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산행기

1924, 강계형 <두류록(頭流錄)>

엉겅퀴 | 1154

【읽어두기】

 

○ 이 글은 심연 강계형(心淵 姜桂馨 1875-1936)의 지리산 유산기이다. 그의 글은 지리99에 2개가 실려 있다. 아버지 강용하의 행장을 국역한 『아버지, 나의 아버지』와 《한오대계안》중의 『한오대계회사실』이 그것이다. 그는 무산 강용하의 둘째 아들로 화산12곡 병담(屛潭)의 ‘심연강공풍영소(心淵姜公風咏所)’ 각자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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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의 산행경로는 이렇다. 〔1924.8.16 오후 문정동 출발 - 세동(1박) - 마적동 - 송대(1박) - 마당바위 - 장구목 - 사립재 - 통천문 - 쑥밭재 - 천례탕 - 마암당 - 하봉 - 중봉 - 천왕봉(1박)〕

이중 마당바위[塲巖] 장구목[缶項] 통천문(通天門) 천례탕(天禮碭) 등은 그동안 거의 등장하지 않았거나 새로운 지명이다. 또 그의 유산기는 1922년 이후에 민인호의 함양명승고적보존회에서 세운 마암당과 망해정의 구체적인 모습을 전해주고 있다.

 

○ 그의 산행기는 특이하게도 천왕봉에서 일출을 맞이하는 것으로 끝난다. 그가 의식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근대적인 문학적 수법에 가깝다는 생각이 든다. 또 부친의 재능을 물려받았는지 그의 글은 명료하면서도 정취가 있고 묵직함이 느껴진다.

그의 산행일정은 본문에서 직접 언급한 적이 없으므로 추정할 수밖에 없었다. 보존사(保存社)의 마암당 건립 이후이고, 그의 선친이 지리산을 유람한(1889) 지 35년이 지났다 하였고, 8월의 명절 익일이라 했으므로 1924년 8월16일로 추정하였다.

 

○ 이 글은 그의 문집 《심연집(心淵集)》에서 발췌하였으며 국립중앙도서관 고도서실에서 꼭대님이 일부를 촬영하여 출력해 보내준 것이다. 원문은 책자를 보고 일일이 타이핑하여 한자로 변환한 것이다. 그의 문집 속에 『두류록』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부탁하였지만, 보내준 자료 중에는 은근히 국역하기를 압박하는 꼭대님의 저의가 느껴지는 저자의 다른 글들도 물론 포함되어 있고, 꼭대님의 의도와 관계없이 우리말로 옮길 만한 내용이 더러 있었지만 게으른 늠이 언제 하겠다고 섣불리 약속할 수는 없는 일이다. 급한 불만 껐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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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류록(頭流錄)

 

나는 가난한 선비이다. 게다가 질병이 있고 나태하여 발길이 뜰 밖으로 나가본 적이 드물다. 나라의 명승에 대하여는 원래부터 가볼 논의를 하지 않았고 고향산천으로는 두류산을 알지만 한번도 오르지 못했다. 중국사람들이 말한 “원컨대 고려국에 태어나 금강산을 한번 보았으면[願生高麗國 一見金剛山]”이란 구절을 혼자 외우며 스스로 만족한 지 오래였다.

금년 가을 8월 상순, 안형(兄) 내명과 함께 명절 후에 송대로 들어가기로 약속하였는데, 이미 명절이 지난 익일 이웃의 벗 김사인이 유평으로부터 돌아와 말하기를 유평의 여러 벗들도 같이 산에 오를 계획으로 다음날 송대로 들어올 예정이며 5리 밖의 몇사람도 함께 가기로 했다고 말하였다. 그 말을 듣고는 귀뿌리가 시원해졌으며 오랫동안 품어왔던 뜻이 발동하였다. 모두 내가 감당하지 못하여 근심하고 고통스러워 할 것이라 여겨 입으로 그 불가함을 다투어 말했지만, 나의 훨훨 떠나고자 하는 뜻을 막을 수 없었다.

내명과 약조한, 산에 드는 일을 언급할 때에는 내명 또한 얼굴에 기쁜 빛이 드러났다. 오후에 내명과 먼저 출발하여 앞 시내를 건너 세동에 이르러 신사과(司果 *정6품의 군직)를 방문하여 날씨에 관한 안부인사를 마치고 저녁을 들었다. 식사 후 그의 아들 현해와 함께 마을 서당에 가서 잤다. 때마침 노송하가 서당의 선생으로 와 있었는데, 그는 일전에 남원 지역에서 선생으로 있었다. 다만 방에는 남사 성칠 어른이 있었고 집에 있는 그의 사위 문선비는 시인이었다. 시를 짓고 술을 마시며 밤새워 놀았다. 주는 대로 잔을 기울이다 보니 취하여 깨지 않았다. 밤을 지새고 다음날 아침 시를 지은 두루마리를 보니 문선비의 시가 으뜸이었고 내가 가장 열등하였다. 시에 재주가 없는 것이 한스러웠다.

아침은 벗 화옥이 갖추었는데 산해진미로 극히 풍부하고 깔끔하였다. 식사 후에 그의 선친의 효의 행적을 보여줬는데 남원의 양사재(養士齋 *향교내에 설치한 교육기관)에서 발급한 통문(通文)과 기송사(松沙 奇宇萬 1846~1916/노사 기정진의 손자)가 서술한 전기를 펼쳐 감상하였다.

조금 후 마적으로 향하는데 남사 어른이 앞장섰고 문선비도 동행하였다. 문중의 어른 우여(遇汝 강지주)氏의 집에 이르러 서로 오랫동안 만나지 못했던 회포를 풀었다. 술을 몇 순배 마신 뒤 파하였다. 그 이웃에 사는 박창서 어른 또한 다과를 보내 대접하였으니 그 마을의 풍속의 순후함과 옛정이 넘치는 것을 볼 수 있어 서로 칭찬하여 떠들기를 그치지 않았다. 여러 이웃들 또한 한 마디로 같이 그러하였다.

아득히 멀다고 들었는데 드디어 송대에 들어갔다. 박어른이 선도하였고 동구에 이르러 내명은 그 외할아버지의 묘에 성묘하러 박어른과 함께 갔다. 박은 내명의 외가쪽의 가까운 친척이었다. 나혼자 먼저 노형(兄) 치범을 방문하여 유평에서 오기로 한 여러 벗들의 소식을 물었다. 노(盧)는 유평 친구들을 맞이하는 역할을 맡았기 때문이다. 치범이 말하기를, “아이들이 어딘가에 가서 말을 전한 적이 있는 모양인데, 여러 사람들의 생각은 다음번에 산에 드는 것이기 때문에 갑자기 지금 (길을 떠나기 위해) 술을 빚는다고 그대가 들은 소문은 잘못된 것이네.”라고 하였다.

