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산행기

1790년경, 有一스님, <칠불암 상량문>

엉겅퀴 | 10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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⑴ 칠불암 상량문

 

〇 연담 유일(蓮潭 有一 1720~1799)스님의 칠불암상량문은 칠불암의 명칭 유래를 언급할 때 자주 인용된다. 다만 이 부분만. “신라 신문왕의 일곱 왕자가 옥부선인의 피리소리를 듣고 출가하여 깨우쳤기에 칠불암이라 하였다.”

나도 작년 이맘때쯤 산행기(2016.11 「칠불사 한 바꾸」속의 ‘칠불사 명칭 小考’)에서 다른 자료와 함께 역시 이 부분도 아울러 언급하면서 “가락국 칠왕자설”의 허구를 낱낱이 지적한 바 있다.

어쨌거나 사람들은 이 부분만 부지런히 퍼다 나르기만 할 뿐, 전체 모습은 그 누구도 언급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 전부를 소개할 필요가 있겠다는 생각은 했으나, 게으름을 피우다 이제야 그 결과물을 내놓는다.

불교 관련 글은 나에게 늘 어렵다. 전문용어를 비롯하여 축약과 비약이 심하고 뜬구름 같은 화두를 종횡무진으로 끌어오므로. 그래서 글을 제대로 옮겼는지 도대체 자신할 수가 없다. 많이 어긋나지 않았기를 바랄 뿐이다.

간단한 주석은 본문 속에, 약간 긴 주석은 각주로 달았다.

 

칠불암 상량문(七佛庵上梁文)

 

진(秦)나라 사람들이 불사약을 캐러 왔을 때 중국에서는 비로소 우리의 삼신산이라는 이름을 들었다. 신라왕이 명을 내려 옥천사를 쌍계사로 이름을 바꾸어 표방하였지만, 국사(*진감국사)의 종적은 변치 않고 의구(依舊)하다.1) 절은 노을진 산기슭에 기대어 서 있는데, 학사(*최치원)의 문장은 지금에 이르러 오히려 새롭고, 비(碑)는 은하수처럼 우뚝하다. 큰 강이 감싸 안아 섬진은 진주로 통하고, 만 봉우리 병풍처럼 둘러섰고 곡령(鵠嶺 *어딘지 모르겠음)은 연곡(燕谷)으로 내달린다. 여기에 안개와 노을이 피어나는 한 골짜기가 있어, 용 같고 범 같은 스님들이 길이 용맹정진하며 거니는 곳이 되었다. 천년 세월에 혹 난새와 학이 끄는 수레가 내왕하였다고 전해지니, 해외의 동림사(*중국 강서성 여산(廬山)에 있는 절. 4C 혜원스님이 창건)를 옮겨왔다거나 호리병 속에 별세계를 열었다는 말이 어찌 공연한 말이겠는가, 진실로 참람한 말이 아니다.  

이 암자로 말하자면 운상원의 옛터를 넓혀 벼랑 사이에 지금의 이름을 내걸었고, 한 산의 정맥(正脈)이 감추어진 곳이며, 온 골짜기의 영기(靈氣)가 모여든 곳이다. 옛날 신라 신문왕(*재위 : 681~692) 때에 여기 두류산에 선인이 있었는데 옥부(玉浮)라 하였다. 행적은 부구자(浮丘子 *전설상의 신선)와 흡사하고 道는 비야옹(毘耶翁 *유마거사)과 같았다. 그의 옥피리 한 소리가 날아가 궁궐 안의 일곱 사람을 깨우치니, 칠왕자는 한밤중에 성을 넘어 나와 만승(萬乘)의 존귀함과 영화로움을 버렸다. 입산 6년에 삼계(三界 *불교의 욕계(欲界)·색계(色界)·무색계(無色界))가 꿈이고 환상임을 깨달았으니 마치 실달다 태자가 홀연히 깨우쳐 부처가 된 것과 같았다. 농옥공주2)를 논할 일이 무어 있겠는가? 그녀는 단지 봉황새를 따라가 버렸을 뿐인데. 이쪽은 젓대 하나로 절을 세워 칠불암이라 명명하였다.

