

방장제일문(方丈第一門)

엉겅퀴 | 337


1. 끄르는 말

 

시골에서 자란 사람들은 대개 이런 기억들이 있을 것이다. 어릴 적엔 무심코 지나다니다가, 고향을 떠나 있다 댕기러 올 때, 저 모퉁이만 돌면 우리동네인데 하는 마을 앞 상징물 같은 거 말이다. 오래된 느티나무나 은행나무, 서낭당, 장승, 징검다리나 섶다리, 물방앗간, 돌무더기, 큰바위, 입석, 비석거리, 삼굿거리 등. 거기서부터는 같은 마을로 치며 그곳을 지나면 비로소 마을의 품안에 들어왔구나 하는 느낌이 드는 자연물. 지금이야 차를 타고 휑하니 지나가 버리니 그런 것이 있었는지조차 잊어버리고 지나치기 십상이다.

이름난 산도 그런 것이 있었다. 금강산의 경우엔 마의태자가 거기서 머리를 깎고 입산하였다고 또는 거기서 바라보는 금강산이 머리 깎고 중이 되고 싶다고 해서 이름 붙였다는 단발령(斷髮嶺)부터 금강산이 시작된다고 보았다 한다. 지리산의 권역은 어떤 것을 경계로 삼았을까? 바다와 접한 육지 끝에 있고 한양에서 접근하는 길이 뻔한 금강산과 달리 지리산은 사방팔방에서 접근가능하므로 일괄적으로 말하기는 어렵다. 강이나 시내 다리가 될 수도 있을 것이고 고개나 사찰 석문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옛유산기 등을 살펴보면 대충 여원치 오도재 입덕문 쌍계석문 춘래대(지막) 화엄사 실상사 함허정 등을 들 수 있을 것 같다.  

물론 그 전부터도 지리산에 속하지만 상징적인 지형지물을 기점으로 다시 한번 옷깃을 여미거나 마음을 가다듬기도 했을 것이다. 그중에서도 석문(石門)은 안과 바깥을 구분하고 이상향과 속세를 가르는 경계의 역할을 하였다. 중국의 무릉도원이나 우리의 청학동 같은 동아시아의 파라다이스의 지형은 대체로 호리병 형태이며 석문이나 동혈 등 좁은 입구를 통과하여 도달하는 것으로 묘사된다. 동천(洞天)과 같다. 그리고 석문은 통천문처럼 구멍 뚫린 것만 석문이 아니고 양쪽에 바위가 서 있는 것, 절벽 끝에 튀어나온 큰 바위, 시냇가 좁은 길목의 벼랑, 심지어 동구 밖 큰 바위도 석문이라 불렀다.

여기 방장제일문(方丈第一門)이라 이름 붙인 석문이 있다. 이름에 비하여 덜 알려진, 지리산꾼들도 잘 찾지 않는 석문이다. 지리99 초창기 조박사님이 짧게 언급한(2005) 바 있고, 꼭대님이 『지리산의 석문』에서 딱 한 컷으로 소개한(2014) 적이 있다. 이제 그 사연 속으로 들어가 보자.




현재 지도상의 방장제일문 표시점을 약간 오른쪽으로 옮길 필요가 있음

 

2. 탄수대(灘叟臺)

 

도로의 배수로로 연결되는, 물이 마른 작은 도랑 옆으로 들어가 왼쪽으로 비스듬히 100m쯤 올라가면 콘크리트 축대 위 절벽에 방장제일문이 있다. 그러나 먼저 눈에 띄는 것은 붉게 칠한 탄수대(灘叟臺) 각자이다.





건너편 의중마을 출신인 탄수 이종식(1871~1943)옹은 지금 현재의 금계(金鷄)마을 이름을 짓고 큰 마을이 될 것이라고 예언했던 분이다. 灘叟李公杖屨之所(탄수이공장구지소)는 그가 노닐었던 곳이란 뜻이다. 그건 차차 얘기하기로 하고 그가 지은 시[原韻원운]부터 살펴보자.

  灘聲七里澹忘歸(탄성칠리담망귀) 여울물 소리 울리는 칠리탄 물은 맑아 돌아가는 것도 잊고

  回首嚴陵舊釣磯(회수엄릉구조기) 머리 돌려 엄자릉의 옛 낚시터를 바라보네.

