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산행기

1922, 민인호 <지리산탐승안내>

엉겅퀴 | 1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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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지리산에 관한 간략한 종합소개 글이다. 글쓴이 민인호(閔麟鎬 1884-?)는 1919.10~1923.3 함양군수를 지냈으며, 1921년 함양명승고적보존회를 조직하여 지리산을 널리 알리는 데 힘썼다. 그 일환으로 선인들의 지리산 유산기와 시를 수집하여 1922년 7월 《지리산지(智異山誌)》를 편찬하였으며, 자신의 글 『지리산탐승안내』를 그 부록에 실었다.

민인호는 함안군수 함양군수 밀양군수 김해군수를 지냈으며, 밀양군수 시절에도 밀양고적보존회를 설립하였다. 일제로부터 2차례 기념장(記念章)을 받았고, 친일인명사전에 이름이 올라 있다.

 

○ 《지리산지》는 총 180쪽으로, 모두 23명의 작자가 쓴 산문 8편과 시 40편이 수록되어 있다. 산문은 김종직 김일손 조식 박여량 등의 잘 알려진 유산기이며, 시는 신숙주 김종직 정여창 유호인 조위 조식 노진 강익 박여량 휴정 등의 시로, 게재된 대부분의 글은 이미 시중에 국역되어 나와 있기에 따로 소개하지 않는다.

선인들 외에 당대인의 글로는 이 글과 본인 및 권도용의 지리산 詩를 부록에 첨부하였고, 지리산지의 서문은 권도용이 썼다.

 

○ 글의 내용상 민인호는 권도용과 함께 지리산을 다녀온(음력 1922.4.16~4.20/양력 5.12~5.16 : 옛산행기방/권도용『방장산부』)후 권도용이 지리산지의 서문을 쓰기(7월기망)전에 글을 작성한 것으로 보이며, 그는 이 글을 바탕으로 다음해 《개벽(開闢)》제34호(1923.4.1)에 『지리산보(智異山譜)』(*옛산행기방)를 발표한 것으로 보인다. 그 과정에서 글의 내용과 문체를 많이 다듬어 훨씬 짜임새 있게 구성하였다. 이 글과 지리산보, 권도용의 방장산부는 같이 읽는 것이 좋다.

다만 「지리산보」에서 새우섬을 지칭한 ‘찬도’(䱗島 *피라미섬)는 새우섬의 별칭이 아니라, 「지리산탐승안내」에는 ‘오도’(鰲島)라고 분명히 표시되어 있으므로 편집 또는 인쇄과정에서 ‘오도鰲島’를 잘못 표기한 것으로 보인다.

또 본문[탐승안내]에서 한남군을 태종의 열째 아들이라(*이 부분은 지리산보에서 바로잡았다.) 한 것, 벽송선사를 고려 때 사람이라고 한 것, 오도재의 지명을 개암 강익과 연계한 것 등은 오류로 생각된다.

 

○ 꼭대님이 고려대학교 도서관에 가서 대출이 되지 않는 책을 사진촬영해서 보내줬다. 원본을 보지 않고 사진으로만 대하였지만, 글체로 봐서 조판하여 인쇄한 것은 아니고 등사지에 철필로 써서 등사판으로 여러 부를 만들었던 것 같다. 우리 어릴 적에 각 학교·관공서 등에 등사판 하나씩은 있었다.

원본은 토씨만 한글이고 나머지는 전부 한자이다. 그래서 해석이 필요한 부분이 꽤 많다. 원래의 필사본은 물론 띄어쓰기도 없고 단락을 끊어 쓰지도 않았다. 하여 옮겨 쓰면서(타이핑) 원본은 적절히 띄어쓰기를 하였고, 해석본은 거기에 더하여 내용상 단락도 나누었다. (괄호)안 청색 글씨는 원작자의 주석이고, *작은 글씨는 옮긴이의 주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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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의 속표지(위)와 해당 글의 첫째 장(아래)

 

【원문】

智異山探勝案內

咸陽名勝古蹟保存會長 閔麟鎬

智異山은 朝鮮의 有名한 巨嶽인데 關東의 金剛山과 湖南의 漢拏山으로 共히 三神山의 名號를 得하니 白頭山의 淸淑한 氣가 南流하야 此山이 됨으로 頭流山이라 칭하고 又 竺書에 方丈毗盧가 有함으로 方丈山이라. 仙書에 方壺員嶠가 有함으므로 方壺山이라고도 稱하니이라. 邃古時代에 上帝께오서 三神山이 海上에 浮在하야 隨波上下함으로 西海로 流去할가 恐하야 策疆을 遣하야 十五巨鰲로 하야곰 三神山을 頭戴케 함에 於是에 三神山이 峙立不動한지라.

支那秦始皇時代에 方士韓終徐福을 遣하야 三神山不死藥을 求하랴 하얏는데 韓徐가 此山을 經由하야 南海錦山을 過하야 日本에 入하야 仍히 土着의 氓이 되얏나니 今 日本에 徐市(即徐福)村이 有함은 實로 此時代의 事이라.

新羅時代부터 中華五嶽의 衡山에 比하야 南嶽으로 隮하고 秩禮(山祭의名)를 行하였으므로 小衡山이라 稱한 時도 有한지라. 其延袤는 全北南原郡과 本郡及山淸河東 居昌陜川 等 六郡을 跨하고 位置는 本郡의 南四十里에 在하야 山의 北面은 郡이 專據하야 上峯이 山淸 即 原晋州와 分界되야 海拔이 六千六百尺에 達하얏는데 森林이 鬱密하고 無數의 老樹가 陰翳하야 天日을 蔽虧하고 氣候는 寒溫이 兼하니 中峯以上은 寒度가 頗高함으로 植林帶가 忽變하야 高山植物에 屬한 眞栢羊齒의 類와 又 立死木이 多하야 望見하면 潘然한 小白頭山을 成한지라.