옛날부터 지금까지 창해(滄海)가 뽕나무밭으로 바뀌는 변혁을 몇 번이나 겪어 시대가 변하고 세상일이 바뀜에 풍운이 변천하는 것을 얼마나 많이 보았던가. 그러나 하늘과 땅의 신령의 도움으로 성인의 자취는 없어지지 않았다. 반타석(盤陁石 *너럭바위) 아래에는 한 자루 옥퉁소가 아직도 남아 있고, 무봉탑(無縫塔 *꿰맨 자국이 없는 탑 또는 하나의 돌로 이루어진 부도) 가운데에는 일곱 점의 사리가 완연하다. 한쪽에는 영지(影池)가 마르지 않아 당시 모후(母后)가 와서 엿보던 것을 상상할 수 있고, 쳔년 된 마른 나무는 아직도 살아서 훗날 선옹(仙翁 *옥부선인)이 다시 올 것을 기다린다. 이런 까닭에 대중들이 모여들어 항상 부처를 뽑는 도량을 열고, 팔부신장(*팔부신중, 천룡팔부)은 수도하는 곳을 오래도록 삼엄하게 호위하고 있다.

경절문(徑截門)3)의 한 단계로 끝내는 활계(活計)3)가 예로부터 지금까지 있어 왔고, 그것이 근기(根機 *부처의 가르침을 받아들일 수 있는 중생의 자질)를 넘어설 경우 행하는 5단계3) 수행법도 선문(禪門)에 있다. 이는 깨달음으로 통하는 큰길 작은 길로, 죽이고 살리는 불문의 가르침을 높이는 것이다. 화두를 희롱하고 몽둥이로 내려치거나 고함을 쳐서 깨우쳐 주는 가풍과 의리를 간직한 선문에서는 아직 정토문(淨土門)4)을 받아들이지 않으나, 평이하게 경(經 *부처님의 가르침)과 논(論 *經의 풀이)을 펼치고 세속에서 알아듣기 쉽게 진리를 설하는 것은 [판독불가 글자 1字] 생각해볼 수 있을 것이다.

삼경이 지나도록 잠들지 못하고 한끼 식사로 정오가 지나도록 먹지 않는 나는 본분납자(本分衲子 *새로 닦을 것 없이 본래 부처라고 하는 도리를 깨달아서 그러한 입장을 견지하는 스님)가 아니므로 주지(住持)도 힘들텐데 어찌 참선하는 승려들의 우두머리가 될 수 있겠는가. 머무는 이 중에 이번에 소임을 맡지 않은 노스님과 더 없이 훌륭한 큰스님이 있는데, 한분은 불법에 통달한 노스승이고 한분은 선문의 고승이다. 혹은 알음알이[知見]를 떨쳐버리고 대승(大乘)의 경지에 높이 올랐거나, 혹은 자비심으로 널리 중생을 어루만진다. 앞뒤로 주석을 맡으면서 암자가 풍우에 기운 것을 탄식하여 사방으로 인연을 구하여 중생을 세상의 水火로부터 구제하고자 하였다. 앞사람이 부르면 뒷사람이 호응하듯 가가호호 서울에까지 이르러 옛날에 무너졌던 것을 오늘날 일으켜 세웠다. 갖가지 인연은 크게 돌아와 발우에 거사들의 밥을 가득 채우고, 사원에 보시하는 장자의 재산을 덮을 정도였다. 

노반 공수5)를 부르지 않았건만 장인(匠人)들은 스스로 왔고, 들보를 묻고 돌을 채찍질할6) 겨를도 없이 木石이 다 갖추어졌으며, 신묘한 설계에다 뛰어난 솜씨를 발휘하여 높다랗고 성대하게 이루어졌다. 황금빛 용마루는 공중에 치솟아 우러러보면 도솔천의 궁전 같고, 옥 같은 사찰은 은하수에 닿았으며, 멀리 봉래산의 상서로운 구름과 접하였다. 서천축의 절도 이와 겨룰 것은 많지 않을 것이니, 남방의 악록(岳麓)7)과 비교하면 어느 것이 뛰어날까?

사방과 연계하여 육위송(六偉頌)8)을 지어 노래 부르게 하여 여러 번 들보를 들어올리는 것을 돕고자 한다.