  不着羊裘誰辨我(불착양구수변아) 양갖옷을 입지 않았으니 누가 나를 알아보겠는가

  烟江風雨一簑衣(연강풍우일사의) 안개 낀 강 비바람 속에 도롱이를 입었으니     〈국역 : 엉겅퀴, 이하 동일

여기서도 엄광(엄자릉)의 고사가 등장한다.[*참조 : 화산12-칠리탄 및 엄천강 부춘대를 찾아서] 칠리탄과 낚시터는 특정한 장소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은거한 자신의 심정을 빗댄 것으로 보면 될 것이다. 후한의 광무제 유수가 등극 후 그의 벗 엄광을 찾아 초빙하라 했는데, 신하들은 양가죽옷을 입고 동강의 칠리탄에서 낚시하고 있던 엄자릉을 찾아냈다고 한다.

 

1971년 신해년(辛亥)에 새겼다고 되어 있다. 사실 원래 탄수대는 금계마을 가운데에 있었다고 한다. 새로 지은 마을회관 앞에 탄수대가 있다. 사람들이 탄수대 머리맡을 밟고 다니고 오줌도 누고 개가 똥도 싸고 하는 바람에 옮겼다고 한다. 탄수대 바위를 축대 삼아 건물을 짓다 보니 콘크리트가 흘러내려 글씨가 많이 뭉개졌다. 무심하기가 그 동네에서 팔구십년을 살았다는 내가 만난 노인분들도 탄수대 각자가 있다는 사실을 몰랐다. 탄수대 및 탄수이공장구소 각자와 위 시가 그대로 새겨져 있고, 중원 계묘(中元 癸卯)라 했으니 1963년이다. 옹이 돌아가신 지 20주년이 되는 해다.




여기서 중원(中元)은 별 게 아니다. 역학에서 60갑자는 180년을 주기로 上··下元으로 반복된다고 본다. 이를테면 1864년 갑자년부터 상원()○○년이라 하고, 1924년부터는 앞에 중원이 붙고, 1984년부터는 하원△△년으로 구분하는 식이다.  2044년부터 다시 상원이 시작되고.. 예를 들어 외삼신봉 아래 미륵암터 미륵암중수 각자에 중원갑임오년이라 했으므로 1882년이 아니라 1942년임을 알 수 있는 거와 같다.

 

3. 금계동(金鷄洞)

 

금계일동근지(金鷄一同謹誌 *금계 주민일동 삼가 쓰다)라 했으니 형식상으로는 주민이 뜻을 모아 한 것으로 되어 있다. 그래선지 마을 중앙 물레방아 정자 곁에 옹을 기리는 비()도 세워졌고(2004) 비석 뒤 바위에는 금계동(金鷄洞) 각자도 새겨 있다. 글씨는 100년 정도 되었는데 탄수옹의 친필은 아니라 한다.






동해 가운데 해가 떠오르는 부상산(扶桑山)이 있고 그 산 위에 사는 금계(金鷄)가 울면 온 천하의 닭이 따라 울면서 새벽이 밝아 온다고 한다. 다른 데서는 천계(天雞)라고도 하였다. 신라 김씨 왕의 시조인 김알지의 전설과 관련된 곳이 계림(鷄林)이며, 후에 신라를 계림 또는 금계라고도 일컬었다.

정감록에는 십승지의 첫 번째로 풍기의 금계촌을 꼽았다. 소백산의 두 물줄기 사이에 자리잡았다면서 2차례나 언급하였다. 의탄·금계 역시 지리산 북쪽의 큰물 둘(의탄천과 임천)이 합수하는 지점이다. 그래서 옹은 금계로 이름을 붙였을까?

의탄교가 생기기 이전에는 그 자리에 징검다리가 있었고, 징검다리를 노디 노들 노돌이라 하는데 금계마을도 그전에는 노디목 또는 노들목이라 불렀다 한다. 6.25 전까지는 의탄에서 의중·의평이 훨씬 컸고 금계는 7~8호에 불과하였으며, 거의 목기장이 소쿠리쟁이 등의 수공(手工)에 종사하였다 한다.