昨年부터 本郡에서 咸陽名勝古蹟保存會를 設立하고 本郡의 望鎭되는 智異山을 主眼으로 作하얏는데 蓋其磅礡扶輿한 元氣가 南鮮地方에 撗亘하야 無限한 地理上 感化를 與함으로 古昔부터 名賢達士가 本郡에서 前後輩出하야 嶺右의 名勝地가 됨은 엇지 徒然하리오.

如斯한 名山에 對하야 數千年名勝古蹟을 開拓發見하기로 計劃한 同時에 一般森林獎勵上에 極히 重要한 關係가 有함으로 此의 實行에 際하여는 最히 周密한 考慮와 努力을 拂하야 的確한 施設方針을 企劃하야 進行上 遣質이 無케 하기로 期하얏슴으로 本會長이 大正十一年五月十二日 金曜의 晴天을 機會하야 智異山開拓에 關한 準備를 團束하고 古蹟調査員權道溶 土木技手補大谷定造와 共히 傭人二名을 帶同하고 登山의 路에 就하얏는데 中路에서 碧松寺僧金禪應李宗仁과 馬川面長金炳皓及雇軍二人이 合同하얏는데 一行이 凡十人이러라.

今에 名山巨嶽을 開拓하야 坦道를 作하고 輧車의 交通을 開始할 時에 他地方側은 姑略하고 特히 本郡에 關한 部分을 注重하야 先히 眺望과 聽聞을 由하야 奇偉한 古蹟을 紹介하건대 山의 北面에 一古城이 有하니 楸城이라 稱하고 又는 朴回址라 稱한데 山峽이 險阨하야 牛馬희 能到치 못하는 處이니 世俗이 相傳하되 古時에 新羅가 百濟를 防禦하던 地라 云하니 倉庫遺址가 宛然히 猶在하며 其附近에 行宮의 基址도 有하다더라.

楸城東十里許에 碧松寺가 有한데 爽嵦淸邃하야 實로 山內有名한 祇園이라. 高麗의 末에 碧松禪師의 修道한 處이니 其緣起를 溯하건데 昔에 三角山太古庵 高僧普愚禪師가 支那(元朝時代)에 入하여 臨濟宗의 十六傳嫡嗣인 淸珙禪師의 印記를 得하고 本國에 還하야 幻庵混修 龜谷覺雲 碧溪正心 碧松智儼 芙蓉雲觀의게 傳授하야 淸虛休靜 浮休善修에 至하니 此二大師는 實 今日朝鮮禪敎兩宗의 派祖라.

寺의 北偏에 龍游潭이 有하니 卽 瀶川下流라. 其傍에 巖石이 平鋪하되 撗張側展하야 或은 大甕과 類似하고 潭水의 湥이 無底한데 其中에 袈裟魚가 有하니 土人이 相傳호대 智異山西北에 達空寺(雲峰地)가 有하고 其傍에 猪淵이 有한데 袈裟魚가 此淵에셔 産하야 每年秋節을 當하면 順流下游하야 龍游潭에 至하얏다가 春節에는 達空으로 還하는 故로 此魚가 嚴川以下에는 全無한지라. 其越邊의 山麓은 姜惠平公顯의 賜牌地인데 左右石面에 題名者이 其數를 殫記키 難한지라. 昔에 佔畢齋金先生이 郡守될 時에 兪㵢溪好仁 曺梅溪偉 林晦軒大仝 諸賢으로 此에셔 嘯詠하얏나니라.

碧松寺對岸에 金剛峯 香爐峯 文殊峯과 脚下에 在한 馬跡臺 松臺 金臺 等과 如한 名所는 遊人의 眺望에 適宜할뿐 아니라 그 名勝의 奇絶함은 畵工과 文士라도 形容키 難한데 就中馬跡臺에 對하야 傳說을 據한즉 古代佛敎의 全盛時代에 馬跡道僧이 此地에 居할새 最愛하는 一匹驢가 有한데 道術을 使用하야 馬川江을 往來할 時에 錫環杖을 彼岸에 掛하고 其上으로 通行케 하얏는데 一日은 該驢를 雲峯等地에 送하얏더니 歸還할 際에 龍游潭에서 群龍이 爭鬪諠聒함으로 馬跡道僧이 該驢의 鳴聲을 聞치 못하야 錫環杖을 架設치 아니하얏슴으로 驢가 通過함을 得치 못하고 哀鳴仆死한지라. 馬跡이 그 歸期를 待하야도 消息이 竟無하거늘 出戶하야 回視하니 重愛하는 一驢가 巖石上에 仆死한지라. 其原因을 究한즉 龍의 喧聒에 由함으로 潭中의 龍을 全部殺害하고 眇目의 一龍만 留存하야 該潭을 守直케 하얏는데 至今 其巖上에 血痕이 斑斑하더라.

馬跡巖에서 東下하야 數十站의 距離에 鰲島가 有하니 乃朝鮮太宗王第十男인 漢南君李어(王+於)의 謫居한 處이니 莊陵(端宗墓號)時에 其兄錦城大君瑜로 더불어 罹禍하야 本郡에 定配하야 此島에 居한 故로 今에 其村을 漢南이라 하니라.

