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산행기

한오대 계안(漢鰲臺 契案)

엉겅퀴 | 15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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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전 산지골님이 고문서 《한오대 계안(漢鰲臺 契案)》을 구하여 사진을 찍어 올린 바 있다. 화산12곡의 제6~7곡(새우섬/한남마을)과 관련된 자료이다. 어차피 내 몫이거니 하면서도, 대충 훑어보니 내용도 대동소이하여 별 재미도 없고 어차피 관심 있는 사람도 별로 없을 텐데 하면서, 요따우 생각으로 밍기적거리다 보니 한달 하고도 열흘이나 후딱 지나가버렸다. 더 이상 미루는 것은 예의가 아닐 것 같다.

 

이 계안은 「한오대서(漢鰲臺序:강정희)-한오대계회사실(漢鰲臺契會事實:강계형)-한오대명(漢鰲臺銘:양재도)-한오대서(漢鰲臺序:강상문)-한오대기(漢鰲臺記:강창희)-한오대발(漢鰲臺跋:류해봉)-한오대계원명부-추가명부-한오정기(漢鰲亭記:허경오)-추가명부」로 구성되어 있다.

추가명부를 제외하고 모두 국역하였다. 원문은 일일이 타이핑을 할 수가 없어 그냥 냅뒀다. 얼마나 엉터리 번역인지 원문과 대조·확인해보고 싶은 분은 〔지리사랑방〉지리속으로〕의 산지골님의 한오대 사진파일 자료를 참조하시라.

 

아울러 이 자료 덕분에 계의 성립연도 등 나의 궁금증도 몇 가지 해소되었고, 기존의 글 중 수정해야 할 부분도 발견하였다. 소중한 자료 구해서 제공해 주신 산지골님께 감사드린다.

※ 괄호 속에 *로 표시한 부분은 역자의 간단한 주석이다.

 

1. 지금으로부터 100년 전 1917년 정사년(丁巳年), 한오대 계원들은 지금의 한오대에 漢鰲臺(한오대)‧李漢南君杖屨所(이한남군장구소) 및 계원 23인의 이름을 새겨 넣었다. 정유년(1897)에 계를 시작하여 정사년에 완성했다고 하였으니 아마 계가 자리를 잡은 20주년을 기념하여 그렇게 한 모양이다. 그들이 쓴 글에는(序‧記‧跋 등) “수계(修契 *계를 맺음)후 21년이 되는 해”라고 하였으나 지금으로 치면 ‘몇 년째 되는 해’라는 뜻으로 이해하면 될 것 같다.

또 한오대는 한남의 한(漢)과 오서의 오(鰲)를 따서 새로 지은 이름이라는 사실이 새삼 확인되었고, 오서(鰲嶼)의 명칭도 자라[鰲]의 모습에서 취했을 것이라는 나의 가설이 이번에 기록으로 확인되었다.

 

2. 그리고 그때(1917) 계안(契案 *계의 장부)을 새로 꾸민 것 같다. 지금의 계안은 대부분 1917년 이후에 쓴 글이다. 물론 그 전에도 장부가 없었던 건 아닌 것 같다. 강용하가 쓴 「한오대 계의 서문」(*화산12곡 참조)에 “여러 해 뒤 하루는 계권(契券 *계의 문건)을 가지고 와 나에게 한 마디 말을 청하였다.”고 한 것을 보면 말이다.

계안은 통상 서(序)·입의(立議)·좌목(座目)·발(跋)로 구성되어 있다. 序는 취지 목적, 입의는 규약, 좌목은 계원명부, 跋은 성립 전말을 나타낸다.

그래서 처음 산지골님이 계첩(契帖)을 올렸을 때 대충 훑어보고는 계의 규약과 그들이 존경한 선배 강용하의 서문이 보이지 않기에 중간에 누락된 부분이 있다고 생각했는데 다시 보니 내용의 연결상 빠진 부분은 없는 것으로 판단된다.

 

3. 아래 양재도의 「한오정기」에는 한오대 각자를 정유년(1897)에 새겼다고 하였지만 다른 사람의 글에는 모두 정사년(1917)에 계원명부와 같이 새겼다고 하였다. 그럴 것이다. 지금 바위면의 글자 배치를 보면 한꺼번에 새긴 것이지, 20년 후에 계원이 몇이나 될지, 또 어떤 글자를 새길지 알고 미리 비워두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아마 한오정기는 1931년에 쓴 글이라 착각이 있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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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19C말에 새우섬에 정자(한오정)가 있었다는 얘기가 전해온다. 나는 당시까지의 여러 기록에 전혀 언급된 바가 없으므로 그 존재에 의문을 표한 적이 있다(*화산12곡). 그런데 이번에 새로운 자료의 발굴로 한오정이 존재했음이 증명되었다.

설마 한오정이 조선말이 아닌 1931년에 세워졌을 줄이야. 그리고 1936년 병자년 대홍수 때 떠내려간 것으로 보인다. 잠시 있다 사라졌으니 미처 문헌에 등재될 틈이 없었다고나 할까. 어쨌든 그 존재를 정식으로 알릴 수 있게 되어 기쁘다.

그 위치에 대해 한번 생각해보자. 한오정기에는 “그 오른쪽 땅에 정자를 세웠다(其右地建亭)”고 하였다. 右地라 하면 주인공이 남면했을 때를 기준으로 서쪽을 가리킨다. 한오대의 서쪽이면 새우섬이 맞다. 그렇다면 오서(鰲嶼)라 하면 되지 왜 굳이 右地라 했을까? 홍수가 잦은 섬에 정자를 세웠을까? 무엇보다도 한남군을 기리기 위해 한오대란 이름을 부여하고 계원들의 행위가 한오대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는데, 한오정이라 이름한 정자를 한오대를 벗어나 세웠을까? 이런 의문이 들기도 하고, 또 右는 이런 뜻도 있다. 옆, 앞.

그래서 한오정은 한오대 옆 언덕 위에 세우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노인분들의 증언에 의하면 당시의 지형상 거기는 어려웠을 것 같고, 한오대 명칭에 따라 한오정이라 했다면 원출발인 새우섬의 상징성에 비추어 새우섬에 세웠을 것이란 심증은 간다.

또 한오정에서 한남군에게 제사를 올렸다는 얘기도 있지만, 원래 심신수양의 목적으로 짓는 누정(樓亭)과는 어울리지도 않고 아래 기문(記文)에도 없는 내용이라 와전된 얘기로 생각된다.

그리고 한오정 이전에는 한오대에 축대[壇]를 쌓았다는 기록도 있었다.