동국여지승람 등의 옛 기록을 보면, 의탄소(義呑所)가 있었고 나중에 의 아전들이 다른 곳으로 옮겨갔다고 하였다. ()·()·부곡(部曲)은 고려 때까지의 특수행정단위로 주로 특정 물품 생산의 공역을 부담하는 장인(匠人 *쟁이)들의 촌락이었던 것으로 이해된다. 그렇다면 노디목도 그런 의탄소라는 장인촌(匠人村)의 흔적이 남아 있었던 것일까? 

6.25 때에는 외지인과 추성 등의 더 깊은 산속 주민들의 소개(疏開)장소로 활용되기도 하였고, 지금은 탄수옹의 예언처럼 60~70호의 대촌이 되어 의중·의평보다 훨씬 커졌다. 풍수상 금계포란(金鷄抱卵) 형국은 금닭이 알을 품으니 당연 번창한다고 한다. 거기다 둘레길 덕분인지 외지인도 많이 들어와 살고 있다. 게다가 양지바르고 천왕봉도 보인다.

 

4. 삼문(三門)·오호(五戶)

 

아까 얘기하다 말고 샛길로 빠진 탄수대 각자 해석을 마저 하자. 벨시리 중요한 내용은 없다.



먼저 법사(法師) 강성통의 축원문(祝願文)이다. 탄수대를 새로 새기면서 축원한 글이다.

  善哉故人李灘叟(선재고인이탄수) 훌륭하다 고인 이탄수 공이여

  千秋恒遊灵灵坮(천추항유영령대) 오랜 세월 늘 신령스런 영대(靈臺)에 노닐었구려

  願惟生前遺遺業(원유생전유유업) 원컨대 생전에 남긴 유업이

  今日運開大興發(금일운개대흥발) 오늘날 운세가 틔어 크게 일어나기를

법사(法師)는 아시다시피 교리에 정통한 스님 또는 불법(佛法)을 널리 펴는 포교사를 높이는 말이다. 스님이라면 스스로 법사라 일컫는 것도 그렇고 법사 다음에는 이름이 아니라 법명을 적는 것이 자연스러울 텐데 성명이 적혀 있다(*이용근 어른은 성통(聖通)은 이름이 아니고 호라고 하였다). 그래서 법사 강성통은 아무래도 스님은 아닌 것 같아 여러 사람에게 물어보았다. 이다 아니다로 대답이 갈렸다. 그럼 증산교(甑山敎) 계통이 아니냐고 물어봤다. 왜냐하면 법사는 증산교에서도 자주 쓰는 용어이므로. 아니라고 하였다. 공통적인 대답은 원래 전주 모악산 밑에 기거했는데 지리산 등지를 오가며 도 닦는 공부를 하고 풍수에 밝았으며 역학에도 조예가 있었다고 하였다. 모악산이라면 증산도일 확률이 높은디?

 

그 다음은 탄수옹의 장자(이영우)가 부친의 원시의 운자(韻字)에 맞추어 차운시(次韻詩)를 지었다. 운자는 귀()·()·().

  五戶紅流抱壁歸(오호홍류포벽귀) 오호(五戶)의 붉은 물은 절벽을 감싸며 돌아 나가고

  三門潭碧仙遊磯(삼문담벽선유기) 삼문(三門)의 푸른 못은 신선이 노닐던 곳이로다

  灵境桃源何處問(영경도원하처문) 무릉도원의 선경(仙境)은 어디인가

  星橋坮上降靑衣(성교대상강청의) 성교대 위 청의동자에게 물어보리

오호(五戶)와 삼문(三門)이 문제다. 먼저 삼문을 보자. 첫째, 삼문은 궁궐이나 관청의 대문, 즉 가운데 정문과 양쪽의 협문(夾門)을 합쳐 이른다. 둘째, 불교에서는 해탈에 이르는 3가지 문을 건축구조상으로 구현하는데 일주문(一柱門)·금강문(金剛門 또는 天王門)·불이문(不二門 또는 解脫門)이 그것이다.

그런데 내용상 그 어느 것도 해당사항이 없다. 아니면 마을이 산으로 둘러싸여 외부로 통하는 길()이 세 곳으로 천연의 요새 같은 지형을 가리킨 것일 수도 있다. 일견 타당한 의견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리되면 오호와 맞지 않고 이어지는 푸른 못, 붉은 시내 등 물을 나타내는 시어(詩語)와도 어울리지 않는다.

