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산행기

1922, 권도용 <방장산부(方丈山賦)>

엉겅퀴 | 905

【읽어두기】

 

⑴ 권도용(1878-1959)은 근세의 유학자이자 언론인‧독립운동가이다. 이 분의 글은 지리99에도 몇 번 소개된 적이 있다. 이 글은 그의 지리산유람기이다. 작자는 친절하게 산행일정을 설명해주지는 않았지만 단편적인 정보를 근거로 작자의 산행경로를 추적해보면 대략 다음과 같다. 4박5일로 추정된다.

 

○ 1922.4.16 함양 출발 - 지안재‧오도재 - 벽송사(1박) - 두리(폐사지) - 마암(부근 1박) - 천왕봉 일출 - 백무동(1박) - 고정(1박) - 화산12곡 일부

 

⑵ 이 글은 산행기이지만 賦(부)의 형식을 빌려 씌었다. 賦는 한문 문장의 한 장르로, 산문과 운문의 중간으로, 즉 시도 아니고 산문도 아니다. 그러나 원래 賦는 시경에서의 표현방식의 하나로 출발하였기에 암송을 위주로 글자 수나 음운(音韻)에 제약을 두었다. 물론 후세에 다 지켜진 건 아니지만, 그런 영향으로 나중에는 내용보다 형식에 치우친 면도 나타나게 되었다.

따라서 생략과 함축, 압축과 정형성을 포함한 賦는 사실을 세세히 전달하는 자유로운 형식의 산행기에는 적합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다른 말로 하면 작자는 그만큼 문장에 자신이 있었기에 산행기에 賦를 선택한 것이리라. 그래서 옮기는 데 애를 먹었다. 능력의 부족을 통감하며 제대로 옮겼는지 자신할 수는 없지만, 근세의 문장가인 선생의 글에 대한 변죽을 울리는 것만으로도 영광이라 생각한다.

 

⑶ 원문은 경상대 문천각에서 인용하였으며, 같이 올려진 목판 영인본을 참조하여 오‧탈자를 수정하였고, 인쇄본도 오자(誤字)라고 생각될 때는 과감하게 내맘대로 고쳤다.

방장산부(方丈山賦) 임술(壬戌 1922)

 

지리(智異)는 청구에서도 매우 넓고 드높은 산이다. 그리하여 소중화의 오악으로 중국의 형산(衡山)에 대응된다. 신라 때에도 왕궁의 영역으로부터 멀지 않았기 때문에 제사를 올렸다. 조산(祖山) 백두가 남으로 달려 맑은 기운이 구불구불 이어지고 자욱하게 뭉쳐 홀연히 솟아 남녘의 거대한 진산이 되었으니 이름하여 두류(頭流)이다. 풍악과 한라 등 여러 산에 비하면 무리 중에서 멀찌감치 뛰어나다고 할 수 있다. 도가의 경전과 불경 및 유가의 서적에 실리지 않은 적이 없을 정도로 아름답고 풍부하며 크고 화려하여 장관이란 말에 부합하며 사람들이 애써 찾는 곳이다.

그립구나, 고운어른과 점필공의 문장, 일두노인과 남명옹의 도덕이여! 넓고 시원한 기상이 전후로 우뚝 일어나 다 같이 향기를 남겼으니, 아름다운 그 모습 위대하고도 높구나. 인걸은 지령이 모인 곳에서 나고, 지령 또한 인걸로 인해 드러나게 되니 다만 서로 의지하고 필요로 하여 끝없는 우주까지 뻗친다는 것에는 의혹이 없다. 아, 나는 이 산 아래에서 태어나 아침 저녁으로 우러러본 지 사십여 년. 선현들의 발자취를 경모하여 그분들의 말채찍이라도 잡으려는 마음 항상 간절했는데, 스스로 헤아려보니 이룬 바는 얕고 허물은 무거워 감히 仁과 智를 가까이하기에는 인연이 멀었다.

