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산행기

1933년 석전(石顚) 박한영의 "지리산천왕봉의 위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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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두기>

"지리산 천왕봉의 위용"은 1933년 잡지 신동아 7월호에 게재 된 僧 박한영이 쓴 글로서,지형.인물.사찰.명승지등 지리산의 총체적인 근황을 기록한 산문이다.

내용중에는 지금은 생소한 지명 및 석전(石顚) 작자 외 고승들의 종교사상을 엿볼 수 있어 지리산 역사탐구에 좋은 글이다.

국한병용의 문장이지만 토씨와 약간의 형용사 외에는 거의가 한자에다 오자가 많이 보여 수정해서 원문을 필사로 옮기고 한글로 풀었다. 


[원문필사]

智異山 天王峰의 偉容

     石顚沙門

此山盤據嶺湖間九郡地域相沿하엿고 특히 雲峰六面되는 一郡山內藏點하였다. 한데 內山般若奉天王奉底源出하야 漸流愈汎하야 山淸換鵝亭을 둘너 丹城赤璧白馬江滙成하고 西谷德山新川合流하야 晉陽眞石樓衝激하야 藍江卽南江이 되야 三千浦로 가서 入海한다. 外山老姑檀底文殊洞泉隱寺華嚴寺西洞을 것서 南原烟波汀水合流하야 長興天冠山밋테서 發源以東逆流江數百里下河東蟾津江으로 入流하야 岳陽瀟湘洞庭經由하고 河東灣으로 하야 光陽大人島하는 同時南海大洋으로 變化하였다.

此山範圍朝鮮里數八百餘里라하니 濟州一道倍廣하고 椒頂海拔六千二百餘尺이라한즉 白頭山高九千0五十四尺과 妙香山高七千餘尺漢拏山高六千百七百餘尺하면 稍低하고 金剛山毘盧峰高五千九百餘尺하면 얼마큼 高峻하다. 그러한데 天王峰般若峰과의 相距數十里間其高相等하것만은 天王峰峰脊이 더욱 峻偉하야 下峰中峰上峰과의 次第階級이 잇고 究竟天門바위를 通出하야 日月臺하면 卽 天王峰임으로 누구던지 此山上峰首位天王峰하다하다. 此山뿐 아니라 最上峰相當法度構造完成選品한다 하면 六大名山中天王峰最長하다하겠다.

此山名稱亦名地理山이라 하엿스니 智異地理와는 엇던것이 訛傳인지 不知하며 二名意義多設雖在하나 아즉도 不分明하고 말엇다. 一名 方丈은 前說하고 一名 頭流는 白頭山正幹하엿는 意旨與誌하엿스니 그러면 海南頭輪山白頭山終點이란 것과 一轍이라한다.

此山金剛山一例內外山限界하니 으로 蓬田峙하며 으로 碧霄嶺하며 西으로 九曲嶺하며 으로 女院峴하야 基內로는 內山이라하고 其外外山이라한다. 然則 嶺南의 咸陽域湖南雲峰域은 모다 內山하고 其外七郡域은 모다 外山하엿다. 最勝處內山天王峰日月臺中峰帝釋堂般若峰上佛墓下拂墓妙香臺의 톡기재와 雲峰모듬이와 外山細石平田靑鶴峰白鶴峰老姑壇等地絶勝하고 川瀑有名地百巫洞上의 가내소와 雙溪石門 佛日瀑布와 新興溪洗耳巖深源달궁沿溪山內馬川淸溪潺水江以東蟾津江치들이다. 傳說하되 中國四川省內 巫俠建平에 所産猿猴活致하야 靑邱名山大川周遊식키되 猿猴緘口不鳴하다가 으로 斗湄月溪峽路한즉 一鳴하고 으로 岳陽花開間한즉 又鳴하였다하나 猿鳴與否確知不能하나 兩處俱是絶勝江峽蜀中三峽伯仲間인만 것은 實境이다. 寺菴屈指할 곳은 內山上無主庵高麗普照國師讚曰申天下名所라 하엿고 其後覺雲禪師拈頌說話落稿하는 筆端에서 舍利現出하였다하여 數層塔至今庭際巋然하다. 또한 四大名刹하니 靈源, 碧松, 金臺, 安國이 羅列하야 至今에 모다 稱寺라 하지만은 古代에는 땅 벌안에 君子寺庵子라한다. 君子寺遺墟麥穗離하다. 黃溪渡頭實相寺浮屠庵壽哲國師道場이다. 背山臨流午鍾淸應한다. 外山雄刹華嚴寺泉隱寺燕谷寺河東雙溪寺國師庵六祖頂相塔下의 東方丈 西方丈과 二十里上去하면 七佛庵 亞字房은 東國第一禪院이 될만하다. 七佛名稱傳說호대 駕洛國首露王十子中長子國統繼承하고 二子許氏蒙性하고 其餘七子此處에서 得道하얏다하여 七佛庵이라한다. 雙溪寺에서 東南으로 하면 昆陽多率寺北菴最勝하고 中間彌勒庵奇絶하고 大源寺觀드러가면 廣廈數百間塔殿宏偉하고 松篁交翠中金碧交曜傑閣天光殿 朝鮮寺刹中에서 房舍偉曠一指首屈한다. 天王峰背景下巨川雲影樓를 싸고도라가는대 水島涎涎하고 錦麟自躍한다. 數十年前石人講友數十輩로 더부러 竹林方丈 에 論道講說昨日과 갓지만은 基時同遊者回想하면 발서 先天에 속한 것이라 자기의 星星鬂髮硯池照映함을 不覺하고 此山遊記를 쓰는 것이 自笑不已한다. 山淸智谷寺歸墟花林深寂과의 兩刹猶在하고 深寂上方羅漢庵奇古하다. 栗谷正趣寺不見하야도 無妨하고 嚴川溪邊 嚴川寺古址昔日嚴川和尙法會盛旺할제 千棟寺宇廣造하였다. 此和尙에 대한 傳說省略하랴한다. 노푼고개를 더우잡아 法華寺上觀하니 泉聲凉活하고 걱의서 登龜재高嶝을 올나보면 彼岸의 보이는것 天王峰頂數千仞笙鶴翩然하고 人間煙火回顧한즉 蟻垤蠢蝡不過 厭世想忽生한다. 咸陽上谷으로 드러가면 黙契靈隱寺別洞天하얏고 上白雪 노푼곳에 白雲無心出峀하니 只可自怡悅이란 詩句朗唫하다한다.