따라서 나는 삼문·오호를 풍수용어로 풀이한다. 이는 풍수 교과서에도 등장하는 말들이다. 한마디로 삼문은 들어오는 물을 말하고 오호는 나가는 물을 말한다. 들어오는 물은 기()를 받아들여야 하기 때문에 넓어야 하고, 나가는 물(수구막이)은 사람의 항문과 같아서 좁아야 하며 돌아앉아 명당에서 보이지 않아야 한다. 사람도 항문이 열리면 종친 인생이듯이 수구(水口)가 벌어지면 기()도 빠져나가고 재물도 쓸려나간다. 즉 여기서 문은 대문을 말하며 호()는 가구(家口)가 아니라 원래의 의미인 작은 지게문을 뜻한다. 역시 넓고 좁은 것의 비유다.

전통 풍수에서는 자연물도 생명체로 간주한다. 삼문·오호를 달리 천문(天門)·지호(地戶)라고도 하는데 침구학(鍼灸學)에서 온 말로 인체의 혈을 가리킨다. 만약 수구(*항문)가 부실할 것 같으면 옆에 돌산(造山)을 쌓아 수구막이를 조이기도 한다. 그런 것을 비보풍수(裨補風水)라 한다. 아시다시피 도선국사가 원조다.

어쨌든 이곳은 풍수상 들어오는 물, 나가는 물이 완벽하게 갖추어졌다는 얘기다. 붉은 시내는 가을날의 단풍 든 풍경으로 푸른 못과 대비되며, 성교(星橋)는 은하수를 건너는 다리를 비유하고(*아마 과거 마을앞 노디나 우락대 앞 섶다리를 비유한 것이 아닐까 싶다)청의는 옥황상제나 신선의 심부름하는 아이로 해석하였다(*주로 푸른 옷을 입으므로). 그런 풍광들이 이곳에 다 있다는 얘기로 읽힌다.

삼문·오호는 나중에 방장제일문의 시에도 등장하므로 연계해서 감상하면 된다. 이 시도 사실은 강성통 법사의 대작(代作)이라는 말을 들었는데 풍기는 취향으로 볼 때 충분히 일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5. 방장제일문(方丈第一門)

 

드디어 방장제일문(方丈第一門)이다. 탄수대와는 같은 바위의 다른 쪽 면에 새겨져 있고 10m쯤 떨어져 있다. 그 가까운 거리를 멀리 돌아오니라고 오래 걸렸다. 죄송타. 글자는 튀어나온 바위절벽의 전면에 씌어 있는데, 정면은 창암산 능선을 마주하였고 비스듬히 영랑대와 초암능선을 바라보고 있다. 글씨는 강건하고 묵직하며 당당하다. 탄수대 글씨와 완전 다르다(탄수대 글씨는 의평마을의 여백윤씨가 썼다 한다). 석문은 방장제일인지 모르겠으되 석문의 글씨로는 방장제일이라 내세울 만하다고 생각된다.


 



함양 사람 이정우(李整雨 1908~1996) 선생이 썼는데 탄수옹의 조카다. 즉 탄수옹이 이정우의 삼촌이다. 탄수옹의 막내아들 이계우(李季雨 1922~) 어른의 증언에 따르면 원래 방장제일문은 금대암 입구에 있었는데 어느날 불에 타 없어지는 바람에 탄수옹이 다른 곳에다 새기기를 생전에 유언처럼 남겼다 한다. 그래서 지리산의 관문처럼 여겨온 현재의 자리에다 새겼다 한다. 금대암 입구에 있었다면 아마 사찰의 산문(일주문 등)이었을 듯한데 확실치 않다. 이계우 어른도 직접 본 것은 아니고 얘기만 들었다니까. 혹시 제보나 기록을 기다린다.

새긴 시기는 6.25가 끝날 무렵이었다 한다. 이정우옹의 아들 이용근(1936~) 어른의 증언이다. 나름 다른 생각을 품고 이용근 어른께 넌지시 여쭤봤다. 방장산제일문이라 하지 않고 산을 빼고 방장제일문이라 했습니까? 절에 가면 제일 높은 스님을 방장이라 하듯이, 지리산은 산 중에서도 제일이고 지리산의 문 중에서도 제일인데 굳이 산을 넣을 필요가 있겠느냐? 자를 넣으면 의미가 제한된다는 얘기다. 동의한다.