 

5. 강계형은 「한오대계회사실(漢鰲臺契會事實)」에 이렇게 기록해 놓았다. “마을 서쪽에 한남군의 옛터가 있고, 터 조금 위에 돌구멍이 있는데 한남군굴이라 칭한다. 그 속에는 당시에 사용하던 수저가 완연하게 남아 있고 마을사람들이 사제(社祭 *봄 가을 토지신에게 지내던 제사)를 지낼 때 한 그릇 밥으로 한남군의 외로운 혼을 위로하는 제사를 올렸다 한다.”

한남군굴, 새로운 사실이다. 이런 내용을 알았다면 화산12곡에서 언급했을 터인데···. 확인차 달려갔으나 아는 사람도 없었고 흔적도 없었다.

 

6. 다음은 계원의 구성을 살펴보자. 아래 표는 1917년 한오대에 이름이 새겨진 계원 23인을 정리한 것이다.

성명

生年

본관

거주지

강정희(姜正熙)

允瑞

무진(1868)

진양

소연

강계형(姜桂馨)

仲直

을해(1875)

진양

문하

강상문(姜尙文)

乃敬

정묘(1867)

진양

원기

강규직(姜圭直)

乃文

임술(1862)

진양

문상

양재도(梁在道)

性熙

정묘(1867)

남원

원기

류해봉(柳海鳳)

玉汝

을축(1865)

진양

한남

강규향(姜圭香)

性集

기사(1869)

진양

문상

허경오(許暻五)

璟先

경오(1870)

하양

문하

유진후(兪鎭厚)

泰汝

갑술(1874)

기계

동호

홍병식(洪炳植)

明先

정축(1877)

남양

소연

강성희(姜性熙)

明彦

임오(1882)

진양

문하

강재성(姜在誠)

信悟

갑신(1884)

진양

원기

박노철(朴魯轍)

允先

신사(1881)

밀양

소연

홍범표(洪範杓)

舜擧

신사(1881)

남양

소연

이정용(李正容)

致玉

계미(1883)

성산

소연

정계홍(鄭啓洪)

士仁

임오(1882)

진양

동호

홍종원(洪鍾原)

 

 

남양

기암

심준섭(沈晙燮)

 

 

청송

평촌

장승해(張承海)

京洙

신묘(1891)

인동

원기

강신태(姜信台)

祥和

임진(1892)

진양

소연

홍성규(洪性奎)

孔集

계사(1893)

남양

소연

김시한(金時瀚)

泰珍

병신(1896)

김해

문하

김옥성(金玉成)

仁和

기해(1899)

경주

소연

다른 식으로 분류를 한번 해보자.

본관 성씨별

거주지별

생년별

진양 강씨 : 8

남양 홍씨 : 4

남원 양씨 : 1

진양 류씨 : 1

하양 허씨 : 1

기계 유씨 : 1

밀양 박씨 : 1

성산 이씨 : 1

진양 정씨 : 1

청송 심씨 : 1

인동 장씨 : 1

김해 김씨 : 1

경주 김씨 : 1

소연 : 8

문하 : 4

원기 : 4

문상 : 2

동호 : 2

한남 : 1

기암 : 1

평촌 : 1

1862 : 1

1865 : 1

1867 : 2

1868 : 1

1869 : 1

1870 : 1

1874 : 1

1875 : 1

1877 : 1

1881 : 2

1882 : 2

1883 : 1

1884 : 1

1891 : 1

1892 : 1

1893 : 1

1896 : 1

1899 : 1

13姓, 23명

8개 자연마을, 23명

최대 나이차 : 37 (2명 미상)

여러 사람의 기록으로 볼 때 정유년(1897) 계의 발족 당시에는 강정희 강계형 강상문 양재도 유진후 허경오 등 대여섯 명이 주축이 되어 출발했던 것으로 보인다. 23인 중에는 당시 관례도 치르지 않았거나 젖먹이였거나 심지어 태어나지 않았던 사람도 있다. 작은 동네 소연동에서 8명이나 차지한 것은 아무래도 처음 발의한 소연마을의 강정희에게 포섭된 결과가 아닐까 싶다.

20년 후에 틀이 잡혔을 때 계원간 최대 나이차가 37살이면 시사(詩社)나 친목계라기보다는 동네계(洞契)에 가깝다. 그럼에도 그때까지는 인근의 행세하던 집안의 대표들로 구성된 느낌이다.

그러다가 1917년 이후 계원들은 폭발적으로 증가한다. 20주년 기념행사가 성공적이었나 보다. 1931년 한오정 건립 이전까지 79명이 추가되었고, 한오정 건립 이후 25명이 다시 추가되었다. 13개 성씨는 46개 성씨로, 8개 마을에 불과하던 계원은 동강 운서 세동 백련 송대 모전 노장동은 물론 심지어 동호마을 뒤 당두재 너머 미천 대포 대천까지 확장되었고, 한일합방 이후의 출생자도 있고 초기멤버 연배의 사람들도 가입하여 조금 과장해서 말하면 面內의 성인남자들을 모두 망라한 느낌이다. 수라도(修羅道) 같은 세상에 서로 의지가지할 데가 필요했던 모양이다.

 

7. 화산12곡에서 소개한 강용하의 「한오대 계안의 서문」에 ‘宗秀正熙允瑞甫與兒子桂馨倡率同志~’를 나는 “종수‧정희‧윤서君과 나의 아들 계형이 동지들을 이끌고~”라 번역하였다.

한오대 각자에도 이름이 없는 종수와 윤서는 누구일까 하고 고민하였고, 연장자가 아랫사람을 지칭할 때는 字를 부르는 경우가 많으므로 누구의 字가 아닐까 하고 생각은 했지만 자료가 없어 확인하지 못하였다. 또 서문의 끝 부분에 “이렇게 되기까지 윤서의 공이 어찌 적다 하리오?”라 되어 있어 지금은 왜 앞에서와 달리 윤서 한 사람만 들먹이지 하고 의심하기도 하였다.

이제 바로잡는다. 종수‧정희‧윤서는 세 사람이 아니라 한 사람이라는 것을. 윤서(允瑞)는 강정희의 字이고 종수(宗秀)는 사람 이름이 아니라 종중의 수재(문중의 뛰어난 선비)라는 뜻으로. 또 이런 오류가 얼마나 더 발견될지···.

아래 한오정기(漢鰲亭記)에서 정자의 공사를 감독하여 완성하였다는 홍창식, 또 한오대기(漢鰲臺記)를 쓴 강창희는 동호마을 앞 관영차밭 옆 청풍정 유허비의 주인공 강창희가 맞는 것 같은데 둘 다 명부에는 없다.