王子安이 有曰 人傑은 地靈이라한즉 超世名士方外高僧此山中에 맛당히 배출하엿슬 것이다. 與誌上登載한 것을 倉卒間記憶할수 不能한故 余의 平素記誦者 列擧하려한다. 傳說에 新羅時 玉寶高라는 仙人이 雲上寺 卽七佛庵에서 玄琴松風三十曲彈奏하였더니 丹山玄鶴翩然飛來하엿다하며 其後貴金玉寶高琴術傳受하야 智異山深入不見하였거늘 羅王琴道斷絶할가 憂慮하야 允興이란 名臣으로 南原公事委任케하야 貴金物色學琴하라한대 允興到官後에 여러 가지 方便으로 貴金에게 맛츰내 飄風等 三曲만 傳受하얏다한다.  

新羅末葉孤雲先生崔致遠雙溪寺晩居하야 雙溪石門 四字의 筆跡尙存하며 顥源上人奇韻詩傳在하엿는대 末聯에 有曰 呤魂은 對景無羈絆이어늘  四海深機憶道安이라 하엿다. 是故近古姜秋琴雙溪寺吟有云호대 雙溪水活孤雲墨이오 二鶴峰靑六祖心이라 써스니 眞境善畵한 것이다. 高麗人 韓惟漢은 崔忠獻擅政賣官하고 國難將作恐惧하야 妻子를 다리고 智異山하야 苦節淸修하거늘 時王聞之하고 遣使迎之한대 閉戶不出커늘 使者排戶以見한즉 壁上一聯書하야曰 一片絲綸이 來入洞하야 始知名字落人間이로다하고 北牖로서 逃去하얏다하니 宋人戴復古絶句에曰 萬事無心只一竿인데 三公不換此江山이로다. 平生誤識劉文叔키로 惹起虛名滿世間이로다함과 逸趣一般이다. 우리나라 一蠹先生鄭汝昌咸陽嘉坪鄭氏先祖인데 戊午士禍慘死하엿다. 其後伸寃되야 文廟從祀先正으로 文獻可徵할것슨 一節詩뿐이라한다. 風蒲獵獵弄輕柔하니 四月花開麥巳秋로다. 看盡頭流千萬壑하고 孤丹又下大江流로다. 비록 絶句이나 氣象超遠하야  聖賢域優入할 것이 보인다한다. 鄭先生次前인가 얼추 同時일까 曺南冥先生天王峰下德山谷卜居修道하엿다한다. 지금에도 山泉精舍古碑石可考할 만하다. 幽居詩에 有曰 春風低處에 無芳草하랴만은 爲愛天王近帝居로다 白首歸來何物食銀河十里喫有餘라하엿다. 鄭詩相對하면 優劣難分이라한다.