바야흐로 의아하게 여길 때 여러 사람의 지팡이와 나막신 끄는 소리에 살펴보니 유평의 소년과 이어서 집안 조카 명언과 사인, 허군(君) 문규와 상촌의 하군(君) 성덕 종생 태진 및 유평의 벗 정인선, 그리고 그의 종형 경부(군명)가 선후로 도착하였다. 그 나머지는 노형 태경, 박군 사필, 김선비 사숙, 김군 태섭은 막 서당 선생이 되었는데 그의 아우와 함께 왔고, 앞에 왔던 소년은 그의 아랫사람이었다. 하인과 경부의 종자(從者)까지 총27인이었다. 서로 손을 잡고 회포를 푸는데 그 기쁨을 주체하지 못하는 듯하였다.

마침내 여러 집에 나누어 잤다. 나와 내명은 박선비 한용의 집에서 같이 잤는데 그는 내명의 외가쪽 사람이었다. 내명의 이번 행사는 오로지 조상이 남긴 흔적을 찾는 데에 있었으므로 박씨 집도 그래서 찾게 된 것이다. 저녁식사 후에 여러 벗들이 운(韻)을 청하기에 마침내 추(秋)자로 정하였다.

다음날 아침 모두 산에 드는 행장을 꾸리면서 각자 점심을 준비했는데 나와 내명은 생각지도 못한 일이라 본디 예측하지 못했음이 분명하다. 나는 방한복 일습을 갖추었고 내명은 솜옷 한벌을 한용에게 빌렸다.

선후로 장암(塲巖 *마당바위)1)에 도착하여 벗 신치구(태경)를 방문하였는데 때마침 그의 중형 경백씨가 그자리에 있다가 얘기를 듣고는 치구와 함께하였고 그 이웃노인 김우서도 행렬의 끝에 붙었다. 치범은 그의 아들과 함께 솥을 지고 따랐고, 또 한 젊은이가 동자 하나에게 옷보따리를 지게 하여 서쪽에서 오는데 가까이서 보니 기동의 정선비 태정이었고 막 장재동의 글방 선생이 된 사람이었다.

드디어 차례로 서서 나아가 겨우 장구목[缶項부항]에 도착하니 갈증이 나고 침이 말랐다. 곧이어 사립재[扉峴비현]에 당도하여 벗 치조를 방문했더니 아이가 말하기를 조금 있으면 돌아올 거라 했지만 일행에게 뒤쳐질까봐 힘써 길을 올랐다. 아래위의 석문을 지났다. 문의 양쪽은 모두 바위이고 가운데로 한 줄기 좁은 길이 통하였다. 바위의 모양은 위가 붙어있고 가운데가 비어 십여인을 수용할 수 있으며 흰 글씨로 통천문(通天門)2) 세 글자가 석면에 쓰여 있었다.

점점 앞으로 쑥밭재[艾峴애현]로 나아가는데  길은 왼쪽으로 가다 오른쪽으로 향했으며 산기슭을 넘자 천례탕(天禮碭 *하늘에 제사지내는 돌?)3)이었다. 골짜기는 깊고 길은 험한데 거기다 거대한 나무들이 하늘을 찔러 눈길을 돌릴 겨를이 없었다. 부족한 것은 서리 내릴 계절이 아직 멀어 단지 녹음만 짙은 것뿐이었다. 만약 늦은 서리가 내려 붉고 누런 색이 화려하게 펼쳐지면 완연히 사람이 비단휘장 속에 있는 듯 형체와 그림자가 서로 비추겠지만, 그것 없이도 하나의 장관이었다.

나는 본디 초목·금수의 계보에 어두워 아는 것이라곤 나무는 녹나무 떡갈나무 박달나무 전나무 마가목 청려목 등이고, 풀은 작약 당귀 도라지 고사리 등속일 뿐이다. 앞길은 극히 험하여 올라갈 때에는 허공으로 오르는 것 같고, 내려갈 때에는 깊은 연못으로 떨어지는 듯하여 결코 평탄한 곳이 없다. 종자들이 말하기를, “전에 산에 오른 자들은 관을 벗고 나무를 끌어안고 바위를 끼고 간신히 나아갔는데 지금은 보존사(保存社 *함양명승고적보존회)의 힘으로 산아래 사람을 시켜 벌목을 하고 험한 곳을 고르게 한 덕분에 이 앞까지는 평지라 할 수 있습니다.” 하였다.

또 유산자들의 노숙을 생각하여 마암과 상봉 및 제석당 등지에 판옥(板屋)을 세우고 풍우를 가리게 하였으니 혜택이 유산인에게 미쳤다고 할 수 있다. 나와 내명은 모두 추위에 곤란을 겪는 자들이므로 길가의 초목이 무성한 것을 보고 말하기를 “한 골짜기의 땔나무를 긁어 집으로 보내면 겨울을 나는 데에 어렵지 않겠다.”고 하자, 종자가 듣고 말하기를 “(저의) 마음씀이 마을사람들에게 멀리 미치지 못하니 스스로 부끄럽습니다.” 하였다.

힘을 다하여 마암당(馬巖堂)4)에 이르렀는데 이는 하봉에서 처음 도착하는 곳이다. 거대한 바위가 둥그렇게 솟아 있는 것이 십여 길이었고 아래 부분은 평탄한데 곁에는 근원이 되는 샘이 있었다. 몇 칸의 집을 새로 지었는데 온돌과 벽없는 마루가 간략히 갖추어져 있어 길 가는 사람이 다리를 쉴 만하였다. 막 점심을 먹으려 할 때에 문선비와 세동사람 몇이 도착하여 둘러앉아 점심을 먹었다.

조금 쉬었다 길을 진행하여 하봉에 올라 돌아보며 보는 것을 점차 넓혀갔다. 가까이에는 높고 큰 나무들이 궁궐의 들보로 쓰일 만한데 수령을 모를 정도로 오래되었고 공중에 나서 공중에서 늙어가니 도끼의 침입을 당할 일이 없어 비록 그 쓸모없음이 애석하다고 하여도 혹자는 끝까지 천수를 누리는 것이라고 한다. 멀리는 높은 밭과 아래 들녘에 벼와 기장이 풍성하고 누렇게 익어가는 것이 공중에 떠있는 듯 하니 농부들이 가을걷이를 하면 살아 있는 백성들이 거의 곤액을 면할 것이니 기쁜 일이다.

