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산행기

1753, 1756, 이언근 <유방장록(遊方丈錄)>

엉겅퀴 | 970

【읽어두기】

 

○ 이언근(李彦根 1697-1764) 자는 회보(晦甫), 호는 만촌(晩村), 본관은 광산. 광산에서 출생하여 중년 이후 선향인 남평에 은거하여 평생 후학을 양성하는 데 전념하였다. 당시 호남에서 문명을 떨쳤고, 시문집으로 《만촌집(晩村集)》을 남겼다.

 

○ 그의 『유방장록(遊方丈錄)』은 2차례의 지리산 유람을 기록한 것이다. 사실 첫 지리산 나들이는 지리산 유람이라기보다는 지리산의 인근 고을을 스쳐간 것일 뿐이다. 즉 1753년 「남원 - 운봉 - 소년대(*점필재의 하봉 인근 소년대가 아님) - 함양 엄천사 - 산청 환아정 - 단성 - 진주 남강 촉석루 - 하동 - 악양 - 화개」을 지나갔다. 화개에서 더 이상 골짜기로 들어간 것 같지는 않다. 기록도 짧다.

 

○ 두 번째, 1756년의 여정은 이렇다. 「집 - 창평 - 옥과 - 곡성 - 남원 - 화엄사 - 구만촌 - 대수천(한수내) - 모가령(목아재) - 연곡사 - 당치 - 칠불사 - 삼신동 각자바위, 능파교터 - 신흥사 - 세이암 - (국사암) - 환학암 - 불일암[청학봉(향로봉), 불일폭포] - 쌍계사 - 화개 - 대수천 - 보전촌 - 귀가」 이 기록에는 자세히 읽으면 귀한 내용들이 참 많다.

 

* 이 글의 원문은 전남대도서관 소장 만촌집에서 발췌한 것으로 가객님이 부탁하여 받은 것이다. 원문은 일일이 타이핑할 수가 없어 붙임 PDF파일로 대신한다.

 

 

유방장록(遊方丈錄)

 

방장은 나라의 동남쪽 대방국(*남원)의 경계에 있다. 여지도(輿地圖)에서 이르는 바 지리산이며 일명 두류산, 일명 방장산이라 한다. 두공부(杜工部 *두보)가 말한 "방장은 삼한 밖에 있고(方丈三韓外)"라 한 것이 그것이다.

계유년(1753) 나는 서울로부터 내려와 벗 안인중(上舍(*생원) 이름은 극권)과 함께 동행하여 남원에서 운봉을 넘어 소년대에 당도하였다. 소년대는 바로 인중의 부친 첨지공께서 터잡아 사는 곳으로 방장의 북쪽 산기슭 아래에 있다. 시내와 산, 水石의 경치가 실로 은군자(隱君子)가 노닐기에 합당한 땅이다. 남쪽을 바라보면 우람하고 넓은 봉우리가 은하수 사이에 꽂힌 듯 서 있으니 소위 천왕·비로라 하는 것으로 실제로 산의 상봉이다. 훌쩍 뛰어 그 꼭대기에 오를 방법이 없으니 한스럽다.

이어 함양의 엄천사에서 자고 산음을 거쳐 환아정에 오르고 단성을 지나 큰 강을 건너 비로소 진양(*진주)에 닿았다. 인중의 형 사칙이 마침 그 고을의 사또로 있었는데 나를 대하는 것이 매우 정성스러움을 알 수 있었고 머물 때 詩酒의 즐거움이 이어졌다. 한가한 날 인중과 함께 촉석루(矗石樓)에 올랐다. 누각은 매우 장대하였고 남강이 그 앞을 둘러싸고 있었다. 이는 실로 정유년에 제현(諸賢)들이 순절한 곳이다. 우리 고을의 준봉 고선생(*隼峰 고종후(1554-1593) : 의병장 고경명의 아들. 부친이 1592년 금산전투에서 전사하자 다시 의병을 일으켜 스스로 복수의병장이라 하였다. 2차 진주성 전투에 참여, 성이 함락될 때 죽음. 三壯士의 한 사람)이 복수의병장으로서 성이 함락될 때 같이 죽었으니 나의 감개(感慨)가 배가되었다. 강언덕엔 바위가 삐죽삐죽(矗矗然) 솟아 있으니 누각의 이름도 이로 인해서일 것이다. 옆에는 충렬사와 의기암 등이 있었는데 유적이 없어지지 않았다. 이 날은 마침 흐리고 음산하였다. 내가 4운시를 지었는데 "긴 무지개 천년 사당을 꿰둟고, 뜨거운 해는 백척 누대를 비추네(長虹氣射千年廟 烈日光臨百尺樓)"라 한 구절이 있었다.