方外高僧으로는 新羅眞鑑國師入唐學禪하야 曺溪祖師玄孫이 된 까닭에  六祖影堂雙溪寺建設하고 魚山梵樂倣傚하야 朝鮮僧侶梵音開祖가 되얏다. 孤雲撰碑字尙存하얏다. 南嶽洪陟國師道義禪師同時入唐하야 鹽官禪傳受以遠하야 實相道場開山하엿고 伽智山林普設하엿스니 東國曹溪宗濫觴이라 한다. 宋廣普照國師八空山으로 杖錫來此하야 上無住에서 無住法門領悟하고 他山移錫하야 曹溪宗中興祖가 되얏다한다. 西山大師卽淸虛祖師安州簪纓家崔氏子로서 上舍庠登第江湖南遊하얏다가 山水絶勝奪魄하야 此山黃嶺寺崇仁長老에게 落髮得道하얏다가 다시 禪科選登階하엿다. 中古泉隱寺座主龍潭大師靈源常住雪坡長老法門龍象이오 人天眼目으로서 佛法殘秋際遇하야 己意莫伸하고 名稱普聞치못하엿다. 近古하야 禪匠講伯代不乏人하얏다. 그럼으로 漢陽末葉一種名言流行하엿다. 人種兩白하고 穀種兩豊하라는 것과 갓트며 佛種하랴면 智異山中必去하리라 하게되엿다. 至今佛法現狀을 볼진대 智異山이 또한 荒蕪하엿다. 格外詩僧으로 五百年끗장 막으니는 草巖上人最秀라한다. 晉州 玉泉寺에서 得道하엿고 靈源碧松間多居하엿다. 其文三嘉朴晩惺에게 博學하엿고 其詩古懽姜緯에게 聞道하엿다. 一生書淫이란 綽號를 밧고 世上凡百糊塗하다는보다 아주 渾忘하엿다한다. 統制使申觀浩有用人材誤解하야 賈長江을 만들여고도 하여보앗다. 이나 天下國家에는 無用일 것이다. 自述三花子傳閱覽한즉 圓覺經徹悟한 것이다. 萬境浮沈하야 無着無碍하엿고 詩三昧에는 登地已上地位하엿으니 晈然貫休參蓼惠洪比肩上磨할 것이다. 一絶句紹介하려한다. 紅梅深院綠蕉傍委地輕陰取次長이라 細雨欲飛人抑短하니 廬山一碧佛驅凉이라하엿다.

名物로는 百果玲瓏하고 香草蔚美한 것은 南中諸山普通이거니와 靑玉菜紫玉菜香蕈石蕈松蕈此山中特産이라한다. 造經刊板의 이용할 樺木(俗名鉅梓 )이 만코 鉢盂作成하는 檀木(俗名烏理木)層生한다. 또한 光潤紫漆木全鮮居甲이라한다. 已上鉅梓木穀雨節에 맞추어 甘露汁瀉出하는故遠近士女雲海霧集하야 한동안에는 內外中山熱閙成市可憎이라 한다.

智異山十餘日遊行逐日述記가 안이라 追想으로 五六年前所見聞種子藏識中含藏하얏다가 東林寺松窓下一椀茶를마시고 閉晴一時影像境摸得하야 毛錐命寫하니 一時積次第出이라 先後倒謬宜乎不免이라한다. 近日 一老先生이 理想楓岳詠詩한다. 仙寰佛地本無形키로 纔動思來已舊境何用覓尋眞面目自家胸裏萬峰靑이라 하엿거늘 石顚沙門基意하야 實地 楓岳을 하야 曰 鐘籥何曾似日形가 行人每笑座談經披藤踏破毘盧頂하야샤 倒海群峰跟低靑을 하얏다. 然則此遊山記愛讀하거든 竹杖芒鞋로써 一步一步前進하야 智異山 天王峰頂日月臺에 依杖以立하야 扶桑日出俯觀敬告한다.

東林寺松窓下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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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어쓴 ]

지리산 천왕봉의 위용

     글쓴이 : 石顚(석전)박한영

  1870(고종 7)1948. 일제강점기 승려. 이름은 漢永이고, 호는 石顚이며 법명(法名)은 鼎鎬 暎湖이다. 추사 김정희가 白坡禪師에게 石顚이란 호를 주면서 줄 만한 사람에게 주라고 했는데 그것이 전해진 것이다.


전라북도 완주(完州)에서 태어났다. 19세에 위봉사 금산스님을 찾아가 출가하면서 순창 구암사에서 설유스님에게서 법통을 받고 법호를 暎湖라고 하였다. 27세부터 해인사(海印寺), 법주사(法主寺), 범어사(梵魚寺) 등에서 강의 불교계의 영재들을 배출 하였으며, 그 뒤 조선불교월보사 사장과 불교전문학교(동국대학교전신) 교장(1933) 등을 역임했다. 1948  229일 정읍의 내장사에서 입적하니 세수 78, 법랍 67세였다.

저서에 석전시초(石顚詩鈔). 석림수필(石林隨筆). 石林草(석림초) 등이 있다.

 


이 산이 자리 잡은 곳은 영호남간에 9개 군의 지역이 서로 이어져 있고, 특히 운봉은 6개 면()인데 한 군()이 다 이 산속에 있다. 그러한데 내산(內山)의 물은 반야봉과 천왕봉 아래에서 발원하여 흐를수록 더욱 넓어져 산청의 환아정을 루르고 단성 적벽의 백마강을 휘돌아 서쪽 골짜기의 덕산과 신천이 합류하여 진양 촉석루에 부딪쳐 람강(濫江) 즉 남강이 되고 삼천포로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

외산(外山)의 물은 노고단 아래와 문수동과 천은사와 화엄사 서쪽 골을 거쳐 남원 연파정수와 합류하고, 또 장흥 천관산 밑에서 발원하여 동쪽으로 수 백리를 거슬러 흐른 물은 하동의 섬진강으로 들어와, 악양의 소상과 동정을 경유하고 하동만으로 들어가 광양 대인도에 닿는 동시에 남해대양으로 바뀐다.