 

아랑위(兒郞偉)8)! 들보를 동쪽으로 올려라(抛樑東)9). 동산에 법석을 열어 종풍(宗風)을 떨치고, 깨달음은 오직 방아찧는 늙은이에게 있는데, 천년 전의 분신이 이 가운데 있구나.10)

아랑위! 들보를 남쪽으로 올려라. 남쪽의 禪院으로는 이 암자를 말하는데, 맑고 깨끗하게 전해지는 것은 세 묶음 대껍질이고, 한가로이 客을 대하니 일곱 근 장삼이로다.11)

아랑위! 들보를 서쪽으로 올려라. 서쪽에서 온 조사의 뜻은 무엇일까, 조주스님의 한 글자 화두[無]가 가장 친절하니, 전제(全提)니 반제(半提)니 하고 묻지 마라.12)

들보를 북쪽으로 올려라. 궁궐의 임금은 마음을 놓치지 않고, 옥촛대와 금향로로 연단(蓮壇)에 예불하니, 한 소리 맑은 경쇠 삼축가(三祝歌)13)를 노래하네. 

들보를 위로 올려라. 상방세계에서 만나고자 하면, 밥 한 알만 있어도 향기가 풍기는 걸 알아야 하는데, 구멍 뚫기를 그만둔 사람은 모두 콧구멍이 막히리라.

들보를 아래로 올려라. 자리에서 내려와서는 도를 행하고 올라서는 좌선하되, 망령되이 참구(參究 *참선)하기를 좋아한다고 생각지 마라, 꿰뚫어 보면 금까마귀 한밤중에 날아가버릴 테니.14)

 

엎드려 바라건대, 요순시절이 거듭 밝아지고 우담바라가 다시 피어나며, 태평 무사하여 세상에서 격양가15)가 다시 들리고, 佛法이 쇠하지 않아 산속에서도 깨우치는 사람이 많이 나타나기를 비나이다. 

 

【註】

 

1) 의상대사의 제자 三法화상이 당나라에서 육조 혜능스님의 머리뼈를 모시고 와 724년경 지금의 금당터에 절을 세운 것이 쌍계사의 시초라 하며, 진감선사(774-850)가 중창하여 옥천사(玉泉寺)라 이름 지었고, 그후 헌강왕(재위 875-886)이 ‘쌍계사’라 이름을 내렸다고 전해진다.

그래서 이 글에서도 옥천사에서 쌍계사로 이름을 바꾸었지만 진감국사의 종적은 옛날 그대로라고 하였다.

 

2) 진(秦)나라 목공(穆公 *재위 : B.C.659~621) 때 소사(簫史)라는 사람이 퉁소를 잘 불어 공작과 백학을 불러오곤 하였다. 목공의 딸 농옥(弄玉)이 그를 좋아하여 그에게 시집갔다. 농옥 또한 소사에게 퉁소를 배워 봉황을 부를 수 있게 되자 목공이 봉대(鳳臺)를 지어주었다. 이들 부부는 몇 해가 되도록 봉대에서 내려오지 않다가 어느 날 봉황을 타고 날아가 버렸다. 《열선전(列仙傳)》

 

3) 경절문(徑截門)의 글자 뜻은 ‘지름길로 통하는 문’이다. 불교에서는 수행 단계를 거치지 않고 곧바로 본래면목을 터득하여 부처에 이르는 수행법을 말한다. 즉 돈오(頓悟)법이다.

이에 비하여 5단계 수행법[五位 :자량위(資糧位) 가행위(加行位) 통달위(通達位) 수습위(修習位) 구경위(究竟位)]은 돈오가 아니라 점수(漸修)법이다.

활계(活計)는 분별과 언어 생각이 끊어져 이론이나 이치를 통하지 않고 사람의 안목을 열어주는 화두를 방편으로 삼는 것. 그런 화두를 활구(活句)라 하고, 이치나 사리분별로 헤아리는 화두를 사구(死句)라 한다.

 

4) 불교에서는 성불(成佛)에 이르는 길을 크게 두 가지로 나누는데, 자력으로 깨닫는 성도문(聖道門)과 타력신앙(他力信仰)에 의존하는 정토문(淨土門)이 그것이다.