내명이 갑자기 다리가 쑤신다고 걱정하고 나도 발이 부르터서 자주 풀을 깔고 쉬었다. 종자가 길가에서 잣나무 열매를 취하여 불에 구워 씨앗을 골라 먹으며 입맛을 돋우웠다.

이렇게 전진하여 근근이 중봉에 도착하여 앞을 바라보니 별세계에 오똑 솟은 하나의 맑게 갠 봉우리가 구름과 하늘 사이에 아득하였다. 비로소 천왕봉의 진면목을 알 수 있었다. 봉우리 밑에 이르러 일행 중 맨몸인 자들은 짐꾼들의 짐을 나눠지고 짐꾼들에게 나무를 베고 땔나무를 잘라 밤을 지샐 밑천으로 삼게 하였다. 상봉은 초목이 풍상을 심하게 겪어 울퉁불퉁 옹이가 지고 군락도 총총하지 않아 땔감으로 감당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드디어 정신을 차리고 일어나 다릿심을 떨쳐 나무와 푸른 넝쿨을 부여잡고 올랐다. 흉금이 확 트이고 안계가 드넓게 펼쳐져 시인이 말한 이른바 ‘별유천지비인간(別有天地非人間 *인간세상이 아닌 별천지, 선경)’이 과연 빈말이 아니었다.

백두산의 큰 기세가 아득히 동쪽으로 달려 태백산이 되었고 태백산에서 다시 멀리 서쪽으로 달려 덕유산이 되었으며 남하하여 반야봉이 되었다. 반야봉에서의 줄기는 벽소령에서 골짜기를 지나고 영신대에서 엉켰다가 천왕봉에서 멈추었으니 백두산의 큰 기운이 천왕봉에서 다한 것이다. 그러므로 산이름을 두류라 칭한 것은 이 때문이다.

그 아름답고 맑은 기운과 드넓고도 높은 형세는 동쪽으로 치닫고 서쪽으로 내달려 천변만화함이 준마의 질주나 용과 뱀이 날아오르는 것 같으니 어찌 만에 하나라도 비유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신령스런 구역의 실제 모습을 크게 열었고 또 보물 같은 신비한 초목과 거대한 재목이 나는 남녘의 진산이 되어 백성들의 일용에 소요되고 국가의 사전(祀典 *국가의 제사 규범)에 남악으로 올려져 제사를 지냈던 바 여간한 명산이 아니고는 감히 견줄 수가 없으니 명성이 현저하여 세상에서 삼신산의 하나로 칭하는 것은 마땅한 일이다.

봉우리의 후면은 흙이 쌓여 온순·윤택·단아·묵직하여 사랑할 만하고 원근에는 무성한 수풀과 풍성한 초목으로 골짜기는 깊고 그윽하며 인가와 멀리 떨어져 있고 북향이다. 전면은 높고 가파르며 깎아지른 바위로 범할 수 없는 형상이며 첩첩이 쌓인 봉우리와 끊어진 골짜기가 좌우를 둘러싸고 묵정밭과 새로 개간한 밭이 나란히 하는 곳으로 남향이다. 앞에서 갈라지고 뒤에서 따라가며 일어나고 엎드리고 움추리고 펴서 널리 퍼져 4방으로 흩어져 가다 혹은 5십리에서 멈추고 혹은 100여리에서 멈추었다. 꿈틀대는 기괴한 모습은 비록 솜씨 좋은 화공이 잘 그려낸다 해도 그 형상을 온전히 나타내기에는 부족할 것이다.

꼭대기에 올라 바라보니 서북쪽은 산이 많아 거악이 첩첩하고 동남쪽은 물이 많아 대해가 탕탕하다. 수없이 많은 산과 물이 끼고 돌며 빙 둘러서서 마치 둥근 고리가 끊어지지 않고 수레바퀴가 끝없이 이어지는 것 같다. 흡사 천왕이 자리한 곳에 모든 벼슬아치들이 줄지어 시립한 것과 같고, 대장이 단에 오르고 군대가 명령을 듣는 것처럼 늠름하고 위엄이 있으며 넓고 아득하여 이름 붙이기 힘들다. 나는 본디 사방으로 돌아다니기를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기에 여기가 어디고 저기가 어딘지 분별할 수가 없었고, 다만 종자의 입에 의지하여 몇 군데 가리켜주는 것을 대강 알았지만 비유하자면 장님이 비단채색 옷을 걸치는 거와 같아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일찍이 《미수기언》의 『지리산기』를 보니 “바라보니 동쪽 끝에 해 뜨는 곳이 보였고, 근해에는 검매(黔魅), 욕지(蓐芝), 절영(絶影) 이 보였다. 그 밖에 있는 마도(馬島)는 일본과의 경계이다. 그 서쪽의 연(燕)나라 제(齊)나라의 바다와 천리나 뻗은 중국대륙이 보였다. 그리고 남쪽 끝으로 탐탁라(耽乇羅)가 보였으며, 그 밖은 눈에 보이지 않았다.” 운운하였다. 이에 의거하여 미루어 생각해보면 이 산의 지극히 높음과 아득히 멀리 바라볼 수 있음을 알 수 있다.

봉우리 남쪽은 일월대인데 오르면 일출의 출입을 볼 수 있어 그렇게 이름지은 것이며, 새로 새긴 대의 이름자는 크기가 팔뚝 만한데 정죽헌이 쓴 글씨이다. 대의 전후좌우에 이름을 새긴 것이 무려 수백 수천이지만 오래된 것은 깎이고 갈라져 판별하기 힘들다. 그 바라는 바는 모두 이름을 남겨 사라지지 않게 하는 것이지만 그 이름자가 뚜렷한 것을 손꼽아 헤아려보면 가장 오래된 것도 2백년 내외에 불과하니 처음 2백년 전에 석면에 새길 때에는 어찌 그것을 몰랐을까? 앞의 것이 닿아 없어지고 뒷사람이 그 자리에 다시 새긴 것일까?

대의 나머지 형세는 혹 네모난 것은 집 같고 둥근 것은 곳간 같은데 모두 돌이며 셀 수 없이 많아 유산자들이 즐기는 바가 되었으니 조물주의 솜씨가 끝없이 교묘함을 알 수 있겠다.