진주 관아에 열흘을 머물다가 하동에서 섬강 악양 등지를 거쳐 화개에 이르렀다. 주막에 사는 사람이 가리켜 말하기를 쌍계동구(雙溪洞口)라 하였다. 일찍이 칠불사와 신흥사가 산속의 경치가 뛰어난 곳이고, 시내를 따라 들어가면 두루 구경할 만하다고 들었지만 여행의 피로가 심하여 멀리서 바라보다가 안타까이 돌아왔다. 내가 이번 여행에서 거쳐간 곳이 일곱 여덟 고을이 더 되지만 다만 이 산을 둘러싼 전후좌우였기에 그 몸체와 형세가 굳건하게 자리한 것과 장대함을 상상해볼 수가 있으니 다른 산은 비교가 되지 않았다.

 

지난 병자년(1756) 나는 거처를 옮길 생각이 있어 마음에 드는 산수를 보고자 하였다. 벗 이사실이 장차 대방으로 갈 작정이라기에 함께 하기로 약속하였다. 9월 초열흘 지팡이 하나를 쥐고 출발하였다. 이날 창평의 유곡에 이르러 벗 유내언(진태)의 집에서 잤다. 내언은 이해 여름에 배우자를 잃고 또 맏며느리 상을 당하여 슬퍼하고 근심하여 어울리지 않으려 하고 서로 개의치 않으려 하였다. 사실을 붙잡아 앉혀 3~4일을 더 머물게 하고는 길을 떠나 옥과의 과치에 있는 허생 댁에서 잤다. 다음날 곡성 오지의 오진사(도옥) 집에서 잤다. 나와는 동년의 벗이다. 17일 남원 보전촌의 벗 최익현의 집에 도착하였다. 그는 사실의 매형으로 나와 몇 차례의 면식이 있었다. 몇일을 머물고는 방장산 유람을 시작하였는데 최의 장자 공서(球)가 앞길을 인도하였다.

19일 화암사(*화엄사)에 당도하였다. 여기는 구례 땅인데 보전과는 거리가 겨우 10여 리이다. 시내가 산골짜기에서 흘러나와 잔수(孱水 *섬진강)의 강나루에 다다른다. 양쪽 산은 깎아지른 절벽처럼 서 있는데 가운데가 가장 넓고 평평하다. 각황전과 대웅전이 마주하고 서 있어 크고 아름다움이 지극한 토목의 장관이었다. 가운데에는 장육금불이 앉아 있는데 승려가 말하기를 장육상(丈六像)은 이 절과 금산사(金山寺)에만 있다 하였다. 비스듬히 서쪽으로 수십 보 되는 곳에 돌을 쌓아 층계를 만들고 그 꼭대기에 부도가 있었는데 여래의 사리를 안치한 곳이라 하였다. 지세가 제일 높고 안계가 탁 트여 볼 만하였다. 나는 4운으로 된 시 1수를 지어 이를 읊었다.

이날 밤은 절의 선방에서 자는데 중들의 풍습이 눈살을 찌푸리게 해 좋지 않았다. 고인(古人)은 산승(山僧) 또한 세속의 정이 있다 하였는데 이 절에서도 세속의 정을 면하지 못함이 심하다. 방장산 아래는 풍속이 본디 순후하다고 일컬었는데 지금 이렇게 되었으니 그 역시 괴이하다.

20일 조식 후 즉시 출발하여 구만촌을 지났다. 전에 해남에 있을 때 주서(注書 *정7품) 오백통과 함께 약속하기를 골짜기로 들어가 살 곳을 정하자고 한 땅이다. 굽어보고 우러러보는 사이에 살고 죽는 것이 서로 달라 슬픔이 없을 수 없고, 옛날 함께 뜻한 것에 감회가 일어 시를 지었다.