임술년(1922) 4월 기망(旣望 *16일), 행장을 갖추고 고을 수령과 동반하여 함께 길을 나섰다. 하인들은 앞에서 나는 듯이 가고, 날은 환하고, 몸에 닿은 바람은 서늘하였다. 오래된 약속이 어긋나지 않게 몇몇 벗은 중간에서 기다리다 출발하였다. 점필재 탁영 두 분의 문집을 길잡이로 삼았는데 그 당시에 보고 말한 것으로 산천의 변천을 헤아려봐도 혹 어딘지 알수 없는 경우도 있었다.

옛 제한역(*현재의 지안)에서 바라보니 오도령이 앞을 막았지만 멀리 명산의 꼭대기가 있는 곳을 가리키니 새삼 몸이 가뿐해지는 것을 느꼈다. 등구사의 옛터를 들르지 않을 수 없어 잠깐 찾았는데, 다만 부서진 탑만 밭두둑에 남아 있을 뿐이었다. 특별한 약효가 있는 영천(靈泉)을 마시니 먼지 낀 허파의 구석구석까지 시원해졌다.

아, 본성을 기르고자 은둔하여 일개 늙은이로 숨은 나도 빈번히 찾다 보니 험한 길도 평탄하고 넓어졌으니, 늦게 배움을 시작하여 일찍 죽어도 도통이 찬란할 수 있을 것이다. 저 배우지 않고 무리지어 천수를 누리며 모였다 흩어졌다 한들 무슨 도움이 되겠는가?

한걸음 한걸음 나아가 벽송사에 도달하였다. 승려들은 등을 들고 하인들은 지팡이로 부축하며 도왔다. 명자(名刺 *명함)를 건네자 즉시 다과가 차려졌다. 속된 생각이 조금 그쳤다. 새벽 종소리를 듣고 일어나 행장을 차리고, 날씨가 흐린 것에 관계치 않고 짐을 단단히 챙겼다. 갖가지 술잔과 솥, 쌀과 장(醬), 침구 등을 종류별로 구분하였다.

승려 응지가 길을 인도하였는데 세속 나이로 거의 고희에 가까웠지만 빠르게 산을 오를 때는 마치 나는 듯하였다. 빙치(氷峙)에서 쉬었다. 천천히 나아가 너럭바위에 이르렀는데 여울이 두 갈래로 흘러오다가 합쳐 저절로 맑은 웅덩이가 되었다. 푸른 등나무 고목은 물가에 푸릇푸릇하고, 산새는 나뭇꾼의 노래를 흉내내어 울어 세상일을 잊게 하였다. 마침내 짐을 내리고 점심을 먹으면서 간단히 얘기를 나누었다. 태수가 내게 바위의 이름을 지어 달라고 청하여, 삼예암(三乂巖 *물결이 세 갈래로 둘러싼 바위)이라 이름 붙였다. 골짜기의 물소리 또렷이 귓가에 들리고 산봉우리들 중첩되어 눈앞에 보였다. 두리(杜里)의 폐사(廢寺)를 지나니 양쪽의 바위가 서로 붙어 있는 곳이 있어 무엇이라 부르는지 물었더니 금강문(金剛門)이라 하였다. 이 또한 승려들이 보이는 대로 갖다 붙인 말이다.

산중턱의 인가는 소외양간이나 돼지우리 같고 혹 길쭉한 것은 그릇 굽는 가마 같고 혹 좁은 것은 변소 같았다. 저 시커멓게 웅크린 것을 짐승떼와 어찌 구별할 수 있으리오? 그러나 풀 하나 돌 하나의 기이한 경치로 말하자면 일일이 맞이하여 감상할 겨를이 없을 정도였다. 글로써 나타내면 질 좋은 종이를 허비함을 슬퍼할 만하고, 버려두면 계륵처럼 아까워할 만하다. 진실로 선배들이 상세히 말한 바를 얻어볼 수 있으니 나는 그것을 요약하여 기술할 뿐이다.