 

지리산의 범위는 조선 이수(里數)로 팔백여 리라 하니 제주도만큼 넓고, 산꼭대기의 높이가 해발 62백여 척이라 한즉 백두산 높이 954척과 묘향산 높이 7천여 척과 한라산 높이 6백여 척에 비하면 약간 낮고, 금강산 비로봉 높이 59백여 척에 비하면 얼마큼 높다.

그러한데 천왕봉과 반야봉과의 거리가 수십 리에 그 높이가 서로 비슷하건마는 천왕봉의 등마루가 더욱 웅장하여 하봉 중봉 상봉간은 차례로 계급이 있고, 천문(天門)바위를 통과하여 일월대에 임하면 곧 천왕봉임으로 누구든지 지리산의 최고 상봉은 천왕봉이 맞다 한다.

이 산뿐 아니라 서로 비슷한 산들의 모습에서 가장 완벽한 최상봉을 고른다면 6대명산 중에 천왕봉이 제일 낫다 하겠다.

 

이 산의 명칭은 또 지리산(地理山)이라 기록하였으니 지리(智異)와 지리(地理)는 어떤 것이 와전된 것인지 알지 못하며, 두 명칭의 뜻은 여러 설이 있기는 하나 아직도 불분명하다. 일명 방장은 앞의 설 즉 智異地理와 같고, 일명 두류는 백두산 정간이 이곳까지 흘렀다는 뜻으로 그렇게 부른다고 동국여지승람에 보인다. 그러면 해남 두륜산의 이름도 백두산의 종점이라는 것과 동일한 뜻이라 하겠다.

 

지리산도 금강산과 한가지로 내외산의 경계가 있으니, 동쪽으로 봉전치를 경계로 하며 남으로 벽소령을 경계로 하고 서쪽으로 구곡령을 경계로 하며 북으로 여원치를 경계로 하여 그 안쪽은 내산이라 하고 그 바깥은 외산이라 한다. 그러하니 영남의 함양지역과 호남의 운봉지역은 모두 내산에 속하고 그 외의 구역은 모두 외산에 속한다.

이 산의 가장 뛰어난 곳은 내산에는 천왕봉의 일월대와 중봉의 제석당과 반야봉의 상불묘 하불묘와 묘향대의 토끼재와 운봉 모듬이이고, 외산에서는 세석평전과 청학봉 백학봉과 노고단 등지가 뛰어나다. 내와 폭포의 유명지는 백무동 위의 가내소와 쌍계석문 불일폭포와 신흥계곡의 세이암과 심원 달궁으로 이어진 계곡과 산내 마천의 푸른 계곡과 잔수강(潺水江) 동쪽의 섬진강 등이다.

전설에 의하면, 중국 사천성내 무협건평(巫俠建平)에 사는 원숭이를 데려다가 청구(靑邱)의 명산대천에 풀어놓았는데, 원숭이가 입을 다물고 울지 않다가 동쪽의 두미월계(斗湄月溪 *양평의 한강지류)의 협곡에 들여다 놓으니 한번 울고, 남으로 악양 화개 간에 들여놓으니 또 한 번 울었다 한다. 원숭이 울음의 여부는 확인하기 불가능하나 두 곳의 절경이 어느 곳과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훌륭한 골짜기라 촉중삼협(蜀中三峽 *지금의 중국 장강삼협)과 버금가는 것만은 사실이다. 

사찰과 암자 가운데서 손꼽을 만한 곳은 내산의 상무주암은 고려 보조국사가 거듭 천하의 명소라 하였고 그 뒤 법을 이은 후대 각운선사(覺雲 *龜谷覺雲)가 《염송설화(拈頌說話)》를 탈고하자 붓끝에서 사리가 나왔으며 그 사리를 봉안한 수 층의 탑이 지금도 마당 끝에 우뚝하다. 또한 사대명찰이 있으니 영원(靈源) 벽송(碧松) 금대(金臺) 안국(安國)이 벌여 있다. 지금은 모두 따로 사찰이라 칭하지만 옛날에는 같은 땅 안에 있는 군자사에 속한 암자였다. 군자사는 지금은 유허지로만 남아있다.1) 황계천변(*지금의 만수천)의 실상사 부도암은 수철국사(壽哲國師)의 도량으로서 배산임류에 한낮의 범종소리가 맑게 울린다.

외산의 큰 사찰은 화엄사(華嚴寺) 천은사(泉隱寺) 연곡사(燕谷寺)와 하동쌍계사(河東雙溪寺)와 국사암 육조정상탑(六祖頂相塔) 아래의 동방장(東方丈) 서방장(西方丈) 등이다. 쌍계사에서 이십 리 거리에 있는 칠불암의 아자방은 동국제일선원이 될만하다. 칠불의 명칭은 전설에 이르기를 가락국 수로왕의 열 명의 아들 중에 장자는 국통을 계승하고 두 아들은 허씨 성을 이어가고 나머지 일곱 아들은 이곳에서 득도하였다 하여 칠불암이라 한다.

