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사람
농평마을 <이강율>님의 꿈
02-03 NOV. 2002
1. 농평마을 이강율씨의 꿈
그날밤 저는 서북쪽에서 불어오는 강풍이 당치에 걸려 허둥대는 사이,
<강율>씨 본채 뒤쪽 언덕배기에 올라 섬진강을 타고 올라온 광양만 미풍에 몸을 맡기고
감나무 밭 아래 서서 머리를 쥐어 뜯으며 온갖 감각을 동원하여
[이날 농평의 밤공기를 어떻게 전달할 수 있을까]
애를 써 봅니다만 결국 실패하고 맙니다.
무안하여 하늘을 쳐다 봅니다만 제가 아는 별자리라곤 북두칠성과 카시오페아 자리 뿐.
이들조차 바람에 실려 쏜살같이 왔다 흩어지기를 반복하는 구름에 가려 꿈뻑거리고만 있으니
애매하게 밤하늘만 쳐다보기도 곧 민망스러워집니다.
저녁 밥공기의 절반도 비우기 전부터 이미 벗어 던진 윈드스톱 자켓을 잊은 채
온 몸을 휘감아 도는 바람의 찬 기운이라도 느끼고 싶었지만
북쪽 찬바람은 통꼭봉 능선에서 얼씬도 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이미 얼큰해진 술기운에 열이 오르기도 하였거니와 감각조차도 무디어 져
사열병 보행속도처럼 불어오는 미풍에 정신을 수습하여
[이날 농평의 밤공기를 어떻게 전달할 수 있을까] 고민하기엔
그 당시 저는 술에 취해있었고 <이강율>씨의 꿈에 이미 취해 있었습니다.
그리 늦지않은 시간이었으나 지리산골 늦가을 저녁 일곱시는 이미 어두워져
농평마을 <이강율>씨 민박집에 도착할 때는 다섯 가구 불빛만 보일 뿐
그믐날 주위는 온통 암흑이었습니다.
다행히 이날 강율씨 댁에는 부산에서 사시는 큰형님과 동네 분들이 단풍놀이삼아 유람와서
마당에 피워올린 장작불에 흑염소를 구우며 화기애애하게 술잔을 돌리고 있어
홀로 찾아 들어간 나그네의 발길을 그리 처량하게 하지는 않았습니다.
미리 전화로 저녁을 부탁 드린 터라 깨끗하고도 뜨끈한 방에 배낭을 풀어놓고
안채로 건너가 대청마루에서 산채 가득한 밥상을 받았지요.
저는 밥상에 앉자마자 <강율>씨를 소주로 유인하여 옆에 앉힌 후
지리산 기슭에서 즐기는 취미이자 특기인 수사에 착수합니다.
<강율>씨가 지리와 더불어 살아온 삶의 모습과 키워온 꿈은 무엇인지.
제가 즐겨 사용하는 술 고문이 동원 되기는 했습니다만
사회적 물의를 일으킬 만한 강압수사 없이
저의 큰 키와 소도둑넘 같은 인상에 취조는 쉽게 진행되고
흥미진진한 수사과정을 엿듣던 부인께서도 취조를 자청하여
소주 한 병을 채 비우기 전, 후하면서도 다부진 <강율>씨 얼굴이 붉게 물들어갈 무렵
저는 사건의 전모를 파헤치는 쾌거를 이룹니다.
지리산 자락에서 살아가는 <강율>씨 부부의 어제와 내일의 꿈에 대하여.
헤아릴 수 없는 선대 대대로 이곳에서 터전을 이루어 태어난 <강율>씨는 현재 45세입니다만
젊은 시절 잠시 부산에서 지내다가
몸이 불편하여 산골마을 일을 감당키 어려운 큰 형님(이 날 놀러 오신 분)과 교대합니다.
큰 형님은 부산으로 도회생활을 위하여 떠나시게 되고 <강율>씨는 부산에서 농평으로 들어옵니다.
(이 대목에 이르러 잠시 큰 형님도 일행들을 두고 스스로 취조를 자청하여
제가 이 댁 가족사를 입체적으로 파악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해 주십니다.)
이후 가파른 농평 산골마을에서 여느 산마을처럼 밭농사와 산나물채취 등으로 지내다가
87년 농평마을 처음으로 지금의 민박집을 직접 지어 산객들과 유람객들을 받아들이게 되었지요.
이곳에서 출발하는 등산로가 막혀있다 보니 최근에는 산객보다는 거의가 유람객들이며
농평마을 다섯가구 중 민박을 치는 세가구가 다 그렇듯이
유람객들에게 음식과 숙박처를 제공하고 있다는군요.
그러나 <강율>씨는 이것이 불만이었습니다.