한편 이계우 어른의 의견도 덧붙여 둔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전설에 바탕을 둔 야그다. 원래 지리산은 경상도에 속했는데 지리산 산신령이 조선의 개국을 반대하는 바람에 왕이 된 이성계는 지리산을 전라도로 귀양을 보내버렸다. 임금이 인정하지 않은 산에 자를 쓸 수는 없었지. 



방장제일문 각자의 하단부에도 시 한 수가 있다. 강성통 법사의 작()이라 한다.

  萬古名勝方丈山(만고명승방장산) 만고의 명승 방장산에

  三門五戶第一門(삼문오호제일문) 삼문과 오호를 갖춘 방장제일문

  運自大發金馬坮(운자대발금마대) 금마대(金馬臺)에서 운세가 절로 크게 일어나는 날

  世人仰視皆歓喜(세인앙시개환희) 세인들이 우러러보며 모두가 기뻐하리라

역시 풍기는 분위기가 불초자 이영우의 시와 비슷하여 축원문과 더불어 동일한 사람의 작품이라 해도 이상할 것이 없겠다.

마천(馬川)은 산골짜기의 물이 말처럼 빨리 흐른다고 마천이라 한다는 얘기도 있고, 풍수상 천마시풍(天馬嘶風 *천마가 바람을 가르며 달리는 형상)의 형국으로 외마·내마마을이 말의 꼬리, 가흥이 말의 엉덩이, 마천석재 부근이 말잔등, 금계가 말머리에 해당된다는 얘기도 있다. 위성사진에 말을 눕혀 놓고 보면 그럼직할 것 같다. 금마대는 그런 풍수에 근거를 둔 얘기로 들린다.



 

6. 나머지 얘기들

 

방장제일문에서 콘크리트 옹벽의 철망을 벗어나 터널처럼 만들어 놓은 구조물 위를 돌면 절벽 귀퉁이에 금계동구(金鷄洞口) 각자가 있다. 나는 사진 찍으러 갔지만 위험하므로 권하지 않는다. 나뭇잎이 다 진 겨울날 도로에서 올려다보면 된다. 기억하는 사람들은 탄수대 각자보다 조금 뒤에 새긴 것으로 안다고 하였다.


 



지금의 도로는 과거 논이었고 해방 후 신작로가 생기고 또 확장되면서 벼랑이 무너질까 봐 옹벽을 쌓고 터널 같은 콘크리트 구조물로 지탱하면서 이마에 방장제일문이란 명패를 붙였다. 그러다 보니 사람들은 원래의 방장제일문은 잘 모른다. 어쨌거나 그 좋은 글씨를 흉내라도 좀 내든지 않고···. 오리지날 각자를 보고 나면 모조품은 너무 초라하게 느껴진다. 비슷하되 같지 않은 것을 사이비(似而非)라 한다면 이건 비슷하지도 않으니 뭐라 해야 하나?

그리고 도로변 입구에 방장제일문에 대한 안내판이라도 세운다면 고급스런 볼거리를 제공할 수 있지 않을까? 없는 것도 만들어내는 세상인데 있는 것도 활용하지 못해서야···.


 


동국여지승람, 김종직의 시, 여지도서, 천령지 등의 고문헌에 의탄은 지금처럼 義灘이 아니라 전부 義呑으로 기록되어 있다. 여울 탄()이 아니라 삼킬 탄()이다. 지리산 북록의 이골 저골 물을 다 합수하여 삼킨다고 이었을까? 의탄교 아래 계곡이 굽이도는 곳에 모티쏘가 있다. 모티는 모퉁이의 갱상도 사투리다. 탄수옹의 예언 중에 모티쏘에는 물 마를 날이 없을 것이라 했다 한다. 시퍼렇게 물을 삼켰다는데, 설마 그래서 이었을까? 지금은 토사로 메워져 쏘() 같지도 않다.

그러던 것이 일제강점기 때부터 義呑義灘으로 바뀌어 나타난다(). 모르긴 해도 금계동과 더불어 탄수옹이 개명한 것이 아닌가 싶다. 옹이 호()로 쓴 灘叟(탄수)도 그냥 나온 것이 아닐 테니까. 여러 어르신들도 모르겠단다.