 

 

한오대서(漢鰲臺序)

 

우리 조선이 명을 받은 후 60여년, 단종이 왕위를 물려주는 때를 당하여 친족으로는 금성‧한남 두 왕자와 신하로는 삼정승과 육신(六臣) 및 여러 대부(大夫)들이, 백이‧숙제가 말고삐를 잡고 간하던 심정으로 비간의 심장이 쪼개지던 형벌을 받았다.(*백이‧숙제는 주나라 무왕이 은나라를 치려고 출정할 때 喪中에 신하로서 천자의 나라를 치는 것은 인륜에 어긋난다며 말고삐를 잡고 말렸다 하고, 비간(比干)은 은나라 폭군 주왕의 숙부로 직간(直諫)을 일삼자 왕이 “성인의 가슴에는 구멍이 일곱 개 있다고 하던데 사실인지 보자.”며 비간의 가슴을 갈라 죽였다 한다.) 비록 일은 성사되지 못했으나 한때의 공은 백세에 전해질 만했으니, 아 아름답도다!

일찍이 논한 바, 당시에 왕조를 누린 지 얼마 되지 않아 삼강오륜이 서지 않았으므로, 하늘의 의도는 이것을 세울 일대기회로 다른 것으로 충의지사의 지조와 절개를 뚜렷이 나타내어 우리 왕조의 기틀을 천년 백년 견고하게 한 것이다.

이로부터 사대부들은 道를 배우고 義를 닦는 것을 숭상한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먼 시골의 좁은 집에 사는 어리석은 남정네와 아낙네까지도 임금과 어버이가 중하다는 것과 충효가 크다는 것을 능히 알게 되었다. 그리하여 평온무사하게 살 때는 각자의 직분에 따라 힘을 다하고, 변고를 만났을 땐 처한 바에 따라 죽음에 이르기도 하였다.

이처럼 해외의 구석진 나라에까지 교화가 온세상에 넘치게 되었으니 이 어찌 왕자와 대부가 앞서서 이끈 공이 아니겠는가? 그러므로 나는 그것이 하늘의 뜻이라고 말한다. 

아, 두 왕자는 의리를 굳게 지킨 것이 같았고, 화를 당한 것 역시 같았다. 금성대군은 순흥으로 유배를 당하였고 후에 부사 이보흠과 같이 죽었다. 한남군은 함양에 유배되어 종신토록 금고형에 처해져 다만 죽음을 면하기만 기다렸다. 그러므로 이른바 유배된 섬과 마을이라는 곳은 군 남쪽의 황량하고 적막한 물가에 위치하였고, 아마도 당시에는 아무도 살지 않고 다만 호랑이 울부짖고 원숭이 우는, 숲 깊고 등나무 우거진 하나의 빈산에 불과했을 것이다.

그리하여 못가에서의 읊조림도 전하지 않고 창랑의 노래도 알려지지 않았으며(*귀양지에서 읊조린 시문이 남아 있지 않다는 말), 마침내 천지에 우뚝한 일월처럼 빛나는 충심과 대절은 흐르는 물과 하늘의 뜬구름처럼 돌아가 버렸다. 이제 와서 그 옛터에서 남아 있는 흔적을 찾으려 해도 한남이라 이름한 마을과 왕손이 지냈던 섬이 있을 뿐이라 한다. 그것도 다만 나뭇꾼과 목동의 입과 귀에 있을 뿐, 선비들의 논의에는 없으므로 백세 이후에 기록으로 전해지는 것은 없다. 이 어찌 하늘은 거칠고 땅은 궁벽하니 두 개가 서로 부합하여 그런 것이 아니겠는가? 아, 안타깝구나!

나의 집안은 대대로 군에 살았고 또 한남촌에 임시로 거주하여 소싯적부터 귀로 듣고 눈으로 본 것은 다른 사람에 비할 바가 아니다. 비록 깊고 높이 경모하였으나 세상에 드러내어 밝힐 재주가 없는 것이 한스러웠는데 종중의 계형(桂馨)이 뜻이 같아 서로 더불어 이 일을 의논하였더니 탄식하며 말하였다. “그대 혼자 고심해도 성취한 것이 없다면, 어찌 중인들과 함께 일을 도모하여 나아가지 않는가?” 이에 논의를 세우고 널리 알렸더니 뜻있는 선비들이 따르며 화답하였다. 강상문 양재도 유진후 제군들이 바로 이들이다.

드디어 오서 위에서 계를 설립하고 모범으로 삼을 조목으로 남전(藍田)의 향약(*송나라 呂氏향약)과 백록동(*주자의 백록동서원)의 규약을 따랐고, 상평전(常平錢) 100문씩을 각출하여 필요한 경비의 밑천으로 삼았다. 또 4월8일을 택하여 회포를 푸는 날로 정하였다. 노를 저어 갔다가 시를 읊으며 돌아오고 술단지에서 술을 따르고 시축에 시를 적고, 先人의 향기를 봄풀에서 찾아보고 옛터의 영령을 조상하였다. 이로부터 21년이 지났다.

금년 봄이 되어 옛사람이 거닐던 아름다운 자취와 한오대의 이름과 계원들의 성명을 빠짐없이 석면에 선명하게 올렸다. 이에 옛마을은 광채가 나고 옛섬에는 아름다운 자취를 남겨 前人을 경모하는 마음을 세상에 드러내는 일이 조금은 성취되었다고 할 것이다. 이 어찌 제군들이 옛것을 좋아하고 현인을 사모하는 마음 때문이 아니겠는가? 또 왕자의 충의를 기억하는 것이 나라의 바른 가르침을 주창하는 일이 된다면 오늘 우리의 강론이 혹 다른 시대에 문명의 조짐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계의 일이 丁(丁酉年 1897)에서 시작되고 丁(丁巳年 1917)에서 완성되었으니 가만히 생각컨대 우연이 아니니, 지금부터 십정 백정이 지나도 그대로일 것이다. 펼쳐서 넓히고 크게 나아가 이 의리를 세상에 밝히고 이 臺를 후세에 전하여 문명의 좋은 운세를 받는 것은 후인들의 책임이다. 이 역시 옛것을 좋아하고 현인을 사모하는 데 마음을 쓰는 것 이외에 다른 데서 구하는 것은 불가하다.

기타 강산의 아름다움과 경치의 풍부함도 仁과 智보다 낫지 않고, 산수벽(癖)이라는 것은 본래 만에 하나도 형용하기 어렵다. 그러므로 생략하는 실수는 할지언정 넘치는 실수는 감히 할 수 없다.(*산수보다 仁義가 소중하고 산수 사랑을 제대로 묘사하기는 쉽지 않으므로 산수경치에 대해서는 말을 아끼겠다는 뜻)

나는 어리석고 계의 일에 작은 도움도 주지 못했지만 제군들이 말하기를, 내가 앞서 주창한 위치에 있고 글이 좋으므로 남을 추천하고 본인이 사양하는 것은 안된다 하여 부족한 글이나마 평소 흉중에 쌓인 것을 차례로 쓴 것이 위와 같다. 이로써 한오대 계모임의 序로 삼는다.