산객이든 유람객이든 누구든지
농평마을을 지나가며 마음 편히 쉬고싶은 대로 쉬어 갈 수 있는
편안한 휴식처를 꿈꾸고 있었으며
편안한 휴식보다는 음식장사로 돈을 만들려는 현재의 생활이
그의 꿈과는 맞지 않았던 것입니다.
벌써 그 꿈을 실현하려 했습니다만,
이곳도 IMF영향은 비켜가지 않아 몇 년을 미루어 두었고
내년에는 기필코 꿈을 이루겠다며 소주 묻은 입술을 힘주어 다물며
몇 번이나 스스로 결의를 다지고 있었습니다.
늦어도 내년 여름부터 현재의 민박집을 헐어 버리고
자신의 집 주위 언덕을 적절히 이용하여 자연과 조화롭게 독립채와 공동채를 섞어 지어
나그네들이 편안하게 쉬면서 밥도 해 먹을 수 있는 시설을 만들겠다는 것이 그의 일단계 꿈이었습니다.
지금은 양상추 모종 재배와 읍내 조그만 공장에 다니면서 생활하고 있습니다만
그의 일단계 꿈이 이루어지면 모든 일을 다 거두고 이곳에 상주하며
산객들의 편안함을 도모하고 같이 산행도 하며
자신이 생존의 터로서 누볐던 지리산을 산객들과의 정서적 터로서 나누고자 하는 것이
그의 완성된 꿈이었습니다.
다음 소주병이 다 비워질 무렵 그가 잠시 자리를 뜬 사이
저는 슬그머니 밥상을 물리고 안채를 빠져 나옵니다.
그 몰래 그의 꿈을 훔쳐보려 벌써부터 안달하고 있었지요.
그믐날 칠흑 같은 밤이었지만 헤드렌턴을 켜 들고 안채 뒤 언덕에 올라
왕시루봉을 마주하고 자리한 그의 집 둘레로 펼쳐진 경사 완만한 구릉을 바라보며
[이날 농평의 밤공기를 어떻게 전달할 수 있을까]
를 생각해 봅니다만
옹기종기 모여 있을 지리산 자락 그림같은 휴양촌을 떠 올리곤
눈앞에 펼쳐진 그의 꿈에 취하여 더 이상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지요.
사실을 실토하자면,
무엇보다도 결정적인 이유는
이미 <은별>님이 더 이상 제가 따라갈 수 없는
아름다운 눈으로 보고
뜨거운 가슴으로 느끼고
맑은 머리로 묘사한 [농평의 밤공기] 이상으로
삶에 찌든 저의 감각으로는 묘사할 자신이 없는 까닭입니다.
아래와 같이 <은별>님의 산행기를 인용함으로써
여러분께 저의 부족함에 대하여 용서를 빌까 합니다만
<은별>님이 지저분한 글 뒤에 아름다운 글을 훔쳐 붙였다고 욕하지 않을까 걱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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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가운 바람이 휭- 하고 귓가를 스치더니. 이미 보름이 지나버렸는데도, 지리산 능선에 걸린 둥그런 달은 푸른빛이다.
자정을 넘긴 깜깜한 시골길에, 까치발을 서면 손끝에 걸릴 듯한 달과 별 세 개. 양떼를 몰고 가는 어린 목동의 순진한 미소처럼 산너머까지 길게 이어진 저 이름 모를 구름하며. (권운..??? 권적운...??? 고적운...???)
풀섶에서 들리는 바스락소리에 호랑이라고, 호들갑을 떨지만. 등 뒤로 파도처럼 걸린 남도의 산자락이 층층이 겹쳐진 모습에 자꾸만 감탄사가 쏟아진다.
민박집은 도대체 어디 있는지 보이지도 않고.
시멘트길을 따라 오르면, 지리산 능선이 바로 코앞에 있어서. 산행의 절반은 이미 마친 상태고, 저 밭 너머로 보이는 건 바로 하늘이었다.
아... 어떻게 그날 농평의 밤공기를 전달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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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후기
다음날 아침, 예의 깔끔한 반찬에 기름진 쌀밥 가득찬 밥상을 받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죽순나물과 고사리나물이 그렇게 순할 수 없었으며
싱싱한 열무김치 깨물어 먹는 맛을 어떻게 표현하리요.
특히 간밤의 취조가 수월하고도 정겹게 끝난 덕분에
저는 흑염소 곰탕을 특별히 얻어 먹습니다.
덕분에 저는 그날 눈보라가 휘몰아치는 능선을 가뿐히 넘어 반야봉 정상까지 한달음에 내딛은 다음
점심도 걸른 채 달궁으로 떨어지는 괴력을 발휘하게 됩니다.
<강율>씨의 꿈이 이루어지면 다시 찾으리라 약속하였으므로
혹시 내년 이맘때쯤 꿈 같은 농평마을을 보신 분이 계시면 소식 전해 주시기 부탁 드립니다.