쌍계사에서 동남쪽으로 가면 곤양 다솔사의 북암이 가장 낫고 중간에 미륵암이 비할 데 없이 기이하다. 대원사를 보러 들어가면 크고 넓은 집이 수백 칸에 탑전(塔殿) 웅대하다. 소나무와 대나무 숲이 어우러져 푸르고 금빛과 푸른빛이 찬란하게 어우러진 큰 누각 천광전(天光殿)은 조선 사찰 중에서 방사(房舍 *방이 딸린 건물)가 크고 넓기로는 첫손가락에 꼽힌다. 천왕봉을 배경으로 큰 내가 운영루(雲影樓)를 싸고 돌아가는데 섬은 잇닿아 있고 비단잉어가 스스로 뛰어오른다.

수십 년 전에 석인(石人 *석전 자신)이 학우 수십 명과 더불어 대나무 숲 처소에서 도를 논하고 강설한 것이 어제와 같건만, 그때 같이 노닌 자를 회상하면 벌써 까마득한 옛날에 속한 것이라, 자기의 희끗희끗 센 귀밑머리와 머리털이 연지(硯池 *벼루 앞쪽에 오목하게 패여 벼룻물을 담는 곳, 또는 벼루처럼 생긴 작은 연못)에 비치는 것은 알아차리지 못하고 이 산유기(山遊記)를 쓰는 것은 스스로 웃음을 금할 수 없다. 

산청의 지곡사(智谷寺) 유허지를 돌아본 후에 들른 花林(화림)과 深寂(심적) 두 사찰은 아직 남아 있고 심적사 윗쪽 나한암(羅漢庵)이 예스러우며 고아하다. 율곡(栗谷)의 정취사(正趣寺)는 보지 않아도 무방하고, 엄천강변의 엄천사(嚴川寺) 옛터는 지난날 엄천화상(嚴川和尙)의 법회가 왕성할 제 천여 동()의 절집이 조성되었다. 엄천화상에 대한 전설은 생략하려 한다.

높은 고개를 더위잡고 올라 법화사를 구경하니 샘물 소리 서늘하게 콸콸거리고, 거기서 등구재 높은 고개를 올라보면 저 건너 멀리 보이는 것은 천왕봉 꼭대기 수천 길에 생학(笙鶴 *신선이 타는 선학(仙鶴))이 훨훨 날고, 인간 세상의 불 때는 연기를 돌이켜보면 개밋둑에 꾸물거리는 개미에 불과하다는 염세적인 생각이 갑자기 일어난다.

함양 상곡으로 들어가면 묵계(黙契)와영은사(靈隱寺)의 별동천(別洞天)이 열려있고, 상백운(上白雲) 높은 곳에 흰 구름은 무심히 봉우리에서 나오니 다만 기쁘고 즐거울 뿐이라는 시의 한 구절이 소리 높이 들리는 듯하다.

 

왕자안(王子安 *초당(初唐) 4(四傑)이라 불리는 중국 당나라 초기의 대표적 시인인 王勃을 말함 650-676)이 말하기를 인걸(人傑)은 땅의 신령스러운 기운에 의해 탄생한다고 한즉, 지리산중에도 마땅히 뛰어난 명사와 불가의 고승이 배출되었을 것이다. 동국여지승람에 등재되어 있는 것을 창졸간에 기억할 수는 없지만, 내가 평소 기억하고 있는 것만 열거하려 한다. 

전설에 의하면 신라 때 옥보고(玉寶高)라는 선인(仙人)이 운상사(雲上寺) 즉 칠불암에서 거문고로 송풍삼십곡(松風三十曲)을 연주하였더니 단산(丹山 *봉황이 산다는 전설의 산) 검은 학이 날아와서 춤을 추었다고 한다. 그 후에 귀금(貴金)이 옥보고의 거문고를 전수받아 지리산에 깊이 들어가 볼 수 없거늘 신라왕이 거문고 곡조가 끊어질까 우려하여 명신 윤흥(允興)을 남원공사(南原公事)를 맡게 하여 귀금을 찾아 거문고를 배우라고 하였다. 윤흥이 부임한 후에 여러 가지 방편으로 귀금에게 마침내 표풍(飄風) 등 세 곡만 전수받았다 한다.

 

신라말엽에 고운선생 최치원은 만년에 쌍계사에 머물렀는데 쌍계석문 4자의 필적이 지금도 남아 있으며, 호원상인(顥源上人)에게 준 시가 전해지는데 마지막 연()에 이르기를

呤魂(음혼)은 對景(대경)에 無羈絆(무기반)이어늘 / 시를 읊조리는 마음은 경치를 대함에 얽매임이 없으니 

四海深機(사해심기)憶道安2)(억도안)이라 / 세상의 깊은 기미에 道安을 생각하노라, 하였다.

그리하여 가까운 옛날에 강추금(姜秋琴 *강위(姜瑋) 1820-1884 조선 말기의 학자, 개화 사상가)의 쌍계사음(雙溪寺吟/쌍계사에서 읖다)에 이르기를

雙溪水活孤雲墨(쌍계수활고운묵)이오 / 쌍계수 흐르는 물은 고운의 묵적이오

二鶴峰靑六祖心(이학봉청육조심)이라 /청학 백학 두 봉우리는 육조혜능의 마음이라

썼으니 진경(眞境)을 잘 그려낸 것이다.

