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유적명소

상무주암 필단사리탑

까막눈이 | 392

    상무주암의 필단사리탑 이야기는 2012.1.14 와운마을에서 올라 영원봉에서 시산제를 하고 상무주암을 거쳐 하산하면서 엉대장으로부터 처음 들었다. 각운스님이 선문염송설화 집필을 마치자 붓끝에서 사리가 떨어져 탑에 봉안했다는 것이다. 신기한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그런 일이 있었으리 만무할 것이라 긴가민가하면서 뒤에도 상무주암을 지나칠 때면 담장 곁에 초라하게 서 있는 필단사리탑을 올려다 보곤 했다.


    그런데 좀 궁금해 졌다. 왜 그런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는지. 그래서 얼마전 그 이야기를 처음 해 준 엉대장에게 물어 보았다.


    "필단사리탑 이야기의 출처가 어디요?"

    "이능화가 쓴 조선불교통사에 나오요"

    "그거 좀 볼 수 있소?"


    지금 '이능화의 조선불교통사'는 도서관에서도 찾을 수 없는 희귀본인데 한 질을 다 가지고 있단다.


    그리하여 폰으로 찍은 필단사리탑에 관한 옛글 사진 몇 장을 받았다.


  ○ 1538년 우주옹이 쓴 고염화발


 

  ○ 1781년 묵암스님이 쓴 염송설화발문



   ○ 이능화의 각운서성주락필단


 


    우주옹의 고염화발 내용을 보니 염송설화는 진각대사 혜심의 선문염송을 명을 받아 각운스님이 수선사(修禪寺)에서 3년에 걸쳐 집필했다고 되어 있고, 이능화의 글에는 상무주암에 있을 때 염송설화를 마쳤다고 되어있다.


    사리탑은 상무주암에 있는데 수선사가 왜 나오지 하는 의문이 생긴다. 하여 수선사를 뒤벼보니 보조국사 지눌과 연결고리가 나온다. 상무주암을 보조국사 지눌이 창건했다는 것도 있던데 사실 여부를 떠나 지눌스님이 상무주암에 주석했다는 이야기는 다른 기록으로 보아도 사실인 듯하다.


    수선사와 상무주암,  보조국사 지눌와  무의자 혜심 그리고 선불교의 중흥

    수선사(修禪寺)는 지금의 조계산 송광사의 전신이다. 수선사를 창건한 보조국사 지눌과 제자 혜심 그리고 혜심의 제자 각운스님과의 관계가 자연스레 나온다.


    지눌(1158~1210)은 고려 의종 19년(1165년)에 출가하여 창평 청원사에서 6조 혜능의 [단경]을 읽고 대각한 뒤 수도에 더욱 정진했다. 명종 18년(1188년)에 팔공산 거조사에 머물면서 정혜결사를 조직하고 권수정혜결사문勸修定慧結社文을 발표, 뜻을 같이 하는 사람들을 모으고 독자적인 사상을 확립하였다.


    고려 신종(神宗) 원년(1198년)에 거조사를 떠나 송광산(松廣山)으로 가는 도중 지리산 상무주암에 머물게 되었는데, 그기서 內觀을 專精하고 外緣을 끊어 더욱 心源을 밝혔다. 그러다가 ≪大慧語錄≫의 語句 (선은 고요한 곳에도 없고 또한 한가한 곳에도 있지 않다· · · · · · )에서 문득 크게 깨달은 바가 있었다. 상무주암에서 3년 동안 머물다 1200년 송광산 길상사로 옮겨 정혜쌍수를 주장하고 "선(禪)으로 체(體)를 삼고 교(敎)로 용(用)을 삼아야 한다."고 말해 선·교의 합일점을 추구했다.


    희종은 즉위하자 송광산을 조계산, 길상사를 수선사라 고쳐 제방을 친히 써 주고 만수가사를 내렸다. 그에게는 많은 제자들이 있어 수선정혜(修禪定慧)의 목우자 가풍 (牧牛子 家風)을 크게 떨침으로써 고려시대 조계종문의 침체와 부진을 씻을 수 있게 되었고, 한국 불교사에서도 높이 평가되고 있다.


