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산행기

智異山遊記-1935년 신조선 신년호

智異山遊記 (지리산유기)
저자 - 碧堂散人
1935년 신조선 신년호에 게제
저자인 벽당산인은 누구인지 아직 확인이 안됨. 초벌 번역은 헌책방 주인 윤한수님이 수고하심...

 

智異山遊記 지리산유기

 

벽당산인(碧堂散人)

 

구월 이십칠일 경남의 명승 산하의 웅위와 천석의 명미를 들자면 첫재 지리산 둘재 덕유산을 굴지하지 아니치 못하나니 지리산 천봉상에 한번 등림하야 연면수백리의 웅자거구를 발부면서 안하로 영호천리를 굽펴보며 북으로 덕유산을 비롯하야 남으로 거제진해의 대해를 바라보지 아니 하고서는 감히 지리산의 웅대를 말하지 못할 것이다. 나 일즉이 지리산을 동경한지 오래엿다. 십오육세로부터 남유하야 진양의 촉석에 올나 멀리 운외의 천왕봉을 요정하여 앙지불급을 탄하엿스며 또한 대원암에 드러가 일석춘소를 보낸 것은 벌서 기억하기에도 아몰아몰한 근이십년전 일시역려의 거름이 엿는지라 이것으로써 지리산의 만일이나마 규현하엿다 하리요, 더구나 만근육칠년래로 나의 분주한 여장이 진주하동일대에 머무른 적이 무릇 수십회에 이르럿스되 다시한번 입덕문을 찻지 못하엿스며 오직 쌍계칠불의 새소리를 멀리 들어 지낫첫슬 뿐이엿스나 요컨대 나의 등산벽이 남에 지지아니한데 비추여 생각해볼 때에 나의 생활이 그 얼마나 고조지산하엿고 또한 속세의 진연이란 산수에 푸대접을 자들것이 그 당연임을 다시금 느끼지 아니 할 수 업다. 그리고 금하에도 오직 일미의 방랑으로서 만장홍진의 경성에서 삼하를 지리히 보내면서 혹은 관서행을 경영햇고 때로는 지리등람을 꾀하야 보앗스나 모다 수포에 고라갓슬 뿐이엿다. 그러자 맛침 민세(안재홍?)가 영호일대를 답파하고 도라와 남유의 장관을 자랑하며 춘곡(고희동?)은 관북을 것처 귀경하야 나의 몰취미한 사생활을 조롱하야 놀니여 댄다. 이러한 모든 충동이 나의 간산벽을 일층자극하며 지리일등이 나의 다년 숙제이므로 어시호 여장을 꾸리여 가지고 일전에 진주읍으로 나려와서 허치구군댁에 체류하다.

그리하야 진주에 도착한지 벌써 십여일이다. 그간 허군댁에서 모힌 기차의 아회와 허영태, 정동석 제군의 연석을 통하여 나의 금행 동기가 전혀 지리유람에 잇슴을 말하고 유진제우의 찬동을 구하매 맛침 박낙종 강병관 양군은 벌서 초추부터 등산을 결의하고 잇던 다음이므로 양군은 십분 깁뻐하야 모든 준비알선에 집심하고 기외 허군, 하필원, 하영진 등 십여인이 모다 동감을 표한다. 그러나 진주 일반 풍기가 등산에 대하야 십분취미를 느끼지 아니하야 혹은 시기의 느짐을 탄하며 혹은 사사를 구하야 시일만 작구 천연하던 지음에 맛침 남사리로 부터 이병목, 최우환 등 칠팔인이 동행하기를 약속하고 또 하동으로부터 정태영군이 일부러 또 참하므로 이에 우리 일행은 명조(이십팔일)에 진주를 출발하야 덕산시장에 이르러 남사리일행을 회합하야 대거 임산하기로 결정하니 남하 십여일만에 이제 비로소 우리의 등산 계획이 성립을 고하게 되엿다.

