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산행기

강계형, <양화대산수록(陽和臺山水錄)>

엉겅퀴 | 10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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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눈발 흩날리는 양화대(2018.4.7)

      

읽어두기

 

○ 이 글은 심연 강계형(心淵 姜桂馨 1875-1936)의 『양화대산수록(陽和臺山水錄)』이다. 화산12곡-제5곡 「양화대」의 산수와 풍경에 관한 글이다. 그의 글은 지리99에 이미 네 편이 소개되었는데, 부친(강용하)의 문재를 이어 받았는지 글이 다 좋다. 훌륭한 유산기나 산수록이 그러하듯 그의 이 글도 원경과 근경의 조화가 뛰어나다. 요새말로 하면 먼저 드론을 띄워 전체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해당 영역을 줌-인하여 그 안으로 들어가 클로즈-업하는 식이다.

예를 들어 어떤 집에 대한 글을 쓴다고 하자. 집밖의 멀리서부터 집의 전체적인 윤곽은 물론, 집의 배경이 되는 산과 물, 집의 앉음새와 지붕 담장의 모습을 알려주고, 문은 솟을대문인지 사립문인지, 또 문간에 이르기까지의 고샅길과 그 길에 얽힌 사연까지 풀어놓는다면 읽는 사람이 혹(惑)하지 않을까? 그리고 문을 통과하면 정원과 꽃·나무에 대한 정보와 처마 아래 걸린 시래기와 시렁의 호미까지도 얘깃거리가 될 것이고, 방문을 열고 들어가서 가구와 이부자리 옷가지 어떤 책이 있는지를 본다면 거기에서 주인장의 성품까지도 어느 정도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너무 세세하면 읽는 사람이 지루할 것이고, 뭘 써야 할지를 모르면 건성건성 건너뛰게 되며, 상투적인 문구는 글의 품격을 떨어뜨릴 것이다.

 

○ 강계형은 먼저 전방위적인 시야를 제공하여 가슴이 트이게 한다. 특히 그는 향로봉(*지금의 상내봉 3거리인 듯)에서부터 양화대까지 뻗어내린 여러 산줄기에 대하여 상당히 정확하게 기술하고 있다. 산자분수령(山自分水嶺)의 원리를 충실히 따르고 있을 뿐더러, 100여년 전임에도 지형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다는 얘기다. 위성지도나 지형도도 없었을 텐데 말이다. 그래서 정확성은 언제나 글쓰는 이의 첫째가는 덕목이다.

그리고 멀리서 가까이에서 강을 넘나들며 유심히 관찰하여 치밀하게 묘사한다. 세부적으로는 현미경을 들이대듯 물속의 바위모양도 그냥 넘어가지 않는다. 따라서 정확한 관찰력 또한 글쓰는 이의 기본덕목이라고 생각한다. 묘사는 그 다음이다. 보지 못한 것을 쓸 수는 없으니까.

그러나 본 것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한다면 그것 또한 보지 못한 거와 별반 다를 바 없을 것이다. 그런 면에서 맞은편에서 본 양화대의 모습을 손바닥을 아래로 향하여 손가락을 늘어뜨린 형상으로 비유한 것은 탁월하다고 생각된다.

이처럼 그는 신선한 비유와 적절한 상상력, 본인의 감회를 엮어 끝까지 글의 긴장감을 유지하는 미덕을 잃지 않는다. 한마디로 상쾌함과 읽는 재미를 선사한다. 결과적으로 산수는 어떻게 즐겨야 하는지, 좋은 글은 어떻게 쓰야 하는지 가르쳐 주고, 나를 다시 그곳으로 달려가게 만든다. 나는 오늘도 한 수 배우고 간다.

    

○ 그는 楊花臺(양화대)가 陽和臺(양화대)로 바뀐 사연도 말해준다. 춥고 암울한 시대에 따뜻한 봄기운[陽和]을 기다리는 심정을 공감할 수 있다. 또 그 땅의 주인 강민영(1859-1925)의 주도하에 석벽에 陽和臺 각자와 여러 사람의 이름을 새기게 된 연유도 알려준다.

지금의 풍경으로 말할 것 같으면 양화대는 충분히 화산12곡의 수위를 다툴 만하다. 이렇게 풍치 좋은 곳에 계모임이 없을 수 없었을 터. 그래서 그의 「양화대수계안서(陽和臺修契案序)」(*양화대 계모임 문서에 쓴 서문)도 같이 소개한다.