    진각국사 혜심(1178~1234년)은 보조국사 지눌을 계승한 수선사 제 2세로서 무신정권 시대의 격동기를 살아간 인물이다. 자호(自號)는 무의자(無衣子)인데, 지눌이 조계산 수선사를 개창하여 도화(道化)를 떨치고 있었으므로 그리로 가서 득도되고 구족계를 받았다. 지눌이 수선사의 법주(法主)를 맡기려 하자 사양하고 지리산으로 들어 갔다. 그 뒤 스승이 세상을 떠나자 뜻을 어길 수 없어 조계산 수선사(曹溪山 修禪寺)의 제2世主가 되었다.


    봄 깊은 절집은 깨끗해 먼지 없고

    조각조각 진 꽃이 이끼 점 찍네

    소림소식 끊겼다 그 누가 말하는가

    저녁 바람 이따금 암향暗香 보내오느니


    혜심스님이 스승인 보조국사가 입적하신 날 지은 시다. 신라 때 처음으로 당나라에 유학한 도의국사에 의해 이 땅에 선불교가 들어 온 이후 실상사 등 구산선문이 개창되었으나 유식과 화엄이 주류였던 경주에는 발붙이지 못한 채 변방으로 돌다 고려가 들어 선 이후에는 그나마 지리멸렬한 상태였다. 지눌이 불교 개혁을 내서우며 선교 양립의 정혜쌍수(定慧雙修)를 주창한 것도 아마 그나마 敎가 우위에 있던 시대 상황에 禪의 지위를 확보하고자 하는 방편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나마 스승이 입적하자 禪의 한 줄기 빛이 사라질까 걱정하는 말들이 많은데 자신이 그 맥을 잇겠다는 다짐을 하고 있는 것이 이 시를 지은 본심 같다. '소림소식'이란 그런 뜻이고, 진정한 의미에서의 禪門의 부활은 진각 혜심에 의해서 이루어 진 것이라 볼 수 있다. 


    혜심스님은 ≪진각국사어록≫을 비롯하여 ≪무의자시집≫ 등 많은 저서를 남기기도 했는데 방대한 공안집인 ≪선문염송≫ 30권을 편찬하여 현재까지 한국 간화선의 풍토에 큰 영향을 끼쳤다. 夢如·眞訓·覺雲·麻谷등의 제자가배출되었다.


    혜심의 뒤를 이어 수선사 제3세주가 된 이는 청진국사 몽여(?~1252), 몽여의 법을 이은 제자 진명국사 混元(1191~1271)이 수선사 제4世主가 되었다.


    禪이란 인도의 선승 보리달마( ? ~ 530?)로부터 시작된다. 보리달마로부터 비롯된 중국선은 혜가 → 승찬 → 도신 → 홍인 → 혜능으로 전승되었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이나 오늘날 이를 신빙성이 있다고 보기에는 어렵다.


    우리나라 불교는 6조 혜능의 법을 이었다고 주장한다. 조계(曹溪)란 명칭은 혜능이 오조 홍인으로부터 가사를 받고 피신해 있던 곳의 이름이다. 그러나중국에서 선의 지평이 넓혀진 것은 혜능의 경쟁자이자 동문수학하던 오조 홍인의 제자 신수(神秀, 606~706)에 의해서라고 한다. 그런데 신수 일파를 정면 비판하고 도전한 사람이 혜능의 제자인 하택신회( 668~758)였다. 신수에 의해서 혜능계의 남종돈오선이 신수계의 북종점오선을 압도하게 된다.


    그러나 혜능의 또다른 제자인 남악회양으로부터 → 마조도일 → 청원행사 → 석두회천 등 당나라 말기까지 여러 종파를 형성했고 우리나라 선불교는 그 맥을 계승하고 있다고 조계(曹溪)란 명칭을 사용하고 있으며, 도의국사를 필두로 신라말 선불교가 이 땅에 들어와 구산선문을 개창하는 등 잠시 번창했던 이후 고려 창건 이후 명맥만 유지하던 선불교를 다시 일으킨 중흥조를 보조국사 지눌로 하고 있는 것이다.