성도문은 이땅에서 깨닫는 것[此土入聖]을 목표로 하나 지혜가 극에 달해야만 깨달을 수 있어 만 명 중 한 명도 성취하기 어렵지만, 정토삼부경(淨土三部經)을 일념으로 염불하면 아미타불의 정토에 들어갈 수 있는 정토문만이 말법의 시대에 맞는 길이라고 정토문에서는 말한다. 나아가 정토문에서는 아미타불을 염송하면 모든 악업이 소멸되며 극락정토에 왕생할 수 있다고 한다. 부처님의 자비력에 의지해 어리석은 사람도 구제할 수 있으니 백 명이 닦아 백 명 모두 왕생한다는 것이다. (인터넷에서 편집)

 

5) 노반공수(魯班公輸)는 노나라의 공수반을 말하며, 고대의 전설적인 장인(匠人)으로 공예가의 시조로 친다.

 

6) 진시황이 돌다리를 놓아 바다에 나가 해가 뜨는 것을 보려 했다. 그러자 신인(神人)이 나타나서 바다로 돌을 내몰자, 돌들이 저절로 바다로 달려갔다. 돌이 빨리 가지 않자 신인이 돌을 채찍질 하였는데 돌에서 피가 흘렀다 한다. 《예문유취(藝文類聚)》

원문 梁埋(양매 *들보(또는 다리)가 묻히다.)또한 그 비슷할 것 같은데 전거를 찾지 못하였다. 

 

7) 중국 호남성 장사(長沙)의 악록산(岳麓山) 기슭에는 악록서원과 악록사가 유명한데 둘 다 경치가 뛰어나다 한다.

 

8) 상량문은 통상 「건축 내력과 동기 + ‘아랑위포량○(兒郞偉抛樑○)’이라는 구절이 동·남·서·북·상·하의 각 3句씩으로 구성된 사(詞) + 마지막 기원문」의 3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래서 보통 상량문에는 동남서북상하 여섯 방위 앞에 ‘아랑위포량○’이 공통으로 들어가므로 상량문을 아랑사(兒郞詞), 아랑송(兒郞頌), 아랑문(兒郞文), 육위송(六偉頌)이라 부르기도 한다.

아랑위는 상량할 때 일꾼들의 기운을 북돋우기 위해 지르는 소리인 ‘어영차’나 ‘어기여차’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또 아랑은 원래 젊은 사람을 뜻하는 말로, 도목수가 아래 장인들을 퉁쳐 부를 때 사용하는 ‘여보게들’ 정도로 해석하기도 한다. 어찌되었든 노동요의 후렴구 정도로 보면 될 것 같다. 여기서는 북·상·하는 아랑위를 생략하였다.

 

9) 포량동(抛樑東)은 ‘동쪽 들보를 들어올리다’ 또는 ‘들보를 동쪽으로 들어올리다’로 옮기기도 하지만, 포(抛)는 원래 ‘던지다’의 뜻이며, 상량식은 마지막으로 집의 뼈대를 구성하는 용마루 아래의 마룻대를 올릴 때 하는 의식이므로 들보는 이미 올려진 상태이므로 새삼스레 동남서북상하의 들보를 들어올린다는 것은 좀 이상하다. 더구나 들보를 위로 또는 아래로 들어올린다는 말은 무엇의 위·아래인지 더 이상하다. 물론 일꾼들이 들보를 목도한 상태에서 여러 방향으로 밀어올리는 상황을 연출하는 것으로 보면 이해가 된다.

고대에는 상량식 때 면(麵)을 마룻대 위에 올렸다 하며, 이후로 모시 명주 등을 걸기도 하였고, 또 사방으로 떡을 던져 고수레하는 풍속도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들보 동쪽에 떡을 던지다’로 해석하는 경우가 더 많다. 고전번역원의 상량문 국역이 대체로 그렇다. 나도 지난번엔 그렇게 해석하였으나, 이번에는 전자로 한번 옮겨보았다.