悟道峙는 智異山北麓에 在하니 其下에 登龜寺遺址가 有하고 又其下에 養眞齋가 有한데 此는 昔日 姜介菴先生翼의 棲息한 處이니 盖是谷이 宅幽報阻하야 龜의 藏六함과 如함으로 先生이 旣히 其名을 愛하고 又 泉明石潔함을 愛하야 其間에 性眞을 養할만하다 하여 養眞이라 命名함이오. 悟道의 名도 先生을 因하야 稱함이니 先生이 玉溪盧文孝公禛으로 더불어 道義相磨하야 此에서 往來講論함이 殆히 虛月이 無한지라.

西溪는 悟道峙의 東北麓에 在한데 本郡南部의 水石名區에 一指를 首屈할 만한지라. 其源이 八良峴에서 出하야 蹄閑驛下에 至하니 兩峽의 間에 石을 平鋪하야 下面이 되여 膩滑하야 磨ㅇ함과 如하고 飛流와 沫이 岡巒에 奔灣하야 鏘然히 環佩의 聲과 如한지라.

昔東岡金文貞公宇顒이 姜介菴 盧玉溪 吳德溪健 諸賢으로 共히 遊賞하고 西溪唱酬錄을 成하얏스니 盖人才의 輩出함이 固히 地靈의 所爲이나 畢竟에는 勝地도 人傑을 由하야 其名을 益闡함이니 其相資相湏하야 可히 偏主치 못함은 自古及今으로 固然한 理勢라 謂치 아니치 못할지로다.

以上은 皆咸陽에 關한 古蹟이거니와 若上峯으로부터 槪論하건대 天王峯西에 般若峯이 有하야 雲表에 屹立하고 其左右에 兩嶺이 有한데 名은 黃嶺, 鄭嶺(全南의 界)이라. 支那漢昭帝時에 馬韓王이 辰弁의 亂을 避하야 黃鄭二將으로 하야곰 此에 築城하고 七十餘年을 保守하얏슴으로 後人이 仍히 二將의 姓으로 其嶺을 名하얏고 

天王峯上에 聖母祠가 有한데 聖母는 古來로 相傳하되 釋迦의 母 摩耶夫人이라 하고 李承休帝王韻記에 云하엿으되 聖母는 高麗太祖의 妣 威肅王后라 하니 佔畢齋 先生이 辨하여 曰 高麗人이 仙桃聖母의 說을 習聞하고 其君의 系를 神明코져 하야 是說을 創出함에 承休가 韻記에 揭載하얏스나 此도 可히 徵信치 못할지라 하얏는데 濯纓金文愍公馹孫은 威肅王后로써 近是라 하니라.

佔畢齋先生이 遊山할 時에 從僧空宗이 聖母祠에 入하야 小佛을 捧하고 呼晴하거늘 先生이 써 戲弄한다 함에 宗이 答호대 如是하면 天晴이라 하야늘 先生이 盥洗冠帶하고 入廟하야 酒果로써 虔告하얏는데 是日에 昏陰風甚하더니 夜半에 至하야 星月이 皎然하야 天地이 開霽하고 山川이 洞豁한데 先生이 更히 入廟하야 神休를 感謝하얏나니라.

上峯에서 數帿地를 南下하면 碧溪寺가 有하얏는데 實로 山腹의 形勝을 據有하야 有名한 精刹이더니 今에는 遺址만 存在하고 唯, 一塔이 林莽中에 巋然히 立하야 恰然히 人이 墻外에 行過함에 隱隱히 其髻를 見함과 如하고 稍下하면 文昌臺가 有한데 此는 文昌侯崔孤雲先生의 遊息한 所이며 西南으로 委迤하야 雙溪(河東의 地方)石門에 至하면 三神山雙磎寺라는 六大字를 石刻하얏는데 此도 孤雲先生의 筆蹟이오. 又, 眞鑑國師의 碑가 有한데 撰書가 皆孤雲의 所爲니 眞個方內에 擅名한 巨刹이며 勝區이오. 又, 四天王의 像을 安置하였는데 彫刻이 甚竗한지라.

古代中華人의 朝鮮誌에 云하되 朝鮮智異山中에 靑鶴洞이 有하니 四隅가 寬曠하야 五穀이 豊穰한데 뭇仙人釋子만 居住하고 世人은 能到치 못하는 處이라. 靑鶴一雙이 巖穴間에 棲止하고 飛騰할 時에는 雲霄間에 決起함으로 洞名을 標함이오. 其附近에 李文淸公後白의 手筆石刻도 有하얏다 하니라.

雙磎寺의 西偏에 岳陽花開洞이 有하니 一蠹鄭先生이 嘗히 此地에 卜築한 故로 當時及後世에 儒林의 題詠이 多하고 山淸(元晋州)의 德山은 曺南冥先生의 卜居하던 處이니 洞府가 深邃하고 原野가 平曠하야 人烟이 稠密하고 水石이 淸冷한데 洞口에 入德門三字의 石刻이 有한지라.

大抵上論과 如히 地靈도 人傑을 賴하야 其名을 益闡한다 함은 今에 智異山에 對하야 孤雲佔畢一蠹南冥四先生으로써 觀하면 尤히 信然치 아니한가. 盖四先生은 直히 玆山을 代表하야 千秋萬歲라도 其名이 同傳不朽할지니 此는 古蹟에 關한 事實을 考究할 必要라 하노라.

