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사람

新版 林巨正 (학병거부자의 수기 제 2 부) - 하준수(河準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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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3년 8월 20일!







 


새 살 림


 


우리는 우선 화전막 주인 金書房 한테서 도끼를 한 자루 빌렸다.


그래서 그 길로 나무를 찍어 다듬었다. 그 다음에 그 나무를 우물 井자로 쌓아 올렸다. 거기다가 새(억새.띠풀)벽질을 하니까 바람벽이 되었고, 그 우에다가 나무를 어긋매기로 걸치니까 지붕이 되었다. 이렇게 우리는 구들도 놓고 부엌도 만들었다. 또 지붕에다 짚도 이었다.


이곳이 오늘부터 우리가 살아나갈 집이다. 날만 새면 우리는 일하러 나갔다.


 


이제부터 우리의 먹을 것은 우리의 힘으로 얻지 않으면 않된다. 우리들은 아침부터 밤까지 나무를 찍어냈다. 우리가 도끼를 곤두 들고 힘껏 내려찍을 때 입때껏  맻히었던 온 심령은 산울림처럼 울렸고 전신의 혈관은 여울물처럼 구비쳐서 흘렀다. 용솟는 기운을 우리는 오즉 한 자루의 도끼에다 맡기고 날마다 산언덕을 무찔러 들어갔다. 입때껏 어께우에 지고서 쫓겨 다니는 무거운 짐은 모두 다 거뜬하게 벗어버렸다.


우리가 힘껏 기운을 쓰려면 자나 깨나 지고 다니는 불안 같은 것은 거추장스럽기 때문이다.


 


우리가 단지 쫓기어 다니면서 싸우는 것 보다 같이 쫓기면서도 이렇게 우리의 젊은 기운을 행사할 수 있는 것이 얼마나 즐거운 일인지 몰랐다.


우리가 살기 위하여 자연과 싸우는 것이 자칫하면 왜적과 싸운다는 실감을 일으키게 하기 쉬웁기 때문에.....


 


그러나 그 반면에 장차 우리가 먹을 것이 당면한 문제였다.


애초에 지고 간 쌀은 다 없어지고 김서방 네로 말하더라도 우리의 식량까지는커녕 자기네 식구가 먹을 쌀이 없어서 감자. 무. 꿀밤(도토리) 등속으로 양식을 삼는 판이라 거기다가 우리들꺼정 덧부치기로 얻어먹을 형편이 되지 못했다.


 


그러므로 나는 생각한 끝에 다시 하산하여 집에 있던 엽총을 가지고 왔다. 그 엽총으로 가끔 사냥을 나가서 노루와 산돼지 따위를 잡아다가 우리도 먹고 또 산 아래 마을을 찾아가 쌀과 서로 맛바꾸기도 하였다. 그래서 그걸로 우리의 식량보탬을 삼았던 것이다.


 


그 동안에 화전막주인 김서방네와는 정이 들어서 서로 한집안 식구처럼 지났다.


김서방 나이가 서른하나이었고, 먼저 우리가 저물게 火田막을 찾아갔을 즈음 우리를 접대하든 젊은 아낙네가 그의 아내이요, 나중에 밖에서 떠들썩하고 들어오든 이들이 바로 김서방 當者이요, 마흔 살 먹은 그의 형님과 일흔일곱에 난 늙은 아버님이었다. 그런데 그의 형님은 喪妻하여 홀아비였고 그에겐 단지 열여섯 먹은 어여쁜 딸이 하나 있었다.


 


 


한 食口


 


그 때 우리가 그들을 맞아 저들에게 우리가 찾아온 연유를 말 한 다음, 우리는 쫓기는 몸으로서 장차 이 산속에 얼마가 되든지 살아 나가야겠다고 말하니, 그들은 잠시 그들대로 과연 그러하리라는 듯이 風便에 들은 세상이야기를 저이끼리 주고받다가, 그렇거든 내일부터라도 가까운 근처에다 산막을 하나 지으란다. 그들은 그저 식구들이 늘은 셈만  치는상 싶었다.