조선 526년 정사(1917) 4월 상한(上澣 *상순) 진양(晉陽) 강정희(姜正熙) 序

 

한오대계회사실(漢鰲臺契會事實)

 

엄천의 가운데에 한남촌이 있고 그 건너편 언덕에 오서가 있다. 섬을 자라섬이라 칭한 것은 구불구불 서려 있는 형상이 자라를 닮아 그 뜻을 취한 듯하다. 마을 이름을 한남이라 한 것은 故 왕자 정도공 한남군의 귀양지였기 때문에 그리된 것이 분명하다.

우리 왕조에서 세조가 선위를 받을 적에 천하가 周나라를 높이듯이(*단종의 정통성을 천하가 주나라를 정통으로 인정하고 숭상하는 것에 빗댐) 왕자는 가까운 종친으로서 인륜의 격변을 만나 복위의 계획을 품었으나 결국 일은 뜻대로 되지 않고 섬에 유배되고 마을에 살게 되었다.

지금 마을 서쪽에 한남군의 오래된 폐허가 남아 있고, 터의 몇 무(武 *1무는 석자) 위에는 석두(石竇 *돌구멍)가 있는데 ‘한남군굴’이라 칭한다. 그 속에는 당시에 사용하던 수저가 완연하게 남아 있고 마을사람들이 사제(社祭 *봄 가을 토지신에게 지내던 제사)를 지낼 때 한 그릇 밥으로 한남군의 외로운 혼을 위로하는 제사를 올렸다고 한다. 

이것은 士人들의 입으로 전해지는 말에서 나왔는데 두메산골이라 문헌은 없다. 그래서 누구와 더불어 일을 꾀하고 무슨 일을 함께 했는지는 자세하지 않다. 그러나 귀와 눈으로 보고 들은 것으로 헤아려보면 왕자의 집은 우리 고장이 아니지만 여기서 卒하고 여기서 장례지낸 것은 분명하다. 충단에 함께 배향된 것은 義로 시작되어 義로 끝났으니 기록 역시 확실하다. 입으로 전해지는 것이 믿을 만하고 거짓이 아니라는 것이다.

아, 왕자가 안으로는 금성대군과 義를 같이하고 밖으로는 성삼문 박팽년 등과 그 忠을 같이 하니, 그 순수한 충의와 큰 절의가 천지에 온전하고 일월처럼 밝아 백세 후에도 그 소문을 듣는 이를 흥기시키는데 하물며 그 땅에 사는 사람들이야 어떻겠는가?

다만 땅이 외진 곳에 치우쳐 이때까지의 습속을 깨뜨리지 못하고 文風이 떨치지 못하여 나이든 유생들이 글을 짓지 않았다. 그리하여 어느덧 사백년이 흘러 지난 흔적이 구름처럼 흩어지고 남겨진 교화가 연기처럼 사라져버렸다. 폐허에 봄바람이 불어 왕손의 풀만 푸르게 나부끼고 밤중의 달은 깊은 산속 하늘에 밝은데 두견새만 피울음을 토할 뿐이다.

정유년 봄에 종중의 뛰어난 선비 정희가 풍류와 운치가 영원히 그치려는 것을 슬퍼하고, 사모하며 우러러볼 데가 없는 것을 걱정하였다. 마침내 나서서 중인들과 논의하고 꾀하여 오서에서 계를 만들고 의를 이야기하였다. 매년 초여름(*4월) 8일에 함께 모였고 차례로 규약을 세워 풍속을 이끄는 규칙으로 삼고 깨우친 선비로 하여금 시를 읊어 뜻을 말하게 하고 술자리를 마련하여 즐거움을 북돋웠다.

이에 풍류는 더욱 넓어지고 숲과 샘은 온통 깨끗해져 경치는 노(魯)나라의 기수(沂水)와 무우대(舞雩臺)에 못지 않고(*논어에 늦은 봄날 기수에서 목욕하고 무대에서 바람 쐬고 노래하며 돌아오겠다는 얘기가 나온다) 진(晋)나라 때 왕희지의 난정(蘭亭 *절강성 소흥에 왕희지가 세운 정자. 명사들을 초청하여 굽은 물에 술잔을 띄우고 시를 지으며 놀았다 함)에 비길 수 있으리라. 바람 쐬고 목욕하는 어른과 아이는 많고 술을 즐기는 젊은이와 노인은 적다.

선군자께서 훌륭한 글로 이끌어주고 이어서 우리 집안의 종숙이 베풀며 무릇 계를 세움에 처음부터 끝까지 남김없이 힘을 다하였건만 불행히도 귀신이 목숨을 거두어 가버려 다시는 전해지는 바가 없으니 아, 안타깝도다.

금년 정사년 봄, 앞의 일을 거울삼고 후일을 염려하여 마침내 땅을 살펴 섬의 약간 동쪽 거암에 대를 쌓고 자취를 기록하여 세상에 널리 오래도록 전해지기를 꾀하였다. 옛사람의 아름다운 행적으로 대의 이름을 짓고 계원의 성명에 이르기까지 남김없이 바위면에 새겼으니 매우 성대한 일이었다.

섬과 마을이 모두 왕자가 거닐던 곳인데 단 한 가지 뜻만 취하면 한쪽으로 치우치는 잘못을 저지를까 걱정하여 하나의 이름에 두 가지 뜻을 합쳐 한오대란 아름다운 이름을 부여하였다. 또 술자리를 마련하고 손님을 불러 기쁜 뜻을 표시하였다.

지금 이후로 문인·시인들은 여기를 지나갈 때 옛터를 가리키며 경모하는 마음을 의탁할 것이니 녹동의 초부를 기다릴 것이 없다. 뛰어난 선비가 나서서 창도한 공이 어찌 적다 하겠는가? 이것을 계승하고 세상이 깜짝 놀랄 정도로 유업을 넓히고 이 의리를 세상에 크게 밝히는 일은 가만히 후인들에게 바란다.  

나는 식견이 얕지만 이미 계를 주창할 때 함께 하였고, 선군자의 성대한 문장을 전해받지 못했음을 알기에 참람하고 망령됨에도 불구하고 그 대강의 사연을 모아 위와 같이 기록해 둔다. 그래도 남은 뜻은 글 끝에 다음과 같이 덧붙인다.