尙且名山巨嶽에 在한 天府의 寶貨는 可히 無盡藏이라 謂할지라 一一枚陳키 難하니 姑히 日前의 所見에 就하건대 허다한 虎豹熊鹿翬翟의 文과 櫸榟檜栢竹箭의 材와 다맛 山蔘楮㯃紫芝稚茸石蕈의 類를 陸續輸出하야 各地方의 利用에 供케 함이 어찌 交通發展上 唯一의 急務가 아니며 且現今朝鮮全道에 敎育熱이 勃興하야 科學上硏究에 汲汲한 바 植物學을 硏究하는 者는 勿論 一般學生도 必히 玆山에 對한 寒溫帶의 林相과 實物을 見學케 하고 森林奬勵上에도 一般人民으로 見學케 함이 어찌 敎育實驗上 第二의 急務가 아니리오.

이럼으로 本會에서 此等要項에 就하야 地方發展上에 直接關係가 有함을 看破하고 幾個의 有志紳士와 協議한 結果, 近間에 姜渭秀氏는 上峯에 望海亭을 建築하고 朴魯翊及靈源寺一同은 帝釋堂建築, 李璡雨及碧松寺一同은 馬巖堂建築(兩處는 皆中峯)에 次第着手하야 一般人士의게 登山眺望의 便宜를 與하야 不遠間, 開山式을 擧行할 터인즉 將來 玆山에 對하야 無限의 發展希望을 成就하면 일로부터 人人마다 一種愛山癖을 培養케 할뿐 아니라 本郡에 在하야 尤히 愛鄕心이 增長될 同時에 發展狀況도 隨하야 더욱 擴大할진져.

玆에 比較的 三神山의 全體上偶劣을 綜論코져 하노니 關東數十郡을 環據하야 千奇萬怪의 形勝을 管轄함은 金剛山이 優報를 占하얏다 하려니와 其高峻雄拔하야 東南으로 直히 海面을 際하야 眺望의 廣濶함은 智異山이 更히 與齊할 바 없고 森林의 稠密함으로 論하야도 頭頭露骨한 金剛山이 비교할 바이 아니오 其外에 日月의 出入과 南極星이 出現함은 唯히 玆山이 獨擅하는 價値가 有한 故로 班固의 漢史와 杜甫의 唐詩에 星宿와 山嶽의 勝을 說하얏슨즉 內容은 金剛山과 比較하면 優點이 多大한지라. 且, 金剛山은 東北에 位置하야 關東八景의 援助를 得함으로 選景探勝에 關하야는 或 彼가 此보담 勝하다 할지나 譬건대 智異山은 鎭物 의 量과 載物 의 德이 具備하야 厚重不遷하야 尨然한 有德君子와 如하고 金剛山은 奇怪의 骨相과 淸瘦의 氣味로 矯矯出塵하야 翛然한 練道高僧과 如하니 然한즉 觀山의 趣味도 其人의 志想에 在하거니와 觀山의 術로 言하면 孔聖의 登岱와 朱子의 登衡은 皆一般法門이니 假令, 聖賢으로 今日에 在하시면 智異를 金剛보담 樂山의 分數가 加層할 줄로 可期하겠다 斷言하노라.

 

 

【해석】

지리산탐승안내

함양명승고적보존회장 민인호

지리산은 조선의 유명한 거악인데 관동의 금강산, 호남의 한라산과 더불어 삼신산이란 이름을 얻었다. 백두산의 맑고 깨끗한 氣가 남쪽으로 흘러 이 산이 되었으므로 두류산이라 칭하였고, 또 불경에 방장․비로(方丈毗盧)가 있으므로 방장산이라 하였고, 선서(仙書 *선도에 관한 책)에 방호․원교(*발해 동쪽 귀허(歸墟)에 있다는 5개의 산. 대여 원교 방호 영주 봉래《列子》)가 있으므로 방호산(方壺山)이라고도 칭한다. 먼 옛날 상제(上帝)께서 삼신산이 해상에 떠 있어 물결 따라 오르내리므로 서해로 떠내려갈까 걱정하여 책강(策疆 *禺彊 바다와 바람의 신)을 보내 열다섯 마리의 큰 자라로 하여금 삼신산을 머리로 떠받치게 함으로써 이에 삼신산이 우뚝 서서 움직이지 않게 되었다.

중국 진시황 시대에 방사(方士 *신선의 술법을 닦는 사람) 한종․서복을 보내 삼신산 불사약을 구해오라고 하였는데 한․서가 이 산을 경유하여 남해 금산을 지나 일본에 들어가 그로 인해 토착민이 되었다. 오늘날 일본에 서불(徐市 즉 徐福)촌이 있음은 실로 이 시대부터의 일이었다.

신라 때부터 중화 5악의 형산(衡山)에 견주어 남악으로 받들고 질례(秩禮)(山祭의 이름)를 행하였으므로 小형산이라 칭한 때도 있었다. 그 면적은 전북 남원군과 본군 및 산청 하동 거창 합천 등 6군에 걸터앉아 있다. 위치는 본군의 남쪽 40리에 있고 산의 북면은 오로지 함양군이 차지하였고 상봉은 산청 즉 원래의 진주와 경계를 나누었으며 해발이 6천6백 척(尺)에 달한다. 삼림이 울밀하고 무수한 노목이 짙은 그늘을 드리워 하늘과 해를 가리고 기후는 추위와 따뜻함을 겸하여 중봉 이상은 추운 정도가 자못 심하므로 삼림대가 갑자기 변하여 고산식물에 속하는 진백․양치류와 또 서서 죽은 나무가 많아 바라보면 문득 소백두산을 이루었다.

작년부터 본군에서 함양명승고적보존회를 설립하고 본군에서 바라보는 진산이 되는 지리산을 (본회의) 주된 목표로 삼았는데, 광대하고 상서로운 원기가 남녘 지방에 걸쳐 있고 무한한 지리상 감화가 더불어 함으로 오랜 옛날부터 이름난 현인과 통달한 인사가 본군에서 앞뒤로 무리지어 배출되어 영남 우도의 명승지가 되었음이 어찌 공연한 일이겠는가?