 


우리는 처음에 그들의 이러한 수작을 의아하게 여겼으나 그들과 얼마를 같이 지나는 가운데 우리들은 쉬웁게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있었다. 이곳서는 먹기 위하여서는 제 각기 스스로가 일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늙은 그들의 아버지가 그러하였고, 나이어린 새악시 역시 그러하였다.


 


누구나 물론하고 이곳서는 남의 덕으로 놀고먹는다는 풍습이 있을 수 없었다.


그것은 그들의 너무나 핍박(逼迫)한 그들의 생활조건이 그들을 그렇게 시킨 것이다.


따라서 우리들도 제각기 분수대로 일을 한다면 떳떳이 그들의 식구 가운데 끼일 수가 있었다.


 


이렇게 그들과 한식구가 된 우리는 그의 幕 가까이 작은 山幕을 짓고 그들의 일을 기운껏 도왔다. 나무를 깎은 다음 그 곳에 남은 뿌리도 캐었다.


우리들은(이제부턴 우리들이라 부를 땐 우리와 또 김서방네 식구까지 함께 들어간다) 거기다가 장차 감자를 심을 작정이었다.


 


어언간 눈도 녹고 이 산골에 봄이 찾아 들었다. 산골에는 봄이 좀 더딘 것 같았으나 그 대신에 그 것은 어느 곳보다도 한층 갑작스러웠고 또 창촐간이었다.


이 곳에서는 눈이 녹는 것과 마른가지에 새싹이 돋는 것과 동시이었다.


 


盧동무와 나와는 잠은 우리 幕에서 자고 朝夕밥은 김서방네와 함께 먹기 때문에 그러한 저녁이면 우리들은 기름불을 달려놓고 밤이 늦도록 즐겁게 떠들었다.


金서방 보고는 김서방 이라 부르기 사나우니까 산골에서는 누가 탈낼 일 이 없으니까 '金참봉'이라 불러 이름호사나 하시라는 둥, 형님께서는 김主事, 또 노인장에게는 進士를 올렸다. 이렇게 박장대소를 하는 중에 김 서방 아닌 김참봉님 안전에서 불쑥 하시는 말이 “그러면 인젠 우리도 양반이 되었으니 우리 생질녀 順伊와 정도령과는 혼인할 수 있으그려” 하고 나와 순이를 번갈아 보았다.


 


순이는 천연덕스럽게 “나하고 정도령하고 내외가 되면 그러면 나는 아주머니의 오라범댁이 되겠지요. 이제부턴 날보고 언니라고 부르소.”하고 되받아 넘겨서 한바탕 또 웃었다.


그때 얼굴을 붉힌 건 오히려 나 혼자이었다.


 


날보고 정도령이라 부른 것은 내가 만일을 염려해서 남에겐 김참봉댁의 오빠라 일컫고, 그의 성 鄭가를 따서 <정무일>이라 행세하였기 때문이다.


이곳과 아랫마을과는 거의 연락이 없는 상태이었지만 이곳 산속에는 띄엄띄엄 산속에 몇 개의 산막이 있어서 하여튼 소문이 날까 부지럽게 여기기 때문이었다.


 


 


下 山


 


그런 일이 있은 다음부터는 우리는 김서방을 김참봉이라고 불렀고 따라서 그의 형님을 김주사, 그들의 아버님을 김진사로 불렀다. 그러나 그 대신에 걸핏하면 순이와 내가 그들의 놀림감이 되지 않으면 않되었다.


그렇다하여 순이와 나 사이는 그들의 조롱을 받아야할 어떠한 터무니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다만 봄 들어서부터 순이의 눈매가 촉촉하게 끈기 있어지고 그의 음성이 버들피리모양으로 애처로워 진 것만은 사실이었다.


입때껏 어린아이로만 보아왔던 조카딸이 이처럼 자라나는 것이 대견스러워서 불쑥 나온다는 게 그들의 이러한 희롱이 아닐까.


생각하면 좀 무작스럽지만 그 속에는 한없이 순박하고 선량한 인간성이 넘쳐흘렀다.


지나치게 솔직한 농담이랄까......


 


우리들은 그동안 잘라놓은 나무와 뿌리들이 마를 때 쯤 하여 거기다 불을 놓았다.


그 불이 몇일을 타서 재가 된 다음 흙을 일구어서 그곳에 감자를 심었다.