   선문염송(禪門拈頌)과 선문염송설화(禪門拈頌說話)

   선문염송(禪門拈頌)은 혜심스님이 중국의 ≪전등록≫과 대조해 가며 역대 조사들의 어록을 찬한 것이며, 염(拈)이란 옛 공안의 독후감을 산문체로 기술한 것을 말하며 송(頌)은 옛 공안의 경지를 시로 읊은 것을 말한다. 선문답은 물론 심지어 그 해설까지도 막연한 점이 많아 이해하기 쉽지 않지만 이해하지 말고 화두에 매달리면 번개처럼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 조사들의 공안집이다. 말하자면 송대(宋代) 벽암록이나 무문관(無門關)과 같은 고려의 토종 공안 주석서인데 선문염송설화(禪門拈頌說話)는 제자인 각운스님이 명을 받아 완성한 해설서인 것이다.


    수선사의 제2세주인 진각 혜심이 선가(禪家)의 공안집인 선문염송을 찬했지만 그 해설서인 선문염송설화의 작자인 覺雲에 대해서는 고려 말기의 구곡 각운(龜谷 覺雲)과 혜심의 제자인 覺雲과 혼동이 있었던 모양이다. 1781년 묵암스님이 쓴 염송설화발문에는 전해져 오던 서문들이 잘못되었다고 했으며, 이는 우주옹이 쓴 고염화발에는 혜심이 수선사에서 각운에게 명한 것으로 되어있고, 이능화의 조선불교통사에는 「중간염송설화 서(重刊拈頌說話 序)」를 지은 민창도(閔昌道)가 혼동하여 구곡(龜谷) 두 자를 잘못 삽입했다 했고, 선문염송설화의 찬자(撰者)로서는 일본인 黑田亮이 「禪門拈頌集과 禪林類聚」(朝鮮舊書考, 1940)에서 논증한 바가 있다고 하여 혜심의 문인인 각운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본다고 했다.


    붓끝에서 오색사리가 빗방울처럼 떨어지다. (筆端五色舍利落如雨點)

    「필단사리탑」이란 1538년 ≪선문염송설화≫에 쓴 우주옹의 발문 중에 "염송설화 쓰기를 마치자 붓끝에서 오색사리가 빗방울처럼 떨어졌다. (寫斯記時 筆端五色舍利落如雨點)"에서 그 유래를 찾을 수 있으며,


    「由是海東眞覺大士獵取諸錄 對傳燈而 集成拈頌五六卷 傳於覺雲 雲奉命于修禪寺入院三年 涉世忘然 而掩觀七日 粲然明著故 俯爲後昆 寫斯記時 筆端五色舍利落如雨點 殆非人巧之所成 似借神功而就也已

    이런 연유로 우리 진각대사께서 여러 기록들을 모아 전등록 대조하며 염송 서른 권을 집성하여 각운스님에게 전했다. 각운스님이 명을 받들어 수선사에 들어가 삼년동안 모든 것을 잊고 전념하였다. 이레 동안 교정을 보니 찬연한 명저가 되었으므로 후손들을 굽어볼 수 있게 되었다. 염송설화를 다 마치니 붓끝에서 오색사리가 빗방울같이 떨어졌다.」


    1781 묵암스님이 쓴 발문에는 "우주옹의 발문이 없었다면 사리의 내력을 어찌 알 수 있었겠는가"라는 글과


    「若無宇宙之筆則 天隱子筆端 時顯舍利之來歷斷絶莫續 是慨也

    만약 우주옹의 글이 없었다면 천은자(각운)의 붓끝에서 사리가 나타난 내력이 단절되어 이어지지 않았을 것인즉 이는 통탄할 일이다」


    이능화가 1918년 출판한 『조선불교통사(朝鮮佛敎通史)』의 "각운이 설화를 완성하자 붓끝에서 사리가 떨어졌다.(覺雲書成珠落筆端)"라는 글이다.