정오가 되어 대수천(大藪川 *한수내)의 객점에 당도하였다. 이어 산허리의 소로를 따라 앞으로 나아가는데 산은 갈수록 험해지고 골은 갈수록 깊어졌다. 말라죽은 소나무가 쓰러져 있고 잡목은 무성하게 우거져 무섭고 오싹한 생각이 들었다. 나아가 모가령(母家嶺 *목아재)에 올라서니 홀연히 드넓게 트여 방장산의 전체 형세가 갑자기 눈앞에 펼쳐졌다. 뭇 봉우리들은 빽빽하게 천갈래 만갈래 병풍처럼 구불구불 4면에 벌여 서 있었다. 가운데로 시내 하나 골짜기 따라 도도하게 흘러가고 좌우 숲 사이에는 인가가 한두 채 있었으나 촌락을 이루지는 못하였다. 소위 연곡사(燕谷寺)라는 곳으로 절은 고개에서 멀지 않았다. 그 이름을 모가령이라 한 것은 풍수가들이 절을 제비집의 형국으로 생각했으니 이 고개는 새끼들이 떼지어 앉은 들보가 아니겠는가? 새끼는 어미 가까이에 있다는 뜻을 취한 것이다.

절 앞에는 교량이 있었는데 다릿발이 매우 높고 십수칸이나 되었다. 앞을 지나 누각에 올랐다. 사면이 울창하고 온산이 모두 밤나무숲인데 지금은 알밤이 떨어질 때라 원근에서 남녀들이 길을 메우도록 와서 줍는 부역을 하고 있었다. 가족을 이끌고 와 누각 아래에 임시거처를 정하여 자리를 펴고 볕을 쬐고 있는 자들이 있어 물어보니 혹 용담이나 장수 등지에서 온 사람들도 있었다. 절은 구례에 속하지만 그 조세는 매 해 명례궁(明禮宮 *경운궁)에 바치고, 조정에서 둘레에 울타리로 봉한 것은 신주에 쓰는 나무를 벌목하는 곳이기 때문으로, 경차관(敬差官 *임시로 지방에 파견한 관리)이 곧 도착할 것이라고 하였다.

조식 후에 도선의 비가 서편 전각 뒤에 있다는 말을 듣고 가서 보았다. 비는 이미 넘어지고 부서져 겨우 글자 모양을 상고할 수 있었다. 드디어 절을 나와 다릿가를 따라 왼쪽으로 방향을 틀어 밤나무 숲을 뚫고 갔더니 앞에 작은 시내가 있었다. 어지러이 흐르는 시냇가의 언덕길을 계속 나아가니 사오리쯤에 이르러 고개 하나가 있었는데 이름이 당치(唐峙)였다. 겨우 그 위에 올랐더니 이른바 칠불사가 산허리 가장 높은 곳에 있었고, 동쪽으로 바라보니 멀리 한 줄기 시내가 돌 사이로 흐르고 있었다. 고개 아래는 또한 몇 가호로 이루어진 산촌이 있었다. 길은 세 갈래인데 가운데 길을 택하여 산골물을 건너고 벼랑을 끼고 갔다. 수십 보에 한번을 쉬고, 조금 쉬었다가 금방 나아가기를 세 번을 반복하고서야 비로소 숲을 벗어나 트인 곳으로 나왔다.

절은 과연 그 정수리에 있었다. 길가에 영지(影池)가 있었는데 황폐하여 묻히고 메워져 거의 흙탕물이었다. 세상에 전하기를, 신라왕자 7인이 옥보선인의 퉁소소리를 듣고 출가하기를 발원하여 참선하며 돌아오지 않거늘 모비(母妃)가 자식들을 생각하여 친히 이 절에 이르러 만나고자 하니 머리 깎고 바뀐 모습은 회복할 수 없다고 거절하며 누각에 서서 그림자를 못에 비추어 어머니께 그것을 보게 했으므로 이름을 영지라 했다고 한다.