이십팔일 조조에 이러나서 강병관군으로부터 산행의 여장을 정돈하여 가지고 덕산행 자동차부로 왕하니 박우종, 박낙종, 정태영, 하필원 제군이 벌서와서 기다리여 잇고 허치구군은 주자를 너허 주고 하영진군은 망원경을 빌니여 주며 하필원군은 급한 사정으로 동행하지 못하게 되어 퍽이나 유감이다. 오전 구시경 덕산행 자동차는 우리의 실어 가지고 진주읍을 떠나 나불암에 이르니 왼 대야 우에 가득한 누른 베는 십리 이십리를 통하야 황금빗을 이루엇고 멀숙한 가을하늘 금빗가티 찬란한 아침 해빗은 모다 글자 그대로의 만안추색이엿다. 우리 일행은 압흐로 지리의 장관을 그리며 연도의 추경에 한끗 도취하야 서루주고 밧는 유쾌한 담소는 오로지 산흥야취로써 차지하고 말뿐인데 맛침 또 권한군이 단성까지 동반하게 되엿스므로 일행의 희학이 권군을 들너싸고 총공격이 나릴 때에 권군의 좌충우돌하는 태도를 볼적마다 일행의 폭소는 끗칠줄을 알지 못하던중 차는 벌서 단성 적벽강반에 다이여 차체가 움쭐하며 선다. 일행은 차에 나리여 적벽강을 건너 가는데 강상에 병열한 천중취벽은 명경알 갓치 맑은 강물 빗에 어우러저 벽파십리가 아침 해볏에 일넝거리며 멀리 강북에 소사잇는 취봉층은 임진전적으로 유명한 백마산성이라고 한다. 우리는 강반주점에 이르러 탁주 두어 잔씩을 서서마신다음 여기에서 권군을 작별하고 다시 차에 올나 단성읍을 것처 남사리에 도착하매 정류장에 서 이석규군이 서서 기다리고 잇다. 그러므로 낙종군은 하차하야 석규군과 함께 남사리로 드러가서 동리 제우로부터 동행하야 오기로 하고 우리는 일로에 입덕문, 도구대를 지나 덕산시장에 치래하차하다. 덕산시장은 지리산 입구의 일개 소시장으로서 지리산의 모든 산물이 이 시장을 통하야 수출되며 또한 산민의 일용물화도 오로지 여기에 집중되므로 이 시장은 지리입구의 중요지니 만큼 산중시장으로서는 젭버 번창하다. 여관에 드러가서 잠깐 휴게하고 점심을 먹을새 반상에 오른 송이와 맑은 탁주는 이 산중의 유명한 명물로서 벌서 산향산미를 충분히 전하여 준다. 오후 사시경에 낙종군 급 남사리 일행이 달니여 드러오니 이병목, 최우환 등 칠인이더라. 덕산은 원래 조남명선생의 유기이므로 지금도 부근 촌락에 선생 후손이 세거해 잇으며 또한 선생 묘소와 유적도 만히 잇다고 한다. 석양에 제우로 더부러 선생묘소에 올나 참배하고 나리여 와서 산천재(선생서재)에 등림하니 낙락한 고송과 황량한 정초는 오직 고색이 창연할 뿐이며 계하의 왕양한 덕천강과 운외에 홀립한 천왕봉은 늠름연 선생의 기상을 천고지하에 상견할 수 잇다. 이에 우리 일행은 명조에 출발하기로 하고 덕산에 유숙하니 일행은 곳 이병교, 이병목, 박우종, 강병관, 박낙종, 최중환, 최우환, 정태영, 이종규, 이정수, 이현근, 이석규, 조원상, 이현규 등 십오인이요, 등산에 관한 제반 기구 물품을 질머지고 따르는 짐꾼 오인이 잇스니 우리 등산대원은 전부 합 이십인이러라.

이십구일, 청이우, 조조에 이러나서 조반을 재촉해 먹고 칠시경에 덕산시장을 출발하야 천왕봉으로 향할새 여게로부터 봉정까지 약백리길이라고 한다. 우리는 모다 모자, 의복 급 가방 등 물은 여관에 임치하고 각기 경장단공으로써 일행 이십인이 전후로 나열하야 등산의 제일보를 시하니 건각 예기와 유쾌한 담소는 특히 우리 등산대가 아니고는 어데서던지 보기 오러운 풍치를 맛볼 수 잇스며 만산의 추성추색은 일행의 산흥을 일층 더도 도아 준다. 이로부터 덕천강을 안고 평관야의 십리황도를 바라보며 지내, 원촌을 지나 돌을 밥고 내를 건너 보보전진하매 야경의 초로 경풍에 흔들니여 사람의 의선을 흐누시 적시여 십분의 경상미를 느끼겟다.