이와 같은 명산에 대하여 수천년의 명승고적을 개척 발견하기로 계획함과 동시에 일반삼림을 장려하는 데에도 극히 중요한 관계가 있다. 그러므로 이의 실행에 즈음하여 가장 주밀한 고려와 노력으로 확실한 시설방침을 꾀하고 진행상 본질을 잃는 일이 없기를 바랐으므로 본 회장이 大正 11년 5월 12일(*양력 ) 금요일, 맑게 갠 하늘을 기회로 지리산 개척에 관한 준비를 단속하고 고적조사원 권도용, 토목기수보 大谷定造와 함께 고용인 2명을 대동하고 등산길에 나섰다. 중로에서 벽송사 승려 김선응·이종인과 마천면장 김병호 및 삯꾼 2인이 같이하여 일행이 모두 10인이 되었다.

지금 각 명산 거악을 개척하여 평탄한 길을 만들고 수레의 교통을 개시함에 있어서 타지방측은 생략하고 특히 본군에 관한 부분에 중점을 두고서 먼저 조망과 소문을 좇아 훌륭한 고적을 소개하면 이러하다.

산의 북면에 한 고성이 있으니 추성(楸城)이라 칭하고 또는 박회지(朴回址)라 하는데, 산골짜기가 험하여 우마가 능히 이르지 못하는 곳이니 세속에 대대로 전하기를 옛적에 신라가 백제를 방어하던 땅이라 하였다. 창고의 유지가 완연히 남아 있으며 그 부근에 행궁의 기초도 있다 한다.

추성 동쪽 십리쯤에 벽송사가 있는데 시원스레 트이고 맑고 깊어 실로 산속의 유명한 사찰이다. 고려말 벽송선사가 수도한 곳이니 그 유래를 거슬러 올라가보면 옛날 삼각산 태고암 고승 보우선사가 지나(元왕조시대)에 들어가 임제종의 16세 적통 청공선사의 인가(印可)를 득하고 본국에 돌아와 환암혼수 구곡각운 벽계정심 벽송지엄 부용영관에게 전수하여 청허휴정 부휴선수에 이르렀으니 이 두 대사는 실로 오늘날 조선 선교양종의 파조(派祖)이다.

절의 북편에 용유담이 있으니 곧 임천하류이다. 그 곁에 암석이 평평하게 길게 옆으로 펼쳐져 혹은 큰 독과 유사하고, 못 물의 흐름은 바닥이 보이지 않는다. 그 가운데 가사어가 있으니 토박들이 대대로 전하되, 지리산 서북에 달공사(운봉 땅)가 있고 그 곁에 저연(猪淵)이 있는데 가사어가 이 못에서 나서 매년 가을철이 되면 흐름을 따라 내려와 용유담에 이르렀다가 봄철에는 달공으로 돌아가기 때문에 이 고기가 엄천 이하에는 전무하다 한다. 그 건너편의 산기슭은 강혜평공 현의 사패지(賜牌地 *임금이 내려준 땅)인데, 좌우 석면에 새긴 이름의 수를 일일이 기록하기 어려울 정도이다. 옛날 점필재 김선생이 군수를 할 때에 뇌계 유호인, 매계 조위, 회헌 임대동 제현들이 여기에서 시가를 읊었다.

벽송사 건너편 언덕에 금강봉 향로봉 문수봉과 발 아래에 있는 마적대 송대 금대 등과 같은 명소는 놀러다니는 사람들이 구경하기에 적합할 뿐 아니라 그 명승의 뛰어남은 화공과 문사라도 형용하기 어렵다. 그중에서도 특히 마적대에 대한 전설에 의하면 고대불교의 전성시대에 마적도승이 이곳에 머물 때 가장 아끼는 나귀 1필이 있었는데 도술을 사용하여 마천강을 왕래할 적에 석장(錫杖 *승려의 지팡이)을 저쪽 언덕에 걸치고 그 위로 통행하게 하였다. 하루는 그 나귀를 운봉 등지에 보냈더니 돌아올 즈음에 용유담에서 뭇 용들이 싸우며 시끄럽게 떠드는 바람에 마적도승이 나귀의 울음소리를 듣지 못하여 석장을 가설치 아니하였으므로 나귀가 통과하지 못하고 슬피 울다가 넘어져 죽었다. 마적이 나귀가 돌아올 때를 기다려도 끝내 소식이 없거늘 집을 나서서 둘러보니 매우 아끼는 나귀가 암석 위에 넘어져 죽어 있었다. 그 원인을 헤아린즉 용의 시끄러움에 말미암은 것이므로 못속의 용을 전부 죽이고 애꾸눈의 용 하나만 남겨 그 못을 맡아서 지키게 하였다. 지금도 그 바위 위에 혈흔이 얼룩져 있다 한다.

마적암에서 동쪽 아래로 수십 참(站)의 거리에 오도(鰲島 *새우섬)가 있으니 곧 조선 태종왕의 열번째 아들 한남군 이어의 유배지이다. 장릉(단종의 묘호) 때에 그 형 금성대군 유(瑜)와 더불어 재앙을 입어 본군에 유배되어 이 섬에 머물렀으므로 지금 그 마을을 한남이라 한다.