 


그즈음 우리들의 식량은 춘궁기라 한참 궁했다. 거기다가 어떻게 소문을 들었는지 징용기피자 두 명이  입산하여 식구가 더 늘었기 때문에 우리들의 곤경은 더욱 하였으랴.


 


그리하여 궁리 끝에 우리는 모두 하산하여 모두 자기 집에 들 가서 쌀을 질수 있는 껏 지고오기로 하였다.  盧동무하고 나하고 나중에 들어온 두 동무하고 넷이서 하산하여 밤을 타서 동네로 들어갔었다.


그런데 盧동무는 나와 함께 우리 집으로 갈 것이지만 , 나중에온 두 동무의 집은 방향이 달랐기 때문에 내일 새벽 네 시를 기하여 동리 어구에서 만나기로 하였다.


 


그 이튿날 어젯밤 약조한 새벽 네 시에 대어 盧동무와 내가 동리 어구에 갔더니 때 마츰 수동면 순사들 둘과 방위단장 하나가 어제 같이 내려온 우리 동류 두 명을 검속하려 하였다.


그렇지 않아도 우리가 지금 징용기피자들 사냥을 나온 참인데 너희 놈들 아주 잘 걸려들었다는 것이다. 그놈들은 덮어놓고 따귀를 때리며 또한 발길로 마구 차 대었다.


 


그러다가 우리가 나타나니 꺼냈던 포승줄로 그들을 채 얽지도 못하고 그 중의 왜놈 수석순사 한 놈이 왜 말로, 너희 놈들은 모두 잘 걸렸다. 징용 걸린 놈들이 모두들 은신골로 모여든다 하더니 그게 헛소문이 아니로구나. 하고 대짜고짜로 몽둥이를 곧추들고 에잇 하며 나에게로 냅다 대들었다.


 


필시 그 표독한 왜놈은 저의 나라 칼 쓰는 법을 내한테 한번 써서 심심풀이와 화풀이를 한꺼번에 채워보자는 것이다.  우리 겉은 것은 한 두놈이 골이 쪼개져서 죽더라도 그놈들에게는 얼마든지 구실이 설수 있었기 때문이다.


 


찰나에 나의 입에서도 같은 기합이 한마디 응하듯이 나오자 그놈은 어느 결엔지 들었든 몽둥이를 내어던지고 에크! 하며 벌컥 뒤로 곤두러졌다.   


몽둥이를 가진 것은 그놈들뿐이 아니었고 우리들 역시 밤길을 걷는지라 산에서 내려올 때 참나무도 탄탄한 놈으로 하나씩 다듬어 가지고들 내려왔었다.


 


또 왜놈들 칼 쓰는 법으로 말하더라도 그렇다.


칼은 저만 쓸 줄 아는 게 아닐라 나도 중학 三年時에 벌써 유단자의 자격을 가졌었고, 중학시절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空手를 하는 한편으로 유도 검도 태권등속을 모조리 수련해 오든 터이라 그놈이 몽둥이로 대하기에 나도 한번 몽둥이로 응한데 지나지 않았다.


더군다나 그때의 순사부장 놈은 어디서 술을 쳐 먹었는지 제 몸을 제가 가누지 못할 지경이어서 그런 놈은 여나무살 먹은 아이라 하여도 몽둥이 하나만 맽기면은 능히 처치하였을 것이다.


 


이렇게 우리는 그놈들을 몽둥이로 한번씩 두들겨서 걷지만 못하게 할 정도로 만들어놓고 쌀을 지고 산으로 올라왔다.


이것이 이생에서 남에게 손찌검을 하여본 시초였다.


 


 


돼 지 막


 


이러한 일이 있은 다음 필시 그 놈들이 그냥 있을 리 없을 것이므로 우리는 그 놈들이 분풀이를 하러 이곳까지 올라올 것을 예상을 하고 제반 준비를 갖추고 있었다.


준비란 별다른 게 아니었고 우리들로서는 그 놈들한테 대항할 의사는 조금도 없었고 만약에 그 놈들이 우리를 잡으러 오면은 우리는 허는 수 없이 다른 데로 피해 가자는 것이었다.


 


우리는 될 수 있는 대로 그 놈들을 해코자 하지 않았다.