 

엄천의 한 구역은 일두·탁영 양선생의 도학이 있는 곳(*문헌동)에서 시작되고, 양성재 최한후가 염퇴(恬退 *명리를 버리고 물러남)한 곳(*함허정)에서 끝나는데, 그 가운데는 왕자의 충의로 세간에 이름난 곳(*오서·한남촌)이다. 능히 이처럼 처음과 끝이 앞뒤가 맞아떨어지는 곳이 있을 수 있겠는가? 이곳이야말로 더 이상 없을 진경이로다.

도학·절의·염퇴, 이 세 가지는 천지간의 제일가는 사업이다. 도학은 또 세상의 강령(綱領)이 될 것이니, 머물기에 다시없는 진경이며 행하기에 다시없는 사업인즉 익히면 어찌 일등인이 될 수 없겠는가, 어찌 일등인이 될 수 없겠는가?

이 모든 것을 여기에 사는 자는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속악이 끝나면 아악을 연주하는 것은(*나중이 더 아름다워진다는 말) 비단 이곳의 사람들 뿐만 아니라 세상의 군자들 또한 마땅히 알아야 할 바이다.

수계(修契) 후 4일 진양(晉陽) 강계형(姜桂馨) 序

 

한오대명(漢鰲臺銘)

 

한오대계가 성립된 후 21년 봄, 비로소 자취를 기록하고 이름을 새긴 것은 심히 성대한 거사이다. 나는 용렬하고 못나 외람되게도 계의 말석에 참여하여 돌아볼 만한 일도 없지만, 지금 이름을 새긴 뒤에는 일의 시작과 끝을 독려했다고 할 수 있다. 스스로 경모하는 마음을 금할 수 없어 가슴속 회포를 드러냈으니 그 대강의 요지를 취합하여 銘으로 삼았다. 명은 아래와 같다. (*이하 銘은 四言으로 운을 갖춰 지었다. 거기에 맞춰 번역하다 보니 억지스런 부분도 있을 것이다.)

 

화산은 진실로 진경이고 한수(*한양의 삼각산을 화산, 한강을 漢水라 한 데 비유하여, 여기 화산의 엄천강을 한수라 일컬은 듯)는 넓고 넓네. 중간에 열려 있는 신령스런 구역, 대나무는 비취빛 소나무는 푸른빛. 옛 왕손을 추억하는 유배지의 긴 모래밭. 사면 받아 돌아갈 기약 없고 여기 하늘끝이 집이 되었네.

신하의 절개 어기지 않았으니 가슴속엔 한 조각 붉은 마음. 서산에서 고사리를 캐고 상택에서 난초를 읊조렸네(*백이·숙제와 굴원의 고사를 끌어와 귀양지에서도 임금을 잊지 않았다는 말). 대의는 높고 높아 밝은 해처럼 푸른 하늘에 걸렸고, 사람 도리 우뚝 세웠으니 천만인의 가르침 될 만하네. 아! 공은 세상 잘못 만났지만 우리나라 영예로다.

그의 정신 미치는 곳 초목도 정령을 품었구나. 북쪽은 한남촌 남쪽은 오서, 샘이 있고 바위 있네. 회포 풀고 근심 끊으며 거닐었음 분명쿠나. 시대 바뀌고 사물 변하여 지난 자취 사라졌네. 끼치신 향기 이제 그쳤으니 외로운 충성 그 누가 알까? 초목 우거진 옛터, 연기 자욱한 벽촌. 오서의 물결 한스러워 목메이고, 두견새 피울음 원통함을 호소하네.

굽힘이 있으면 펴짐도 필히 있고, 가지 않으면 돌아옴도 없는 법. 많은 선비 뒤늦은 감회, 수백년 지난 오늘에 느껴, 옛섬 위에 추모계를 만들었네. 옛사람 향기 아직도 남아 갈매기와 백로는 편안하고, 경개 좋은 땅과 풍경 은거할 만하구나. 술이 있고 벗이 있고 시를 지어 노래하니 좋은 계절 화창한 마음 난정(蘭亭)과 방불하네. 지켜서 잃지 않았으니 모두 몇 해나 흘렀던가? 이봄 늦게 높은 행적 새겼으니, 큰 글씨 찬란하고 세상살이 본보기가 되었다네.

하얀 이슬 갈대 위에 빛나고 나의 회포 길게 이어지네. 그분을 생각하니 원통한 사연이 저 물 가운데 있어, 흡사 아침저녁 만나는 듯하니 어찌 수고롭게 몽상하랴? 하여 용렬하나 명(銘)을 지어 널리 우리 당에 고하노니, 아아 말세에도 후인들은 익히 알리라. 현인을 사모하고 義를 가르치는 한오대를.

정사 4월 상완(上浣 *상순) 남원(南原) 양재도(梁在道) 銘

 

한오대서(漢鰲臺序)

 

두류 북쪽 동호(마을)의 남쪽에 오래된 한 섬이 있는데 오서(鰲嶼)라 한다. 옛날 단종임금이 양위하던 날 왕자 한남군이 여기로 귀양을 와서, 거닐며 쉬고 굶주림을 즐기며 생을 마쳤던 곳이니, 아 슬프구나!

경태(景泰 *명나라 대종의 연호 1450-1456) 을해년(1455)으로부터 400여년, 그동안 머물던 땅은 황폐하여 빈 터가 되었으니 길 가는 사람들이 탄식하고 마을의 나이든 사람들이 몹시 슬퍼하였다.

그리하여 정유년(1897) 봄, 유생들과 더불어 그가 머물던 것을 그리워하여 계를 맺었다. 나무를 심어 경모하는 장소로 삼고 단(壇)을 쌓아 보호하니 초목은 향기롭고 산천은 더욱 빛났다. 북쪽으로 바라보면 한남인데 방초 무성하고, 서쪽으로 고개를 들면 문헌동인데 높은 산이 치솟아 있다. 이때에 공중에 흐릿한 기운이 눈에 가득하니 감동이 지극하여 슬픔에 겹구나.

무릇 우리 계원들은 선현이 남긴 흔적을 사모하고 풍물이 다르지 않음을 느껴 세세년년 영원히 도탑게 지킨다면 이 땅은 비단 우리들의 행운일 뿐만 아니라 또한 선현들에게도 행운이 될 것이다. 그래서 말한다. 우리 모임의 유생들은 각자 힘쓸지어다.

갑인(1914) 11월 동짓날 진양 강상문(姜尙文) 序

 

한오대기(漢鰲臺記)

 

천하의 명승으로는 마땅히 지리산 만한 것이 없으며, 신성(神聖)한 군왕 단군과 기자가 다스린 강역 안의 남악이기 때문에 이름이 가장 알려졌다. 또 지리의 명승으로는 청학동과 용유담 만한 것이 없으며, 그것은 도덕선생 최문창(*최치원)과 정문헌(*정여창)이 노닐던 땅이었기 때문에 이름 또한 더욱 드러났다. 그것은 대개 인물과 땅이 서로 부합한 연후에 산천이 정채로워지고 명성이 커지는 까닭이다.