아, 우주가 생긴 이래 이 산이 있고 이 산이 생긴 이래 오른 자는 무한하지만 앞사람이 거닐고 뒷사람이 쉬던 자취는 다시 찾을 수 없다. 다만 일두노인의 “두류산을 남김없이 구경하고 외로운 배로 강물 따라 내려가네(看盡頭流孤舟下)”란 시와 남명옹의 “만고의 천왕봉은 하늘이 울어도 오히려 울지 않네(萬古天王峯 天鳴猶不鳴)”란 구절이 이 산과 시작과 끝을 함께할 것이며, 탁영의 두류록 한편은 이 산의 전체 유산록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기억해보니 옛날 기축년 중추(1889.8월) 상순, 선대인이 박우재 김입암 및 문중어른과 노인분들 그리고 권자언 어른 등 제공들과 더불어 고삐를 나란히 하고 한 이불을 덮고 자면서 이 산에 올랐다. 그때 流자 운으로 지은 시 중에는 선대인이 옛선현을 추모하여 지은 “산수경치를 남김없이 보았는데, 옛 두류산은 탈없이 잘 있네(看盡處煙霞 無恙舊頭流 )”라 한 구절이 수위에 올랐고, 叢자 운으로 지은 시로는 우재의 “8월의 갖옷도 밤이 되니 오히려 두렵고, 백년 늙은 나무는 무리를 짓지 않았네(八月寒裘猶畏夜 百年老樹不成叢)”란 구절을 으뜸으로 쳤다. 그 당시 유람의 번성함과 시짓기의 풍성함을 만에 하나나마 상상할 수 있다. 지금까지 35년이 지나 선대인과 여러 어른들이 차례로 돌아가시고 나이가 가장 적은 입암 혼자 아직 살아 계신다. 금일 불초가 여기에 와서 비록 옛 동네어른들의 발자취를 감히 따르지는 못할지라도 옛시절에 대한 감회에 스스로 서글픔을 금할 수 없다.     

생각해보면 이 산에 오른 사람들 중엔 대인군자도 있을 것이고 나무꾼이나 소 먹이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대인군자가 본 것은 무엇일까, 모두 仁과 智일까? 나무꾼 소 먹이는 사람이 본 것은 무엇일까, 그저 가시밭길이었을까? 누군들 대인군자가 본 것을 보고자 하지 않으랴만, 결국은 나무꾼 소 먹이는 자가 본 것으로(*힘들다는 것) 귀결되는 것은 어째서일까?

또 생각컨대 천지간의 온갖 것들이 눈 아래로 보이고 인간세상의 노래와 울음은 멀어서 들리지 않으니 한나절 동안 한가함을 얻었다고 할 만하다. 이 같은 선경에서 어떻게 하면 수진양성(修眞養性 *수행하여 천성을 기르는 것)하는 인사를 만나 도를 듣고 세상을 논하며 약초를 캐고 물을 마시며 노년의 한가로움을 누릴 수 있을까? 몹시 한스럽다.

산등성마루에는 총사(叢祠 *잡신을 섬기는 사당. 음사淫祠와 같다.)가 있는데, 나와 여러 사람이 들어가서 보니 석상이 안치되어 있고 주위는 비단장막을 둘렀으며 밤과 대추가 바쳐져 있었다. 탁영이 산신령에게 드린 말에 느낌이 있었고 산 아래 사는 사람으로서 은밀히 그 은덕을 받을 수도 있으니 어찌 절을 하지 않겠는가 하고는 마침내 절을 하고 물러나왔다.

평이한 곳에는 새로 지은 판옥이 있었는데 보존사에서 세운 것이다. 상하 사방 모두 나무를 깎아 구성하였고 흙과 돌을 쓰지 않았다. 주방이 있고 기둥과 도리가 나란히 양철을 떠받쳤는데 모진 바람에 말려올라가 한쪽을 덧대었으며 모든 사람이 주방에 들어찼다. 멀리 사립재가 바라보였고 벗 치조가 우리가 등산한다는 말을 듣고는 이웃에 사는 문선비와 지팡이를 짚고 같이 왔으니 친구의 정을 볼 수 있다. 시속에 따라 바람 속에 자는데 산의 날씨가 따뜻하여 홑 삼베옷을 입은 내명조차 추운 기색이 조금도 없었다.

서편의 해가 함지(咸池 *해가 진다는 서쪽의 큰 못)로 들어가려 할 때 대에 올라 바라보니 태양의 곁에 별도의 햇무리 몇 개가 있었는데 위에 있다가 아래에 있다가 별안간 왼쪽에 나타났다가 오른쪽에 나타나곤 하여 그 변화무쌍함이 일정치 않았다. 떨어져 가라앉을 때 태양의 빛깔은 불처럼 붉었고 그 모양은 둥근 항아리 같았으며, 그 변하는 것은 마치 가마가 떠가듯 천천히 내려앉았다. 서편 하늘은 불의 성(城)처럼 휘황하게 빛나 상하좌우를 밝게 물들이고, 하늘끝 뜬구름은 고기비늘 같은데 홀연히 변하여 만 조각 비단자락이 되어 오래도록 바뀌지 않으니, 진실로 장관이었다.

일행들이 물을 찾아 저녁밥을 지으려고 하는데 마침 오랜 가뭄으로 샘구멍이 다 말라버렸고 다만 몇 방울의 물만 있어 제대로 쌀을 일 수도 없어 밥이 이루어진 것을 보니 반은 익고 반은 익지 않아 씹어먹을 수가 없어 나눠 취하여 배고픔을 면하였다. 또 머리 깎은 세 사람이 있었고 마천에 사는데 백무동에서 왔다고 하였다. 이에 머물러 자야 할 사람이 총40여인이어서 한곳에 단체로 모이기가 힘들어 혹은 방에 혹은 마당에 모여 앉아 불을 피웠다. 나는 일행중 나이 많은 사람 10여인과 더불어 주방을 차지하고 불을 피워 추위를 막고 밤을 지샐 계획으로 치범에게 마른자리를 빌려 나눠 앉았다.