고려인 한유한(韓惟漢)은 최충헌이 권력을 휘두르면서 벼슬을 파는 것을 보고는 나라가 장차 어려워질 것이라고 두려워하여 처자를 데리고 지리산에 들어와 청백한 절개를 지켰다. 당시 왕이 듣고 사신을 보내 불렀으나 지게문을 닫은 채 나오지 않거늘 사신이 문을 밀치고 들어가 보니 벽 위에 한 구절이 적혀있었는데 이러하였다. 

一片絲綸(일편사륜)이 來入洞(내입동)하야 / 임금의 한마디 말씀이 산골에 들어오니

始知名字落人間(시지명자락인간)이로다 / 비로소 이름이 인간 세상에 떨어진 줄 알았네.

그러고는 북쪽 창문을 통해 도망하였다 한다.

이는 송나라 사람 대복고(戴復古 1167~)의 절구에

萬事無心只一竿(만사무심지일간)인데 / 세상사에 무심하여 다만 낚싯대 하나 드리우니

三公不換此江山(삼공불환차강산)이로다 / 삼공의 벼슬인들 이 강산과 바꿀손가

平生(평생)에 誤識劉文叔(오식유문숙)키로 / 평생에 유문숙을 잘못 알아

惹起虛名滿世間(야기허명만세간)이로다 / 헛된 이름만 세상에 가득 차게 되었네.3)

라 한 것과 그 고상한 정취가 같다 하겠다.

우리나라 일두선생 정여창은 함양 가평정씨의 선조인데 무오사화로 참혹하게 죽었다. 그 후에 신원(伸冤 *억울하고 원통한 일에서 풀려남)이 되어 문묘에 종사한 선정(先正 *선대의 어진 이)으로, 증빙할 만한 문헌은 한 절()의 詩 뿐이라 한다.

風蒲獵獵弄輕柔(풍포엽엽농경유)하니 / 부들풀 바람에 가볍게 흔들리는데

四月花開(사월화개)에 麥已秋(맥이추)로다 / 사월 화개에는 보리가 벌써 익어가네

看盡頭流千萬疊(간진두류천만첩)하고 / 두류산 천만봉 두루 다 구경하고

孤舟又下大江流(고주우하대강류)로다 / 외로운 배로 다시 큰 강 따라 내려오도다.

비록 절구이나 기상이 뛰어나 성현의 반열에 넉넉히 들어갈 것으로 보인다 하겠다.

정여창선생보다 바로 앞인가, 얼추 동시대일까, 조남명선생은 천왕봉 아래 덕산곡에 살면서 수도하였다 한다. 지금도 산천정사와 옛 비석이 있어 참고할만하다. 덕산복거(德山卜居 *필자의 원문에는 幽居詩로 되어 있음) 詩에 이렇게 읊었다.

春風低處(춘풍저처)에 無芳草(무방초)하랴만은 / 봄산 어디엔들 방초야 없으련만

只愛天王(지애천왕)이 近帝居(근제거)로다 / 다만 천왕봉이 하늘에 가까이 있음을 사랑하네

白首歸來(백수귀래)에 何物食(하물식) / 빈손으로 왔으니 무엇을 먹으리오

銀河十里喫有餘(은하십리계유여)라 하였다. / 십 리 은하수 마시고도 남겠네.

정여창의 와 비교하면 우열을 가리기 어렵다 하겠다.

 

세상 밖 고승으로서, 신라의 진감국사는 당나라에 들어가 선()을 배워 조계조사의 현손(玄孫)이 된 까닭에 육조영당(六祖影堂)을 쌍계사에 건설하고 어산범악(魚山梵樂 *인도 중국의 범패음악)을 그대로 본받아서 조선 범패음악의 개조가 되었다. 고운이 찬술한 비석의 글자가 남아 있다.

남악의 홍척국사(洪陟國使)는 도의선사(道義禪師)와 동시대에 당나라에 유학하여 염관선(鹽官禪 *당나라의 선승 염관제안(鹽官齊安, ?842) 의 불법)을 멀리서 전수받아  홍척은 실상사에 개산하였고 도의는 가지산림에 널리 베풀었으니 동국조계종의 조종(祖宗)이라 칭한다.

송광사의 보조국사는 팔공산에서 석장(錫杖 *승려의 지팡이)을 짚고 이 산으로 와  상무주암에서 무주법문을 깨달은 후 다른 산으로 옮겨가 조계종의 중흥조가 되었다 한다. 

서산대사 즉 청허조사는 안주(安州) 벼슬아치 집안 최씨가의 자식으로 성균관에 입학한 후에 강호에 유람하였다가 남쪽의 비할 바 없이 뛰어난 지리산의 경치에 넋을 빼앗겨 이 산의 황령사 숭인장로(崇仁長老)에게 머리 깎고 출가하였다가 다시 선과(禪科)과거에 올랐다.