이리하야 일선림경이 심림을 뚤코 단애늘 돌아 실뱀가티 고불고불 드러가매 협곡이 점점 좁아들기 시작하야 흡사히 호리세계를 지엇는데 간간히 풍림속으로부터 수삼의 고촌이 듬성듬성 보이며 지붕 우에 까라노흔 빨간 고초며 감나무 가지속으로 영하는 붉은 홍시며 돈사 우에 축느러진 허연 포자는 간간히 산촌의 추경을 점철하야 노핫다. 다시 몃 등성이를 너머 대하, 대포의 산촌을 지나서 춘심동구에 이르매 첩첩의 층암절벽은 더욱 유수미를 깨달게 하는 동시에 동협을 통하야 쏘나저 흐르는 여울소리는 사위의 산곡을 울니여 꿍꿍하는 반향이 심산의 적막을 깨트리고도 나뭄이 잇다. 그런데 이 물은 동리의 각종 세류를 거두어 원촌 압해에 이르러 동북으도의 삼장협과 서남의 중산곡으로부터 흘러 나오는 양대 지류와 합류하야 곳 덕천이 되는 것이다.

이곳으로부터 길은 차차 험준하고 인가는 점점 희소하야진다. 우리는 때로 위암단애를 밥고 수지초만을 더우잡아 산허리를 안고 우회하야 들어가매 들어 갈수록 골은 더욱 깁퍼지고 사위의 봉만은 층일층 고급하야 일선세경이 천장낙락의 위애 우으로 올나가게 될 때에 우리는 발이 아실아실하고 머리가 앗찔앗찔하야 참아미를 나려다 보지 못하고 다맛 압만보고 더듬 거릴 뿐이다. 만일 한 번 실족하면 그 위험 낭패임을 오히려 차치하고 위선 목하의 암령을 더우 잡으며 수우을 헷치기에 몰두하야 으르러 산의 험준을 돌탄하고 굽피여 골작우니의 깁품을 바라볼만한 여유와 용기를 가지기 어려우며 오로지 심력의 전부가 발의 차질을 바루잡아 보보의 간난을 돌파하기에 집중할 뿐이다. 이와가티 천신만고로서 한 골을 지나면 또 한 골이 잇고 한 고개를 너무면 또 다른 고개가 낫타나 골과 고개를 경과할 때마다 설마하니 이것만 통과하면 필연코 춘심동은 나왓거니 하는 자위심에서 피곤한 다리를 억지로 잡아 차츰차츰 통과하야 들어가나 그러나 산의 중요는 의연 끗이 업고 천장만인의 고봉은 칼날처럼 깍거 질러서 사람의 머리를 답타 눌느는 것 같러서 가슴이 답답할 때가 잇다. 산이 점점 깁퍼 짐을 따라 만산단풍은 차차 짓터지고 고목창등은 더욱 욱어저 잇는데 천종이음의 산조소리는 태고의 시곡을 전하야 주니 층암절벽을 박차고 떠러지는 비류급천들은 옥을 부수고 유리반을 깻치드시 쇄쇄하다가 때로는 바람결에 날니여 뚝 끈어지면서 먼 골작우니를 후려 갈기여 꿍꿍한다.