이든 이든 원래 숯 탄()의 오기(誤記)로 숯 굽는 마을이 아니었을까 하는 추측도 있고(언론과 함양군) 가능성도 있지만, 적어도 기록상으로나 주민들의 증언으로는 근거 없는 얘기다. 나중에는 버젓이 사실인 양 둔갑할지도 모르겠지만 말이다. 그리고 개인적으로 마을 이름으로는 그중 여울 灘()이 가장 잘 어울린다고 생각한다.


 


처음 방장제일문 때문에 금계·의평·의중마을의 노인분들을 붙잡고 말을 걸기 시작했을 때는 생각지도 못했다. 탄수옹의 생존해 있는 막내아드님(대전 李季雨 어르신 1922~)과 탄수옹을 종조부라 부르는 분(의중마을 李用大 어르신 1935~), 그리고 방장제일문 글씨를 쓴 분의 아드님(함양읍 李用根 어르신 1936~) 등 직간접으로 연관되는 분들과 연결될 줄은. 감사드린다.

물론 그분들의 얘기 중 많이 불합리하다고 판단되는 부분은 옮기지 않았다. 가장 확실한 것은 선대의 본인들이 남긴 문집 등 기록물인데 아쉽게도 존재하지 않았다. 조선왕조실록이라는 위대한 유산을 남긴 나라인데, 그 기록정신이 지리산 골짝까지는 스며들지 않았던 것일까? 그나마 그런 얘기조차 들려줄 분들은 이미 많이 사라졌고 또 지금도 사라지고 있다. 

 

마지막으로 감히 조지훈 선생의 詩 『석문(石門)』을 빙의하며 마무리 짓는다.

 

  지리산 임천(瀶川)가의 벼랑에는

  검푸른 이끼가 끼고 비바람에 낡아가는 석문 하나 있습니다.

  부서져 내리는 돌부스러기에도 묵묵히 천년을 버텨온 석문이 있습니다.

  물을 건널 수 없는 산은 그 자리에 돌이 되어 강 건너 지리산을 바라보고만 있습니다.

 

  이제는 굳은 몸을 풀고 돌무더기로 주저앉고 싶어 당신을 기다리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수백 길 고갯길을 넘거나 수십 리 물길을 따라 지리산으로 드는 당신을 말입니다.

  지리산 의탄에는 어쩌면 당신의 손길이 닿으면 열릴지도 모르는 석문 하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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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Comments
백산 2020.03.03 17:36  
현 콘크리트 구조물 명패의 "方丈第一門" 예서체 글씨는 가늘고 힘이 없어 웅대한 지리산의 기상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하는 느낌입니다.
당당한 기개가 느껴지는 각자 글씨를 임사하여 그대로 새겼으면 의미도 크고 멋졌을 텐데 많이 아쉽군요.

지리산민이 되고나서 지리산 유적 관련 글을 쓰시는데 여러모로 편리한 점이 많겠습니다.
좋은 글, 지리산을 더 깊이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山용호 2020.03.04 08:26  
발품을 팔아야 할 지점이 또 늘어납니다.ㅎㅎㅎ 각자기행 단독아아템으로도 충분한 지리산 여정이 되겟습니다.
흥미진진 ㅎㅎ
애기나리 2020.03.04 10:17  
제가 몇년전 이곳에 차를 잠시 멈춘적이 있습니다.
각자가 새겨진 바위 너머로 백합과의 털중나리가
제법 탐스럽게 피어 있던 초여름 이었지요.
각자가 새겨져 있다는 그쪽으로 부지런히 드나들었는데
꽃에만 신경 쓰느라고 각자가 새겨진줄은 몰랐네요.
각자 이야기도 제법 재미납니다.
지리n보이 2020.03.04 10:46  
다니면서 콘크리트 구조물에 웬 뜬금없이 방장제일문일까?
라는 생각을 했는데 그런 각자가 있어서 그렇게 구조물을
세운거였네요~
덕분에 많이 배웁니다^^
뽓때 2020.03.04 21:18  
모두를 기억할수는 없어도
오늘도 형님덕분에 몇가지 배웁니다.

역시 대단하십니다.
해영 2020.03.06 10:46  
저도 지리n보이님과 같은 생각을 갖고 통과했던 구조물였습니다.
형님 말씀처럼 암각된 글씨 모양으로 콘크리트 간판을 그렸으면 의미가 있었을텐데.
있는것도 활용 못하는 행정이 아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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