마암(馬巖)에 도착하니 그윽하고 빼어났으며 높이 오르기에 적합하여 올라가 다리를 쉬었다. 필옹(畢翁 *점필재)이 기록한 진경(眞境)에 꼭 들어맞는 곳으로 먼 선현이 남긴 행적과 어긋나지 않아 거닐던 자취를 생각하니 마치 어제인 듯하였다. 태수의 지휘에 따라 민첩한 승려들은 재빨리 소나무 전나무를 베어내고 방초를 깔아 자리를 만들었다. 비유하자면 나무 위에 얽은 새 둥지와 같을 뿐이지만 잠깐 사이에 사치스런 집 한 채를 지은 셈이다. 아름드리 녹나무를 연이어 운반해와 모닥불을 크게 피우고 저녁이 되어 뱃가죽 속으로 술을 부으니 추위와 따뜻함을 느끼지 못하였다. 이윽고 별과 달이 밝게 뜨고 산하가 적막한 가운데 고운의 옥침(玉枕) 시1)를 읊조리자 나 또한 이곳에 영원히 몸을 맡기고 싶었다.

이윽고 한걸음에 꼭대기에 올라 일출을 구경하였다. 날카로운 바위에 서서 동쪽 바다를 향하여 몇 번이나 쳐다보았다. 아직 원기(元氣 *천지우주의 원래 기운)는 구분되지 않았고 물과 구름이 서로 섞여 있었다. 하계의 뭇산들은 그림자는 형체에 숨어 있고 형체는 그림자에 잠겨 있었다. 혼돈의 가운데에서 아득하여 내 몸을 알아볼 수 없었다. 붉은 바퀴가 맷돌처럼 떠올라 온 바다가 들끓고 햇무리는 불타는 듯 환하고 꿩의 가슴처럼 찬란하게 번쩍이고, 색색이 만 가지로 빛나 각기 그 형태를 드러내니 천하의 장관으로, 견줄 만한 것이 없으리라. 참으로 산에 올라 일출을 보지 않는다면 비유하자면 비단옷을 벗어 놓고 낮길을 가는 거와 같다. 고적(古蹟)을 보고 물었더니 위숙왕후의 옛 사당이 있었던 곳이라고 하였다. 세상에서는 혹 불모(佛母)라고도 칭하는데 자세한 것은 문민(文愍 *김일손)공이 변별하여 말하였다.

바위샘에서 물을 길어 밥을 지어 거의 맨밥을 먹었다. 모름지기 이렇게 하는 것은, 성대하게 흰 도자기에 된장 김 나박김치를 차려 맛이 제각기 비할 바 없이 훌륭하고 그 달기가 저 옛날 신선의 단약과 같다 해도, 오래 가고 실로 아름답고 진실로 배부른 것으로는 어찌 이것과 같을 수 있겠는가? 남명노인이 말한 생선회 절편 경단도 기이하다고 하기에 부족하다.

이 산의 수뇌는 천왕봉이라 하는데 그것이 웅거하여 위치한 곳은 의심할 것 없이 대령(大嶺 *새재)의 남쪽으로 곧 영남이다. 반야봉은 호남에 있는데, 호남에서는 거기에 근거하여 방장산을 소유하려고 한다. 모름지기 송사가 진행되면 원고 피고 쌍방의 산신령은 반드시 판결을 내려야 하리라.

天門(*하늘에 통할 듯 높은 곳)에 기대어 낭랑히 읊조리고 머리를 들어 멀리 바라보니 키질하듯 출렁거리며 흐르는 땅은 늘 연모하던 곳이요, 툭 트인 하늘은 내심 기대하던 바였다. 서북쪽으로는 광주의 무등산이 우뚝 솟아 구름 위로 숨었다 보였다 하고, 남쪽으로 광양의 백운산과 진강(晉康 *진주)의 와룡산이 날아오를 듯 빼어나고 비단 장막을 친 듯 밝게 빛나며, 동남쪽에는 기양(岐陽 *삼가)의 황매산과 합천의 가야산이 하늘 끝 아스라이 가까이 있는 듯 멀리 있는 듯하고, 북쪽은 무주 덕유산인데 깨끗한 기운이 구불구불 이어져 흡사 면류관을 머리에 이고 있는 것 같다. 지금은 여름인데도 서늘하고 사방에서 구름이 모여들어 그 밖은 알 수 없으니, 인간세상은 과연 몇 겹의 세계 너머에 있는 것일까? 만약 중추를 맞이하여 높이 올라 바라보면 남극성이 형형히 빛나는 것을 볼 수 있다고 하나, 이는 이미 반고의 《한서(漢書)》의 『志』에 실려 있는 말로서 항간의 떠도는 말에 책임을 돌릴 수는 없을 것이다.(*실제로는 남극성을 볼 수 없다는 말)