 

10) 육조 혜능스님은 행자시절 방아 찧는 일을 하였다. 천년 뒤 그분의 분신인 양 누군가 여기에서도 깨우치는 사람이 나올 것이라는 말

 

11) 일곱 근 장삼(七斤衫) : 어떤 스님이 조주스님에게 물었다. “만법은 하나로 돌아가는데, 그 하나는 어디로 돌아갑니까?” 조주스님이 말하였다. “내가 청주에 있을 때 무명 장삼 한벌을 만들었는데 그 무게가 일곱 근이었다.”

세 묶음 대껍질(三束篾) : 대껍질은 잘게 여며 엮어서 자리를 만든다. ‘일곱 근 장삼’과 비슷한 화두로 여겨지는데 여러 화두집에서도 찾지 못하였다.

 

12) 어느 스님이 조주스님에게 물었다. “개에게도 불성(佛性)이 있습니까?” 대답하였다. “없다[無].”

전제(全提) 반제(半提)는 화두를 전부를 들어주거나(온전하게 제시) 반만 들어주는 것.

 

13) 백성들이 요임금에게 축원했다는 세 가지. 수(壽)・부(富)・다남(多男) 《장자(莊子)》

 

14) 화두는 말로써 해석하는 순간 사구(死句)로 떨어져버리지만, 억지로 보충 설명을 하자면 수행은 자유자재해야지 참선에 얽매여서는 증득(證得)하지 못한다는 말 정도로 보면 되지 않을까 싶다.  

 

15) 격양가(擊壤歌)는 요임금 때 백성들이 불렀다는 태평가(太平歌)이다.

“해 뜨면 일하고 해 지면 편히 쉬네. 우물 파서 물 마시고 논밭 갈아 밥 먹으니, 임금님의 덕이 나와 무슨 상관이랴? (日出而作 日入而息 鑿井而飮 耕田而食 帝力於我何有哉)” 물론 지금은 후세의 위작으로 본다.

 

 

⑵ 연담 유일

 

〇 연담 유일(蓮潭 有一 1720~1799)스님에 관해서는 인터넷만 치면 풍부한 정보를 얻을 수 있으므로, 그런 것 다 차치하고 그의 비에 새겨진 글을 소개하는 것으로 대신하고자 한다. 그의 비문도 위 칠불암상량문과 마찬가지로 전문이 번역 소개되는 것은 처음인 것으로 안다.

그의 비는 해남 대둔사에 있으며, 스님의 비문을 쓴 이충익(李忠翊 1744~1816)은 조선후기의 뛰어난 문인·학자였다. 본관은 전주, 출신은 강화도, 호는 초원(椒園)이다. 몰락한 소론가문으로, 하곡 정제두(1649-1736)의 강화학파를 계승하였다. 당시의 유학자로는 드물게 양명학을 공부하였고 노자와 불교도 깊이 연구하였다고 한다.

 

연담화상 비기(蓮潭和尙碑記)

 

대사의 이름은 유일(有一), 자는 무이(無二), 연담(蓮潭)은 그의 호이다. 호남 화순현 천씨의 아들이다. 18세에 법천사의 성철스님을 따라 출가하였고, 안빈 심○(한 글자가 탈락된 듯)스님에게 수계를 받았다. 해인사의 호암 체정 스님 아래로 들어가 몇 년을 모시면서 그 은밀한 뜻을 모두 전해 받았다. 호암은 환성옹의 고제자이므로 (유일은) 청허 조사의 6세 법손이 된다.

그는 뛰어난 고승들에게 두루 참학하였고, 또 동문인 설파 상언을 따라 화엄학을 떨쳐 일으켜 오로지 30여년간 모두 15차례나 강석(講席)을 주관하였고, 항상 그를 따르는 자가 거의 100인에 가까웠다.

정종(*정조) 기미년(1799) 2월 초3일에 장흥 보림사 삼성암에서 입적하였고, 숙종 경자년(1720)에 태어났으니 춘추 80이었다. 경·론·의(經論義)를 서술한 것이 7부 10권이며, 문집·법어 4권과 함께 세상에 통용되고 있다. 문인들이 대둔사 미황사 법천사 등의 여러 절에 솔도(窣堵 *솔도파. 스투파의 음역. 여기서는 부도)를 세웠으니, 모두 일찌기 대사가 주석하였던 곳이다.