여기 글들도 꼭대님이 국립중앙도서관에서 발췌 촬영한 《심연집(心淵集)》의 일부를 국역한 것임을 밝혀둔다.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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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화대의 다섯 손가락 지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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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의 글에 등장하는 관련지명(주민들의 증언 및 추정) : 지도와 사진(본문 참조)

 

양화대산수록(陽和臺山水錄)

 

방장산은 덕유산을 중조산(中祖山 *太祖山(=祖山) → 中祖山 → 小祖山(=主山))으로 하여 연치(鳶峙 *솔개재. 정확히는 알 수 없으나 장수군 계북면에 솔개재(솔고개)가 있는데 대간에서는 살짝 벗어나 있음)에서 협곡을 지나 삼신산의 하나가 되었으며 남녘의 진산(鎭山)이 되었다. 웅장 수려하고 걸출한 형세를 지녔기에 그 차지한 땅은 아득히 멀고 그윽하다. 세상을 피하기에는 무릉도원이나 구지(仇池 *산꼭대기에 있다는 전설상의 연못)와 같고, 道를 익히기에는 주자의 백록동서원이나 무이정사 같은 곳도 없지 않다. 그리하여 일두·탁영·옥계·고봉처럼 깊이 탐구하고, 고운·녹사·남명·개암처럼 즐거이 은둔한 것이 앞뒤로 연달아 이어졌으니 아, 성대하도다!(*일두=정여창 탁영=김일손 옥계=노진 고봉=기대승 고운=최치원 녹사=한유한 남명=조식 개암=강익)

산의 여세가 잘게 나눠지고 흩어져 천 봉우리 만 골짜기가 되었고, 힘을 쏟아 큰 줄기가 되어 멀리 아득히 치달리고 뛰어 올라 그 기교를 다하였다. 사립재에 이르렀다가 향로봉(*지금의 상내봉 3거리옆 봉우리인 듯)이 되었고 정수를 뽑아 우뚝 솟았으니, 이는 군 남쪽 엄천 남녘의 조산(祖山)이 된다. 봉우리의 오른편 어깨에서 동북으로 뻗은 한 가닥은 구불구불 돌며 꺾이고 깎여 평평한 산등성이와 부드러운 산기슭으로 변하였고, 아래로 수 里를 달려 빙 돌아 서쪽으로 물을 경계로 하여 몇 길의 석벽을 이루었으니 곧 세상에서 일컫는 양화대이다.

봉우리에서 곧장 뻗어내린 것은 노장대(*독바위)가 되었고, 노장대의 왼편 어깨에서 한 줄기가 서쪽으로 거슬러 나아가 문필봉(*솔봉)이 되었으며, 그것은 문수사의 주봉을 이루고 문헌동의 바깥 안산(案山)이 되었다. 노장대의 가운데 줄기는 비스듬히 ○里쯤을 나아가서는 굽이돌아 북쪽으로 나아가 문헌동의 안산인 채봉(釵峯 *비녀봉. 양화대 정남의 524m봉)이 되었고, 얼굴을 내밀고 머리를 드리워 양화대를 안으로 감싸는 형세[砂]가 되었다. 노장대의 오른편 옆구리에서 흩어져 내린 여러 줄기는 봉우리와 봉우리가 중첩되고 지맥(*곁다리)이 널리 퍼져 물을 거슬러 서쪽으로 나아가 양화대를 바깥에서 감싸는 형세가 되었다.

산 북쪽의 많은 산골물과 운봉의 모든 물은 당흥과 의탄에서 서로 합쳐져 그 지명에 따라 마천(馬川)이 되고 조금 아래에서 엄천(嚴川)이 된다. 혹은 바로 쏟아져 급한 여울과 휘날리는 폭포가 되기도 하고, 혹은 굽이쳐 네모난 못과 깊은 못이 되기도 하였다. 용유담은 고요하고 와룡대는 맑고 깊고 상쾌하다. 모든 시내가 활처럼 굽어 흐르다가 양화대 앞에서 모여 하나의 못을 이루었는데 길이와 넓이가 전부 수십 무(畝 *고대의 면적 단위)나 되고, 검푸른 못은 그 깊이를 헤아릴 수 없다.

덕유산을 같은 조산(祖山)으로 하여 떨어져 나와 뻗어간 산줄기는 수십 가닥으로, 그중 법화산에 이른 줄기는 고요하고 빼어나고 얌전하고 아름다운데 큰 산세가 동쪽으로 달려 몇 里를 못 가서 갈라져 나와 중심의 한 가닥이 남향하여 문헌동이 되었다. 주산이 그 왼쪽 어깨를 아래로 드리운 것은 문헌동의 청룡이 되었고 그 나머지 산세가 평평하고 넓게 퍼져 연화평(蓮花坪 *坪은 들판)이 되었는데, 양화대와 마주한 곳이다.