조금 있으니 달이 떠오른다 하여 밤을 도와 대에 오르니 바다어귀는 대낮 같이 밝아 그 모습이 기괴하기 짝이 없고, 갑자기 수레바퀴 같은 달이 떠서 그것이 서서히 하늘 끝으로 굴러가는 것을 보고는 원래 있던 자리로 돌아왔다. 2경이 가까워지자 홀연히 파도소리가 들려오는 듯하여 한밤중에 놀라서 깨어나니 군마(軍馬)가 곧바로 달려가는 듯한데 바람이 불어오는 징후였다. 잠깐만에 온 천지에서 바람이 일어나 사람의 살과 뼈를 파고드니 참을 수 없었고 견딜 방도가 없었다. 다만 해학과 옛날이야기를 심심파적으로 삼고 간혹 고구마를 구워 입맛을 돋울 뿐이었다.

밤이 이미 반이 지나 남극성이 뜰 때를 살피는데, 남극성은 봄의 저녁과 가을의 새벽에 병방(丙方 *정남에서 동으로 15도 이내)에서 나와 정방(丁方 *정남에서 서로 15도 이내)으로 들어간다고 일찍이 들었다. 일행중 한 사람이  “전에 이 별을 본 적이 몇 번 있는데 아직 시간이 이르다.” 하였다. 하지만 자주 시간을 헤아려보는데, 홀연 한 가닥 선이 구름 사이로 뻗어 바다 끝까지 엉긴 것 같았고, 멀리서 보면 다만 보이는 것은 배의 불빛만 깜박거릴 뿐, 구름 가에는 새벽빛이 점점 밝아졌다. 후에 들으니, “배의 불빛이 어찌 수백 리 밖에까지 멀리 비치겠는가? 이것은 바로 (남극성의) 별빛이다.” 운운하였는데 과연 확실한지는 알 수 없다.

일출이 시작될 걸 알고는 모든 사람이 배고픔을 참고 추위를 무릅쓰고 나아가 움츠리고 앉아 동쪽 하늘끝[天門]을 바라보고 있는데, 한 떼의 먹구름이 그 부근을 에워싸고 있었다. 밝은 빛이 원근에서 붉게 물드는데 흡사 비단 옷을 입은 자가 기운 옷을 덧입은 것처럼 안으로는 밝은데 밖으로는 해가 뜨는 것이 정확히 어느 곳인지 알 수 없었다. 갑은 “이곳이 가장 밝으니 필시 이것이 태양일 것이다.” 말하고 을은 “저기가 가장 밝으니 반드시 저것일 것이다.”고 말한다. 희미하여 아직 정해진 것이 없었는데 문득 한 식경쯤 지나자 갑자기 하나의 크고 붉은 옥쟁반이 떠올랐으며, 먹구름에 가려 그 광경의 찬란함을 다 볼 수 없었으니 매우 애석하였다. 〈끝〉

 

【註】

 

1) 마을 입구에서 약 400m. 장구목으로 가는 길에서 약간 벗어나 있다. 전망은 송대 본동보다 훨씬 낫다. 지금도 민가가 있다. 바위 귀퉁이에는 廣岩臺(광암대) 각자가 있다. 廣岩은 너럭바위를 뜻한다. 또 바위 가운데에는 장기판이 그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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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통천문(通天門)은 어디일까? 사립재에서 오르면서 만났다 했으니 새봉 직전의 바위군일까? 그러나 바위 윗부분이 붙어 있다 했는데 맞지 않다. 또 독바위[甕巖옹암]를 언급하지 않은 것으로 보아 사립재에서 바로 청이당으로 가로질러 갔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점필재도 그렇게 갔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그 경로에 비슷한 바위가 있었던가?

한편 권도용은 『방장산부』에서 “두리(杜里)의 폐사(廢寺)를 지나니 양쪽의 바위가 서로 붙어 있는 곳이 있어 무엇이라 부르는지 물었더니 금강문(金剛門)이라 하였다.” 하였는데 그 금강문과 같은 것일까?

아니면 1611년 유몽인이 지리산을 유람하면서 두류암에서 지은 시 중에 “내일 아침 나는 석문으로 떠나고, 스님은 두류암의 구름과 물 사이에 남겠지(明朝我向石門去 師在頭流雲水間)”라 하였는데, 그 석문을 말하는 것일까? 그의 행로로 보아 석문은 곰샘에서 새봉 직전에 만나는 바위군을 말하는 듯. 어쨌든 알 수 없다.

 

3) 천례탕(天禮碭) 처음 듣는 이름이다. ‘하늘에 제사지내는 돌’이란 뜻이다. 하봉 옛길을 가다 산등성이와 만나는 곳에 바위군이 있는데, 그중 제사를 지낼 만한 평평한 바위를 찾아보면 될까?

 

4) 정황상 지금의 마암이다.

 