이에 우리는 멀니 단풍을 다 바 보니 새노래 물소리를 따라서 차행차휴하며 차담차소하야 벌서 임자정 고개를 너머서 상불대에 등림하니 대하의 청류 참으로 칼칼하고 맑기도 하야 귀멀고먼 인간으로 홀니여 보내기가 무엇보담 앗까움을 느끼겠다. 이러구러. 오후 일시경에 직방대에 이르매 협곡이 심히 유아하고 천석이 더욱 명미하야 일층 사람의 가슴을 상연케 한다. 대상에 올라 휴게할새 혹은 물을 움키며 목을 추기며 혹은 거터안고 누어서 제각끔 기왕의 간수을 이즌드시 태평천하를 질기는 감이 흐른다. 우리는 덕산에서 노정을 정할 때 금야에는 광덕사에 유숙하기로 하엿스나 그러나 광덕사 중로에는 가히 오반을 먹을만한 곳이 업다 하기에 미리 점심을 준비 휴대하엿는데 이것은 곳주먹밥이라는 것으로서 원구와 가티 둥굴게 뭉치여 그 속에는 며루치장을 너허 만든 희귀무비한 식물이엿다. 이 주먹밥을 각각 이사개씩 나노아 먹으며 또 휴대한 일준청주를 기우리여 각기 두어 잔씩 마신 후 백석 우에 거터 안저 산풍을 완상하며 은류를 부감하매 이에 일동은 주흥산취에 잠기여 도취자적이 기극에 달하엿다. 오반을 맛친 후 일동은 원기 일층왕성하야 일기에 국사봉을 돌파하야 광덕사에 득달하기로 하고 다시 거름을 옴기여 국사봉 상정을 향할새 직방대로부터 순이리산막까지 가는 도중에 제일 놉픈 산은 이 국사봉이다. 국사봉은 아까 지나온 산령처럼 비록 암석의 험악과 수만의 울적은 업스나 그러나 빤빤하고 꼿꼿한 푼수에 잇서서 이미 지나온 수십개의 험치 따위는 이 국사봉에 비견할 자 태무하엿다.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일동은 더욱 건국을 날니며 희학과 담소로써 전전후후하야 대숨에 국사봉 중요에 도달하니 낙종군의 후리후리한 키와 건들건들하는 다리에는 바람이 휙휙날리고 병관군의 큼직한 눈이 더욱 둥글해진 것도 가관이거니와 사방으로 퍼진 병목군의 몸이 두 주먹을 쥐고 경주하는 것 태영군의 풍자적 희학은 일동을 시시로 폭소케 하며 병교군의 수신세각이 남에 지지안케 팔낭팔낭하는 것과 우환군의 눌어로서 좌우의 희학을 바다내기에 급급한 것과 땀을 뻘뻘 흘니면서 맨뒤에서 허덕어리는 중환군의 태도도 참 장관이고 우숨거리엿다. 이와갓티 진진불휴하야 숙연 국사봉 상정에 도달하야 다시 일동은 좌휴게하며 눈을 돌니여 사방을 바라보매 멀니 왕양도도한 덕천강은 평관들 십리대야를 휘휘감고 늠실거리고 동으로 삼장협과 서으로 중산곡은 안하에 전개되엿스며 삼십리 춘심동협은 천장만장으로 뚝떠러저 잇다. 그리고 천왕봉을 바라본즉 그 절정은 운무에 가리여 잘 보이지 아니하나 그러나 하늘의 중복을 끠트릴드시 외외연 품품연 웅자거구를 버티고 안즌 품이야말로 우주간 일대 거물이 아니면 안될 것이다. 천왕봉이야 상의라 막론하고 중봉을 바라볼지라도 이 국사봉 따위로서는 감히 내노라하지 못할만큼 일국의 토양에 불과하다 하여도 과언이 아니다.

여게서 광덕사 노정을 물은즉 또 이십리길이 느러젓는데 여기로부터 광덕사까지야 말로 참 간절장절한 천험이요 난국이나니 인간의 모든 기구험악을 오로지 차일처 이십리에다가 집중한 것이며 조화옹의 수단 밋치는데 까지는 그 귀월신부를 여지업시 발휘한 곳이엿다. 국사봉 상정으로부터 봉저에 까지 나리여 가는 길은 이것은 길이 아니다. 꼿꼿한 절벽이 오로지 위암거석으로써 차지할 뿐으로서 암상에는 청태노등이 꽉쩌리여 잇슬 뿐이요, 길이라곤 도시 차질 수 업다. 이 바위에서 저 바위로 뛰여 건늬면서 암상의 등만을 손에 잡고 태상으로 주루루 밋끄러저 나려 가다가 발끗이 바위에 다이면 그제야 다시 밟을 모아 가지고 일보이보 옴기여 가기를 범수시간 철속하야 겨우 봉하에 이르럿나니 이야말로 속수위난어상천이 아니면 안될 것이다.