대사는 위인됨이 질박 정직하고 막힘없이 대범하여, 비록 세상에서 우러러 존숭을 받았으나 스스로 자랑하거나 존귀하게 여기지 않았다. 어릴 적부터 총명과 오성(悟性)이 남보다 뛰어났고, 눈으로 한번 본 책은 모두 기억하였다. 세상에 통용되는 가르침은 바다처럼 넓은데 깊이 엉켜 있는 것을 송곳처럼 풀이하여 의심스럽거나 어려운 곳이 없게 하였다. 저술한 시문은 손이 가는대로 지었고 글을 꾸미지 않았으나 타고난 자질이 아름다웠다. 근기에 맞춘 설법으로 널리 응대하는 것마다 이치에 들어맞아 덕이 있는 자의 말임을 알 수 있다.

나는 대사의 면모를 본 적이 없지만 여러 차례 그를 따라 노닌 자들에게 들었다. 늦게서야 대사의 문집을 얻어 스스로에 대하여 말한 것을 보니 선한 일은 양보하지 않았고 허물은 그대로 두지 않아 넓게 트인 그의 속마음을 보는 듯하였다. 덕(德)이 재주보다 낫고 뛰어남이 道를 손상시키지 않았다. 주공(周公)과 공자를 높이고 인륜과 의리를 도탑게 여겨 법에 얽매이지 않고 두루 통하는 자이다.

지금 그 문도들이 장차 비석을 세우고자 대사의 평생에 관하여 썼고, 나는 요약하여 서술하는 것을 마다하지 않았다. 만약 대사의 도를 구하고자 하면 그의 글을 읽어야 할 것이다. 요지를 전하지 못한 것이 있다면 의지하여 전하는 자(나, 글쓴이) 때문일 것이다.

 

 

〇 이 글을 새긴 스님의 탑비는 해남 두륜산 대둔사(대흥사)에 있다고 한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명(銘)이 없다. 통상 비문은 그 끝에 고인의 행적·공적·학덕·사상 등을 압축하여 운문으로 나타낸 명으로 마무리를 짓는다. 헌데 그것이 없다. 그래서 제자들은 못내 아쉬웠던지 후에 추사에게 명을 지어 달라고 부탁한 모양이다. 추사는 그의 名·字·號와 관련된 글자로 기막힌 명을 지었다. 추사는 게(偈)의 형식으로 명(銘)을 지었다고 하였는데, 게는 불교에서 부처의 공덕을 찬양하거나 불경의 한 장(또는 한 편)의 끝이나 맨 뒤에 핵심을 요약하여 붙이는 노래 또는 시를 말한다.

 

연담의 탑비에 명(銘)이 없어 그 문하에서 나에게 채워 달라고 하기에 드디어 게(偈)로써 썼다. 그 게에 이르되[蓮潭塔碑無銘詞 其門下要余補之 遂以偈題之 其偈曰]

  

蓮潭大師 연담대사는

有碑無銘 비만 있고 명이 없네

有是有一 있는 것은 有一(唯一)이고

無是無二 없는 것은 無二로다

有非是有 있다고 有가 아니요

無非是無 없다고 無가 아니다

有無之外 有와 無의 밖에서

文字般若 문자반야(*부처님이 설한 經·律·論 모두)

的的明明 명명백백하니

是惟師之 이로써 대사의

眞面自呈 진면목이 절로 나타나네

[연담의 이름은 유일(有一), 자는 무이(無二)이다.]

 

 

〇 마지막으로 다산선생이 유일스님에게 준 시를 소개한다. 고전번역원에서 국역한 것을 거의 그대로 인용하였다. 다산이 17살 때 지었다 한다. 천재다!

 

지리산승가를 지어 유일에게 보이다[智異山僧歌示有一]

 

智異高高三萬丈 지리산 높고 높아 삼만 길 우뚝한데

上頭碧巘平如掌 꼭대기의 푸른 뫼는 편평하기가 손바닥 같고

有一草菴雙竹扉 그 가운데 암자 하나 대사립이 두 짝이요

有僧白毫垂緇幌 흰 눈썹의 스님이 검은 법복 걸쳤네.