頭流錄

余寒士也兼以疾病懶惰足跡罕出庭際其於國中之名勝固無議到而至如家山之知頭流者未能一陟焉自誦唐人願生高麗國一見金剛山之句而自慊者久矣今秋八月上旬與安兄乃明有節後入松臺之約旣而過節翌日隣友金士仁自柳坪而還言柳坪諸友共爲上山計而將以明日入松臺又五里幾人亦爲偕行計云聞來耳根爽宿志忽發然皆以余之不能抵當爲憂苦口爭言其不可余之翩翩之志不可以阻遏而已乃明從約果至言及入山事則乃明亦喜發於顔午後與乃明先發渡前川至細洞訪申司果敍寒暄畢因進夕飯飯後與其允玉現偕至村塾而宿焉時盧松下致一方爲塾師而日前作南原之方惟房南史星七丈在家其玉潤文生詩人也遂拈韻呼酒以娛永夕余則隨處傾杯醉未醒而度夜翌朝題詩軸文詩居甲而余最劣到此空恨無詩工也朝飯友和玉所具而山海滋味極其豊潔飯后出示其先考孝行蹟南原養士齋通文及奇松沙所述傳披玩移時將向馬跡南史丈先導而文生亦偕行至宗丈遇汝氏家相與敍契闊之懷因呼酒數巡而罷其隣居朴昌瑞丈亦送茶果而致款可見其村風之淳厚而舊誼之津津也聒聒不已諸傍亦一辭同然然聽之邈邈而遂入松臺朴丈先導而至洞口乃明省其外祖墓與朴丈偕去朴是乃明外族近親也余獨先訪盧兄致範因問柳坪諸友之消息蓋盧爲柳友之東道故也致範言兒輩日前有那邊行而傳言諸人之念後入山故俄玆釀酒君之所聞誤也方疑訝之際有衆人筇屐聲審示之則柳坪少年而繼而家姪明彦及士仁許君文圭上村河君性德宗生泰珍與柳坪鄭友仁善曁其從兄君明敬夫後先而到焉其餘則盧兄泰卿朴君士弼金生士淑金君台燮方爲塾師與其弟偕來而前來少年則乃其腳下也僕夫若敬夫從者總二十七人也相握而敍懷其喜可掬遂分宿各家余與乃明則同宿於朴生漢容於乃明爲外族而乃明此行專在於先蹟之遺朴家而摉覓故也夕飯后諸友請以韻遂押秋字翌朝皆治入山之裝各貯午飯而余與乃明則出於不意素無豫料矣明焉余具寒衣一襲乃明則借木綿衣一件於漢容而後先到塲巖訪申友致九泰卿仲兄景伯氏時在此處而聞奇與致九及其隣老金禹瑞亦尾而行致範與其子負鼎鐺而從又有一年少使一童子負衣袱而西來者近視則基洞鄭生泰正方學究於長在洞者也遂序立前進纔到缶項而喉渴無涎矣迤到扉峴訪友致祚則兒言少選當返而恐其失伴努力登途過上下石門門之兩傍皆石而中通一逕巖形上合而中虛可容十餘人以白書通天門三字於石面漸漸前進置艾峴路於左便而取右路踰麓則天禮碭也谷深路險加以巨材參天無暇顧眄而所少者霜候未及只是綠陰中而已若到晩霜則紅黃爛漫宛似人在錦繡步障中形影相照而欠此一壯觀也余素昧草木禽獸譜而所識者於木櫲檞檀檜丁公藤靑藜枝之屬於草則芍藥當歸吉更薇蕨之屬而已前路崎嶇或上而騰於半空或下而若墜乎淵谷絶無平坦處從者言前之上山者脫冠巾而抱木挾巖艱辛而進今則賴有保存社之力使山下人伐薪輯險此前則可謂平地矣又慮遊山者之露宿設板屋於馬巖上峯及帝釋堂等處蔽風雨可謂惠及遊人矣余與乃明俱是困於寒者見路傍草樹之離披曰若梳一谷之薪輸之於家則過冬不難矣聞此從者之言自愧用心之不及社人遠矣盡力到馬巖堂乃下峯初到處也蓋巨巖穹隆壁立者十餘仞而下稍平坦傍有源泉新築數間屋子溫突凉軒略僃而足以歇行者之脚一行方午飯之際文生與細洞數人來到遂匝坐點心少憩而進程登下峯而回望則所見漸恢近者則高材巨木堪爲明堂棟梁之用者不知年數而空生空老不遭斧斤之侵其爲無用雖曰可惜而或者終之以天年耶遠者則高田下野禾黍穰穰黃雲浮空爲賀農者之有秋而庶免生民之困倒矣乃明忽患脚疼余亦足繭頻頻藉草而休從者取路傍柏子木實炙於火而取仁以助口味如是前進僅僅到中峯以望前頭則別有突兀之一晴峯縹緲於雲霄之際始知天王之眞面目焉到峯下一行之空行者分擔負軍之任而使斫木伐薪以爲經夜之資蓋上峯則草木飽經風霜擁腫不成叢不堪爲火用故也遂乃抖擻精神奮脚力攀木綠藤而登焉則胷襟洞闊眼界渺茫詩人所謂別有天地非人間者果非虛語也歟蓋白頭之大勢遙遙東馳爲太白自太白而復遙遙西馳爲德裕而南下爲般若自般若而過峽於碧霄嶺結姻靈神臺至天王峯而止焉白頭之幹氣至天王而盡焉故山名之稱以頭流者以此也其扶輿淸淑之氣磅礴崔嵬之勢東馳西走千變萬化駿馬之奔馳龍蛇之飛騰曷足以諭其萬一哉以故大闢靈區眞境又産寶物神卉巨材爲南服之鎭望需生民之日用國家秩以南嶽載在祀典非如干名山所敢比伍而名顯天下稱以三神之一宐矣峯之後面則戴土而溫潤端重有愛玩之底意茂林豊草遠近深邃而煙火隔遠者以其向陰也前面則多石而峻絶嶄巖有不可犯之之像層峯絶壑左右周遭而菑畲相望者以其面陽也前支後脚起伏屈伸分布四散者或四五十里而止焉或百餘里而止焉蜿蜒奇怪雖巧畫善譯者不足以盡其狀焉登峯頭而望焉則西北多山而巨嶽疊疊東南多水而大海湯湯千山萬水之擁廻周匝者若環之無端輪之無軋宛如天王在座百官列侍大將登壇諸軍聽令凜凜然有威蕩蕩乎難名余之素無四方者不辨此爲誰彼爲某而只憑從者之口頭略認數三指點處然譬如瞽者之加繡彩有何益哉曾見睂叜記言智異山記其觀望東盡日域近海黔昧蓐芝絶影其外馬島爲日本之界其西燕齊之海大陸千里極南耽乇羅以外眼力所不及云云據此而想像則可見玆山之絶高而觀望之漠遠矣峯之南日月臺上可望日月之出入故錫名而新刻臺名字書如腕大乃鄭竹軒所書也臺之前後左右刻名者無慮以百千數而久者則夷泐難辨其要摠爲留名不朽之資然觀其名字之顯著者而屈指以計則最遠者不過二百年之內外抑未知鐫刻於石面始於二百年前耶前者則爲風雨所磨滅而後者復刻於其處耶臺之餘勢或方如屋圓如廩者皆石而不可勝數以供遊山者之玩賞於此可認天工之費無限巧妙矣噫自宇宙以來有此山以來有登臨者無限而前者消後者息無復形跡之可尋惟蠹老之看盡頭流孤舟下詩冥翁之萬古天王峯天鳴猶不鳴之句可以玆山相終始而纓子之頭流錄可爲玆山之一副全錄矣記昔己丑仲秋上旬先大人與朴愚齋金立菴及宗丈耆老權丈子彦諸公並轡連被以登玆山而其流字詩則以先人之追上先賢看盡處煙霞無恙舊頭流之句推以爲首叢字詩則以愚齋之八月寒裘猶畏夜百年老樹不成叢之句推以爲冠其時遊覽之盛篇什之富可以想像萬一而到今三十五年之間先人及諸丈次第觀化獨立菴年最少而在世今日不肖登臨縱不敢追躡父老之遺塵而曠感之懷則自不禁悵然也第念登玆山者有大人君子焉有樵人牧子焉大人君子之見如何而都是仁智樵人牧子之見如何而只是荊棘孰不欲有大人君子之見而竟歸於樵人牧子之見何哉又念凡厥林林總總都歸於俯視中而人間歌哭邈乎難聽可謂得半日之偸閒矣如此靈境安得從修眞養性之士講道論世採藥飮水以做長年之閒乎重可恨也山脊有叢祠余與諸人入而視之則安以石像圍以錦障奠以棗栗因感濯纓山靈之語而居於山下者陰受其賜則安可無拜乎遂納拜而退下平夷處有新設板屋乃保存社之所建而上下四方俱是削木構成無土石之費有廚房楹楣之齊乘以洋鐵爲獰風所捲摺疊於一邊諸伴御擔於房而遠望則扉峴致祚聞吾輩登山隣居文生者杖策同來可見親舊之情矣時俗風宿而山日煖雖以乃明之單麻衣少無寒色而已西日將入咸池遂登臺望焉太陽之傍別有數日輪或上或下乍左乍右而閃忽難定及其垂몰沒之際太陽之色赤如火其形如圓壺又變如方屋轎冉冉而下西天一方宛如煌煌火城而通明於上下左右天際之浮雲如魚鱗者忽變爲萬片錦段久而不改眞壯觀也一行方尋水炊夕飯而適値久旱泉眼枯渴只有涓滴之水不能任意浙米及其成飯則半生半熟不堪喫噍而分取療飢又有剃頭者三人自言居馬川而自白武來云於是諸伴留宿者總四十餘人難於一處團聚或於房或於塲而團坐爇火余則與行中年高者十餘人占廚所以火禦寒而爲經夜之計借致範槁薦而分坐少焉有月出之報遂攝夜而登臺則海門如晝奇怪莫狀忽有一輪桂魄宛轉於天際看罷復還故處將及二更有聲忽如波濤夜驚軍馬直赴蓋風來之候也須臾風生萬竅砭人肌骨寒不可忍而無計可施只以詼諧及古談罷寂而間或炮甘薯以助味而已夜已過半審南極星出之候蓋南極春昏而秋晨丙出而丁入曾所聞也行中一人自言前已看星者數次而時未及云云然頻頻看候則忽有一線浮雲罩於海際凝於遠看只見海上船火明滅雲際而曙色漸開追後聞之則安有船火遠照於數百里之外哉此是星光也云云果未知的否也然認爲日出之候諸伴忍飢冒寒而進蝟縮而坐東望天門則又有一隊烏雲擁此而明光通紅於遠近恰如衣錦者之尙褧內明而外不知日出之的在何處甲曰此處最明必是日輪也乙曰彼處最明必是也依俙未定將過食頃而忽捧出一大赤玉盤蓋因烏雲之所遮未能盡其光景之燦爛殊爲可惜

