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산행기
용유담의 계(契)
옛사람들은 계(契)를 맺는 일을 수계(修契)라 하였다. 물론 결계(結契)라고도 하였지만, 압도적으로 수계(修契)란 말을 선호하였다. 글자 그대로 하면, 계를 닦는다? 뭔가 어색하다. 그것은 수계(修契)가 수계(修禊 또는 脩禊)에서 유래했기 때문이다. 이때 수계(修禊)의 계(禊)는 계제사(禊祭祀)의 계(禊)를 말한다. 계제사(禊祭祀)란 중국 고대로부터 삼월 상사일(上巳日 : *3월의 첫 巳日)에 액운을 떨쳐버리기 위하여 물가에서 지내는 제사를 일컬었다. 몸과 마음을 정갈하게 닦기 때문에 修(닦을 수)라 하였다. 혹시 논어에 "늦은 봄날 기수(沂水)에서 목욕하고 풍우대에서 바람쐬고" 한 것도 당시 계(禊)의 풍속을 반영한 것은 아닐까?
이처럼 계(契)와 계(稧)는 다르다. 우리 고유의 민간 협동·친목단체인 계(契)와 제사의 계(稧). 물론 우리의 契가 禊에서 왔는지는 확실치 않다. 그런데 禊에서 보듯이 ‘보일 시示’ 부수가 들어가 있는 글자는 제사 또는 신(神)과 관련된 글자가 많다. 社(토지신 사) 祀(제사 사) 神(귀신 신) 祖(조상 조) 祠(사당 사) 禍(신이 내리는 재앙 화) 신에게 빌다는 뜻인 祈(기)·禱(도)·祝(축), 祭(제사 제) 각종 제사를 나타내는 祊·祔·祣·祫·祼·禘(팽/부/려/협/관/체) 등 무수히 많다. 그것은 示가 갑골문에서는 제단·제상을 나타냈기 때문이다. 示 윗부분 一(丶)은 제물을 뜻하고.
복(福)이라는 글자도 갑골문을 보면 이런 모양이다. >
제단(示=丅)에 술병(畐=酉)을 두 손으로 받들어 올리거나 술병을 기울여 복을 비는 것을 뜻한다. 그래서 제사 후에는 반드시 음복(飮福)을 해야 복을 받는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너무 과하게 복을 빌어 늘 운전대를 마누라한테 넘기는 것이 문제기는 하지만. 어쨌거나~.
왕희지(307-365)가 절강성 산음의 난정(蘭亭)에서 전통적인 계제사에 명사들을 초빙하여 유상곡수(流觴曲水 *물굽이에 잔을 띄워 노는 것)하면서 시회(詩會)를 연 이래 계(禊)는 사대부들의 모임으로 성행하게 되었다. 후대에 禊와 성격이 다른 契에도 修契라 한 것을 보면 禊의 의식(儀式)은 사라져도 禊의 유풍이 남아 있어서 그런 것이라면 契가 禊에서 유래한 유력한 증거가 아닐지…. 아니면 契를 좀 더 고상하게 보이기 위한 사대부들의 용어선택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용유담도 신성한 물가라는 의미에서 수계하기에는 적절한 장소였을 것이다. 용유담의 바위에는 수많은 이름들이 새겨져 있다. 그중 단체로 나열된 이름은 대부분 어떤 계의 계원들로 추정된다. 그러나 바위에 이름은 남겼지만 그 계가 용유담으로 인해 탄생했는지, 아니면 단지 기념으로 용유담에 각자(刻字)만 했는지는 알 수 없다.
용유담처럼 수계(修契)하기 좋은 곳을 옛사람들도 그냥 지나치지는 않았을 테고, 각 계(契)마다 장부를 만들어 기록을 남겼을 테지만, 나로서는 기록이 없으니 더 이상 알 수는 없다.
내가 아는 것은, 강지주(*跡隱 姜趾周 1856-1909)의 『용유담수계서(龍游潭修契序)』가 용유담에서 직접 계를 맺은 사실을 알려주는 유일한 문서이다. 강지주는 우리에게 제법 친숙한 이름이고, 글 또한 좋으므로 소개한다. 화산12곡 용유담 편에서 잠깐 언급한 적이 있다. 아시다시피 그의 이름은 남쪽의 용유담 각자 아래에도 있다. 시대는 1890년대로 추정된다.
이로써 용유담에 관하여 우려먹을 만한 것은 거의 다 우려먹은 것 같다. 더 있다 해도 이제는 제끼자!
용유담수계서(龍游潭修契序)
남방의 방장산은 소중화의 태산이요, 산의 북쪽 용유담은 소중화의 기수·사수(沂水 泗水 *공자의 고향을 흐르던 강)이며, 용유담에서 노닐며 구경하다가 시를 읊으며 돌아오는 자는 소중화에서 공자의 가르침을 공부하는 자들이다. 천하에 배우는 자들을 크게 얻어 노닐며 구경하는 것은 백세의 아름다운 일인데 지금은 끊어져 겨우 바다 밖의 변방에 남아 있을 뿐이다. 여기 산수가 있고 뛰어난 인물들이 있음이여, 아 성대하구나!