양화대 앞의 물은 북쪽으로 흐르다가 다시 동으로 흐른다. 법화산이 동편으로 달려 서로 안고 돌아 응봉(鷹峯 *매봉산=베리산)에 이르러 산청의 왕산과 함께 수구(水口 *물이 빠져나가는 곳=수구막이)를 잠궜는데, 이는 양화대의 전체 형국으로 볼 때 지키고 막는 문이 되니 하늘이 아름다운 산수를 만들면서 정력을 다 쏟았다고 할 만하다.

양화대의 형세는 사람이 손바닥을 엎어 손가락을 늘어뜨린 모양이다. 그 셋째 손가락에서 뻗어나온 지맥(支脈)은 위에는 하나의 포개진 돌상자를 이고 있으며 가운데는 몇 길의 바위병풍이 섰고 아래는 2층의 석대를 이루었는데 엄숙·단정하며 치우치지 않아 털끝만큼도 아부하는 태도가 없다. 아랫부분의 석대는 둥그렇게 엎드린 모습은 거북 같고, 등딱지를 이룬 바위조각은 벼루의 먹을 가는 부분처럼 움푹 패었거나 술 담는 항아리나 차 끓이는 부뚜막 또는 낚시터 등 갖추어지지 않은 형상이 없다. 매끄러운 곳은 글을 쓸 수 있고 평평한 곳은 바둑을 둘 수 있으며, 수십 인이 충분히 앉고 누울 수 있다.

그 왼편으로 첫째·둘째손가락에 해당하는 줄기는 돌더미가 높고 험하여 발길을 허용치 않으며, 넷째·다섯째손가락에 해당하는 줄기는 흙을 이고 제법 평탄하여 왕래하는 자들은 반드시 이곳을 경유한다. 첫째와 다섯째 손가락에서 뻗어나간 줄기의 남은 세력은 소매를 늘어뜨리고 팔짱을 껴서 감싸 안은 모양이며 험준한 돌다리가 강 속으로 뻗어나가서는 빙 둘러 이어 서로 합쳐져 저절로 하나의 형국을 이루었다.

좌우는 바위가 여러 층을 이룬 절벽으로, 혹 벌여선 것은 겹쳐 세운 병풍 같고 상자 같기도 하며, 혹 쭈그린 것은 짐승이 날아오를 듯하고 새 같기도 하며, 속이 비어 휑한 것도 있고, 등이 두터운 힘센 역사(力士) 같은 모습도 있고, 썰물에 우뚝 버티고 선 기둥 같은 것, 물소 갑옷으로 무장한 군사를 진압하는 모습, 우러러보고 굽어보는 것, 높고 낮은 것 등 만 가지 모습이 같지 않고 백 가지 형태가 다 갖춰져 있다. 하늘이 감추고 땅이 숨기고 신령이 깎고 귀신이 새겼으니 아름다움을 나타내고 기이함을 드러내어 완성하지 않은 것이 없다.

바위 사이에는 아름다운 나무가 숲을 이루었고, 옛스럽고 괴상하여 사랑할 만한 곳이 무더기를 이루었으며, 그윽하고 깊어 즐길 만하고, 꾀꼬리 울고 매미 노래하며 제각기 하늘이 부여한 성정(性情)을 다하고 있다. 물이 세차게 솟구치는 곳은 눈이 흩날리는 듯, 진동하며 쿵쾅거리는 곳은 우레가 일어나는 듯, 깊게 고인 곳은 쪽빛으로 물들었고, 해오라기는 잠들고 고기는 뛰어올라 모두가 스스로 즐기고 있다. 빗속에 들리는 농부의 노랫소리, 구름을 뚫고 울리는 나무꾼의 피리소리, 낚시하는 늙은이는 아침에 나가 저녁에 돌아오고, 행인이 앞에서 부르면 뒤에서 대답하는 것, 모두 하나같이 이 대(臺)의 풍경을 북돋우지 않는 것이 없다. 바람과 달 구름과 연기가 시시각각 다르게 변하는 모습으로 말할 것 같으면 이것은 바로 조물주의 다함이 없는 보고(寶庫)이며, 다 즐길 겨를이 없다.