먼젓번 일만 하여도 우리는 예사 때 같았으면 우리는 그냥 피하여 도망하였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 때는 우리가 등에 쌀을 지고 있어서 도망가지 못하고 어쩔 수없이 그러한 일을 저질렀다.


 


우리가 이렇게 마음의 차비를 차리고 그놈들을 기다렸었는데 열흘이 지나도 오지를 않았고 한달이 지나도 별일이 없었다.


한편으로 미루어 생각하건대 그놈들이 아무리 분이 머리끝까지 치올랐다 하더라도 한번 이곳까지 쳐들어 올랴면 순사 몇 명으로 될 수 있는 일도 아닐 것이어서 오히려 우리의 생각이 너무 조급하였는지도 알 수 없었다.


 


그러는 중에 봄도 가고 여름이 되었다.


우리가 심은 어느 듯 무성하여 검은 잎사귀를 비스듬한 산언덕에서 바람이 일 때마다 움직였고, 여름 햇볕이 짙어갈 수록 감자잎사귀는 더욱 검게 거렀다.


 


흙 속에서는 한창 지금 감자 알맹이가 자랄 때이다. 이와 같이 비와 바람과 햇볕이 감자를 길렀고 또 흙은 안 가슴에 품어서 감자를 키웠다.


우리는 또 참외와 수박도 심었다. 우리는 김도 매고 낮잠도 잤다.


한잠씩 늘어지게 자고나서는 마음 내키는 대로 참외도 따 먹고 수박도 먹었다.


틈나는 대로 순이 한데는 諺文도 아르켜주었다.


 


감자알이 커질 때 쯤 되면 산돼지란 놈들이 밤마다 나와서 감자밭을 뒤집어놓고 가는 바람에 우리는 돼지막을 짓고 번갈아 일어나서 밤을 새었다.


달없는 그믐밤에 흐미한 별빛 밑에서 우리는 화톳불을 놓고 밤새도록 떠들었고, 그러한 때 순이가 섞이면은 우리들의 이야기가 한층 번거로워졌다.


 


그 중에서 능청맞고 익살 잘 떠는 朴동무가,


“순이는 어떤 신랑한테로 시집 갈 테냐?”


“시집은 벌써 무슨 시집이야 망측스럽게”


“벌써가 무슨 벌써야. 너의 아주머니는 열일곱인데 작년에 벌써 시집을 왔으니까 너도 올해는 시집갈 나이야. 그런대 순이야 나 같은 총각은 네 마음에 어떠하냐? ”


“어이구 저런 늙은 총각이 어디 있담! 능글 맞게스리”


“올해 서른 살이 늙었어, 너이 아저씨는 몇 살인데 그러니. 올가을에 너와 나가 혼인하면 작년에 내 나이가 너의 아저씨 나이가 되고, 또 네 나이는 꼭 너의 아주머니 나이가 되거등,이것이 천생연분이 아니고 무엇이냐 말이다.”


“듣기 싫어요! 나는 朴서방같은 능글맞은 사람한테는 시집 안갈 테니깐.”


“옳치! 그럼 鄭도령같은 신랑이 꼭 마음에 든단 말이지.”


 


“鄭도령!” 하고 順伊는 한참동안 내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보다가 “鄭도령 같은 女相도 나는 싫다 마” 한마디 이렇게 뚝 잘라 말하곤 순이는 벌떡 일어나서 산막으로 나려가 버렸다.


 


한참 있더니 훠어 이! 하고 돼지 쫒는 시늉을 내고 연이어 자지러지게 웃어대는 순이의 웃음소리가 깊은 적막을 흔들면서 한참동안 들려왔다.


 


 


智異山으로


 


가을철에 들어서자 또 징용 기피자 셋이 입산을 하였는데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요즈음 은신골에 징용기피자들이 모여들어서 현재 수십 명이 피한다는 둥 동네에서는 소문이 자자하다고 한다.


그리고 版口란 수동면의 수석 놈이 일전의 화풀이 겸 함양읍 경찰서에 응원을 청하여 순사 십여 명과 경방단원 수십 명을 동원하여 미구에 은신골 토벌을 간다고 한참 헛자를 부린다는 것이다.