    「世傳覺雲在地異山 上無住庵 作拈頌說話 筆端時現舍利 庵下作小塔藏之

세간에서 전하기를, 각운이 지리산 상무주암에 있을 때 「염송설화』를 집필하였는데 붓끝에서 갑자기 사리가 나타나 이에 암자 아래에 작은 탑을 세워 봉안하였다.」


    붓끝에서 사리가 나온다는 설화는 듣고 새기기에는 아름답지만 상식적이지 않고, 이적을 배제하는 불교에서 불교적이지도 않다.


    나는 우주옹의 저 문장을 은유(隱喩 메타포)라고 생각한다. 문학적 수사로 보는 것이다.


     천관사에 가서 봄을 먹었다. 

     보랏빛 오랑캐 꽃을 먹고

     분홍빛 꽃잔디 꽃을 먹고

     황금색 배추꽃을 먹었다.

     질경이도 두릅도 먹고 칡 순도 먹었다.

     꾀꼬리 울음소리 휘파람새의 울음소리

     비둘기 소리 장끼 소리도 먹었다.

     삼층 석탑도 먹고, 범종도 먹고

     대웅전 안의

     부처님도 관세음보살도 먹었다.

     나는 거대한 한 송이 꽃이 되어

     가슴 두근거리며

     해우소에 가서 가랑이를 벌리고

     봄의 교향시를 휘갈겼다.


     한승원의 시다. 누가 봄을 먹고 부처님도 먹고 관세음보살도 먹었다고 믿겠는가. 하지만 비유와 은유는  감정을 풍부하게 하고 문학을 아름답게 해 준다. 쓰여진 글자 그대로 이해하는 것은 초딩도 안하는 짓이다.     


    또 우주옹이 발문을 쓴 것은 선문염송설화가 완성된 300여년 후이기 때문에 진위여부는 확인할 수도 없는 것이다. 


    그러면 ‘붓끝에서 오색사리가 빗방울처럼 떨어졌다. (筆端五色舍利落如雨點)’는 것을 아무 생각없이 받아들인 나 같은 멍충이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아마 종교적 스토리 때문이기도 했겠지만, 종교라 해서 상식을 뛰어넘는 이야기에 대해 그 뜻을 살펴보지 않는다면 신비주의에 빠지거나 길을 잃고 똥통에 빠지기 십상이다.    


     「종래 설화 제본에는 이 우주옹의 발문이 누락되어 염송설화의 작자가 착오로 인식되었다. 從來說話諸本 漏落此宇宙翁跋文 故錯認說話之作者」  - 1781에 쓴  묵암스님 발문 중 -


      '이전의 여러 염송설화 본에는 저 우주옹의 발문을 싣지 않았다'는 것은 우주옹의 글이 믿을만한 것이 아니라는 의미일 수도 있고 ····           


    해서 다시 보니 그 의미는 ‘붓을 놓자 입적했다’로 보이는 것이라. 스승의 명을 받들어 섭세망연하기를 삼 년, 염송설화를 완성하고 그 피로 누적으로 입적한 것일 개연성이 높아 보인다. 그래서 그 사리를 거두어 탑에 봉안한 것이고....


    그렇지 않았다면 실력으로 보아 혜심 다음 수선사의 3世主는 마땅하게도 覺雲스님이 되었어야 할 것이지만 다음 世主 계보 어디에도 이름이 없는 것으로 보아 이를 뒷받침한다.


    그러면 왜 수선사가 아니고 상무주암에 사리탑을 봉안했을까하는 것이다.

    그 내막이야 알 수는 없지만 연결고리로 추정할 수 있는 것은 상무주암은 보조국사 지눌이 3년을 지낸 곳이고, 진각국사 혜심은 그의 제자이고 각운은 혜심의 제자이니 지눌에게는 손자인 셈이다. 그들 사이에는 禪의 부활과 불교의 개혁이라는 크나큰 목표가 있었지만 안타깝게도 각운이 죽자 혜심은 스승의 기운이 서려있는 상무주암에 제자의 사리를 안치한 것이 아닐까 하는 것이다.