지금 지리산 전체에 대하여 대략을 논한다면, 쌍계사와 칠불암 사이에서 고운옹은 신선이 되었고, 화개 악양은 일두노인이 노닐던 곳이며, 덕산 삼장은 남명어른이 옮겨와 살던 곳이고, 엄천 마천의 여러 명승은 점필재공이 머물던 곳이니, 인물과 땅이 서로 의지한다는 말이 진실로 그렇지 않겠는가? 호랑이 표범 코끼리 사슴의 찬란한 무늬 빛나고 곰과 원숭이 등이 무리를 끌고 다니며, 팽나무 녹나무 전나무 삼나무 닥나무 옻나무와 화살대의 재료 및 산삼 자지(紫芝) 표고버섯 석이버섯이 나는 곳으로 가히 명산이자 무진장한 보고라 할 수 있다. 매일 실어내어도 새것과 오래된 것이 쌓여 넘친다.

세상에 드러나지 않은 사연을 채집하고 기이한 것을 전하는 데에는 또한 스님들의 기록에 근거한 것도 있다. “반야봉의 두 고개를 바라보며 정장군 황정군을 생각하고, 아름다운 검은 학이 춤추며 훨훨 날고, 옥보의 거문고 곡조를 상상하고, 벽계(碧溪 *正心스님/碧松 智嚴의 스승)의 남은 흔적을 찾네. 산기슭에 승탑 하나 우뚝하고, 문창의 높은 누대에서 쉬고, 돌우물의 영수(靈水)를 마시네.”

또 비스듬히 서쪽으로 가니 바위가 입을 벌려 큰 구멍이 앞뒤로 길게 뚫려 있었다. 스님은 마치 활깍지를 끼고 쏜 화살이 날아가 과녁을 적중시키듯이 거침없이 바위투성이의 벼랑을 부여잡고 내려갔다. 다리는 시큰거리고 기운은 빠졌다.

바라보면 지척인데 나아가면 거리가 얼마나 되는지 줄어들지 않았다. 중봉으로부터 오르내림에 기후는 먼 곳과 같지 않았고 나뭇잎은 비로소 움트기 시작하였다. 가파른 골짜기는 깊고 눈 속에 사는 전나무 떡갈나무는 선 채로 죽은 것이 반이 넘었고, 철쭉은 꽃송이가 맺혔는데 오히려 키가 다 자란 줄기에서는 시들어 문드러지고, 여문 것은 몇 마디 밖에 안되는 키낮은 나무에 매달린 것이었는데, 작은 키 덕분에 꽃받침을 보호했기 때문이다. 하봉에서부터 조금 따뜻해졌는데 겨우 늦은 봄 초저녁의 바깥 날씨와 같았다.

나는 백무에서 잤는데, 새는 숲속에 둥지를 틀어도 하나의 가지에 불과하다고 들었는데 빈말이 아니었다. 날아온 듯한 깎아지른 바위를 지나자 와폭이 굽이굽이를 이룬 곳이 있었는데, 거기에 또 이름을 지어 구절탄(九折灘)이라 하였다. 거의 다 내려오자 길은 헷갈리지 않았고 비탈에 강청의 옛마을이 있었다. 송소(松沼 *지금의 실덕삼거리 송알 부근이 아닐지?)의 용을 노래하며 고정(高亭 *휴천면 고정마을)까지 나란히 내달려 투숙하였다. 밤이 반쯤 지나고 닭이 울려고 할 때 횃불이 멀리서 부르는 것을 보고는 벗을 따라 시내를 건넜다.