여게서 휘전한 다리를 한참 쉬여 가지고 골을 지나고 내를 건늬여 순이리산막에 당도하매 감자가는 화전수무와 통나무로 꾸리여 노흔 산막사오가 잇슬 뿐이요, 사람은 하나도 구경할 수 업는데 멀니 들은즉 어데서 땅땅하는 무슨 소리만 들니여 올 뿐이다. 우리는 서로 그것이 무슨 소리인가 하고 차저본즉 졸졸 흐르는 계간의 끗에다가 조고만한 홈대()를 대여노코 바닥에 양철을 깔아 노흔 후에 그 우에 조고만한 물방아(소수용)를 가설하야 홈에서 물이 떨어지면 바야흐로 방아고가 오르나리면서 양철조각을 때리여 꽝꽝 울닌다. 이것은 무얼하는게냐 하면 화전민이 일터에 가면 산조들이 와서 지장, 서숙을 쪼스며 또는 밤에 산저가 와서 화전을 침범하는 수가 만이 잇스므로 이 방아의 소리를 비러서 새, 김성을 놀내게 하여 쫏차 버리는 절묘의 작용을 발휘하는 것이엿다. 이것이야말로 산간 화전부락이 아니고서는 도저히 상상도 할 수 업는 원시수공의 형태엿다. 순이리를 지나 광덕사 동구에 이르러 차즘차즘 골작안으로 들어간즉 사위의 만첩층봉은 바람샐 틈도 업시 빽둘너섯스며 수천수만의 고회노백은 십리 이십리의 창만노등과 서루 얼크러지고 저리여 왼천지를 덥펏슬 뿐인데 오직 보이느니 만학천봉의 단풍은 일폭의 강금을 버려노앗고 만천의 금수병속에서 새소리 물소리만 때로 들니여 나올 뿐이다. 맗하자면 이곳에는 하늘도 땅도 세계도 압는 오직 단풍만으로서 존재를 차지한 홍금활화의 천국이엿다. 갸룩하고 흐덜스러운 이 광덕사 동구의 단풍이여!! 이것을 보지 못하고서는 지리산을 말하지 못할 것이며 지리산을 보지 못하고는 감히 산수를 이약이할 자격이 업슬 것이다. 이 이십리 단풍림을 통과하야 전전심입한즉 길은 차차고급하고 골은 더욱 깁허저 십보 이십보만 격하면 일행도 서루 알아 보기가 ??이므로 이에 전자는 후자를 부르고 후자는 전자를 화하야 소리의 부호로써 소향의 지점을 지시하며 때로는 체조식으로 일이삼사의 번호를 불너 동반의 무루를 점검하야 이와가티 일행 이십인의 소리가 함께 올니여 골안이 정정할 때에 먼산의 구름속에서 채하는 산인들과 도로리 줏는 산처들이 멀니서 어어하고 응성하야 주는데 들은즉 이것은 산인의 습관이라고 한다. 이러구러 신선너들(신선평)에 이르매 비비한 량우가 만학의 풍엽을 따리여 쇄쇄한다. 일행은 비를 무릅쓰고 전경을 구경하매 소대천만의 기암괴석이 선태불형으로 변환무상하야 완연히 금국의 만물상을 연상케 한다. 신선평으로부터 다시 보보진진하매 일개백장의 거암이 리에 홀립하야 거산의 웅혼을 좌하엿다. 그러나 아직 차암의 이름이 업다 하므로 나는 명명하야 왈 진암이라 하고 여게서 다시 수백보를 옴기여 일산령에 올으매 수백장의 일석대가 외외특립하엿는데 차대역 이름이 업다 하므로 나는 또 차대의 명을 명하야 왈 관풍대라 이름하고 대상에 올나 한참 휴게할새 이때 맛침 일동승이 도토리를 주어 가지고 지나 가거늘 우리는 차 동승을 불너 광덕사가 얼마나 머냐고 물은즉 동승 답왈 소승내시광덕사의 주자로서 종차로 거사불원하다 하므로 우리는 이 동승을 압세우고 수천보를 우회 전입하야 사에 다다르니 차사는 만장석벽 우에 수삼의 모옥을 결구하고 일노니 양씨와 수삼동승이 주거하는 바로 이곳은 지리산 중봉인 즉 일월봉 상정인데 여게서 천왕봉에 거하기 약이십리요 대소원근의 수천고봉이 발밋헤 나열하고 창망한 천리남주가 안하에 전개하엿다. 운무 우에 노피안저 하계를 부감하매 진실로 천고의 장관을 자랑하지 아니 할 수 업다. 차사에서 일야를 유숙하니 주인 노니의 은근관대와 동승의 진성응접은 실로 감사한 바 잇다. 밤에 병교, 우종 양군이 한시 일절을 읍고 나의게 차운을 요하므로 부득이 나도 일절을 화답하엿스니 여하하다.

??사륜동(덕산 일명)

경장소일공지, 망리천왕여지척.

이각선표불면취, 호정불감소년시,

병교

효일지지상수지, 표묘령산금지척.

유인삼수범장취, 두류추색정당시.

우종

사륜효월괘산지, 명일천왕봉상도.

풍각소소불수취, 운청종락석양시.