절에 들어가 둘러보니 누각은 이제 막 중창하여 단청은 되지 않았으나 기둥과 들보의 거대함과 전각의 가지런함은 실로 산천을 비보(裨補 *풍수에서 모자라는 부분을 보충하는 것)한 곳으로서 이만한 것이 없었다.

서쪽 끝의 선당(禪堂)에 이르러 문을 열어 언뜻 보니 층이 진 방의 가운데는 오목[凹]하고 바깥쪽은(가에는) 높아서 아(亞)자 모양을 이루고 있는데 亞는 벙어리[喑啞암아]의 뜻을 취한 듯하다. 서교(西敎 *불교)의 구계(口戒 *입을 경계함) 역시 주나라 사당에 있었던 입을 봉한 金人에 가깝다. 벽 둘레에는 쑥 들어간 쪽문이 있고 쪽문은 가사를 간직하는 곳이다. 이 방은 한번 만든 이후 다시 보수하거나 고친 적이 없고 연기와 그을음도 쌓이지 않으며 따뜻하기가 처음과 같다고 하니 역시 기이한 일이다.

절 뒤에는 옥보대가 있는데 옥보가 퉁소를 불던 곳이다. 대 곁에는 오래된 전나무가 넘어져 꺾여져 있는데 뿌리는 아직도 남았고 높이가 1척(尺)쯤 되었다. 세상에 전해지기를, 이 지역에는 말라죽은 나무에서 새싹이 피어난다 하였는데 아마도 이 전나무를 가리키는 듯하다. 승려가 말하기를, 근년부터 점차 쇠하여 다시는 살아날 기미가 없다고 하였다. 말하자면 어미인 산천의 신령하고 빼어난 기운도 사라질 때가 있는 것이다.

절의 터전은 와우(臥牛)형국이므로 동쪽에는 소머리샘[牛頭泉]을 두고 남쪽에는 대황초(*잎이 소귀를 닮음)를 심었으며 소뿔 모양을 바위에 새겼는데 이는 모두 절을 창건할 때 신승(神僧)이 계획하여 정한 것이라 한다.

『인지록(仁智錄)』과 『연하사(烟霞史)』 1부가 장정이 되어 승려의 처소에 있었다. 인지록은 아마 요산요수(樂山樂水)에서 그 뜻(*者樂山 者樂水)을 취한 것 같다. 첫머리에는 징사(徵士 *학식과 덕망이 뛰어나 조정에서 초빙한 선비) 옥보(玉寶仙人)를 실었고, 차례대로 최고운과 포은(정몽주)·목은(이색) 제현들과 김부의·부식의 무리까지 서술하였고, 우리 왕조에는 익성공 황희를 선두로 일두(정여창)·환원(김굉필)·회재(이언적)·한강(정구) 제군자들의 기록이 상세히 갖추어져 있었다. 그러나 삼연옹(김창흡 1653-1722) 이하부터는 이름난 벼슬아치나 부귀한 자들에 불과할 뿐이었다. 승려 무리들의 거취(去就 *물러남과 나아감)와 취사(取捨 *취함과 버림)(자기들 일이라) 진실로 책망할 것이 있으랴만, 그 세력이 성함을 끼고서 스스로 그들의 이름을 올렸으니 오호라, 그 仁과 智가 무엇인지 나는 알 수 없다. 이 어찌 군자가 할 수 있는 바이겠는가? 또한 산천에도 부끄러울 것이다.

연하사(烟霞史)는 선문(禪門)에서 스스로 자신에 관한 일을 기술한 것이므로 나는 보고 싶지 않았다.

절은 방장산에 있는데 진실로 이 산의 요추에 해당되며 뭇산이 구불구불 내려와 엎드렸고, 맑고 곱고 단아하여 한 점의 더럽고 탁한 기운도 없다. 객지에 묵으며 완상하는 사람으로 하여금 속세 밖에 있다는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점심을 먹고 절을 나와 신흥사 가는 길을 물었더니 노승이 길을 인도하였다. 영지가에 이르러 가야 할 길을 가리켰는데 소나무 전나무가 줄지어 서 있고 그 사이로 한 줄기 큰길이 나 있었다. 남쪽으로 나아가니 전나무의 크기가 수십 아름이고 높이가 백여 장인데 모두 평생 보지 못한 것들이었다. 지세는 경사가 져서 1보에 1보 만큼 낮아질 정도이며, 겨우 평지에 도달하였다. 장사꾼들이 그 뒤로 분분히 지나갔다. 함양의 경계라 고개를 넘으면 섬진의 시장에 갈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태사공이 말한 "천하가 풍성한 것은 모두가 이익을 위하여 오가기 때문이다."라고 한 것은 잘 형용한 말이라 할 것이다. 이익이 있는 곳이면 험난함도 피하지 않는 것이 이와 같다.