이 땅은 단종의 충신 한남군이 울며 결별하던 오서(鰲嶼 *새우섬)와 서로 이어져 있고, 또 일두·탁영이 살 만한 땅이라고 칭한 문헌동 및 한남동·소연동의 여러 마을과 모두 1里의 거리에 있으며, 나의 재종숙 오재 公(*강민영 1859-1925)의 소유이다. 그 궁벽하고 기이함 때문에 나 같이 산수에 어두운 자도 매년 봄꽃이 피고 가을낙엽이 질 때 한번씩 오르지 않은 적이 없다. 오재공은 미산선생(*정환주 1833-1899)이 공북대(拱北臺 *휴천면 대천)에서 계를 맺은 일로 말미암아 제산 이면석과 친하게 지낸 지 여러 해가 되었다. 하루는 경치 좋은 산수를 논하다가 말이 이 대(臺)에 미치자 제산 또한 아름다운 산수를 사랑하는 고질병이 있는지라 듣고는 기분좋게 따라나서 드디어 대 위에 조촐한 술상을 차리고는 즐겨 감상하였다. 

대의 옛이름 양화(楊花)는 고상하지 못하여 음(音)은 그대로 두고 뜻은 새롭게 하여 양화(陽和)로 바꾸었다. 또 석수장이를 불러 석벽에 대의 이름을 새기고 또 여러 사람의 이름을 새겼는데, 나의 어리석은 이름 또한 그 끝에 두게 되었다(* 모두 11명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오재는 그윽한 덕을 지녔고 또 여러 노선생들의 유업을 잘 이었으니 이 대의 주인으로 부끄럽지 않고, 제산은 호걸의 재능을 지녀 산수를 잘 배웠다고 이를 만하다. 술을 마시며 시를 읊거나 서로 주고받으며 맑고 한가한 즐거움을 함께 누리고 있으니 마치 나팔과 피리가 서로 어울리는 것 같다고 할 것이다.   

아, 돌아보니 지금 세상은 음랭한 겨울에 들어선 듯, 기운은 어긋나고  양기(陽氣)는 숨고 화창한 기운은 그 어디에서도 볼 수 없으니, 바른 道를 멸하는 재앙이 침상을 깎아 살갗에 닿을 만큼 가까이 있다(*《주역(周易)》 박괘(剝卦)). 그런즉 어떻게 닦아 재앙에서 구할 것인가? 다만 이번에 이름 붙인 아름다운 두 글자가 우연인 것 같지만  사실은 깊은 뜻을 가지고 있다. 이 대에서 노는 것은 겉으로 대의 형상을 감상하고 안으로 대의 덕을 체득하는 것이니, 모이고 쌓여 온갖 것이 깊이 감추어져 드러나지 않지만 영겁의 풍상을 겪어도 변치 않고 바뀌지 않을 것이다. 이는 큰 과일 하나는 따먹지 않고 남겨두어(*주역 박괘) 종자가 되어 훗날을 기약하는 일에 부끄럽지 않은 것으로, 봄볕 같이 온화한 기운[陽和]이 크게 자랄 날이 어찌 없겠는가?

선현들이 이름난 산수에 노닌 것이 끝이 있으랴만 하늘과 땅이 갖춘 곳에 한 조각 이름을 새긴 글자도 없다면 후인들이 우러러 그리워하고자 해도 미치지 못할까 오히려 두렵다. 다른 사람들도 경치 좋은 장소에 글을 파서 표시해 두지 않은 적이 없지만 조금만 지나면 구름이 사라지고 안개가 흩어지듯 그들이 남긴 자취를 회복할 수 없으니 이것은 어찌된 까닭일까? 대개 선현들은 이름에 뜻이 없었고 이름이 나게 된 그 까닭을 닦았을 뿐이다. 다른 사람들은 이름은 매우 아끼면서 이름이 나게 된 까닭은 포기하고 공연히 이름을 새기는 일만 했을 뿐이다.

이것을 알면서도 세상의 물건을 가로채 사유물로 만들어 서로 시샘하고 서로 주고 빼앗는다. 이에 아침이면 관중과 포숙처럼 친하다가 저녁이면 원수처럼 대하는 것은 더러 그런 마음을 가졌기 때문이고, 私(*사사로이 하다) 한 글자에 마음이 가려지면 그렇게 되기 때문이다. 그리되면 비단 산의 신령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은밀히 벌을 줄 뿐만 아니라 장래 후인들의 비웃음을 받을 것이니 지금 사람들은 침을 뱉을 겨를도 없을 것인즉, 어찌 세상에 이름이 알려지겠는가? 함께 이름을 새긴 우리 모두 힘쓰고 경계하여 흐드러진 화창한 봄기운[陽和]의 영역으로 같이 돌아간다면 대의 명예도 끝이 없을 것임이 분명하니, 공경함[敬]이야말로 제군들이 나아가야 할 하나의 길이다.