용유담에서 물을 따라 5리쯤 내려오면 백척(百尺)의 맑은 못과 천장(千丈)의 붉은 벼랑이 하늘끝 외진 땅에 서로를 비추며 서 있다. 가파르게 치솟은 산과 부서지는 물소리는 바라볼 수는 있으되 접근할 수는 없고, 우뚝하고 시원한 산세는 시를 읊지 않을 수 없게 만든다. 가지 축축 늘어진 높은 소나무는 늠름한 모습이 마치 장부의 기개 같고, 넘실대며 흐느끼는 물결은 울음을 삼키는 지사(志士)의 한스러운 마음 같다.

먼 옛적의 구름이 머물고 한 언덕에 돌이 튀어나온 이곳은 故 충신 이공 한남군 휘(諱) 어(王+於 )가 귀양와서 우거(寓居)하던 땅으로 세상에는 오서라고 전해진다.

오호! 바야흐로 단종임금이 양위하던 때에 순흥의 일(*금성대군과 순흥부사 이보흠의 단종복위 사건)도 결국은 육신(六臣)과 제공(諸公)들의 모의처럼 이루어지지 못하였으니 말한들 무엇하리오? 공은 마지막에 이와 같이 멀리 와 있으면서 백세 전에도 사면 받아 돌아가지 못하였고, 죽어 백세 후에도  한양의 옛집으로 돌아가지 못하였다. 비록 후세에 큰 절의로 기림을 받았으나 이곳에서 제사를 받는다는 얘기는 들어본 적이 없으니 사생(死生) 전후에 한결같이 어찌 그리 기박하였던가?

이땅에는 자못 경치 좋은 곳이 많고 풍토가 뛰어남은 자못 지리 전역에도 양보하지 않을 정도이지만, 특히 지난 자취가 두드러져 기억할 만하다. 또한 이와 같은데도 홀로 적막한 물가에 자취가 묻혀 수백년 동안 알려지지 않았으니 이 또한 어찌된 일인가? 오호라, 운수의 만남도 행·불행이 있고 이치의 통함도 멀고 가까운 것이 있다는 말인가?

지난 정유년 4월일에 여러 유생들을 모아 여기서 계를 만들고는 풀을 베고 나무를 심어 무너진 곳을 보수하고 북돋웠으며, 술 마시고 시를 읊어 사모하는 뜻을 의탁하였다. 서로 말하기를, 선배가 지난날 비록 한번 쉬었던 초목 하나만 있는 땅도 오히려 경모하고 추모할 만한데 하물며 수백년 동안 뚜렷한 흔적[符節]이 여기에 있음에랴? 주역에 “道에 따라 돌아오면 무슨 허물이 있겠는가?” 하였고, 시경에 “빛나는 군자여, 끝내 잊을 수 없도다.”라고 하였으니 이런 것이 아니겠는가?

21년이 지난 봄, 그 앞에 다시 돌을 쌓고 왕자의 봉호와 지명을 좇아 한오대라 하였고 또 모한대(慕漢臺)라고도 불렀으며, 술을 부어 영령을 위로하였다. 자제(子弟)를 권면하여 참된 선비가 되어 선왕의 유민으로서 공맹(孔孟 *공자·맹자)의 마음을 전한다면 이로부터 옛터는 환히 빛나 시골마을의 자랑이 될 것이고 물고기와 새도 情이 새로워질 것이며 안개와 놀은 갑절이나 깨끗해질 것이다. 그리하여 한오대의 명칭이 장차 청학동·용유담과 더불어 함께 알려져 남악삼절(南嶽三絶)로 불리어질 수도 있을 것이다. 아, 그렇게 되면 진실로 백이·숙제가 어려운 일이겠는가?

진실로 처음과 어긋나지 않고 삼가서 지키고 천추 후에도 뒤늦게나마 감회를 느껴 시를 읊으며 돌아오는 벗이 있으니 이 작은 땅이 고래의 나쁜 풍습을 타파하는 날을 이끌 수도 있을 것이다. 후인들 또한 숭상할 만한 바를 능히 안다면 충혼이 기댈 곳이 있을 것이며 우리 道가 의지할 곳이 생길 것인즉 이 臺의 시작이 헛된 이름만 있는 명승이 아니라고 세상에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 臺에 힘입어 세상의 풍속교화에도 큰 공이 있을 것이니 대 또한 아름다운 이름이 돌에 실려 혹시 백겁‧천겁 후에 나라의 옥판과 금궤가(*玉板 金櫃는 나라의 소중한 기록과 보존하는 것) 오히려 좀벌레에 스러지더라도 臺와 돌에 새겨 단청 칠한 말은 이지러짐은 있을지언정 당연히 산하와 더불어 오래도록 함께할 것이며 해와 달 아래 빛날 것이다.

대가 이루어진 날 나는 객으로 여기 놀러와 굽어보고 우러러보며 산수에 정을 쏟고 황홀한 갈대 위의 이슬을 생각하는 마음으로 여러 군자들의 뜻을 받들었다. 조화로움을 다하여 예를 갖추고, 강개한 논의를 하고, 노래를 마치면 경전을 외우고 일어나니 의연함이 마치 새로 지은 정자에 오르고 백록동에 드는 것 같다. 무릇 여기에 임하는 자는 누구든 절의에 감격하고 탄식하지 않겠는가?

내 비록 사람이 보잘것없고 배움이 얕지만 이성(彝性 *타고난 떳떳한 천성)은 남들과 같으니 좌우의 청(請)에 한 마디 말을 하지 않을 수 없어 감히 누(累)가 됨을 잊고 그럴 듯하게 꾸며 책임을 면하고자 이와 같이 말하였다.

조선 526년 정사(1917) 4월 청매실 익어가는 계절, 진양 강창희(姜昌熙) 삼가 쓰다.

 

한오대발(漢鰲臺跋)

 

군의 남쪽 엄천의 중간 기슭에 문헌동과 한남촌이라는 곳이 있는데 마을간의 거리는 겨우 소울음 소리가 들릴 정도이다. 문헌동은 道의 조종 문헌공이 노닌 곳이라 이름을 문헌으로 하였고, 한남촌은 왕자 한남군의 귀양지였기에 한남이라 칭한다. 나는 문헌동에서 나서 자랐고 떠돌다 한남촌에 살게 되었기에 어릴 때부터 어버이와 스승을 모시면서 문헌공의 道를 듣고 한남군의 義를 사모하게 된 것이 본디부터 있었다.