용유담은 함양군 남쪽 엄천 상류에 있으며, 산 북쪽의 여러 산골 물이 모여 못이 되었다. 못은 수십 묘(畝)에 뻗쳐 물이 괴어 물결이 일고 깊어 그 바닥이 보이지 않는다. 양 언덕의 바위는 병풍처럼 벌려 서 있고 상(床)처럼 포개져 있으며 모나거나 둥글고 오목하거나 볼록하여 그 모양이 하나도 같은 것이 없다. 협곡에는 키큰 나무들이 시원한 그늘을 드리워 여름에도 더운 줄을 모른다.
옛 문헌은 너무 아득하여 상고할 수가 없고, 가까운 시대를 말하자면 점필재ᐧ일두ᐧ탁영ᐧ뇌계ᐧ신안ᐧ남명ᐧ한사ᐧ구주 같은 선생들이 있어, 당시 목욕하고 바람 쐬며 노닐던 선현들이었다. 신안(*新安 姜顯 1486-1553) 같은 분은 성군(聖君)의 지우(知遇)를 얻어 이 못을 하사받았으니 당(唐)의 하지장이 현종에게 경호(鏡湖)를 받은 거와 같다. 한사(*寒沙 강대수 1591-1658)와 구주(*鷗洲 강대적 1594-1678)는 바로 나의 집안 선조이다.
이 땅은 이미 여러 선현들의 정채(精彩)를 입었고 또 성군의 은택을 받았다. 그런 연후에 사람과 땅이 만났으니 산은 더욱 높아지고 물은 더욱 깊어져 남겨진 아름다운 기풍의 여운은 장차 하늘 땅과 더불어 시작과 끝을 함께 할 것이니 어찌 못과 산의 신령께 하례(賀禮)의 술 한 잔을 드리지 않겠는가?
당시 노래를 부르며 돌아오던 즐거움은 감히 소인의 속마음[腹]으로 헤아릴 수 있는 바가 아니며, 또 감히 언어로 능히 나타낼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일찍이 들으니 동파 公이 말하길, “산색과 녹수 가운데에서 호흡하니, 비천한 남녀도 빙옥 같은 자태를 지녔구나.”하였다. 진실로 이 말은 산수가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이 이처럼 빠르다는 것인데, 나는 못 위에 산 지 36년이 지나도록 옛날 그대로 골몰해 있었으나 얻은 것이 하나도 없으니 비천한 저 남녀만도 못한 것이 또 많다.
그러나 선현들의 발자취를 거슬러 오르고 선조의 시를 외우면 높이 경모하는 생각이 저절로 심중에 일어나 쏟아낼 곳이 없다. 이에 약간의 동지들과 더불어 계를 맺고 규약을 세워 노래하고 읊조리는 유풍과 한가하게 앞날을 보낼 바탕으로 삼고자 한다. 다만 중인들의 비웃음 뿐만 아니라 응당 신령의 꾸짖음이 있을 것을 알지만 마음속으로 그만둘 수 없는 것은 이 역시 타고난 성품은 없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비난과 꾸짖음을 돌아볼 겨를이 없음에 다른 날 갑자기 주자 같은 사람이 와서 만나게 되면 망령되게 백록동(*주자의 서원이 있었던 곳)의 초부에 견주리라.
나머지 계를 맺은 전말과 규약 절차는 제공들의 기록에 다 갖추어져 있다. 다시 알맹이 없는 얕은 말을 더하는 것은 군더더기일 뿐이다.
南方之方丈山卽小中華之泰山也山北龍游潭卽小中華之沂泗也遊賞於潭而詠歸者卽小中華之聖門諸子也以天下之大得諸子之遊賞爲百世光華者絶無而僅有焉矧乎海外褊邦有此山水有此人豪猗歟盛哉潭在咸陽郡南嚴川上流山北衆澗匯而成潭連亙數十畝渟滀漣漪深不見底兩岸巖石或列如屛疊如床方圓凹凸狀貌不一又夾以喬木淸陰翳日夏不知暑焉往牒杳茫遠無所考信而以近代言之則有若畢齋一蠧濯纓㵢溪新安南冥寒沙鷗洲諸先生爲當日風浴之賢而若新安則又得聖主之知遇勅賜此潭如賀鑑之鏡湖焉寒沙鷗洲則則吾之從先祖也此地旣被諸賢之精彩又蒙聖主之恩光然後人地相遇山益高而水益深遺風餘韻將與天壤相終始焉曷不爲潭神嶽靈一獻賀也若其當日詠歸之樂則非小人之腹所敢測度者而亦非言語所能形容者也嘗聞坡公云呼吸山光水綠中傭奴販夫皆氷玉信斯言也山水之移人若是其敏速而予之居于潭上者已歷三紀依舊汨沒毫無所得其視傭奴販夫不及亦多矣然溯諸賢之蹟誦先祖之詩則高景之思自發于中而無地可洩於是與若干同志修契立規以爲歌詠遺風優遊餘日之資非但被衆人之譏笑知應有神靈之呵噤而於心終不已者是亦彝性不泯故也故於譏呵不暇顧而異日倘遇如朱夫子者來訪則以鹿洞樵夫妄擬焉其佗修契顚末立規節次諸公之述備矣盡矣更無膚淺之言可贅也
(원문 : 跡隱遺稿, 경상대 문천각/국역 엉겅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