미산옹(*정환주)이 일찍이 시를 지어 말하였다. (*원시에서 앞뒤 2구씩 생략하고 인용됨. 화산12곡-양화대 참조)

巖懸樹全老(암현수전로)  벼랑 끝에 매달린 나무는 모두 늙었고

天闊鳥自飛(천활조자비)  툭 트인 하늘엔 새들이 자유롭게 난다.

行歌沙歷歷(행가사역력)  노래하며 거니는 모래밭엔 발자국 뚜렷하고

歸艇月依依(귀정월의의)  나룻배에 흐릿한 달빛 싣고 돌아가네.

지금 그 시를 외우고 그 땅을 완상하니 완연히 이 대가 그 시를 옮겨놓은 하나의 화폭이 되었다.

현자들의 말에는 반드시 훗날에 증명되는 것이 있는데, 오늘날 서로 시문(詩文)을 주고받는 것이 어찌 그 말이 증명될 조짐이 아니라고 하겠는가?(*주역의 괘와 같이 어지럽고 암울한 시대에도 양(陽)의 기운 하나를 이어가 훗날을 기약하듯이 미산선생이나 우리가 양화대에서 시문을 즐기며 양화(陽和)를 기다리는 것은 언젠가 그런 세상이 올 조짐이 아니겠는가?) 거기에 글을 더하는 것도 괜찮지만 나는 식견이 매우 얕아 석면(石面)에 몇 방울 내 이름자를 떨어뜨린 것도 많이 부끄러운데, 거기에다 어찌 부처의 머리에 오물을 뒤집어 씌웠다는 꾸지람을 더하겠는가? 그러나 거듭되는 제공들의 명령으로 옛 사실을 간략히 서술하고, 아울러 일의 전말을 붙여 ‘양화대산수록’이라 하였다.

 

 

양화대수계안서(陽和臺修契案序)/양화대 계모임 문건 서문

 

재종숙 오재 公은 양화대의 푸른 절벽에 이름을 남겼는데 좇아서 나란히 올린 자가 십 수인이었다. 약간의 금전을 각출하여 놀 때 소용되는 물품을 장만하였다. 이로 인해 계의 이름을 갖게 되었다.

누군가 의심하는 자가 말했다. “公의 맑고 고상함으로 배운 바는 실질에 힘쓰지 않는 일이 없을 터인데 지금 이 한 가지는 세속에서 이름을 좇는 것에 가깝지 않은가? 시험 삼아 양화대 하나에 관하여 말할 것 같으면 곧 증점 당시에 기수에서 목욕하고 무우에서 바람쐬던 것과 같으며, 그 이름을 나란히 새긴 수재(秀才)들은 바로 증점 당시의 노래하며 돌아오던 어른과 아이들이다. 기타 봄날과 봄옷은 없는 해[歲]가 없었으니 종종 그 상황이 비슷하지 않은 것이 없다. 그런데 이름을 남기고 계를 만드는 것이 어찌 증점 당시에 달가워하던 바이겠는가?”

나는 이렇게 응답했다. “그렇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하다. 증점을 어찌 쉽게 배울 수 있겠는가? 증점 자신은 태화원기(太和元氣 *음양이 조화되어 만물을 생성하는 우주에 충만한 기운)에 흠뻑 젖고 스스로 터득한 공부가 충분한데다 주변에서 배움의 근원을 만났으므로 스승과의 문답을 몸 밖에서 구하지 않고 이처럼 조용히 처하였다. 그리하여 성인께서 ‘나도 같이 하겠다’는 탄식을 발하면서 그를 인정했던 것이다. 만약 지금에 이르러 그것을 배우고자 하는 자는 반드시 이름난 산과 운치 있는 물가에서 놀며 구경해야 하고 훈도를 받아야 할 것이다. 仁(인)과 智(지)의 즐거움과 動靜(동정)의 묘리에 있어서는 깊이 살펴 스스로 터득하고자 했기 때문에 선대의 현자들은 어떤 이는 평생 그(*仁智 등) 속에서 놀기를 원했고 어떤 이는 거기에(*仁智가 주는 즐거움 등) 종신토록 머물러 살았다. 그러면서 정대(亭臺)를 만들고 골짜기나 바위에 글을 새기는 것은 거의 손가락을 꼽을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그런즉 이름을 새기고 계를 만드는 것은 어찌 당연한 수순이 아니겠는가? 그대는 어찌 이리 식견이 늦어 의심이 깊은가?”