 


이런 일이 있은 지 보름이 지난 어떤 날 점심 먹을 즈음하여, 그 전날 읍으로 장보러 갔던 김참봉이 숨이 턱에 닿도록 달려와선 정도령 어서 빨리 피하시라 하였고,


또 뒤미처 함양읍으로부터 순검과 경방단원 오륙 십 명이 풀려서 이곳 은신골로 향하여 오는 중인데 순검들은 총까지 매었다는 것이었다.

 

 

미구에 이런 일이 있을 것을 짐작한 우리는 미리부터 꾸려놓은 바랑들을 제가끔 씩 지고 부랴부랴 은신골을 떠났다.


순이는 주먹밥과 감자를 삶아가지고 어디까지든지 따라왔다.

우리가 그만 돌아가라 해도 그는 들은 척 마는척하고 한 십리가량은 따라 왔었다.

우리는 오늘 같은 순이를 보지 못했다.

얼굴은 벌겋게 상혈한 채 맨발바닥으로 어디까지고 따라오는 순이의 모양은 차마 우리들이 애통해서 볼 수 없었다.


얼마를 가다가 할 수없이 우리가 감자 보탱이를 뺏다시피 해서 돌려보내려니까 그는 그냥 그 자리에 주저앉아 울어버렸다. 단 반년동안에 무슨 정이 이다지도 깊이 들어버렸을까.

우리는 이를 수 없는 뉘우침에 사로잡혔다. 우리는 앉아 우는 순이를 그냥 떨쳐놓고 우리가 갈려는 지리산을 향해 딥다 걸었다.


그 지음 지리산에는 징용과 징병을 거부한 동류들이 군데군데 수삼 백 명이나 모이어서 집단생활을 하여가며 간악한 총독정치와 싸우고 있었다.

그들은 모두가 이십대의 혈기왕성한 청년들이어서 징용을 피하여 입산한 동류들로 살림에 얽매이지 않은 젊은 총각들이었다. 그래서 그들이 당면한 가장 큰 곤란은 식량문제해결에 있었는데 한 창 먹을 때인 그네들이라 당장 죽으라는 법을 내지 않았어도 하루에 세끼 먹고는 견디기 어려웠다.


그동안 우리들은 은신골을 나와서 지리산으로 왔었는데 처음에는 벽송사에서 길가는 사람이라 일컫고 사흘 동안 묵었고, 또 그다음 어느 산막에 가서 하루를 묵는 동안에 이곳 同類들과도 연락을 취하였다.


우리는 당분간 그들 한데 얹혀 있다가 은신골서 배운 솜씨로 사흘 안에 산막 하나를 지어 들었다.

그러는 동안에 겨울은 박도하여서 우리들의 양식은 극도로 결걸(缺乞)하여졌다.

그즈음 우리 쪽에 붙은 인원수가 나까지 쳐서 모두가 열일곱 명 이었는데 우리는 거의 기아상태에 빠져있었다. 우리들은 이 곤경을 이겨 나갈려 고 여러 가지 술책을 다 하였다.


우리는 엽총 석 자루를 구입하여 전원이 출동하여 노루와 산돼지 등속을 잡는 한편, 한달에 일인당 쌀 석 되에다, 무우 ,감자 ,칙뿌리 ,꿀밤, 깐치발 (일명 황정인데 그냥은 먹을 수 없고 아홉 번 찌고 말린 다음에야 먹게 된다),등속을 섞어서 대용식을 삼았다.


우리가 이렇게 기아와 싸우고 있을 제 소위 기피자들을 잡을려고 지리산 발치 각 고을에서는 무장경관대 이백여명을 소집하여서 지리산을 포위습격 하여왔다.

그러나 그해 겨울에는 눈이 유난하게 많이 쌓여서 그 놈들은 길이 차는 눈에 阻害(멀고 험해서)되어 中腹까지도 올라오지도 못하고, 우리들 대신으로 그 놈들은 산발치의 인가들을 습격하여 닭. 꿀 등을 소위 公正價로 약탈하여 갔었다.


普 光 黨

그 사건이 있은 후 우리들은 또 지리산을 뒤로하였다.