오도치는 지리산 북쪽기슭에 있다. 그 아래에 등구사 유지가 있고 또 그 아래에 양진재가 있는데 이는 옛날 강개암선생 익(翼)이 깃들어 살던 곳이다. 이 골짝이 사는 곳이 깊고 소식이 막혀 거북이 몸을 숨기는 거와 같으므로 선생이 처음부터 그 이름을 사랑하였다. 또 샘이 맑고 돌이 깨끗함을 사랑하여 그 사이에서 본성[性眞]을 기를[養] 만하다 하여 양진(養眞)이라 명명하였고 오도(悟道)라는 이름도 선생으로 인하여 칭하게 되었다. 선생이 옥계 노문효공 진(禛)과 더불어 서로 도의를 연마하며 여기에 왕래 강론함이 거의 빈 달이 없었다.

서계(西溪)는 오도치의 동북기슭에 있는데 본군 남부의 수석이 뛰어난 곳으로 손가락을 첫째로 꼽을 만하다. 그 근원이 팔랑고개에서 나와 제한역 밑에 이르러 양협곡 사이에 돌이 평평하게 깔려 바닥이 미끄러워 磨ㅇ(*판독불가)과 같고 세찬 물결과 물보라가 산과 언덕의 물굽이를 내달려 쟁쟁거리는 것이 패옥이 부딪치는 소리 같다.

옛날 동강 김문정공 우옹이 강개암 노옥계 오덕계 제현들과 함께 놀며 구경하고 서계창수록을 이루었으니, 대개 인재를 배출함은 본래 지령이 하는 일이나 명승지도 인걸로 말미암아 그 이름을 더욱 드러난 것이니 그 서로 의지하고 서로 필요로 하여 가히 한쪽으로 주장하지 못함은 예로부터 지금까지 원래 그러한 사리와 형세라 일컫지 아니하지 못하리라.

이상은 모두 함양에 관한 고적이거니와 만약 상봉으로부터 간추려 논한다면 천왕봉 서쪽에 반야봉이 있어 구름 밖에 우뚝 솟아 있고 그 좌우에 두 고개가 있는데 이름이 황령 정령(전남의 경계)이다. 중국 한소제(*재위 : BC 86-74) 때에 마한왕이 진한·변한의 난을 피하여 황·정 두 장수로 하여금 여기에 성을 쌓게 하고 70여년을 지켰으므로 후인이 이로 인하여 두 장수의 성을 그 고개 이름으로 삼은 것이다. 

천왕봉 위에 성모사가 있는데 성모는 고래로 전하기를 석가의 모 마야부인이라 하고, 이승휴의 제왕운기에 이르되 성모는 고려 태조의 모친 위숙왕후라 하였다. 점필재 선생이 변별하여 말하기를, 고려인들이 선도성모의 전설을 익히 듣고 그 임금의 혈통을 신성하게 밝히고자 하여 이 이야기를 만들어낸 것을 승휴가 운기에 게재하였으나 이도 가히 증명하여 믿지 못할 것이라 하였는데, 탁영 김문민공 일손은 위숙왕후가 거의 맞다 하였다.

점필재 선생이 유산할 때에 좇아간 승려 공종이 성모사에 들어가 소불(小佛)을 받들고 날이 개게 해달라고 외치거늘 선생이 희롱한다 하니 종이 대답하기를 이렇게 하면 날이 갠다 하였다. 선생이 손을 씻고 의관을 정제하고 사당에 들어가 간단한 제물로 정성껏 고하였다. 이날 황혼녘에 음랭한 바람이 심하게 불었는데 한밤중에 이르러 별과 달이 깨끗이 빛나고 천지가 활짝 개어 산천이 확 트였는데 선생이 다시 사당에 들어가 신의 도움을 감사드렸다.

상봉에서 몇 마장을 남하하면 벽계사(碧溪寺)가 있는데 실로 산중턱의 형승을 차지하여 유명하고 뛰어난 사찰이더니 지금은 옛터만 존재하고 오직 탑 하나만 우거진 수풀 속에 우뚝하게 서 있어 흡사 사람이 담장 밖으로 지나갈 때 은은히 결발한 상투머리를 보는 것 같다. 조금 내려오면 문창대가 있는데 이는 문창후 최고운 선생이 거닐며 쉬던 곳이다.

서남쪽으로 구불구불 쌍계(하동의 지명)석문에 이르면 '삼신산쌍계사'란 여섯 큰 글자를 석각하였는데 이것도 고운선생의 필적이다. 또 진감국사의 비가 있는데 글을 짓는 것은 모두 최고운이 하였으니 참으로 세상에서 이름난 거찰이며 경치가 뛰어난 곳이다. 또 사천왕의 상을 안치하였는데 조각이 매우 묘하다.

고대 중화인의 조선지(朝鮮誌)에 말하되, 조선 지리산에 청학동이 있으니 사방이 아주 넓고 오곡이 잘 여무는데다 뭇 선인·승려만 거주하고 세인은 도달하지 못하는 곳이라, 청학 한 쌍이 바위굴에 머물러 살고 날아오를 때에는 하늘 높이 힘껏 떨치므로 골짜기명으로 삼았다 하였다. 그 부근에 이문청공 후백이 손수 쓴 석각이 있다 한다.

쌍계사의 서편에 악양 화개동이 있으니 일두 정선생이 일찍이 이 땅이 살 만한 곳이라 하여 집을 지었으므로 당시와 후세에 유림들이 거기에 관한 시를 지은 것이 많다.

산청(원래는 진주)의 덕산은 조남명 선생이 살 곳으로 정한 곳이니 골짜기가 깊고 그윽하며 들판이 평탄하고 넓어 인가가 조밀하고 수석이 맑고 시원데 동구에 ‘입덕문’ 세 글자의 석각이 있다.