듣는 자가 마침내 의심이 풀려 그렇다·그렇다 하였다. 그 어떤 사람이 의심하게 된 것을 나에게 물은 것은 내가 이름을 나란히 새긴 어른·아이의 하나로 참여했기 때문이다. 지금 공의 명으로 계의 서문을 쓰는데, 요컨대 위의 문답이 다른 곳에는 쓰이지 않을 것이기에 끌어와 두루마리의 끝에 붙여 명을 받든다.

 

註) 관련된 고사 : 논어 선진편

「자로와 증석과 염유와 공서화가 공자를 모시고 앉아 있었다.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너희보다 조금 나이가 많지만, 그렇다고 나를 어려워 말고 말을 하도록 해라. 평소에 너희들은 ‘나를 몰라준다.’고들 하는데, 만약 너희를 알아준다면 어떻게 하겠느냐?”

--------------- 〈중략〉 -------------

증점이 말하였다. “늦봄에 봄옷이 만들어지면 어른 대여섯, 아이 예닐곱과 함께 기수(沂水)에서 목욕하고 무우(舞雩)에서 바람 쐬고 노래하며 돌아오겠습니다.”  

공자께서 크게 찬탄하며 말씀하셨다. “나도 점(點)과 함께 하겠노라.” (莫春者 春服旣成 冠者五六人 童子六七人 浴乎沂 風乎舞雩 詠而歸. 夫子喟然歎曰 吾與點也)   --〈하략〉--」

*증점(曾點)은 후세에 증자(曾子)라고 불리는 증삼(曾參)의 아버지로 자가 석(晳)이다.

 

 

원문

 