중세에 천은사 좌주(座主)인 용담대사(龍潭大師)와 영원사에 상주하였던 설파장로(雪坡長老)는 법문의 고승이요 일체중생의 사표였으나 불법이 쇠잔한 시대를 맞아  그 뜻을 펼치지 못하였으니 명성이 널리 퍼지지는 못하였다.

근세에 이르러서도 (지리산에는) 훌륭한 선사나 뛰어난 강백(講伯 *경론을 가르치는 스님)이 끊어진 적이 없었다. 그러므로 한양말엽에 일종의 명언이 유행하였다. 인종(人種)은 양백(兩白)에서 구하고, 곡종(穀種)은 양풍(兩豊)에서 구하라4)고 한 것과 같이 불종(佛種)을 구하려면 반드시 지리산중에 가야 하리라고 하게 되었다. 지금의 현상으로 보건대 지리산 또한 불법(佛法)이 황폐해졌다.

특별한 시승(詩僧)으로 오백년 끝장을 막은 이는 초암상인(草巖上人)5)이 가장 뛰어나다고 한다. 진주 옥천사에서 출가하였고 영원사와 벽송사에 많이 머물렀다. 그 문장은 삼가(三嘉)의 박만성(朴晩惺 *박치복(朴致馥) 1824(순조24)1894(고종31))에게 넓게 배웠고, 는 고환 강위(古懽 姜瑋 1820-1884)에게 배웠다. 일생에 서음(書淫 *글 읽기를 지나치게 즐기는 사람)이란 작호(綽號 *남들이 붙여준 호)를 받았고 세상 온갖 일에는 어리석기보다는 아주 다 잊었다 한다. 통제사 신관호(申觀浩 *호가 위당(威堂)으로 조선후기 금위대장, 훈련대장, 진무사 등을 역임한 무신으로 시에 능하였다. 1811~1884)가 유용한 인재로 오해하여 가장강(賈長江)6)을 만들려고도 하여 보았다. 그러나 천하 국가에는 무용할 것이다. 

스스로 저술한 삼화자전(三花子傳)을 열람해보니 원각경(圓覺經)에서 철저히 깨달은 것이었다. 온갖 경계에 부침(浮沈)하면서 무착무애(無着無碍 *집착함이 없고 걸림이 없음)하였고 시삼매(詩三昧 *시에 집중하여 득도한 경지)에는 등지(登地 *보살 수행의 과정 중에서 십지(十地)의 자리에 오르는 것) 이상의 지위를 얻었으니 당()의 교연 관휴(皎然貫休 *당의 선승이자 시승인 교연청주(皎然淸晝 720-799?)를 말함)와 송()의 참료 혜홍(參蓼惠洪 *당의 선승이자 시승인 각범혜홍(覺範惠洪 1071-1128)을 가리킴)과 어깨를 나란히 할 것이다. 그의 시 한 절구를 소개하려 한다.

紅梅深院綠蕉傍(홍매심원녹초방) / 붉은 매화 핀 깊은 절에 푸른 파초 같이 있다가

委地輕陰取次長(위지경음취차장)이라 / 매화꽃은 떨어지고 옅은 구름 점차 늘어나

細雨欲飛人抑短(세우욕비인억단)하니 / 가랑비 흩뿌리려 하니 사람은 오히려 움추려들고

廬山一碧佛驅凉(려산일벽불구량)이라 / 려산은 온통 푸르른데 불자의 몸은 서늘하구나. (廬山 *덕유산의 별칭)

 

명물로는 백과(百果)가 영롱하고 향초(香草)가 무성하고 아름다운 것은 남쪽의 여러 산에서는 보통이거니와 청옥채 자옥채와 표고버섯 석이버섯 송이버섯이 이 산중의 특산이라 한다. 경판을 새기는 데 이용하는 자작나무(민간에서는 거재수라 함)가 많고, 발우를 만드는 박달나무(민간에서는 오리목이라 함)가 층층이 자란다.

또한 광택을 내는 황칠나무는 조선전체에서 으뜸이라고 한다. 위의 거재수나무에 는 곡우절에 맞추어 감로즙(甘露汁)이 흘러나오는 고로 원근(遠近)의 남녀가 구름처럼 모여들어 한동안 내외산중이 시끄러운 시장터가 되어 가증스럽다 한다.

 

지리산을 십여 일 돌아다닌 것을 날짜에 따라 그대로 기록한 것이 아니라 돌이켜 생각하여 오륙 년 전에 보고 들은 바를 씨앗으로 삼아 마음 깊이 갈무리하였다가 동림사의 소나무 창 아래에서 차 한 잔 마시고 맑은 창을 닫고 한순간에 마음속에 떠오른 모습을 그려내어 붓에게 명하여 베끼게 하니, 축적된 것이 일시에 차례로 나와 앞뒤가 바뀌고 잘못됨을 마땅히 면할 수 없을 것이다.

근래 한 늙은 선생이 이상적인 풍악산(楓岳山)만 시로 노래하고 있다.

仙寰佛地本無形(선환불지본무형)키로 / 신선세계와 부처의 땅은 본래 형체가 없으니

纔動思來已舊境(재동사래이구경) / 막 생각이 일어나도 이미 옛 경지일 뿐

何用覔尋眞面目(하용멱심진면목) / 무엇 때문에 진면목을 찾는가

自家胸裏萬峰靑(자자흉리만봉청)이라 / 스스로의 가슴속에 만 봉우리 푸르른데.