십 리쯤 나아가니 동구의 돌에 삼신동(三神洞) 세 글자를 새겨 놓았고 앞에는 큰 시내가 있었는데 홍류동(紅流洞)이라 하였다. 다리의 이름은 능파교(凌波橋)로 지금은 이미 무너지고 끊어져 다시 볼 수 없었다. 다리의 흔적이 있는 남쪽으로 또 큰 시내 하나가 흘러와 합류하고 물이 둥글게 돌아나가는 가운데에 신흥사가 있었다. 시내를 건너고 바위를 따라 곧장 절문으로 들어서니 장삼을 입은 한 승려가 나와 맞이하였다. 이끌어 전각에 앉았는데 용모가 크고 훌륭하였다. 나에게 시축을 보여주었는데 소리 높여 읊조리며 부채를 치니 문득 퇴고의 뜻이 일어났다. 법명을 물었더니 선간(瑄侃 *글쓴이는 이하 선간을 그냥 간이라 하였지만 나는 선간이라 표시한다.)이라 하였다. 일찍이 낭주(郎州 *영암)의 미황사에 있을 때 설봉대사 회정(1678-1738)에게 선(禪)의 요지를 배웠다 한다. 회정은 나에게는 진실로 속세 밖의 혜원(慧遠 : 334-416. 동진의 승려. 정토종의 초조. 여산 동림사에 은거. 수많은 유학자들과 교류)과 같은데 이야기하다가 이를 선간과 언급하였다. 그가 나를 위하여 예로써 공경하는 뜻이 있음을 비로소 알겠다. 이날 밤은 여기서 묵었다.

아침 식사 후 선간이 나를 이끌어 누(樓)에 올랐다. 누의 명칭은 세진루(洗塵樓)였다. 앞에는 계류를 임하였는데 넓게 트여 맑고 깨끗하였다. 현판에는 여러 사람의 시가 있었지만 오직 정승 최석정(1646-1715)의 시가 가장 빼어났다. 나도 그 운(韻)에 화답하여 시를 지었지만 연곡사 이후에 지은 모든 시는 시집에 있으므로 지금 다시 기록하지는 않는다.

시내를 따라 내려가는데 열 몇 걸음도 가기 전에 돌을 넘고 물을 건너 바위 하나에 올랐다. 바위의 명칭은 세이암(洗耳嵒)으로 새겨 놓은 글자의 획이 뚜렷하였다. 이는 고운이 노닐던 곳이라 하였다. 바위 가에는 몇 개의 둥근 구멍이 있었는데 큰 것은 동이처럼 사방이 자로 잰 듯 동그랗고, 지팡이로 그 깊이를 재어보니 1장 남짓이었다. 선간이 말하기를, 여기 물항아리에 시험 삼아 김치를 담갔더니 8석쯤 들어갔다 한다.

시냇가의 암석에는 이름을 새겨서 남긴 것이 많았고, 혹은 주홍으로 칠한 것도 있었다. 시내의 발원이 몇 리나 떨어져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여기에 이르러 백석이 촘촘이 늘어서 있고 물빛은 맑고 투명하여 바닥까지 꿰뚫어볼 수 있었다.

선간이 일찍이 이 바위에서 지은 시가 있어 나를 위해 읊조렸고, 내가 약간 고쳤다. 그 시는 이러하다.

  千年崔學士(천년최학사) 천년 전 최학사는

  洗耳此淸流(세이차청류) 이 맑은 물에 귀를 씻었다네

  鶴去簫聲斷(학거소성단) 학은 날아가고 퉁소소리도 끊겼는데

  嵒名水共悠(암명수공유) 바위 이름과 물은 유유하리.