아침에 출발하여 용담(*용유담)에서 놀면서 혜평(*혜평공 강현)의 아름다운 모습을 흠모하고, 한낮에는 가랑비가 내려 오도(鰲島 *새우섬)에 쉬면서 왕자를 위하여 한잔 술을 따라 부었다. 천년 묵은 신령스런 거북이 모래밭에 나와 볕을 쬐는 곳으로 말하면 와룡대요, 맑은 강 일대에 바람이 감돌고 비단을 꿴 듯 절벽 그림자가 물에 어리는 곳은 양화탄(*양화대)이며, 푸른 봉우리가 병풍처럼 늘어서 있고 검푸른 못이 거울처럼 펼쳐진 곳은 화산과 동강의 승경(勝景)이라.

호연지기가 다하지 않았음을 헤아리고 회옹(晦翁 *주자)[여산 북쪽을 유람하고서] 낭랑하게 읊은 것을 기억하며 소중화의 남악을 생각하니, 서로 이역(異域)에 위치하였지만 같은 운명이었다. 둘 다 예로부터 산에 오를 때 북쪽 기슭을 마음에 두었기 때문이다. 이는 주역의 간배(艮背)2)를 정확히 본받은 것으로, 이른바 뜰안[門庭]으로 가서도 거성(去聲)에 맞추려면 뜰에서 실내[奧․窔(오․요)]로 들어가야3) 한다는 말이니, 이는 아주 자연스러운 경우이다.

이에 붓을 적셔 부(賦)를 지어 옛것을 좋아하는 여흥에 겨워 부응하였으나 자질구레한 말들이라 꾸며낸 이야기처럼 될까 두렵다.

 

【註】

 

1) 쌍계사 석벽의 바위틈에서 스님이 발견했다고 전해지는 고운의 시. 여러 문헌에 전한다.

東國花開洞(동국화개동)  동국의 화개동은

壺中別有天(호중별유천)  호리병 속의 별천지로구나.

仙人堆玉枕(선인퇴옥침)  선인이 옥베개를 베고 잠든 동안

身世倏千年(신세숙천년)  몸은 세상에 있건만 잠깐만에 천년이 지났네.

3구의 堆(퇴)가 推(추)로 된 곳도 있다. 그때는 “선인이 옥베개를 밀치고 일어나니”로 해석하면 될 것이다.

 

2) 《주역》『간괘(艮卦)』에 「그 등에 그치면 그 몸을 얻지 못하며, 그 뜰에 가면서도 그 사람을 보지 못하여 허물이 없으리라.(艮其背 不獲其身 行其庭 不見其人 无咎)」고 하였다. 무슨 소린지는 잘 모르겠다.

또 背(배)와 北(북)은 통하므로 글쓴이는 주자가 여산(廬山) 북쪽을 유람한 것과 본인이 지리산 북쪽을 유람한 것에 주역의 간배(艮背)를 연계한 것으로 보인다.

 

3) 고대 궁실의 제도에 따르면 ‘門〉庭〉堂〉室’의 순서로 이루어져 있고 室 좌우에는 房이 있고 室 뒤에는 寢이 있다 한다. 室의 서남쪽 구석은 오(奧)라 하여 존자(尊者)가 자리하는 곳이며 동남쪽 구석은 요(窔)라 하여 그 다음으로 친다. 거성(去聲)은 평‧상‧거‧입의 사성(四聲) 중에서도 가장 높은 소리이다. 즉, 문을 지나 뜰[庭]에 들어섰는데도 가장 높은 자를 만나지 못했다면 당(堂)에 올라 실(室/奧‧窔)로 들어가야 한다는 말이다.

지금은 지리산의 북쪽만 둘러봤지만 제대로 알려면 더 깊이 더 많이 섭렵해야 한다는 뜻으로 이해하면 되겠다.