    따라서 상무주암의 필단사리탑은 《선문염송설화》를 지은 각운스님의 사리탑일 것으로 보는 것이 망구 내 생각이다.  그렇다고 우주옹의 저 글이 없었다면 우리는 상무주암 필단사리탑의 아름다운 이야기를 어디에서 들을 수 있으랴!    


     《선문염송》과 《선문염송설화》는 시중에 책으로 나와 있지만 읽어 본 적은 없다. 다만 지리산에 떠도는 이런 저런 이야기들에 대해 호기심과 궁금증이 생기고 하여 그 끄나풀을 따라 가본 것 뿐이다. 


     망구 씰데없는 오만 책을 다 가지고 있는 엉대장에게 감사드린다. 나는 숟가락을 살짝 얻었을 뿐이다.


     다음은 엉대장이 보내 준 사진 속의 원문을 전문가도, 이 분야에 뭔 지식이 있는 것도 아닌 촌에서 밭이나 일구고 사는 사람이 개발새발 해석한 것이므로 틀린 것이 있어도 양해 바람. 


古拈話跋

窃觀禪敎旨 語黙不到處 古今無卷時 誰能體此

선교의 취지를 절실하게 살펴보건데 말과 침묵으로 이를 수 없는 곳이고, 고금으로 단절된 때가 없다. 누가 이를 체득했는가

孔聖予欲無言 盖知其妙矣 

공자같은 성인도 “나는 말하지 않겠다”라 했으니 대개 그 묘미를 알았음이라.

是我能仁禪師 燈點迦葉之心 敎海瀉阿難之口 

이는 우리 부처님께서 가섭의 마음으로 등불을 붙이셨고, 교의 바다는 아난의 입으로 널리 펼치셨으니

西乾四七 葉葉分芳 東震二三 燈燈續焰 

인도에서 스물여덟제자의 꽃향기 퍼졌고 중국에서는 여섯분 조사의 등불이 이어졌다.

人生斯世 欲損人心 見性成佛 舍此而奚以哉 

사람으로서 이런 세상에 살며 마음을 덜고자 하면 견성성불 이를 버리고는 어찌할 것인가.

由是海東眞覺大士獵取諸錄 對傳燈而 集成拈頌五六卷 

傳於覺雲 雲奉命于修禪寺入院三年 涉世忘然

이런 연유로 우리 진각대사께서 여러 기록들을 모아 전등록 대조하며 염송 서른 권을 집성하여 각운스님에게 전했다. 각운스님이 명을 받들어 수선사에 들어가 삼년동안 모든 것을 잊고 전념하였다.

而掩觀七日 粲然明著故 俯爲後昆 

이레 동안 교정을 보니 찬연한 명저가 되었으므로 후손들을 굽어볼 수 있게 되었다.

寫斯記時 筆端五色舍利落如雨點 殆非人巧之所成 似借神功而就也已 

염송설화를 다 마치니 붓끝에서 오색사리가 빗방울같이 떨어졌다. 거의 사람의 솜씨로 만든 것이 아닌 신공을 빌린 것 같이 되었다.

後攬者 依若膾炙之口 欲爲眼目 而未有刊行 累傳多手 魚魯難分故 

후에 염송설화를 읽는 자들이 입에 회자된 바 (대중들이) 안목을 구하고자 간행되지 않은 채 많은 손을 거치면서 魚자와 魯 자도 구분 할 수 없게 어지럽게 되었다.

走聚請碩德 書十餘件 校正而命門人天么 欲募緣鋟梓 傳流於世 

덕이 높은 스님들에게 글(서문과 발문 등) 십 여건을 청하고 모아 교정하고 제자들에게 명하여 모연을 하고 판각하니 세상에 전하게 되었다.