했거늘 나(石顚스님)는 그 뜻에 반하여 (생각 속의 이상적인 풍악이 아니라) 실지 풍악을 칭송하여 읊는다.

鐘籥何曾似日形(종약하증사일형) 종과 피리가 해의 모습을 닮았던 적이 있었던가7)

行人每笑座談經(행인매소좌담경) 수행자는 늘 웃으며 앉아 경전을 얘기하네

披藤踏破毘盧頂(피등답파비로정) 덩굴을 헤치고 답파해 비로봉 정상에 서면

倒海群峰跟低靑(도해군봉근저청) 바다로 거꾸러지는 뭇 봉우리들 발아래로 푸르다네

라고 하였다.

그러한즉 이 유산기를 애독하거든 대지팡이에 짚신 신고 한 걸음씩 나아가 지리산 천왕봉 꼭대기 일월대에 지팡이를 짚고 서서 동쪽 바다의 일출을 내려다 보라고  삼가 말씀드린다.

동림사 소나무 창 아래에서.

 

1) 원문은 맥수리(麥穗離) : ()나라의 신하였던 기자(箕子), 은이 망한 후 주()나라 때에 은나라의 폐허를 보고 옛날에는 보리가 무성했던 시절을 생각하며 지었다는 시에서 나온 말로, 군자사의 폐사지 풍경에 비유한 것이다.

2) 진나라 문인 습착치와 고승 도안(312~385)의 고사를 끌어와 자신과 호원상인이 儒佛을 떠나 마음으로 교유하고 싶다는 뜻

3) 송나라 시인 대복고(戴復古)가 엄자릉의 마음을 읊은 조대(釣臺)라는 시다. 여기서 유문숙은 광무제다. 광무제의 이름은 유수(劉秀), 자는 문숙(文叔)이었다. 삼공(三公)은 천자를 보좌하던 최고 관직이다. 그런 관직도 대자연에서 유유자적하는 삶과는 바꿀 수 없다는 얘기다. 엄자릉의 고고한 기상은 후세 시인묵객들이 애송하고 흠모하는 대상이 됐고 그림의 소재도 많이 쓰였다.

4) 양백삼풍은 격암유록 등의 도참서에 보인다. 여러 설이 있으나 보통 양백(兩白)은 태백과 소백 사이를 일컬음. 삼풍(三豊)은 풍기 무풍 연풍이라고 억지 해석을 하기도 하나 산도 들도 아니라 했으니 다른 설도 많다. 그런데 양풍(兩豊)이란 말은 그 어디에도 나오지 않는다. 글쓴이의 기억에 착오가 있었던 것 같다. 아마도 삼풍()일 것이다.

5)초암선사는 생몰연대가 명확하지 않다.1828년경 영남의 고성에서 박씨 가문의 아들로 출생했는데, 1843년 출가하여 이듬해 고성 옥천사에 득도했다. 법호는 초암(草巖) 이고, 법명은 채오(采五)이며, 최소한 1852년 이후 박치복과 강위로부터 경사와 시문을 익 혀 당대에 벌써 거벽 혹은 명가라는 명성을 얻었다. 하지만 세상에서 인정받지 못해 입신출세하지 못했고, 이후 원각경등의 경전을 읽고 절대적 불교 진리를 완전히 깨달았고, 말년에는 금강산과 묘향산과 백두산 등 전국의 산천을 주유하며 대 자유를 즐기다가 1880년대 이후 먼 변방 의 고비 사막에서 입적한 것으로 전한다.

저서 초암유고(草巖遺稿)를 남겼으며,99에서는 초암유고에 수록된 <문수암 사적기>로 소개된 적이 있다 

6)중국 중당 때의 유명한 승려시인 가도(賈島)를 말함. 고사성어 퇴고(推敲)의 주인공. 한유와 교유하였고 환속하여 관리가 됨. 779~843

7) 세상에 태어나 해를 못 본 소경이 옆사람에게 해의 모양을 물으니 해는 구리반과 같다 하였는데 두들겨보니 소리가 나므로 종소리를 듣고 해로 알았고, 또 해의 빛이 어떠하냐고 물으니 촛불과 같다 하였는데 촛대와 같이 생긴 피리를 만져보고 햇빛으로 알았다고 한다. 소식의 『일유(日喩)』에 나온다.

그러므로 이 시는, 대체로 사실을 잘못 알기 쉬우므로 수행자는 원래 경전을 깊이 궁구하고, 금강산은 실제로 올라 내려다봐야 한다는 뜻으로 읽힌다. 이 글 전체의 결론도 그러하다.

 

<덧글>

 겨우 기초정도의 한자 실력으로  겁없이 국역에 도전해 봤습니다.

본문필사와 함께 한글로 풀어 쓰기가 많이 어려웠지만 구글 과 다음이 유용했고, <엉겅퀴>님께서 부분적으로 수정보완을 해 주셨습니다.

자료발굴은 회원 <깊은강>님께서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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