대저 위에서 논한 바와 같이, 지령도 인걸을 의지하여 그 이름을 더욱 드러낸다 함은 지금 지리산에 대하여 고운·점필재·일두·남명 네 선생으로써 본다면 매우 믿을 수 있지 아니한가? 대개 네 선생은 이 산을 대표하여 천추만세라도 그 이름이 같이 전해져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 이것이 고적에 관한 사실을 자세히 살펴 연구할 필요라 하겠다.

또한 명산거악에 있는 하늘이 내린 보화는 가히 무진장이라 할지니 하나하나 낱낱이 말하기 어려우니 잠깐 일전에 본 바를 따르면 범·표범·곰·사슴·꿩의 가죽과 느티나무·가래나무·전나무·잣나무·대나무의 재목과 더불어 산삼·닥나무와 옻나무·자지(紫芝)·표고버섯·석이버섯 류를 계속 실어서 내보내 각지방의 이용에 제공함이 어찌 교통발전상 필요한 유일의 급무(急務)가 아니겠으며, 또 현재 조선 전도(全道)에 교육열이 발흥하여 과학상 연구에 골똘한 바 식물학을 연구하는 자는 물론 일반학생도 필히 이 산에 대한 한온대의 숲의 형상과 실물을 견학케 하고 삼림장려상 일반인민들에게 견학케 함이 어찌 교육실험을 위한 제2의 급무가 아니리오?

그러므로 본회에서 이들 요긴한 사항에 따라 지방발전상 직접 관계가 있음을 간파하고 몇 사람의 뜻있는 신사와 협의한 결과 근간에 강위수씨는 상봉에 망해정(望海亭)을 건축하고 박노익 및 영원사 일동은 제석당(帝釋堂)주) 건축, 이진우 및 벽송사 일동은 마암당(馬巖堂) 건축 등(두곳 모두 중봉)에 차례로 착수하여 일반인사에게 등산과 조망의 편의를 주어 불원간 개산식을 거행할 터인즉 장래 이 산에 대하여 무한의 발전희망을 성취하려면 이로부터 사람마다 일종의 산을 사랑하는 습관을 배양케 할 뿐 아니라 본군에 있어 더욱 애향심이 늘어남과 동시에 발전상황도 뒤따라야 더욱 확대될 것이다.

이에 비교하여 삼신산의 전체적 우열을 종합 논의코자 한다. 관동 수십 군을 두루 차지하여 가지각색의 기괴한 형승을 관할함은 금강산이 우위를 점하였다 하겠지만, 그 높고 빼어남이 동남쪽으로 곧장 바다에 닿아 조망의 광활함은 다시 지리산과 나란히 할 바가 없다. 삼림의 울창함으로 논하여도 뼈를 모두 드러낸 금강산과 비교할 바가 아니다. 그 외에 일월의 출입과 남극성이 출현함은 오직 이 산이 독차지하는 가치가 있으므로 반고의 한사(漢史)와 두보의 당시(唐詩)에 별자리와 산악의 경치를 설하였은즉 내용은 금강산과 비교하면 나은 점이 많다. 또 금강산은 동북에 위치하여 관동팔경의 지원을 받고 있으므로 가려 뽑은 경치 탐승에 관하여는 혹 저기가 여기보다 낫다 할 것이나, 비유하자면 지리산은 진물(鎭物 *사물을 안돈시키는 것)의 양과 재물(載物 *사물을 싣는 것)의 덕이 구비되어 두텁고 무거워 움직이지 않는 것이 커다란 덕이 있는 군자와 같고 금강산은 기괴한 골격과 맑고 여윈 기상으로 날래게 속세를 벗어나 얽매이지 않고 도를 닦는 고승과 같다.

그러한즉 산을 보는 취미도 그 사람의 뜻과 생각에 있을지니 산을 보는 방법으로 말하면 공자가 태산에 오른 것과 주자가 형산에 오른 것은 모두 한 가지의 법문이니, 가령 성현이 오늘날에 있다면 지리를 금강보다는 산을 즐기는 단계에서 한 층을 더 쳐줄 것이라고 단언하노라.

 

註) “상봉에 망해정을, 중봉에 마암당과 제석당을 세운다”고 하였는데, 중봉에 세우면서 제석당이라 이름 붙였다는 것은 이상하다. 유산인의 편의를 위해 세 건물을 세운다고 하였는데 그렇다면 상봉을 중심으로 중봉 또는 제석봉 쪽으로 오르내리는 사람을 위해 상봉 외에는 당연히 중봉과 제석봉에 각각 세우는 게 상식적일 것이다.

지금의 제석단(*제석봉 아래 박지) 바위에 「帝釋堂 朴魯翊建屋 壬戌七月日(제석당 박노익건옥 임술칠월일)」각자가 새겨져 있어 명백한 증거가 되므로 제석당의 위치를 중봉이라 한 것은 사실과 다르다. 아니면 이 글을 쓸 당시의 본래 계획은 중봉이었으나 나중에 합리적으로 판단하여 실제 건축은 제석봉에 세웠을 수도 있다.

아울러 논란이 된 마암당(馬巖堂)의 위치도 이 기록으로 볼 때는 중봉 부근이다. 물론 실제로는 다른 곳에 세웠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제석당처럼 기부자 이진우(李璡雨)의 각자를 찾는 것도 관건이 될 것이다.


제석당.jpg
 

△ 제석당 각자(인터넷)

5 Comments
꼭대 2018.01.12 06:53  
학창시절 문집 만든다고 필경하여 등사로 밀어보고는 수십년 만에 등사본을 만나 감회에 젖었습니다만, 상태가 좋지 못해 우찌 국역을 하나 싶었더만 깔끔하게 마무리한 것을 보니 대단합니다.