하략.............. 

嘉靖 十七年 宇宙翁 跋 

1538년 우주옹 발문


拈頌說話跋文

一大藏敎 與千七百則公案 何莫非胡亂指注而拭瘡疣之紙  

방대한 경전과 천 칠백칙 공안이 어찌 병자호란의 상처를 씻어주는 종이에 지나지 않는 것 아니겠는가

(瘡疣 창우 : 부스럼과 혹)

則佛出世祖西來 皆未免臂不向外曲而瞎驢糞換眼珠也 

곧 부처가 세상에 오고, 달마가 서쪽에서 온 것은 모두 팔이 바깥으로 굽지 않는다는 것과 한쪽 눈이 먼 노새가 똥을 진주로 바꾸어 보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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此跋文只在順天松廣寺錦溟講伯所藏 拈頌說話 最初板後十卷 

이 발문은 순천 송광사 금명강백이 소장하고 있는 염송설화 최초 판 후 십권이다.

從來說話諸本 漏落此宇宙翁跋文 故錯認說話之作者 

종래 설화 제본에는 우주옹 발문이 누락되어 염송설화의 작자가 착오로 인식되었다.

此下是默庵之所見 

이하는 바로 묵암의 소견이다.

責宇宙翁跋不載 無依子 拈頌之作書於貞祐丙戌(고려고종 1226) 越三百二十三年 至嘉靖戊戌 說話始刻 亦宇宙翁鋟也 

우주옹의 발문을 싣지 않은 것을 나무란다. 무의자(혜심)께서 염송설화를 지은 것이 고려 고종 10년(1226년)인데 323년이 지난 중종 33년(1538년) 염송설화를 판각하기 시작했고 또한 우주옹이 새겼다.

大凡禪敎典流通始終之跡 皆係於當時序跋 

무릇 선교의 전범이 유통되는 시작과 끝의 흔적은 모두 당시 서문과 발문에 관계가 있다.

凡例之家 不如此則 緣起顚末 何以昭示于群目耶 

범례를 잘 쓰는 문중이라도 연기전말(일어남과 경과)을 대중들에게 어떻게 밝게 내 보이는가 하는 법칙만 못하다.

雪巖老 楞伽之役 前日彌天老之所請天隱子長序 

설암장로는 전날에 미천장로가 천은자(각운)의 서문을 부탁하였기에

與其無用老新序 自家前跋 幷錄之 

새로운 서문이 소용없다고 여겨 자기 문중에 전부터 있던 발문을 병기하면서

彌天老 香山之役 宇宙翁之舊跋 曷爲之不錄焉 

미천장로의 우주옹이 쓴 구 발문은 어찌하여 기록하지 않았는가

盖雪巖老之於彌天 父子也 彌天之於宇宙 疏遠人故然歟 

대개 설암장로와 미천은 부자관계로서 미천장로와 우주옹은 소원한 관계 때문이 아니었을까

旣爲法將擔當人行事 唯流通久當沿革 是謀內別親疎 何必是計乎 

이미 법장을 담당하는 사람이 일을 처리하는 것은 오직 유통이 오래도록 내력을 관리하는 것인데, 이는 내별친소(친한 척 하며 멀리 하는 것)를 꾀하는 것으로서 하필이면 이 꾀를 내었을까

若無宇宙之筆則 天隱子筆端 時顯舍利之來歷斷絶莫續 是慨也 

만약 우주옹의 글이 없었다면 천은자(각운)의 붓끝에서 사리가 나타난 내력이 단절되어 이어지지 않았을 것인즉 이는 통탄할 일이다

復惟之昔栢庵老 註警訓八梓也 太高流通之序不收故 後世或惜之 今世雪坡氏 重刊大徑也 栢庵老 接續神州之大緣起序 

또 옛날을 생각해 보건데 백암장로(1631~1700)는 이를 경계하는 8가지를 지어 새겼다. 예부터 전해져 오던 서문이 거두어지지 않으므로 후세들이 혹 이를 애석하게 여겼는데 금세에 설파(雪坡尙彦, 1707~1791) 씨가 大徑을 중간하였고, 백암장로에 이어서 신주지대연기 서문을 간행했다.