1. 농평마을 이강율씨의 꿈
그날밤 저는 서북쪽에서 불어오는 강풍이 당치에 걸려 허둥대는 사이,
<강율>씨 본채 뒤쪽 언덕배기에 올라 섬진강을 타고 올라온 광양만 미풍에 몸을 맡기고
감나무 밭 아래 서서 머리를 쥐어 뜯으며 온갖 감각을 동원하여
[이날 농평의 밤공기를 어떻게 전달할 수 있을까]
애를 써 봅니다만 결국 실패하고 맙니다.
무안하여 하늘을 쳐다 봅니다만 제가 아는 별자리라곤 북두칠성과 카시오페아 자리 뿐.
이들조차 바람에 실려 쏜살같이 왔다 흩어지기를 반복하는 구름에 가려 꿈뻑거리고만 있으니
애매하게 밤하늘만 쳐다보기도 곧 민망스러워집니다.
저녁 밥공기의 절반도 비우기 전부터 이미 벗어 던진 윈드스톱 자켓을 잊은 채
온 몸을 휘감아 도는 바람의 찬 기운이라도 느끼고 싶었지만
북쪽 찬바람은 통꼭봉 능선에서 얼씬도 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이미 얼큰해진 술기운에 열이 오르기도 하였거니와 감각조차도 무디어 져
사열병 보행속도처럼 불어오는 미풍에 정신을 수습하여
[이날 농평의 밤공기를 어떻게 전달할 수 있을까] 고민하기엔
그 당시 저는 술에 취해있었고 <이강율>씨의 꿈에 이미 취해 있었습니다.
그리 늦지않은 시간이었으나 지리산골 늦가을 저녁 일곱시는 이미 어두워져
농평마을 <이강율>씨 민박집에 도착할 때는 다섯 가구 불빛만 보일 뿐
그믐날 주위는 온통 암흑이었습니다.
다행히 이날 강율씨 댁에는 부산에서 사시는 큰형님과 동네 분들이 단풍놀이삼아 유람와서
마당에 피워올린 장작불에 흑염소를 구우며 화기애애하게 술잔을 돌리고 있어
홀로 찾아 들어간 나그네의 발길을 그리 처량하게 하지는 않았습니다.
미리 전화로 저녁을 부탁 드린 터라 깨끗하고도 뜨끈한 방에 배낭을 풀어놓고
안채로 건너가 대청마루에서 산채 가득한 밥상을 받았지요.
저는 밥상에 앉자마자 <강율>씨를 소주로 유인하여 옆에 앉힌 후
지리산 기슭에서 즐기는 취미이자 특기인 수사에 착수합니다.
<강율>씨가 지리와 더불어 살아온 삶의 모습과 키워온 꿈은 무엇인지.
제가 즐겨 사용하는 술 고문이 동원 되기는 했습니다만
사회적 물의를 일으킬 만한 강압수사 없이
저의 큰 키와 소도둑넘 같은 인상에 취조는 쉽게 진행되고
흥미진진한 수사과정을 엿듣던 부인께서도 취조를 자청하여
소주 한 병을 채 비우기 전, 후하면서도 다부진 <강율>씨 얼굴이 붉게 물들어갈 무렵
저는 사건의 전모를 파헤치는 쾌거를 이룹니다.
지리산 자락에서 살아가는 <강율>씨 부부의 어제와 내일의 꿈에 대하여.
헤아릴 수 없는 선대 대대로 이곳에서 터전을 이루어 태어난 <강율>씨는 현재 45세입니다만
젊은 시절 잠시 부산에서 지내다가
몸이 불편하여 산골마을 일을 감당키 어려운 큰 형님(이 날 놀러 오신 분)과 교대합니다.
큰 형님은 부산으로 도회생활을 위하여 떠나시게 되고 <강율>씨는 부산에서 농평으로 들어옵니다.
(이 대목에 이르러 잠시 큰 형님도 일행들을 두고 스스로 취조를 자청하여
제가 이 댁 가족사를 입체적으로 파악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해 주십니다.)
이후 가파른 농평 산골마을에서 여느 산마을처럼 밭농사와 산나물채취 등으로 지내다가
87년 농평마을 처음으로 지금의 민박집을 직접 지어 산객들과 유람객들을 받아들이게 되었지요.
이곳에서 출발하는 등산로가 막혀있다 보니 최근에는 산객보다는 거의가 유람객들이며
농평마을 다섯가구 중 민박을 치는 세가구가 다 그렇듯이
유람객들에게 음식과 숙박처를 제공하고 있다는군요.
그러나 <강율>씨는 이것이 불만이었습니다.