필자

삼십일, 청 아침에 이러나서 문을 열고 조망하매 미우소소하며 농무만산하므로 우리는 금일 천왕봉에 등림하지 못할까 하야 자못 걱정하엿다. 조반을 맛치고 한시간 기두르매 비가 쾌청하고 운무 서서히 것치며 일기 심히 명랑하므로 일동은 깁뻐하야 상봉을 향하야 출발하다. 이곳으로부터 상봉 까지는 차 소위 고산정정이므로 길의 험악은 다시 더 말할 나위도 업거니와 그 통쾌장절함도 이루 형언키 어려웁다.

우리는 천인절벽을 안고 부복등하야 범사오시간을 허비한후 상봉에 다다르니 이것이 즉 천왕봉이다.

천왕봉상에 등림하야 조망하매 기웅차대의 천고장관임은 구구한 필설로써 도저히 그 만일을 그리기 어러우니 차라리 이것은 독자의 상상에 막길 뿐이다. 그러나 일언이폐지하면 과연 우주간 최대의 거물이라고 할박게는 다른 오설을 불허하는 바이며 멀니 영호 수천리와 남천의 군도대해가 기점가티 부몰하야 오직 무궁과 무한을 느끼게 하는 동시에 스스로 옷깃을 바루잡아 품연히 경건엄숙함을 깨다를 뿐이다.

상정에는 동서 양편으로 수백의 거암이 외외촉촉하야 전후좌우로 반회삭립하엿는데 기명 왈 일월대라고 한다. 곽면우 시왈 천왕봉상유명언, 일월대중건중래라는 것이 곳이 곳이다. 그런데 이곳은 절고무비하야 한기가 겨울이나 다름이 업슴므로 우리는 화목을 수적하야 불을 지르고 휴대한 면의 짝겟, 외투 등 다구를 환착하고 밥을 지어 먹고 또 휴대한 소주 일준을 경도하야 대음하엿다. 그러나 몸은 의연 떨니며 차움을 자못 느끼겟다.

이와가티 조망배회하며 담소소요하다가 오후 오시경에 이르매 홀연 농무가 짓터지며 한기 점점 름율하야 야간에 혹 하우할 우려가 불무하다. 금야에는 상봉에서 유숙하기로 하고 래시에 이에 대한 일체 준비를 무루히 구비하엿던 바이나 그러나 만일 야간에 하우하면 기낭패 위험이 하경에 이를찌 예측키 난하므로 부득이 본래의 계획을 변경하야 즉시 하산하기로 결정하매 일행중 기인은 본래 계획을 고집하야 불평을 명하는 자 불무하고 나 역 무한히 섭섭하야 마지 아니 하엿다. 그러나 사정에 의하야 천고의 장관을 뒤으로 하며 일숙의 원을 이루지 못하고 하산하게 되엿다. 봉상에서 병관군으로 더부러 시 일절을 을펏스니 여좌하다.

등천왕봉

천왕제일봉, 아상침고절.

특립태현공, 건곤정무궁. 병관

수도천왕봉, 부삼나만상.

오래좌태공, 소우주무궁. 필자

천왕봉을 이별하고 천인절벽의 이십리 험관을 답파하야 벽계사에 이르니 만학풍림에 모기창연한데 광덕사의 야종이 멀니 산허리를 너머서 울니여 온다. 우리는 절에 들어가서 석반을 식히여 먹으며 야작난무순식으로 각각 배주를 나노아 마신 후에 멀니 남으로 전망하매 진주, 삼천포의 야등이 안전에 나열경경하고 여수로 드러가는 해상의 기선은 적은북()가티 굴너가며 점점의 도서와 천백의 범선이 안계에 부몰하는 것은 과연 벽계사가 아니고는 다시 보기 어려운 통쾌무류한 야경이 아니라 할 수 업다. 주인승 곽화상의 친절한 인도로 사서의 소봉에 올나가서 멀니 노인성을 망견하니 이 별은 특히 다른 별에 비하야 훨신 크고 경경낭랑하며 홀은홀현하는 것이 그 특색인듯하며 차부근에서는 지리산 중봉에 오르지 아니하면 차노인성을 망견하지 못한다는 것이 남선일대의 전설이며 또한 노인성을 보면 증수한다는 속설이 잇스나 이것은 일종 밋을 수 업는 말이엿다. 야심토록 차담차소하며 혹음혹와하다가 심경에 취침하다.