亦曷爲而不收也 倘使栢庵 爲彌天則 雪坡子 應不別矣 

또한 어찌해도 거두어들일 수 없으니, 갑자기 백암으로 하여금 미천이 되게 해도 설파라도 마땅히 구별할 수 없으리라

予以是知天坡二公之用心 皆一律故 彰其豊功 偉烈之前後兩短 爲後世流通大事者道 

나는 천은자와 설파 두 공의 마음 씀이 모두 한결같으므로 그 풍성한 공을 밝히고 위대한 공적의 앞뒤 양단을 후세를 위하여 세상에 널리 퍼지게 하는 큰일을 하는 것이 도라는 것을 이로서 알겠다.」


乾隆四六年辛丑初冬 叩寫軒 課虛子 默庵夫謹白 

1781 초겨울 고사헌 과허자 묵암 삼가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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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Comments
산유화 2020.10.29 14:25  
내용을 읽기조차 힘든데 어떻게 쓰시는지 절로 감탄사가 나옵니다.
두고두고 되풀이해서 읽어 볼랍니다.
인내심이 상당히 필요할 듯하지만...^^
수고하셨고 고맙습니다.
강호원 2020.10.29 15:11  


이 사진의 탑입니까?
강호원 2020.10.29 15:23  
전부터 간간이 올리시는 글에서 엉겅퀴 이선생의 도반으로써 상당한 고수임을 알고 있었습니다만,
이렇게 승탑(사리탑) 하나로 중국과 우리나라 불교의 역사를 풀어내시는 내공이 놀랍습니다.

‘붓끝에서 오색사리가 빗방울처럼 떨어졌다. (筆端五色舍利落如雨點)’를 풀기 위해 한승원 작가의 시도 인용한 것을
보고 또 놀랐습니다.

위 산유화님 말씀대로 원체 까막눈이라(죄송합니다.) 읽는다꼬 눈도 아푸고 다 이해도 못 하지만 대충 그리 알겠습니다.
만구 씰데없는 오만 책을 다 가지고 계신 엉겅퀴 이선생 덕분에 저도 밥 잘 묵었습니다.

정성들여 글 쓰신다고 수고하셨고,
고맙고, 잘 봤습니다.

참, 까막눈이님은 절대 까막눈이 아님을 이제 만천하가 알게되엇습니다. ㅎㅎㅎ
엉겅퀴 2020.10.29 18:07  
필단사리탑을 각운선사의 사리탑이라고 본 것은 탁월한 견해라고 생각합니다.
불교에서도 이적(異蹟)은 대중을 깨우치기 위한 방편이든 비유든 기록이야 많지 않던가요?

몇 사람이나 있어 이렇게 에럽고 골아픈 야그를 끝까지 읽어 볼끼라고,
그렇게 공을 들여 글을 쓰는 김에 좀 쉽게 쓰든가 안하고...
하지만 지리산의 역사문화는 또한 이로써 업그레이드 될 듯~.
백현 2020.10.29 22:15  
인내심을 가지고 공부해 보겠습니다
좋은 자료 올려주셔서
감사 합니다
꼭대 2020.10.29 22:42  
가장 머리 아픈 (읽는 사람 입장) 불교 문헌 국역도 하시면서 여러 자료를 종합하여 필단사리탑 역사에 대하여 종결판으로 정리해주셨네요.
지눌이 상무주암에 주석하다가 송광사로 떠날 때 지리산파 제자들은 남아 나름대로 일대에 산문을 이루고 있었다고 보여집니다. 그렇기에 혜심이 수선사를 피하여 금대암으로 들어와 있다가 돌아가기도 했던 것 같습니다.
막연히 각운을 검색하면 우리나라 선불교 법맥에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구곡각운에 관한 자료가 눈에 띄기 마련인데, 덕분에 저도 분명히 구분하여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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