특히, 「帝釋堂 朴魯翊建屋 壬戌七月日] 각자의 근본을 밝힌 점은 대단한 수확입니다.


수많은 유산기에 등장하는 중봉(中峰)은 대략 다음의 세가지 의미로 사용되고 있더군요.

1. 상봉을 향해가는 중간에 있는 봉우리(중봉)라는 의미의 보통명사입니다.
  ->장터목에서 상봉을 향하여 가는 중간에 있는 봉우리 (제석봉)도 중봉이고,
  ->햠양 방면에서 천왕봉에 오르는 주요코스였던 동부능선에서 상봉을 향하여 가는 중간에 있는 봉우리도 중봉이고,
  ->중산리에서 상봉을 향하여 올라가다가 법계사 못미처 중간에 있는 봉우리도 중봉이고, 법계사 지나 상봉가기 전 중간에 있는 봉우리도 중봉이라 표기하였습니다.

제석봉을 중봉이라 표현한 것도 많이 보입니다.

2. 봉우리 이름으로서 고유명사로 사용
이 경우는 앞서 보통명사의 중봉으로 사용되다가 고유명사로 굳어진 경우라고 볼 수 있겠지요. 현재의 중봉이 그렇게 된 것 같습니다.

3. 산을 일컫는 지명의 의미가 그렇듯이, Pick를 이루는 봉우리뿐만 아니라 봉우리를 포함하여 자락까지 아우르는 지역을 표현하는 경우입니다.


그리고 옛날 유산기를 해석할 때, 몇가지 염두에 두어야 할 것 같습니다.
지금은 지리산중 소소한 지명까지 정보가 공유되어 대부분 산꾼들이 세밀하게 인식을 하고 있지만, 옛날에 대부분 사람들이 평생에 한두번 지리산 올라갈까 말까 할 시절에 정보의 비축과 공유는 매우 빈약했을 겁니다. 이것저것 요즘처럼 명쾌하게 분간을 할 수 없었겠지요.


그러니, 제석봉 언저리에 있는 제석당을 중봉에 건축했다는 표현은 이해할 만합니다.

마암 각자가 있는 곳에 마암당이 있었을 경우, 당시로서는 주변에 별다리 차용하여 지역을 표현할 지명도 없었던 그 시절, 지리산에 처음 오르는 함양군수가 마암당은 어디에 건축했다고 표현했겠습니까?
마암당은 중봉에 건축했다는 표현 이외에 별달리 분별하여 표현할 방법이 없었을 겁니다.


백무동에서 상봉으로 올라가는 베이스켐프 같은 위치에 「帝釋堂]을 건축하고 각자를 새겼듯이, 이에 상응하게 함양에서 상봉으로 가는 주루트에 베이스캠프로 적절한 곳에 마암당을 짓고 [馬巖] 각자도 이때 새겼다고 보여집니다.
엉겅퀴 2018.01.12 08:46  
옛사람들의 유산기에서, 상봉을 제외한 비슷한 봉우리들을 중봉이라 한 경우는 더러 있더군요.
언젠가 저도 한번 언급한 적이 있고요.
뭐 이 기록 하나로 마암의 위치를 어디다 할 수는 없고요.

다만 존재했을 가능성이 높은 이진우의 각자는 한번 찾아봐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만약 현재의 마암, 떨어져 나온 바위에 있었다면 훼손되었을 가능성이 높겠지요.
어쨌든 날이 풀리면 한번 나서봐야겠습니다.
가객 2018.01.12 10:21  
몇 부분을 제외하고는 지리산 역사및 정보를 아주 탄탄하게 구성한 글을 읽으며,
김종직이후 지리산을 알리는데 최고의 역량을 발휘한 함양의 도백인것 같습니다.
지리산보를 첫 대면할때 부터 원본에 목말라 했는데 꼭대님과 이선생 덕분에 대박자료..감사합니다.

마암(兩處는 皆中峯) ...
하봉이라 는 이름이 생성되기 전 중봉 주변의 지명들의 위치 설명을 포괄적 개념으로 했다고 봅니다.
예를 들면,진양지에서의 향적사지에 대한 기록 같은 것,
향적사 ."지리산 천왕봉에 있다.聖母廟의 香火를 위하여 세웠다(승람에 보인다)香積寺在智異山天王峯爲聖毋廟香火而建見勝覽 "

근데 당시 민군수 일행들이 지리산탐승을 할때,마암당이 세워졌을까요?
본문및 지리산부를 보면 건축 전인것 같은데...

그야말로 종이조각들 이었던 자료를 귀한책으로 제본해 주신 삼우반 이재영샘께도 감사드립니다.
엉겅퀴 2018.01.12 11:15  
본문에 "근간(가까운 시일 내)에 차례로 착수하여 ··· 불원간 개산식을 거행할 터인즉"이라 하였고
민인호와 같이 간 권도용의 「방장산부」에 "마암에 도착하여 하룻밤 묵을 야영지를 방초를 깔고 나무를 베어 새둥지처럼 꾸몄다"고 했으며
다음해 「지리산보」에 " ··· 건축하여 본년 양춘가절에 개산식을 행하려 한다"고 하였으니
세 건물이 완성되었기에 개산식을 행한다고 본다면
1922년5월(음력4월) 산행시에는 마암당은 없었고, 그 이후 다음해 봄 사이에 세워진 것으로 보이네요.
가객 2018.01.12 11:39  
천왕봉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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