陽和臺山水錄

方丈一山中祖於德裕而過峽於鳶峙叅三神之一而爲南服之鎭有雄秀傑出之勢故擅杳冥幽閒之境其避世之桃源仇池講道之白鹿武夷不無其處是以一蠹濯纓玉溪高峯之尋探孤雲錄事南冥介菴之嘉遯前後而踵相接焉嗚呼盛哉山之餘勢支分節解散爲千峯萬壑而奰屭巨幹遙遙馳奔騰踊躍盡其奇巧拖至扉峙爲香爐峯而拔精特立作郡南嚴川南麓之祖峯之右肩一股東北行者逶迤屈曲剝換變化平岡媆麓馳下數里回轉於西界水而成數丈石壁卽世所稱陽和臺者也峯之直下者爲老將臺而臺之左肩一枝向西逆行者爲文筆峯而作文殊寺主峯爲文獻洞外案砂臺之中股迆到里許回折而北爲文獻洞案山釵峯而開面垂頭爲陽和臺之內護從砂臺之右脇諸脈散下者峯巒重疊支腳分布逆水而西爲陽和臺之外護從砂山北衆澗之流雲峯全郡之水至堂興義灘而相合因其地名爲馬川稍下爲嚴川或直瀉爲急湍飛瀑或宛轉爲方池深潭龍遊之幽閒臥龍之瀟爽皆是川之彎曲而至臺前匯成一澤長廣皆數十畝而黝深不可測同祖於德裕而落脈者抽出幾十節而至法華山靜秀窈窕大勢之東馳未數里而劈出中心一節南向而爲文獻洞主山其左肩垂下者爲洞之靑龍而餘氣平廣蔓衍爲蓮花坪而爲臺之對案前之水北流而復東法華之東馳者相爲回抱至鷹峯而山陰之王山關鎖水口爲臺全局之扞門天之作成名區可謂費盡精力矣蓋臺之爲勢如人覆掌垂指其第三指出脈者上戴一疊石箱中到數丈石屛下作二層石臺儼然端重不偏不倚無纖毫阿附之態圓伏如龜片鱗如龍墨池酒缸茶竈漁磯無不畢具而滑處可以寫書平處可以置棋而足容數十人坐臥矣其左第一第二指脈則石嶝嵯峨無容足處第四第五指脈戴土稍平夷往來者必由於此而一指五指之餘勢如垂拱環抱樣嶮巇石梁橫截江中回連合襟自成一局而左右之層巖絶壁或列如屛疊如箱或蹲如獸翔如鳥或腹空而谽谺或背厚而屴力或頹波柱或爲鎭水犀或仰或俯或高或低萬貌不同百態具備而天藏地秘神剜鬼刻者無不獻媚呈奇以成其美樹於巖間者則成叢而古怪可愛土處者則成林而幽邃可樂而鸎啼蟬吟各盡天機水於激跳處則飛雪動盪處則起雷渟滀處則染藍而鷺眠魚躍皆得自樂若夫帶雨之農歌穿雲之樵笛釣叜之朝往暮歸行人之前呼後應無非斯臺助景之一致而至於風月雲煙之變態異狀則此是造物之無盡藏也而不暇悉焉此地與端廟忠臣漢南君泣訣之所鰲嶼相連又距一蠹濯纓所稱可居之地文獻洞及漢南巢燕諸村皆一里而爲再從叔悟齋公所有者也以其僻且奇也如桂之盲於山水者每春花秋葉未嘗不一陟焉悟齋公因薇山先生拱北臺契事與濟山李冕錫契好有年矣一日相與論山水之勝而語及此臺濟山亦癖於煙霞者聞而欣然從之遂設小酌於臺上而嘉賞焉以臺舊名楊花之不雅也音仍舊而義存新改定以陽和旣又招石手刻臺名於石壁而刻名者至若干人以桂之愚亦置名於石末焉蓋悟齋有幽閒之德又能尋諸老先生之遺緖則無愧爲斯臺主人而濟山有雄豪之才則可謂善學山水而觴詠唱和共享淸閒之樂可謂壎篪相和矣噫顧今世入陰冬而戾氣矣陽幽和氣無地可睹而蔑貞之禍近在床膚然則何修而救此歟惟是錫嘉二字似偶然而實有深意存焉遊於斯臺者玩臺之像體臺之德收畜萬有深藏不市閱百劫風霜而不變不渝則無愧爲不食之碩果而陽和之發育豈無其日乎此先賢之遊於名區者何限而無片字之刻名與天壤俱存後之人慕仰之猶恐不及他人於名區標置鐫刻無不用厥極而少閒雲消霧散無復遺跡此曷故焉蓋先賢無意於名而修其所以名者而已佗人靳靳乎名而棄其所以名者徒事雕刻而已知則攘取公物據爲私有猜忌互生予奪相尋至於朝管鮑而暮仇讐者或有之是其情也爲私之一字所蔽有以致之也非但嶽靈之陰誅於冥冥而後之人譏笑於將來時之人將唾棄之不暇矣奚有乎名乎哉凡我同題者勉之戒之同歸於爛漫陽和之域則臺之名於無窮也審矣敬爲諸君一道之薇山翁嘗有詩曰巖懸樹全老天闊鳥自飛行歌沙歷歷歸艇月依依今誦其詩而玩其境則宛然爲斯臺一副畵幅而賢者之言必有徵於來後則安知不爲今日唱酬之兆朕歟重可書也已以余膚淺已多點汗石面之愧而安厚佛頭鋪穢之誚哉重因諸公之命略敍故實兼附顚末以爲陽和臺山水錄

  

 

陽和臺修契案序

再從叔悟齋公置名於陽和之蒼壁從而列之者十數人各出金若干以爲濟勝之具於是有契之名焉或有訝之者曰以公之淸雅所學者罔非前賢務實之事而至於此一段無乃近於世俗徇名之爲也耶試以陽和一臺言之則卽曾點當日風浴之沂雩也其所列名之秀才則卽曾點當日咏歸之冠童也其佗春日春服無歲無之則種種景狀無不髣髴者而若夫置名與設契則豈曾點當日之所屑爲者乎余應之曰唯唯否否曾點豈可容易學乎夫曾點自身已涵濡於太和元氣之中出於資深居安之餘而左右逢其源故函席問答不願乎外而從容如此是以聖人發吾與之歎而許與之若其及於此而欲學之者則必也名山韻水遊賞焉薰炙焉其於仁智之樂動靜之妙欲其深察而自得之故前賢或窮年願遊或終身棲止焉亭臺之創置巖壑之鐫題殆乎指不勝屈矣然則置名設契豈非次第事乎子何見之晩而疑之深也聞者方釋然而唯唯焉蓋或者之所以致疑而問於余者以余爲參於列名冠童之一故也今因公之命序於契也要無別用他設故引而置諸卷端以塞命焉

 

7 Comments
강호원 2018.04.09 18:08  
잘은 모르지만 이선생의 찬탄으로 미루어 강계형의 원문도 뛰어난 문장이지만
어려운 중국 고전이나 고사에 나오는 인용문들을 훤히 꿰고 아름다운 국역을 하신 이선생도 대단하십니다.