松葉稀麋或沾喉 솔잎으로 미음 끓여 간혹 목을 축이고

葛絲煖帽常覆顙 칡덩굴로 모자 엮어 항상 이마 가렸는데

喃喃念經千百遍 중얼중얼 천백 번 불경을 외우다가

忽爾寂然無聲響 갑자기 고요해져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네.

三十三年不下山 서른이라 세 해를 산을 아니 내려오니

世人那得識容顔 세상 사람 어느 누가 그 얼굴을 기억하리

花開花落了不省 피고 지는 꽃잎일랑 전혀 아니 살펴보고

雲來雲去只同閑 오락가락 흰 구름과 한가롭기 한가질세

文豹牽裾戲庭畔 표범은 소매 끌며 뜰앞에서 장난치고

斑鼯聽偈遊牕間 다람쥐는 염불 들으며 창틈에서 놀고 있네

蔘芽滿地無人採 인삼이 땅에 널려도 캐 가는 사람 없고

麂鹿呦呦自往還 노루 사슴 울어대며 제멋대로 다닌다네

此僧名字將誰識 이 스님의 이름자를 장차 누가 알 것인고

煙霞疊鎖蒼山色 안개 노을 겹겹이 푸른 산을 덮었거니

太白藏龍衆共疑 태백산에 용 가둔 일 뭇사람이 의심하고1)

少林面壁愚莫測 소림사에 면벽한 달마스님 우매한 자는 이해 못해

吾聞雪坡入禪定 듣자하니 설파대사 선정에 들었다는데

無乃高蹤此逃匿 혹시 그의 높은 행적 여기 숨지 않았나요

蓮公俛首不肯答 연공은 고개 숙여 대답하려 하지 않고

但道別來無消息 그분과 헤어진 뒤 소식 없다 이를 따름

[설파대사(雪坡大士)2)는 유일(有一)의 법형(法兄)이다.]

 

1) 당나라 때 태백산 꼭대기에 살던 어떤 고승이, 깊은 못에 사는 악독한 용이 오랫동안 못된 짓을 하자 그것을 잡아 가둬버렸다는 일화가 있다.

2) 설파 상언(雪坡 尙彦 1707-1791)스님의 부도는 영원사 동남쪽 부도밭에 있다.

 

 

〖원문〗

 

七佛庵上梁文

秦人采藥 華夏始聞三神之名 羅王降綸 玉泉更換雙溪之榜 國師之蹤跡不老依舊 寺倚霞岑 學士之文章 尙新至今 碑聳雲漢 大江環抱 蟾津通於晋陽 萬岫屛圍 鵠嶺馳於燕谷 由是烟霞一洞 永作龍鉢虎錫之盤旋 風月千秋 或傳鸞驂鶴駕之來徃 所謂移東林於海外 開別界於壼中 豈徒然哉良非僣矣 至若斯庵也 拓雲上之舊址揭壁間之今名 一山正脉之凾藏 萬壑靈氣之輻湊 昔在新羅之代 神文臨朝爰有頭流之仙 玉浮其號 迹似浮丘子 道則毘耶翁 飛玉笛之一聲 警金闕之七子 踰城半夜 舍萬乘之尊榮 入山六年 悟三界之夢幻 恰同悉達太子頓成佛來 奚論弄玉公主 但隨鳳去 於是一竿建刹 七佛命名 古徃今來幾經滄桑之變革 時移事換 多見風雲之迁更 然而神祇悠扶 聖迹不泯 盤陁石下 一柄玉簫尙存 無縫塔中 七枚舍利宛在 一面影池不竭 想當時母后之來窺 千年枯樹猶生 徯他日仙翁之再到 所以十方聚會 常啓選佛之場八部森嚴 永護修眞之所 徑截門一段活計 亘古亘今 過量機五位門庭 通衢通路 擧揚殺活宗旨 拈弄棒喝家風義理禪淨土門尙不許 平展經論 說俗諦ⓧ 可得商量 除三更而不許就眠只一食而莫之過午 故非本分衲子 難以住持 豈可虛頭禪客 所能栖泊 今玆無任老宿 無價大師 一是佛法古錐一是禪門碩德 或以脫洒知見 高超上乘 或以慈悲心情 廣攝群品 先後主席 慨斯庵之雨風 東西乞緣 濟衆生於水火 前者呼後者應 家家門戶透長安 昔之廢今之興 種種因緣歸大數滿鉢㞐士之飰 布園長子之金 不招魯班公輸 而工匠自臻 無假梁埋秦鞭 而木石咸具 運妙手於妙筭 得美興於美輪 金甍排空 仰瞻兜率之宮殿 玉刹磨漢 遙接蓬萊之霱雲 西笁之爛陁不爭多也 南方之岳麓 較誰奇焉 係相四方 撰出六偉之頌 請唱一闋 助擧數抱之梁 兒郞偉拋梁東 東山法席振宗風 承當獨有碓翁在 千古分身在此中 兒郞偉拋梁南 南國禪林說此庵淸白傳家三束篾 等閑對客七斤衫 兒郞偉拋梁西 西來祖意若爲題 趙州一字最親切 莫問全提與半提 拋梁北北闕聖君心不釋 玉燭金爐禮蓮壇 一聲淸磬歌三祝 拋梁上 上方世界要相訪 須持一粒飯香來 穿却人人鼻孔障 拋梁下 下床行道上床坐 莫須妄想好叅祥 會見金烏飛半夜 㑀願上梁之後 舜日重明 曇花再現 莫道太平無象 人間更聞擊壤之歌 須知正法不衰 林下猶多見性之士