 

7 Comments
꼭대 2018.01.30 14:35  
산행코스가 아주 재미있습니다.

1. 유산기에 등장하는 사립재

세동-마적-송대에서 자고, 마당바위를 지나 벽송사능선 상의 장구목를 지나 곧 사립재라고 했는데,
“사립재에 당도하여 벗 치조를 방문했더니..” 즉, 벗 치조의 집이 있는 마을을 지났다고 본다면, 여기서 표현한 사립재는 사립재 고개 그 자체가 아니라 사립재골로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 다음에 등장하는 지명이 쑥밭재이므로, (벽송사능선상의) 장구목에서 능선을 따라 사립재로 멀리 둘러 갈 필요가 없습니다.


2. 마암

이로써, 마암에 대한 논란은 더 이상 없겠지요?
 
3. 하봉

하봉이라는 지명이 이때에도 사용되었군요.



강계형의 문장이 ‘명료하면서도 정취가 있고 묵직함이 느껴진다.’ 했는데, 아주 귀중한 지리산행기 발굴하여 강계형 못지 않게 명료하면서도 정취가 있고 묵직하게 풀어쓴 <엉겅퀴>님의 문장이 제월광풍, 즉 비 개인 뒤 바람과 달처럼 명쾌하고 깨끗합니다.
가객 2018.01.30 22:00  
선대 강용하의 고매한 문맥을 그대로 이어받은 강계형의 학식이 돋보이는 기록입니다.
참 대단한 가문이라고 칭 하고 싶습니다.
 

백년 전 인데,기록에 등장하는 문정 세동 마적 송대등 ..
산간 마을들에 흐르는 인맥들의 가풍이 참 기품있게 느껴집니다.
지금의 송대 세동은 그야말로 자본주의 냄새만 나는데...

기록을 대하고보니 진즉에 게으름 부리지 말고 심연집 자료를 전해 드렸으면
99에서 결코 마암 난리는 없었을 텐데.,생각이 듭니다.
마암 논란의 난리를 겪으면서,시국이 평정(?)이 되면 언젠가는
지리산 보 의  “兩處는 皆 中峯”에 관한 개인적인 견해를 밝히려 했는데 자연적으로 해결이 된 것 같습니다.
 다 이선생 덕분입니다.


기록에 등장하는 지명들에 대한 견해를 내도 번호를 매겨서..ㅎ
1. 기록에서의 사립재: <꼭대>님과 동감입니다.


2.통천문: 본문에서 “통천문 글씨”라는 문장을 대하는 순간 아! 대박이다 했습니다.
지난 여름 우연히 사립재골의 한 골이 통천골이라는 정보를 들었습니다.
지금 마음으로는 당장에라도 그 쪽에 가면 몇 번 지나쳤을듯도 한 곳,석문바위를 찾을 것 같습니다.ㅎ
그리 되면 유몽인의 석문,권도용의 금강문 강계형의 통천문 ...김종직의 구롱까지...  가능 하리라 봅니다.


3.천례탕은 청이당의 이음인 듯 합니다.
99태동 전 청이당을 찾아 다닐때 어름터 독가 주인 임대봉씨는 천애당이라고 했고,
당시 추성리 이장 석씨 양반은 처녀당이라고 한데서 청이당을 쉽게 찾을 수 있었습니다.

1871년 <배찬>은 유두류록에서 천녀당이라고 했습니다.