楊花가 왜 고상하지 못하다고 했습니까?
陽和는 본문에 자세히 언급해서 대충 알겠는데.

수고많으셨고
잘 읽었습니다.

참, 그 동네 강씨들 대단합니다.
엉겅퀴 2018.04.10 08:28  
아마도 옛사람들은 에둘러 표현하길 좋아했기 때문이 아닐까요?
楊花는 버드나무 우거진 곳이라는, 사물의 모습을 직접 가리키는,
단편적인 뜻 이외에는 다른 해석을 취하기 어렵고
陽和는 시대적인 상황과 맞물려 重義적인 해석이 가능하다고나 할까요?
어쩌면 사실은 바꿔놓고 의미를 갖다 붙였는지도 모르죠...
가객 2018.04.10 08:13  
읽어두기서 언급 하신대로 양화대  일개의 명소에 대한 고찰이 대단하신 어른이십니다.
기와 수계안서를  음미하듯 숙독의 자세로 보고있자니 강계형의 인성과도 맛닿아 지면서
화산자락에 살게되면 다 저리되는가? 언감생심 흑심을 품게합니다,ㅎㅎ.
 
 솔봉(문필봉)이 비녀봉이라고 알고서 부근에 뭣이 있다고해서 오르내린적이 있는데,
양화대기에 적시된 곳이 비녀봉이라면 멀지도 않은곳 뭐 하나 찾으러 가봐야겠습니다.

그날 날씨가 않좋았나 본데 수고하셨습니더.
엉겅퀴 2018.04.10 08:36  
문하마을 사람들은 그 앞봉우리가 비녀봉이라고 확고하게 말하더군요.
옛날에는 나무하러, 나물 뜯으러 자주 오르내렸다 하였습니다.
기록과 주민들의 증언이 일치하니 지명은 확실한 것 같습니다.

예, 그렇네요.
그야말로 깡촌 두메산골에 이렇게 글을 하는 사람들이 많았다는 게 참 신기합니다..
꼭대 2018.04.10 18:23  
<엉겅퀴>님의 분석을 듣고 보니 강계형의 문장이 대단합니다. 특히, 양화대 한곳을 보고 느낀 바를 장문으로 표현해내는 것을 보니, 표현할 수 있을 만큼 느낄 수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강계형의 문장의 묘미를 간파하고 국역에 덧붙여 감상법까지 알려주시니 독자들에게 훌륭한 독서가 되겠습니다.

<가객>님 언급을 하셨지만, 솔봉 아래 살았던 형제간에도 솔봉을 두고 형은 비녀봉이라 하고 동생은 솔봉이라 하여 고민을 많이 했었는데, 비녀봉이 밝혀졌으니 다행입니다.
문헌자료든 전승 자료든 오류가 있을 수 있으므로(특히 구전자료) 항상 복수의 구전자로부터 확인이 필요함을 일깨워줍니다.

강계형의 문장도 훌륭하지만, 글에 지명 기록이 많아 지명탐구를 위한 자료로도 훌륭합니다.  엄천강변을 따라 유서 깊은 마을들이 맥을 이어 내려온 덕도 있겠고, 조선 후기 많은 양반계급이 경제적으로 몰락하면서 낙향하였으니 산간벽지에도 문자 하는 사람들이 있지 않았겠습니까.
엄천강변 뿐이겠습니까. 지리산 자락에 있는 재실 수소문하여 향토사가 담긴 문집 탐구도 해볼 만 하겠습니다.
백산 2018.04.11 10:01  
어려운 원문을 쉽게 풀어 해석하시고 '읽어두기'를 바탕으로 '사진'과 '지도'까지 첨부하시니 이해하기가 수월합니다.

"양화대의 모습을 손바닥을 아래로 향하여 손가락을 늘어뜨린 형상으로 비유"한 대목에서 감탄합니다.
학문이 깊으면 심미안도 탁월해지는 가 봅니다.
'양화대를 보고 어쩌면 저렇게 수준 높고 유려한 글을 쓸 수 있을까?'하는 의문과 함께 '강계형'은 대단한 문장가임을 느낍니다.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산지골 2018.04.22 09:49  
강계형의 문장이 참으로 대단하네요.
엉겅퀴님의 눈부신 국역 덕분에 잘 읽었습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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