산객이든 유람객이든 누구든지
농평마을을 지나가며 마음 편히 쉬고싶은 대로 쉬어 갈 수 있는
편안한 휴식처를 꿈꾸고 있었으며
편안한 휴식보다는 음식장사로 돈을 만들려는 현재의 생활이
그의 꿈과는 맞지 않았던 것입니다.
벌써 그 꿈을 실현하려 했습니다만,
이곳도 IMF영향은 비켜가지 않아 몇 년을 미루어 두었고
내년에는 기필코 꿈을 이루겠다며 소주 묻은 입술을 힘주어 다물며
몇 번이나 스스로 결의를 다지고 있었습니다.
늦어도 내년 여름부터 현재의 민박집을 헐어 버리고
자신의 집 주위 언덕을 적절히 이용하여 자연과 조화롭게 독립채와 공동채를 섞어 지어
나그네들이 편안하게 쉬면서 밥도 해 먹을 수 있는 시설을 만들겠다는 것이 그의 일단계 꿈이었습니다.
지금은 양상추 모종 재배와 읍내 조그만 공장에 다니면서 생활하고 있습니다만
그의 일단계 꿈이 이루어지면 모든 일을 다 거두고 이곳에 상주하며
산객들의 편안함을 도모하고 같이 산행도 하며
자신이 생존의 터로서 누볐던 지리산을 산객들과의 정서적 터로서 나누고자 하는 것이
그의 완성된 꿈이었습니다.
다음 소주병이 다 비워질 무렵 그가 잠시 자리를 뜬 사이
저는 슬그머니 밥상을 물리고 안채를 빠져 나옵니다.
그 몰래 그의 꿈을 훔쳐보려 벌써부터 안달하고 있었지요.
그믐날 칠흑 같은 밤이었지만 헤드렌턴을 켜 들고 안채 뒤 언덕에 올라
왕시루봉을 마주하고 자리한 그의 집 둘레로 펼쳐진 경사 완만한 구릉을 바라보며
[이날 농평의 밤공기를 어떻게 전달할 수 있을까]
를 생각해 봅니다만
옹기종기 모여 있을 지리산 자락 그림같은 휴양촌을 떠 올리곤
눈앞에 펼쳐진 그의 꿈에 취하여 더 이상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지요.
사실을 실토하자면,
무엇보다도 결정적인 이유는
이미 <은별>님이 더 이상 제가 따라갈 수 없는
아름다운 눈으로 보고
뜨거운 가슴으로 느끼고
맑은 머리로 묘사한 [농평의 밤공기] 이상으로
삶에 찌든 저의 감각으로는 묘사할 자신이 없는 까닭입니다.
아래와 같이 <은별>님의 산행기를 인용함으로써
여러분께 저의 부족함에 대하여 용서를 빌까 합니다만
<은별>님이 지저분한 글 뒤에 아름다운 글을 훔쳐 붙였다고 욕하지 않을까 걱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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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가운 바람이 휭- 하고 귓가를 스치더니. 이미 보름이 지나버렸는데도, 지리산 능선에 걸린 둥그런 달은 푸른빛이다.
자정을 넘긴 깜깜한 시골길에, 까치발을 서면 손끝에 걸릴 듯한 달과 별 세 개. 양떼를 몰고 가는 어린 목동의 순진한 미소처럼 산너머까지 길게 이어진 저 이름 모를 구름하며. (권운..??? 권적운...??? 고적운...???)
풀섶에서 들리는 바스락소리에 호랑이라고, 호들갑을 떨지만. 등 뒤로 파도처럼 걸린 남도의 산자락이 층층이 겹쳐진 모습에 자꾸만 감탄사가 쏟아진다.
민박집은 도대체 어디 있는지 보이지도 않고.
시멘트길을 따라 오르면, 지리산 능선이 바로 코앞에 있어서. 산행의 절반은 이미 마친 상태고, 저 밭 너머로 보이는 건 바로 하늘이었다.
아... 어떻게 그날 농평의 밤공기를 전달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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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후기
다음날 아침, 예의 깔끔한 반찬에 기름진 쌀밥 가득찬 밥상을 받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죽순나물과 고사리나물이 그렇게 순할 수 없었으며
싱싱한 열무김치 깨물어 먹는 맛을 어떻게 표현하리요.
특히 간밤의 취조가 수월하고도 정겹게 끝난 덕분에
저는 흑염소 곰탕을 특별히 얻어 먹습니다.
덕분에 저는 그날 눈보라가 휘몰아치는 능선을 가뿐히 넘어 반야봉 정상까지 한달음에 내딛은 다음
점심도 걸른 채 달궁으로 떨어지는 괴력을 발휘하게 됩니다.
<강율>씨의 꿈이 이루어지면 다시 찾으리라 약속하였으므로
혹시 내년 이맘때쯤 꿈 같은 농평마을을 보신 분이 계시면 소식 전해 주시기 부탁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