십월 일일. 우 벽계사에서 조반을 맛치고 하산하려하매 또한 추우가 유인의 정삼을 불불한다. 우리는 모우하산이 일종 취미잇는 모험이요, 또한 유감없는 금행에 경 일칭장쾌를 증가하는 것이라 하야 그냥 출발하기로 결정하고 벽계사를 떠나 문창대에 오르매 우세 더욱 급하야 엄천의 등만수림으로부터 우수폭주함이 맛치 산우에서 떠러지는 비류급천에 비하야 조곰도 손색이 업슬 듯 하다. 문창대에서 중산곡을 향하야 나려 가는데 이곳의 산세험악함은 작일 순두리에서 광덕사로 올나가던 험로에 비하야 오히려 심한 바 잇스며 더구나 절벽천인에 달니여 일직으로 활하하는 일선초경이 우중의 창태에 덥피여 그 위태하고 밋끄러움은 다시 기류를 보기 어려울 것이다. 절벽의 활로를 무난히 답파하고 심협유곡의 일로삼십리를 돌파하야 비로소 산촌 주점에 다다르니 산행 오육일에 비로소 촌락을 보고 계견성을 듯겟다. 모우입점하야 의복을 환착하고 점심을 맛친후 석양에 다시 일저를 팽하고 수준호주를 구래하야 진일 호담쾌소로서 혹은 천왕봉의 장관을 그리며 혹은 금행의 통쾌를 자랑하야 모든 곤비를 이저버리고 일일의 온휴를 요상하니 심신이 일칭 건듯함을 깨달겟더라.

이일, 청 조반 후 넌즈시 중산주점을 떠나서 덕산으로 도라 오는데 어제 밤 가을비가 쓰슨드시 개여 버리고 새파란 가을하늘 캄캄한 산과 들 산들산들한 경풍은 장유를 맛치고 도라 오는 오인의게 일종 개선군의 쾌미를 주는 감이 잇다. 이 골의 길은 비록 산촌의 험로라 운운하나 그러나 수일 동안 경로에 비하야서 이것은 오히려 탄탄한 평지대로서 이 따위는 일일기백리라도 능당히 거를 듯십고 또한 아모리 천험인관이 당전할찌라도 오인의 건각으로서 답파하지 못할 곳이 업스리라는 자부를 느끼게 한다. 우리 일행은 만장의 호기와 유쾌한 담소를 계속하면서 일로 남으로 향하야 나려 오는데 인가 점점 늘어가고 촌락이 간간상격하야 보일보 인세의 풍경을 느끼며 곡구 점점 버러저 감을 따라서 들도 차차 커지고 산세는 비교적 완화하며 천석은 십분 명랑함을 깨달겟다. 어느 듯 중로의 곡점, 동장, 하장 제산촌을 지낫트리고 영파대의 승경과 신천의 추파를 부감하면서 일로삼십리를 답파하야 공전야에 이르러 휴게하니 이 중산골 삼십리 연도는 실로 지리산 전경중에 빼지 못할 중요한 일부분이다. 이 골작은 비록 장엄웅위는 업다 할지라도 처처의 명사백석과 칼칼한 오류명천은 이곳에 와서야만 비로소 볼 수 잇나니 이 골의 명미유아함은 맛치 덕유산맥의 안의삼동에 비견 할 수 잇는 곳이다. 공전야의 평평한 대야를 발부며 덕천강을 엽페 끼고서 국골, 진금의 수삼촌을 지나서 원촌에 이르러 우리는 일행중 조원상군을 압세우고 경의당을 참관하고 다시 세심정에 등림하니 십리벽파의 덕천강이 영하에 왕양하고 사위의 천인취벽과 안하에 광개한 평관대야는 다시금 덕산의 장엄을 느끼지 아니 할 수 업다. 다시 남명의 시 청간천석종, 비대고목명. 이라는 일구를 퍼보매 과연 이 산하가 아니면 이 시를 쓰지 못할 것이며 또한 남명이 아니고는 이러한 주먹으로써 웅산거하를 처서 울니지 못할 것이다. 그 얼마 장엄웅위한 구기인가, 원촌을 지나 덕산시장에 이르러 우리 일행은 귀장을 각각 정돈하니 어언 석양이 재산하고 원촌으로부터 모연이 일기 시작하더라.