 

 

方丈山賦

惟智異爲山磅礴峻極於靑邱玆迺小華之五岳實應衡山於神州粤羅氏而隮祀以不遠於徐菀之甸侯祖白頭而南馳淑氣蜿蜒而浮浮屹然作南鮮之巨鎭肆亦標名以頭流校諸楓岳與漢挐可謂邈焉而絶儔蓋道典竺書儒家之籍靡不載之瓌富鉅麗宜壯觀而冥搜者也懷夫雲叟畢公之文章蠹老冥翁之道德礌落崛起於前後相與留芬而賁飾巍乎高哉人傑固地靈之所鍾地靈亦因人傑而呈特是其相資相須亘窮宙而靡惑繄余生於玆山之下晨晡仰止餘四十年景慕先賢之往轍願力恒切於執鞭自量業淺垢重未敢近仁智之遐緣歲舍玄黓月旅仲呂旣望之晁束裝結侶偕地主而登程僕夫前而翩擧日喧姸而適體風拂拂以吹楮羌宿約之不愆有數友之中佇出二集佔畢濯纓以爲導行且看而且語諒陵谷之變遷或不識其何所繇蹄閒之舊驛望悟道之前阻遙指名山之絶頂更覺身健而莫禦乍覓登龜之遺址但留殘塔於田畔飮別藥之靈泉爽塵肺之稍泮唯養眞之藏六寔介叟之韜鏟則翁頻以委訪絶嶮爲之成坦偉晩學而蚤圽然道緖之粲粲彼無學而徒壽終何補乎聚散於是乎步步前進昏抵碧松僧侶提燈僕夫相筇名刺才換茶果卽供塵想少息又聽晨鍾早起裝嚴不關曇濃團束荷物尊鐺橫縱米醬夜具各以類從惟禪應之指路幾俗臘之古稀得般若之道力倏登陟而如飛憩氷峙徐進得盤陀之石磯出二派而匯合成自然之淸潿蒼藤古木湲依依山禽效吟樵歌忘機遂乃弛擔午䭜脫略交譚太守請余而錫名名之曰三乂巖溪壑荵蒨於耳郭峯巒糾紛於眼簾過杜里之廢寺有兩巖之交粘問奚名則曰金剛門亦禪師之權辭以拈眡山腰之人家如牛欄與䐁柵或橢長如陶窯或狹陽如溷廁彼蠢愚而黟皯與獸伍而何擇至若一草一石之奇玩皆不暇於應接收之則剡藤可弔遺之則鷄肋可惜固先輩之所詳余可得而略之也抵馬巖之幽絶允合升高而歇脚照以畢翁之所記眞境相符而不錯緬前賢之留芬想杖屨而如昨隨太守之指揮敏僧侶之趨作斬松檜而爲蓋藉芳草而爲席比巢皇而已侈一屋構於頃刻運連抱之樟木大▼(艹+㶧)火而達昔酌鞄中之和酒夜寒暖其莫覺方星月之明槪而山河之寂寞誦孤雲之玉枕吾亦欲玆焉永託於是一蹴而上至顚觀日出立峭巖嚮東溟屢回瞻元氣未判水雲相涵下界群山影祕形潛混淪之中渺不可諳己而紅輪碾上滄海沸盈珥暈煬熿雉膺爛熒色色萬彙各呈其形天下壯觀莫之與京信哉登山而不觀日出譬猶卸錦衣而晝行也覩古蹟而尋問有威肅之舊祠世或稱爲佛母爰詳文愍之辨辭乃汲巖泉而炊皛飯斯須就而盛皓磁豉醬海苔蘿葍之皮味殊絶佳其甘如飴伊昔仙翁丹成太遲實美眞飽豈能若斯冥老所稱河魚膾油糕餠黃白團子不足爲奇惟玆山之主腦曰天王其無疑據位置之攸在寔大嶺之南維以般若之在湖湖欲據而有之雖束矢而兩造山靈必其辨歸倚天門而朗嘯遐矯首而流移簸域中之常戀暢天衢之心期其西北則光州之無等屹立雲表乍隱乍見其南則光陽之白雲晉康之臥龍飛騰峻拔錦幛明絢其東南則岐陽之黃梅陜川之伽倻縹緲天際若近若遠其北則茂朱之德裕淑氣逶迤如戴冠冕時當夏冷陰雲四合不知此外人間果隔幾重界限若會中秋而登眺極宿炯炯而可見孟堅已載於漢志蓋不可歸之俚諺今就全部而槪論之雙七之間雲翁得仙花開岳陽蠹老盤旋德山三壯冥叟卜遷嚴馬諸勝畢公留連向所謂人地相須不其亶然若夫虎豹象鹿翬翟之文熊羆猿猱軥輈之群楩楠檜杉楮漆竹箭之材山蔘紫芝椎茸石蕈之源可謂名山無盡藏之寶式日輸出而新舊相因採軼事而傳奇亦有据於僧錄望般若之二嶺思黃鄭而毣毣玄鶴舞而翩翩想玉寶之琴曲尋碧溪之遺阯屹一塔於林麓憩文昌之高臺飮石潴之靈淥又迤西有而巖呀大竅於背腹緬白足之決韘矢剡剡以中鵠攀磴崖而轉下凜脚酸而氣跼望咫尺而前進何距離之不縮自中峯而升降氣候夐以不齊木葉胎以始坼嶜谷深而雪棲檜樫立死者强半躑躅結房而猶枯禿榦長於十稔矮數寸以護跗由下峯而得稍暖僅如野外暮春之初夕余宿於白鵡聞巢林之不誣過飛來之危巖臥瀑曲曲以成區又錫名曰九折之灘庶來 者之不迷斜江淸之故里詠松沼之龍驪趲高亭而投宿夜參半而將鷄見炬火之遙叫迺追友之渡溪朝出遊於龍潭欽惠平之徽橅午霎憩於鰲島酹王子以一㪺至若千年神龜出曝沙逕臥龍臺也澄江一帶風綾綴影陽和灘也靑嶂列屛黝潭開鏡華山桐江之勝也諒豪氣之未除憶晦翁之朗詠惟小華之南岳▩異城而同命蓋自古之登山指北麓而爲正象大易之艮背所謂行其門庭叶去聲由門庭而入奧窔乃自然之順境玆染翰而爲賦酬好古之餘興如其細瑣恐參稗乘