정말 채식을 하는 사람의 맑은 기상이 있어 사랑할 만하다.

선간은 나를 위해 작은 솥 하나와 쌀과 반찬을 싸서 바랑에 넣고는 앞장서서 불일암으로 향해 갔다. 다시 능파교를 건너고 홍류동을 따라 내려가 계곡을 가로질러 비스듬히 건넜다. 국사암을 지나고 작은 고개 하나를 넘자 길가에 환학암이 있었다. 잠깐 쉬었다가 곧 나아가 다시 한 고개를 넘고 산언덕을 따라 왼편으로 꺾어 십수 걸음을 가니 좁은 길이 끊어지고 아래는 낭떠러지였다. 절의 중이 나무를 엮어 잔교를 만들어 오가는 것을 통하게 하였는데, 겨우 발을 디딜 수 있을 뿐 걸음마다 땀이 흘러 감히 함부로 내딛을 수 없었다. 약 수 장(丈)의 잔교가 끝나자 다시 뾰족한 돌비탈길이 이어지고 그것이 끝나는 곳에 다시 잔교가 있었다. 이런 과정을 겪어야 하는 것이 모두 두 곳이었는데 이런 곳을 지나 겨우 불일암에 도착하였다.

암자의 문은 맨 꼭대기에 위치하였고 너댓 길의 구름사다리가 있어 부여잡고 암자에 오르니 마음이 매우 깨끗이 씻겼다. 때마침 거처하는 중이 없었다. 그 앞에는 대(臺)가 있었는데 이름은 완폭대이다. 곁에는 석봉이 마주하고 서 있는데 왼쪽은 청학봉, 오른쪽은 백학봉이다. 이곳은 고운이 노닐며 은둔했던 땅이다.

나와 공서는 암자에서 왼쪽으로 한 작은 계곡을 건너 나무를 붙잡고 절벽을 따라 곧바로 청학봉에 올랐다. 꼭대기는 3면이 모두 바위벼랑으로 만 길이나 되고 폭포는 봉우리가 끊어진 곳에 매달려 쏟아져 내렸다. 봉우리를 빙 둘러 에워싸 흐르는 구름은 산을 감돌아 오고 소나무와 개오동나무가 빽빽이 늘어서 있었다. 그 아래를 굽어보니 깊은 땅밑은 비록 시력을 다해도 (마음이) 쿵쾅거려 보이는 것이 없었다. 혼이 떨리고 가슴이 두근거려 마음을 진정할 수 없었고, 또 호랑이나 표범의 굴인 듯 오래 머물 수 없어 내려왔다. 공서가 손수 철쭉 가지 2개를 잘라 그 하나는 내가 지팡이로 썼다. 계곡가로 돌아오니 선간이 이미 솥을 걸고 밥을 지어 놓았다. 세 사람이 벌여 앉아 나뭇가지를 꺾어 수저를 만들어 밥을 먹었다. 식사를 마치고 불일암으로 돌아왔다.

조금 있다가 선간 공서와 더불어 암자에서부터 돌부리에 의지하여 손으로 나뭇가지를 부여잡고 폭포가 떨어지는 곳까지 내려갔다. 그곳(*폭포수가 떨어지는 웅덩이)은 어둡고 깊어 몇 길이나 되는지 알 수 없었다. 올려다보니 한 줄기 휘날리는 물방울이 낭떠러지에서 곧장 쏟아지는 것이 만 장이나 되는 흰 비단폭이 은하수에 가로 걸린 것 같았다. 이백의 여산(*망여산폭포) 詩는 진실로 이러한 경계를 모사한 것이다. 선간이 앞에 용추가 있다고 해서 보러 가려 했으나 길이 끊겨 갈 수 없었다. 드디어 갔던 길로 올라왔다. 산중의 해는 어느덧 기울었다. 돌아오는 길에 환학암에 이르러 쌍계사로 가는 갈림길에서 선간은 작별을 고하고 갔다. 나는 마침내 절구 한 수를 써서 그에게 주었다.

쌍계사에 도착하였다. 특별히 볼만한 것은 없었고 오직 진감국사의 비(碑)가 뜰 가운데 서 있었는데 고운이 왕명을 받아 글을 짓고 쓴 것이다. 비는 비록 상하고 부서졌지만 자획이 완연하여 천년세월이 하루와 같으니 그 또한 귀중한 것이다.