(출전 : 한국불교전서)

 

蓮潭和尙碑記

大師諱有一。字無二。蓮潭。其號也。湖南和順縣千氏子。年十八。從法泉性哲師出家。受戒於安貧諶〇師。旋投虎巖體靜師於海印寺。隨侍累年。盡傳其密旨。嚴爲喚惺翁高足。而淸虛祖六世嗣法也。遍參尊宿。又從同門雪坡彦振楊華嚴。專主講席三十餘年。凡十五周。常隨者恒近百人。 正宗己未二月初三日。示寂于長興寶林寺三聖庵。距其生 肅宗庚子。爲八十春秋。所述經論義七部共十卷。文集法語四卷。並行於世。門人爲建窣堵於大芚,美黃,法泉諸寺。皆師所甞駐錫也。師爲人質直通簡。雖爲一世所宗仰。不自矜持尊重。自幼聰悟絶人。博覽羣書。書過目悉記。流通敎海。觽解奧結。沛然無疑難。所著詩文。皆信手爲之。不事藻飾。而天機爛熳。隨機說法。汎應曲當。知其爲德者之言也。余未見師面貌。屢從遊方者耳之。晩獲師文集。覩其所自叙。不讓善。不穩過。曠然如見其衷。德勝其才。儁不傷道。尊周孔。敦倫義。不縛於法而弘通之者也。今其徒將竪石。紀師平生。余略爲之叙述而不辭。如有求師道者。就讀其書。其有不傳之旨。寓而傳焉者歟。

(출전 : 고전번역원)

2 Comments
꼭대 2017.11.08 17:14  
승탑까지 있는 것 보면 유일 스님의 법과 덕이 높았던 분이군요.
대흥사 승탑밭에는 청허당탑을 비롯하여 탑과 탑비들이 유난히 많은데 그 중에 있군요.
문을 잠구어 놓아 들어가서 확인해볼 수도 없거니와 들어간들 한문을 알아야 살펴볼 것인데...

노승께서 상량문 한번 길게 써셔서 애꿎게 <엉겅퀴>님이 국역하느라 수고 많았습니다.

곡령(鵠嶺)이라는 흥미 있는 지명이 숙제로 등장하는군요. 훈차한 것 같은데 고작 200여년 전에 부르던 지명이라 흔적이 남아 있지싶습니다.
가객 2017.11.09 07:22  
상량을 할 때 불려진 일꾼들의 후렴소리 아량위가 생소합니다.
곡령(鵠嶺)은 성호사설과 동사열전에도 보이는데 지리산의 지명이라고 보기보다는 스님이 비유한 단어 같습니다만,연구대상입니다.
늘 많이 배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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