 대박자료 발굴에 국역까지 정말 감사합니다.
99가 언제까지 이선생을 이렇게 고생 시켜야 하는지..
이번 자료도 까막눈이가 봐도 쉬운 문장은 아닌데 수고하셨습니다.
엉겅퀴 2018.01.31 12:36  
천례탕은 청이당의 음이 변이된 것 같다는 말씀,
참으로 설득력 있는 견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한편으론, 강계형은 시골의 무지렁이도 아니고
탁영의 유산기가 지리산 유산기를 대표할 만하다는 의견을 피력하였듯이
선인들의 수많은 유산기를 섭렵했을 터이고
청이당의 존재에 대해서도 당연 파악하고 있었을 것으로 보이며
그의 산행기는 상당히 정확한 묘사가 특징인데
청이당을 천례탕이라 하였다면 좀 의문입니다.
가객 2018.02.01 05:47  
강계형의 청이당 인식은 동행한 일행들로부터 들은 이름이라고 보아집니다.
 임대봉씨가 천애당이라하고,배찬이 천녀당이라 했듯 당시사람들도  비슷한 발음 천례탕 으로 불렀지 않았을까요?
들은 이름에 굳이 어려운 한역을 한 것은 작가의 고도한 학식 탓일 것이구요..ㅎ

수 많은 지리산유산기에서 청이당이 기록된 작품은 김종직 유몽인의 단 두 편인데,
행려 강계형이 두 작품을 못 보았을 수도 있거니와 읽었다해도 청이당 지명을 기억하지 않았을 경우도 있을 수 있다고 보아집니다.
(강계형이 청이당 기록이 없는 미수 탁영 일두 남명등의 유산기만 언급한 사실에서 생각),

그리고 강계형이 선인들의 지리산 기록을 대한 의식은
 어느 곳의 지명을 알려는 호기심 보다는  선비답게 기록속에 담긴 작가의 사상을 취하고져 한 것으로 봅니다.
(오직,마암당에 통천문에 대박을 외치는 내  의식이  부끄러울 정도.)

또 읽어도 대박 자료입니다.해동되면 통천문 찾으러 갑시다.
해영 2018.01.31 13:07  
[백두산의 큰 기세가 아득히 동쪽으로 달려 태백산이 되었고
태백산에서 다시 멀리 서쪽으로 달려 덕유산이 되었으며 남하하여 반야봉이 되었다.
반야봉에서의 줄기는 벽소령에서 골짜기를 지나고 영신대에서 엉켰다가 천왕봉에서 멈추었으니
백두산의 큰 기운이 천왕봉에서 다한 것이다.
그러므로 산이름을 두류라 칭한 것은 이 때문이다]

백두대간을 할 때 주제가 되었던 문장이라 눈에 확 들어 옵니다.

까만게 글자라는 것 밖에 모르는 무지렁이가 번역자의 아름다운 문장으로 지리산을
읽게되니 무식이 더 부끄러워집니다.
아직 지리산 지명에 대한 깊이가 없어 자꾸 곱 씹어 읽으며 이름을 각인합니다.

책에서 읽기 힘든 귀한 글을 지리99에서 만나게 되어 엉겅퀴형께 감사드립니다.
이런 글은 널리널리 읽혀야 하는데..
지리산곰돌이 2018.02.06 17:02  
엉겅퀴님 안녕하십니까?
 지리산곰돌이입니다.

 옛산행기방에 올려주신 일련의 게시물에 대하여 항상 감사해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평형감각을 가지고 유산기와 사물을 보아야함이 옳다'라고 생각되어 몇가지 고려되는 부분들을 요약해보았습니다.

 첫째,1922년 민인호 <지리산탐승안내>(옛산행기방 게시물번호 192번)에 의하면 친일조직인 함양명승고적보존회의 지원으로 건립된
중봉 마암당 언급과 본게시물상 '마암당'은 상이한것이 아닌가 판단됩니다.왜냐하면 1924년 강계형의 <두류록>에서 엄연히 하봉과
중봉을 구분하고있기 때문입니다.

 즉,본게시물상 '마암당'이라고 지칭한 곳은 말바우산막,행랑굴로 불려지는 현 하봉옛길상 마암이 분명하다는 판단입니다.과거 유산기에
등장하는 묘사 - 목기공이나 매잡이들이 기거하던 곳-와 흡사하며 건물의 묘사가 '행랑'의 의미와도 동일한 묘사로 보여집니다.
 강계형을 안내한 이들이 2년전 보존사(함양명승고적보존회)에서 시행한 사업을 알고 있었고 '마암당'이라 알고 도착한 산막뒤의
바위 또한 마암이니 마암이 마암이 아니라는 것이 아니라 본질은 同名異巖으로 마암을 이해하는가 아닌가가 핵심인듯합니다.
(저의 탐구분야도 마암당이 아닌 두개의 마암,즉 점필재 선생의 '유두류록'상 현중봉샘의 마암기술은 오류라는 지적에 있습니다.지금도 탐구중임을
 밝혀둡니다.)

 둘째 강계형의 <두류록>이 기술되기 2년전인 권도용의 <방장산부>에 나타난 현 중봉샘 마암기술 부분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가
 저의 숙제입니다. 한걸음에 올라 올라 일출을 구경할 수 있는곳,그리고 성모사에 대한 기술이 이어집니다.


1922년 권도용<방장산부>(옛산행기방 게시물번호 190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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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략)

마암(馬巖)에 도착하니 그윽하고 빼어났으며 높이 오르기에 적합하여 올라가 다리를 쉬었다. 필옹(畢翁 *점필재)이 기록한 진경(眞境)에 꼭 들어맞는 곳으로 먼 선현이 남긴 행적과 어긋나지 않아 거닐던 자취를 생각하니 마치 어제인 듯하였다. 태수의 지휘에 따라 민첩한 승려들은 재빨리 소나무 전나무를 베어내고 방초를 깔아 자리를 만들었다. 비유하자면 나무 위에 얽은 새 둥지와 같을 뿐이지만 잠깐 사이에 사치스런 집 한 채를 지은 셈이다. 아름드리 녹나무를 연이어 운반해와 모닥불을 크게 피우고 저녁이 되어 뱃가죽 속으로 술을 부으니 추위와 따뜻함을 느끼지 못하였다. 이윽고 별과 달이 밝게 뜨고 산하가 적막한 가운데 고운의 옥침(玉枕) 시1)를 읊조리자 나 또한 이곳에 영원히 몸을 맡기고 싶었다.

이윽고 한걸음에 꼭대기에 올라 일출을 구경하였다. 날카로운 바위에 서서 동쪽 바다를 향하여 몇 번이나 쳐다보았다.
(중략)

 다양한 시각으로 지리산학을 대하고자하는 마음에서 엉겅퀴님께 말씀드렸습니다.
항상 감사드립니다.끝.
산지골 2018.04.22 10:25  
엉겅퀴님 덕분에 귀한 산행기를 접해봅니다.
학창시절 공부할때처럼 여러번 읽어봐야할 명문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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