여기서 조원상, 이정수 양군과 짐꾼 오인을 섭섭히 작별하고 이병교, 이병목, 이종규, 이석규, 이현근, 최중환, 최우환, 이현규 제군은 남사리를 향하야 선발하고 박우종, 박낙종, 정태영 우리 일행은 기어히 금야에 진주읍에 득달하기로 하엿스나 그러나 정기 행차시간을 어기여 자동차를 탈 수 업슴므로 부득이 진주행 화물차를 비러 타고 밤 팔시경에 덕산시장을 떠나 나오는데 컴컴한 흑야 침침한 거산으로서 사위 전혀 암흑창울한 가운데 오직 창공 우에 수개의 저녁별만 반짝반짝할 뿐인데 차체는 벌건 큰 눈을 부릅뜨고 대지의 암흑을 돌파하야 입덕문을 지나서 일로 남사리정류장에 도달하매 남사리 제우 일행은 우리의 차두를 둘너 싸고 우리를 기어히 끄러나림으로 할 수 업시 하차하야 다시 제우로 더부러 일석에 좌하매 미리 준비하야둔 한통의 백계탕에 또 신짐이 무륵무륵 오르고 , 정종, 약주를 두르미채로 드려 노코 만반의 성찬과 따신 미음으로써 우리를 관대하며 기어히 금야의 유숙을 만권하므로 우리는 허는 수 업시 남사 제우의 포로 계획에 떠러저 금야에 남사리 영모재에서 유숙하니 남사제우의 도에 넘치는 관대는 도리여 미안하며 또한 금행은 전혀 제우의 힘을 뢰한 바 만옴으로 실로 기우의 은근함을 만이 감사하는 바이다.

[이 게시물은 관리자님에 의해 2020-03-03 21:41:30 지리다방에서 복사 됨]
4 Comments
옥국장 2019.12.24 10:54  
-1935. 9.28일 진주서 대중교통으로 원지 가서, 도보로 도강하고, 단성을 지나, 남사리에서 일행을 만나서 덕산여관에 도착하여 총 20인(등산객15, 짐꾼5) 등반대를 꾸려서 (1박) 하고,
-9.29일 여관에 짐을 두고, 07:00 출발, 원촌~대하~대포리 경유하여, 바깥내원~안내원로 황금능선에 붙는 도중에 멸치장 주먹밥으로 점심을 먹고,  국수봉에 올라 조망을 즐기다가, 국수재~순두류 험로를 내려서서, 광덕사골 초입에서 동자승 안내를 받아, 단풍을 즐기며 광덕사에 가서 (2박) 하고,
- 9.30일 광덕사~천왕봉 올라서 자려고 했으나 조망만 즐기다가 법계사로 하산하여 (3박 하고),
 -10.1일 법계사에서 문창대를 거쳐서 중산리주막에 하산하여 씻고 먹고 (4박) 자고, 
-10.2일 중산리 주점에서 곡점, 원촌, 덕산시장에 복귀하여 짐을 싣고, 화물차로 남사 영모재에서 (5박) 자고 산행 일정을 마무리한 코스군요.!!

요즘이라면 박짐 진다면 덕산서 천왕봉 원점회귀  2박3일 또는 3박4일 정도의 코스로 생각되는군요. 
교통이 불편한 일제강점기시절에 서울서 진주와서,
 10여일을 머물며 수소문하여 원정대를 꾸려서,
 지리산 등반을 5박6일한 대단한 여정이라고 생각됩니다.
일제강점기시대의 산행기 잘 보았습니다.
가객 2019.12.24 11:45  
산행기 발굴도 대단한 업적이지만 원문 그대로를 필사한 실력이 대단하십니다.
 본문에 등장하는 지금은 잊혀진 내원골의 지명들, 임자정고개, 상불대, 춘심동,직방대,등이 이채로우며 언급한 "순이리산막"은 순두류산막의 오기인 듯 하며,
 당시의  광덕사는 법계사 중창주 신덕순씨가 임시로 세웠다가 1938년 법계사로 이전하기 직전인 듯 합니다.
귀한 산행기 잘 보았습니다.
5945 2019.12.25 10:46  
오래된 산행기에 뜻모를 정이 넘치니 마음이 풍만해 집니다.
예나 지금이나 산행기에 드러난 삶의 모습이 조금도 다름이 없음입니다.
잘보고 읽고 느끼고 갑니다.
꼭대 2020.01.05 15:54  
귀한 산행기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새삼 최현배선생을 비롯하여 한글 맞춤법을 몇십년만에 정리한 국어학자들의 공적의 위대함을 느끼게 합니다.
 
지금의 내원골에 청하 권상순 선생이 각자로 새겨 놓은 지명이 대거 등장하여 반갑습니다.
임자정 고개, 상불대를 비정할 수 있다면 옛길과 폐사지 등 아주 흥미로운 사실 들이 밝혀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Tota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