그리하여 전라북도 장안산으로 가서 전라도 동류들을 만나 한달을 지낸 다음, 다시 경상남도 백운산으로 옮겨가서 그해 겨울을 그곳에서 났다. 작년겨울에 집을 나온 다음 만 한 해 동안을 객지에서 지냈는데, 그동안 우리들의 얼굴에는 비바람도 잦았었고 눈보라도 세찼다.

그럴수록 우리들의 품은 뜻은 더욱 굳어지고 우리들의 심보는 더욱 크게 자라났다.


그리하여 쫒기면 굶주린 이리떼 모양으로 단지 피하여만 다니는 게 이때껏 우리들이 취한 행동의 그 전부였는데 이렇게 한해를 쫓기어만 다니는 가운데 애초에 우리들이 품었던 뜻은

어느 듯 우리들도 의식치 못하는 틈에서 어떠한 생장을 하였던 것이다.

이것은 혼돈에서 유형으로 무의식에서 의식으로 생장하는 만유생성의 그 근본 원리에서 벗어나지 않는 일개 현상의 끝일는지 모르나 여하튼 희안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백운산에서 겨울을 난 우리들은 1945년 3월에 괘관산으로 들어가서 그곳에다 큰집을 짓고 화전을 시작하는 한편, 동지 73명으로 보광당을 조직하고 일본이 전쟁을 계속 못하도록 될 수 있는 대로 방해 놀 것과 당원을 훈련하여 연합군 南鮮上陸시(연합군이 南鮮에 상륙할 것을 전제)에 응할 수 있도록 제반태세를 갖추자는 것이 우리들의 행동목표이었다.


그리하여 우리들은 화전을 이루어서 우리의 식량문제를 해결코자 일을 하는 시간외는 나머지 시간을 전부 군사 훈련에 충당시켰었다.

우리는 무기를 매입하였었고 일방으로는 염초,黃, 재렵 등속으로 화약조제도 하였다.

무기매입이라 하여도 엽총 따위였고, 우리들은 간혹 아랫동네로 몸날샌 당원들로 작패하여가지고 내려가선 주재소를 공격하였다. 그놈들이 가진 총을 뺏자는 것이다.


그럴 때 면 몸날샌 두세 명의 당원이 몽둥이를 하나씩 가지고 하산하여 밤을 타서 마을로 들어간다.

그리하여 그 중에서 한 당원만 주재소 안으로 들어가고 나머지는 만일을 경계하고 밖에서 기다린다.

그러면 5분 이내에 들어갔던 동무는 무사히 총을 뺏어 가지고 나올수 있었다. 

그래서 얻은 총이 대 여섯 자루는 되었는데 7월달에 들어서 산청군 경찰관대 10여명이 괘관산으로 우리들을 공격하러 왔다가 우리들의 우세함과 산길이 험해서 저희들 숫자로는 도저히 우리들을 감당할 수 없음을 깨닫고 산속에는 발 한 자국 들여놓지 못한 채 산 아래서 애꿎은 李처사만 묶어가지고 그대로 돌아갔다.

李처사는 왜 묶어 간고 하니 李처사라는 이가 나이 쉰이 되었으되 조금 지능이 적게 발달하여서 주책없이 그놈들이 묻는 말에 먼저 나서서 아는 말 모르는 말 함께 섞어 떠들었기 때문이라 한다.

 

이것은 빈손으로 돌아가기 멋쩍은 그놈들이 언제든지 저지르는 상식적인 수작이기도 하였고

거기에 지각없이 걸려든 것은 이처사의 횡액이라 하겠지만 그 반면에

이처사가 우리들의 내막을 아는 것 이 무슨 자랑이나 되듯이 실제로 알지도 못하는 것을 철없이 떠들어댄 그의 헐은 수작으로 미루어서 우리들의 소문이 민간들 축에 퍼진 정도와 또 끼친 정도를 어느 정도 짐작을 할 수가 있었다.


그리하여 경찰에서는 우리들한테 그리 호락히 손을 대지 못하고 미구엔 대규모의 토벌을 계획하고 있다는 풍설이 떠돌았는데 때마침 우리당원 세 명이 쌀을 구하러 하산하였다가 어느산골 주막집에서 그놈들한테 함께 모두 붙잡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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