고운의 화상이 동편 전각에 있다 하여 사실 공서와 함께 가서 첨배(瞻拜 *우러러 뵈며 절함)하였다. 붉은 도포에 사모를 쓴 모습은 일개 조정의 벼슬아치 같은 모습이었지만 얼굴은 기름지고 살집이 많았으며 미목은 청수하여 마치 살아서 속세에 앉아 있는 신선 같았다. 경모하는 마음을 스스로 그만둘 수 없었다. 이날 밤은 절에서 묵었다.

다음날 아침 골짜기 입구를 나서니 한쌍의 바위가 좌우에 있었고, 나누어서 쌍계동문 네 글자가 크게 쓰여 있었다. 이것은 고운이 쇠지팡이로 쓴 것이라 하는데 몹시 힘차고 굳세어 아낄 만하다. 마침내 화개로 가는 길을 따라 돌아오는데 산세는 갈수록 열리고 계류는 점점 넓어졌다. 지나가는 곳에 일두선생의 유허가 있다고 들었는데 무성한 풀과 황량한 들만 펼쳐져 있어 찾을 수가 없었다. 십여리 길을 가서 보니 큰 강이 동으로 흐르고 계류가 합치고 백운산의 한쪽 기슭이 그 앞을 빙 둘러 싸고 있었다. 다시 대수천으로 가서 보전으로 갔다가 몇일을 지내고 돌아왔다. 집으로 돌아온 후 그 시말을 기록하여 후인들이 구경 다니는 것에 도움이 되고자 할 따름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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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Comments
꼭대 2018.09.10 10:22  
1750년 전후한 지리산의 생생한 모습을 묘사한 귀중한 자료입니다. 세세한 기록을 어찌 빠짐없이 매끄럽게 국역을 하였는지 새삼 존경스럽습니다.

특히 주목한 대목은 연곡사탑비입니다.

연곡사 서쪽 전각 뒤에 도선의 비가 있었다하였는데, 이미 넘어지고 부서져 겨우 글자 모양을 상고할 수 있었다. =>서쪽이라면 현재 현각선사탑비의 이수에 현각왕사비명의 전액이 명확하게 남아 있으므로 착오가 일어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동쪽에 있는 동승탑의 비석 파편을 본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단정 짓기에는 여전히 의문이 많이 있습니다만 도선의 탑일 가능성도 염두에 두어야 할 것 같습니다.

마지막 문장에서 옛 선비들의 맑은 정신을 느끼게 합니다.

“집으로 돌아온 후 그 시말을 기록하여 후인들이 구경 다니는 것에 도움이 되고자 할 따름이다.”
가객 2018.09.12 05:36  
저자 이언근 외 여타 어떤 유람록에서도 볼 수 없는 역동적인 산행코스가 흥미롭습니다.
당시에 벌써  한수내에서 목아재 넘어 연곡사쪽으로 길이 나 있었나 봅니다.
 
유산기 국역에서 문장 곳곳에 세세한 주석까지 곁들인 역작은  오직 이선생의 작품에서만 볼 수 있는듯 해서
참으로 감탄스럽습니다.
일전에 지리산유산기 분야의 논문을 쓴 모 교수를 만났더니 이선생의 국역 실력에 감탄하면서 어떤 분인지 궁금하다고 하더군요.

원광대에서 받은 적은유고 자료 중 <동강대기>가 궁금합니다요.ㅎ

근데 저는 원광대와 전남대에서 받은 카톡 자료들이 전부 다 날라버렸네요.
저작만기 전에 따로 저장해 두지 않은 불찰인가 봅니다. 허기사 까막눈이 한테는 별 긴요하지도 않지만,
호남쪽의 문집들에서 지리산유산기가 몇 편더 보입니다만 이선생께 미안시러바서 .....
엉겅퀴 2018.09.12 08:11  
더 있으면 구하는대로 보내 주십시오. 뭐 쉬엄쉬엄 하지요.

동강대기는 받자마자 국역해 놓았습니다.
조만간 다른 데 종합적으로 써먹을 데가 있을 것 같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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