중간에 궁하게 되어 남에게 비웃음을 받을까 싶어 한곳에 거처를 정하지 못하고 아침에는 물가로, 저녁에는 고개 위로 옮겨 다녔다. 앉은 자리가 따뜻해질 겨를이 없고 굴뚝이 검어질 틈도 없이 눈물을 흘리며 쫓겨 다니다 보니 백에 하나도 이룬 게 없고 슬그머니 세월만 흘러 살쩍 위는 이미 가을서리처럼 물들었는데 흉중의 사업은 흐르는 물처럼 쓸려 가버렸다.

마침내 숨어살려는 원래의 뜻에 따라 고향으로 돌아오니 동지 제군들이 한남군의 옛터 오서 위에 나아가 義를 공부하고 계를 만든 것이 2기(紀 *1기는 12년) 가까이 되었다. 丁의 해(*여기서는 丁巳年)를 맞아 금년 봄, 돌에 행적을 새겼다. 이에 기쁨을 이기지 못하여 외람되게 변변치 못한 이름을 그 끝에 올렸으니 전에 앙모하던 情이 조금은 풀렸다고 할 수 있다. 제군자들이 현인을 존중하고 의를 숭상하는 고심(苦心)이 어느 때보다 훨씬 많이 나타난 것도 축하할 만한 일이다.

일찍이 논하기를, 우리나라의 단종임금이 선위한 것은 명나라의 건문제(*명태조 주원장의 손자로 2대 황제에 올랐으나 그의 삼촌 영락제에게 황위를 찬탈당함)가 양위한 것과 판에 박은 듯이 같은데, 황실의 종족이 옛임금을 위하여 복위 계획을 품었다는 것은 들어본 적이 없다. 그런즉 한남군의 이 거사는 다 썩은 백골 같은 황족을 부끄럽게 할 만하고, 평소 소중화라 칭한 것에 더욱 광채를 더하였다. 오호! 뜻은 비록 이루어지지 못했지만 한때의 공들인 보람은 만세에 도움이 되어 이 해외의 구석진 나라에서도 禮와 義를 아름답게 밝혀 천하에 알렸으니 이 어찌 저절로 된 일이겠는가?  

세상에서 옛일을 논하건대, 군자는 반드시 명확히 변별하는 것이 있다 하였다. 그가 불행한 일을 당한 사실로 인하여 계를 세웠는데 그 전말은 제군자들의 글에 다 갖추어져 있다. 내가 쓰는 글은 상(床) 위에 상을 겹치는 일이 될 것이니 무슨 쓸모가 있으리오? 대강 그 중간의 소감을 모아 망령되게도 한 마디 말을 두루마리의 끝에 붙일 뿐이다.

정사 4월 상완(*상순) 진양(晉陽) 류해봉(柳海鳳) 삼가 발문을 쓰다. 

 

한오정기(漢鰲亭記)

 

우리 고장은 산천이 수려하고 인물이 위대하니 진실로 영남 우도의 명승이다. 군 남쪽 방장산 기슭, 용유담의 하류에 오서(鰲嶼)가 있는데, 이곳은 단종조의 충신 한남군 정도공 이선생의 유배지이다. 후에 점필재·일두·탁영·남명 등의 제선생이 여기 산수간에 노닐었으니 산중의 옛 사연 뿐만 아니라 남녘땅에서 신명(神明)이 모이는 중심지이다. 

지난 정유년(1897)에 나는 강정희·강계형 두 벗과 더불어 동지 및 가까운 사람들과 함께 청화절(淸和節 *음력4월)을 맞아 계를 맺었으니, 하나는 옛날 왕희지가 난정에서 아름다운 모임을 가진 그 맑고 깨끗한 흥취를 모방한 것이요, 하나는 현인을 본받고 덕을 높이자는 뜻이다.

이날, 나이든 사람과 젊은이가 모두 이르러 연회를 베풀어 술을 권하고 문장을 품평하고 글을 외우면서 (한남군을) 추모하는 정성을 나타냈다. 그리고는 강기슭의 큰돌에 나아가 대의 이름[漢鰲臺] 세 글자를 새기고, 무산 강공이 서문을 지었다. [*무산 강용하의 漢鰲臺契案序(한오대 계모임 문서에 쓴 서문)/화산12곡 참조]

삼가 생각해보니, 정도공(貞悼公)은 왕족으로서 바야흐로 큰 명분이 한번 바뀌는 때를 당하여, 임금과 지극히 가까운 종친으로서 어려운 처지를 만났으니 장차 어떻게 하여 그 뜻을 나타냈을까? 저기를 따르면 살신성인할 것이요, 여기를 따르면 부귀영화를 누릴 것이어늘, 이것을 버리고 저것을 취함으로써 충심은 밝은 해를 뚫고 이름은 청사에 드리웠으니 어찌 위대하지 않을손가?

내 비록 지극히 어리석고 문장을 이루지는 못했으나 나에게도 한 조각 ‘병이지성(秉彛之性 *떳떳하게 타고난 천성)’이 없을 수 없다. 또 가일층 경모하는 것은 선조 일영공(一寧公)·응천공(凝川公) 양세대가 [허후·허조(許詡·許慥) 父子] 六臣이 화를 당할 때 같이 화를 입었던 것이니, 조정의 변고가 극심하던 때였다. 이에 진실로 감회가 없을 수 없다.

나라가 망한 지 21년(1931), 그 오른쪽 땅에 정자를 세웠는데 네 기둥에 세칸짜리였고 청기와로 지붕을 덮었으며 흙계단과 소나무 침상은 맑고 깨끗하여 법도가 있고 산천은 더욱 빛나고 풍경은 볼만하였다. 저기 뛰는 것은 아름다운 물고기이고 헤엄치는 것은 오리로다. 저들도 기뻐하지 않음이 없는데 하물며 사람은 어떻겠는가?

지금 천지가 막다른 곳에 이르러 삼강(三綱)이 끊어지고 구법(九法 *홍범9조)이 무너졌다. 이에 순박한 사람과 단정한 선비는 깊은 근심을 그치지 못한다. 간절히 바라건대, 동지와 여러 군자들은 음풍농월하는 장소로 여기지 말고 진심으로 道를 향해 나아갈 것을 으뜸으로 생각한다면 극히 다행한 일일 것이요, 그렇지 않으면 한때의 놀고 구경하는 장소에 불과할 뿐일 것이다.

금년 4월8일 잔치를 베풀고 정자의 낙성(落成)을 하여 마을의 수재들이 어울려 학문을 논하고 시를 지어 마음속의 회포를 풀어내니 말세의 성대한 일이다. 큰 공사를 감독하여 정자를 완성한 이는 홍君 창식이다. 이에 기문을 짓는다.