(원문 : 추범문원원집(秋帆文苑原集) / 경상대 문천각)

3 Comments
강호원 2017.12.11 11:59  
이선생님,
잘 계시지요?

연말까지 고문  번역한다꼬 울매 남지 않은 머리카락 더 빠졌겠습니다.

돈도 되지도 않고 비아냥거리는 사람도 있는데
정말 수고하셨습니다.
나무아래 님과 마찬가지로.

저는 賦는 그냥 노랜  줄 알았더니 산문과 운문의 중간으로  형식이 있군요.

공들여 번역하신 역작.

잘 봤습니다.
복 많이 받으십시오.
가객 2017.12.12 05:28  
참으로 좋은 한편의 산행수필입니다.
산행기록을  어찌 이리 아름답게 구성을 할수 있는지...?
산에서 느낄 수 있는 사람의 감정들을 진솔하고도 서정적으로 꾸며진 문장들이 물흐르듯 합니다.

작가(권도용)가 당대 신문사주필이어서 이리도 문장이 수려하나 하면서  까막눈이지만 원문을 세세하게 수 번을 보고서,
역시 최고의 국역 실력에  문학적 재능까지 겸비한  이선생만이 구성할수 있는 작품이라는 것을 또  느낍니다.

"이에 붓을 적셔 부(賦)를 지어 옛것을 좋아하는 여흥에 겨워 부응하였으나 자질구레한 말들이라 꾸며낸 이야기처럼 될까 두렵다."
마지막 문장,제가 늘 느끼는 감정이라  마음에 와 닿습니다.
이 작품에서의 벽계(碧溪)는 법계사를 두고한 것이 아닐까요?
 
수고하셨습니다.늘 많이 배우고 감사합니다.
두류산인 2017.12.13 18:40  
1472년 점필재와 1922년 권도용선생은 동일한 장소의 마암을 얘기하고 있는데 1923년 건립된 마암당은 왜 이렇게 의견이 분분했는지 너무나 안타깝습니다.

방장산부를 해석하신 님의 견해가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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