신미년(1931) 단양절(*단오) 하양(河陽) 허경오(許璟五) 삼가 쓰다.

 

[이 게시물은 꼭대님에 의해 2017-10-03 06:50:10 지리다방에서 복사 됨]
21 Comments
산지골 2017.08.21 17:35  
무슨 내용일까 궁금했는데 이렇게 국역을 해주시니
고맙습니다. 정말 수고하셨습니다.
차분히 읽어보니 내용도 재미있네요.
보나마나 지루한 글이겠거니 짐작했는데
생각외로 내용이 재밌어 인근 주민들과
관심있는 함양사람들에게도 이런 것이 있다고 소개하고 싶습니다.
무더운 날 국역하느라 수고해주셔서 다시 감사드립니다^^
강호원 2017.08.21 19:34  
서, 기, 발, 명, ...
모두가 구구 절절이 단종의 억울한 양위를 복위하고자 한 한남군의 충심을 기리는
명문들입니다.

읽기도 힘드는데 번역하느라 없는 머리 더 빠진 건 아닌가 걱정입니다.
덕분에 귀하고 아름다운 글을 수월하게 접하게 됨을 감사합니다.

다음 주 월요일(28일) 저녁, 삼천포에서 한 잔 하입시다.

수고하셨습니다.
백산 2017.08.21 20:22  
한오대 계안(漢鰲臺 契案), 산지골님이 소중한 자료 구하셨네요.
한남군 사후 400년 뒤 지방 유생들의 계안을 통해 당시 역사의 새로운 단면을 알게 됩니다.

좋은 사료 번역하시느라 수고하셨습니다.
가객 2017.08.22 04:42  
자료중에서도 강계형의 한오대계회사실(漢鰲臺契會事實)이 명문중의 명문입니다.
문집에 대한 이선생의  견해와 주석이  본문보다 더욱 충실한 명문이라서, 한오대 역사가 쉽게 다가옵니다.
한남군 굴에 관해서는 들은 기억이 어렴풋 합니다.
한남군 굴과 한오정터 ...언제한번 살펴보도록 하입시다.
적잖은 분량의 자료인데 국역에 수고하셨습니다.
산지골 2017.08.22 15:55  
한오정 위치에 대해 한남 마을 지인(김진두)에게 물어보니
새우섬에 있었다고 확실하게 이야기 하네요.
지금 화계 사는 이화라는 사람의 부모가 예전에 새우섬에
집을 짓고 살았다고 합니다. 그 때 주택도 있고 새우섬 안쪽 물길에 방아도
찧었다합니다. 사람도 살았으니 바로 거기에 정자를 지은걸로 보입니다.
엉겅퀴 2017.08.22 17:47  
기록만 못 찾았다 뿐이지, 한오정이 새우섬에 있었다는 데에는 대체로 저도 동의합니다.
마을분들도 정자를 직접 본 사람은 없고, 섬에 있었다 하더라는 얘기만 하더군요.
물론 50~60년대까지 있은 것 같다고 하는 분도 있었지만, 병자년(1936) 대홍수 이후 중건된 적이 없다는 것이 대체적인 의견이었습니다.

모래 또는 푸석한 퇴적토에다 당시는 건너다니기도 힘들었으므로
임시거처 움막이면 몰라도 정식으로 집을 짓고 살 수 있는 환경은 아니었다고 하더군요.
또 물레방아 얘기도 들었는데, 물길이 일정치 않아 얼마 안 가서 철거했다고 하였습니다.

한남군의 가대지에는 무덤 1기가 있었는데, 한남군의 가묘가 아닐까 하는 얘기도 있었답니다.
누군가 집을 짓고 살았는데, 한쪽 귀퉁이에 위치하여 정식 가대지는 아니었다고 했고요.
한남군굴에 대해서는 다들 금시초문이라 하더군요. 마지막 동제를 주관한 어른까지도 선배들한테 들어본 바가 없답니다.

나머지 얘기는 다음 기회에...
꼭대 2017.08.26 12:00  
읽기도 벅찬데 국역하기는 얼마나 힘들었겠습니까.
여간 차분한 성격이 아니면 못해낼 일이라 새삼 <엉겅퀴>님의 성품을 알게 됩니다.

‘한오대기‘에,
‘홀로 적막한 물가에 자취가 묻혀 수백 년 동안 알려지지 않았으니 이 또한 어찌된 일인가?’

수백 년 동안 알려지지 않았던 역사가 ‘한오대계안’이 없었다면, 또한 있었다한들 이렇게 세상에 나와 국역되지 않았다면, 영구히 희미한 구전을 놓고 설왕설래만 하였을 겁니다.

‘한오정기‘를 읽다보니 좋은 문장을 멋지게 국역한 구절을 옮겨 봅니다.

‘동지와 여러 군자들은 음풍농월하는 장소로 여기지 말고 진심으로 道를 향해 나아갈 것을 으뜸으로 생각한다면 극히 다행한 일일 것이요, 그렇지 않으면 한때의 놀고 구경하는 장소에 불과할 뿐일 것이다.’

지리산을 대하는 지리산꾼들의 마음자세에 적용될 문장입니다.
산지골 2017.08.28 19:31  
한오대 경임안(142쪽) 이라는 서책(필사본)이 같이 있었는데
혹 여기에 한오정 위치에 관한 내용이 있나싶어
오늘 책을 빌려 복사를 했습니다.
우편으로 보내 드릴테니 한번 살펴봐 주십시오.
대부분 게금과 관련된 거고 한문이라 눈이 아파서 이런게 있네 하고 넘어갔는데
혹시나 해서요. 정자 공사를 맡았던 홍창식이 유사를 맡았을 때 전후를 보면
혹 정자 위치에 관한 내용이 숨어있지않을까 싶네요.
마지막에 발문에 정자관련 언급이 보입니다.
1988년부터는 새로운 장부에 기록이 최근 9년전까지 이어져 있습니다.
9년전에 운서에서 6명이 한오대계를 했더군요.


위치에 대해 혹 구전이라도 확실히 기억하는 사람이 잇나싶어
수소문 해봤는데, 강이화(78세?)씨는 어릴 때 동란전 새우섬에 4~5 살았지만
철이 없던 6살? 때 일이라 정자에 대한 정확하게 들은 기억이 없다하네요.
한남마을의 김재호(78세?)씨는 새우섬 솔나무를 배경으로 한오대 정자 그림을
문정국민학교에서 본 적이 있다하는데 오래전이라 기억이 정확하지 않다합니다.
산지골 2017.08.28 19: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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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지골 2017.08.28 1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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