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사람

[정동초대석]박남준 시인(펌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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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 01/01 뉴스메이커 756호


“버리지 못한다면 나누면서 살아라. 그러면 행복해진다”



지금 살고 있는 악양산방은 모악산방에 비하면 천국이다. 따뜻한 물도 나오고 부엌도 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햇살이 좋아서 습기가 없다는 점이 좋다. 모악산방을 떠난 가장 큰 이유는 습기가 많아 몸이 안 좋아졌기 때문이다.
한 사내가 있다. 1984년 ‘시인’지에 ‘할매는 꽃신 신고 사랑노래 부르다가’라는 시로 등단했고, 먹고살기 위해 회사를 다녔다. 그러다 운명처럼 전주 모악산에 있는 무당집에 들어가 살게 됐다. 그곳에서 1년간 살면서 ‘돈을 쓰지 않으면 돈을 벌지 않아도 되는구나’라는 생각이 들었고 회사에 사표를 냈다. 무지막지한 단순함 때문이었을까. 그 사내는 그곳에서 사람 대신 풀, 나무, 꽃, 새와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그곳의 생활은 시가 됐고, 사람들은 그의 시를 통해 위안과 감동을 받았다. 그 사내는 ‘은둔의 시인’ ‘자연의 시인’ 박남준이다. 소설가 한창훈은 박남준을 두고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다.

“사람들이 흔히 칭하기를 풀잎 같고 이슬 같고 바람 같고 수선화 같고 처마 끝 빗물 같고 나비 같고 어린 왕자 같고 눈물방울 같은 사람이라고들 합니다. …… 그러니까 오십 넘도록 홀로 스님처럼 지내며 시와 음악과 새소리, 매화를 동거인으로 두고 살고 있습니다. 삶은 정갈하고 성품은 깨끗하고 몸은 아담하고 버릇은 단순하고 행동거지는 품위 있고 눈매는 깊고 손속은 성실한 데다가 시서에 능하고 음주는 탁월하고 가무는 빛나는 가인(佳人)입죠.”(‘박남준 시인 말입니까’ 중)

2003년 9월, 그는 12년 동안 살아온 모악산방을 등지고 경남 하동의 악양면 동매리로 둥지를 옮겼다. 동매리는 하루에 버스가 두 번(원래는 세 번이었는데, 이용객이 적어서 줄었다)만 다니는 외진 곳이다. 그 마을에는 초등학교에 다니는 학생이 단 3명일 정도로, 젊은이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모악산방을 떠났지만, 다시 지리산의 깊은 산골로 들어간 셈이다.

그가 살고 있는 ‘악양산방’은 한겨울 오후에도 해가 지지 않아 따뜻함이 느껴진다. 바람에 흔들리는 풍경 소리와 집 뒤편에 있는 아담한 연못(산에서 내려오는 물을 받아서 직접 만들었다) 그리고 처마에 걸려 있는 곶감이 여느 시골집의 한적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가난을 보여주는 것처럼 헤진 바지를 입고 기자를 맞이하지만, 그의 얼굴은 여전히 순수한 어린 아이처럼 맑기만 했다.

그가 자연 속으로 들어간 것은 운명이었다. 1980년 광주를 겪은 여느 지식인처럼 운동을 했고, 시를 통해 치열한 삶을 이야기했다. 1984년 등단한 후 모악산을 다니기 시작했다. 별로 높지 않은 산이었기에 올라갈 때마다 새로운 길을 찾아나섰다. 초가을 어느 날 해가 졌는데, 산 속에서 길을 잃어버리고 만 것. 그러다 불빛이 보여 찾아간 곳이 무당집이었다. 물 한 잔 얻어 마시고, 길을 물어 내려온 후에는 잊혀졌다. 하지만 6년 후 운명처럼 그 집을 다시 찾게 됐다. 그림을 그리던 선배가 그 집을 샀고, 무당집에 딸려 있던 행랑채에 들어간 것이다. 1991년 박남준은 그렇게 모악산 깊은 곳으로 삶의 터를 옮겼다.

“그곳에 간 것은 운명이었다. 만일 모악산방을 만나지 않았다면 내 시는 세상살이에 대한 이야기로 채워졌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곳에서 자연을 만났고, 자연을 이야기하게 됐다.”

전업작가로 살아가겠다고 들어갔지만, 그에게 글을 청탁하는 곳은 거의 없었다. 자연스럽게 경제적인 궁핍이 생기기 시작했다. 먹을 것이 없어서 단식을 해보기도 했다. 그를 가장 괴롭힌 것은 외로움과 고독이었다.

하지만 언제부턴가 그는 나무와 새, 그리고 꽃 들에 말을 걸기 시작했다. 그를 둘러싸고 있는 자연은 마치 사람들처럼 화답해주기 시작했다. 연못을 파서 버들치를 기르기 시작했고, 텃밭을 일궈 채소를 심기 시작했다. 거기에서 음악을 듣고, 그림을 그리고, 시를 쓰고, 밭을 갈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박남준의 시는 새롭게 태어나기 시작했다. 시집 ‘그 숲에 새를 묻지 못한 사람이 있다’(창비, 1995)를 펴냈고, 유명세를 타기 시작했다. 그의 시를 읽고 전국에 팬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특히 그의 작품을 보고 찾아오는 여성 독자들 때문에 생긴 많은 해프닝은 문인들 사이에서 여전히 이야기되고 있다.


시인 박남준은 물질적으로 가진 것이 별로 없다. 하지만 사람들을 위해 마련해놓은 차와 곶감만으로도 따뜻함이 느껴진다. 무엇보다 그의 해맑은 웃음이 사람들을 행복하게 만든다.
“아직 결혼하지 않아서 그런지, 독자가 찾아와 힘든 경우도 많았다. 새벽에 부스럭거리는 소리에 잠을 깨서 보면 방문 앞에 여성이 앉아 있어서 놀란 적도 있다. 팬이라고 찾아왔는데, 애정 표현을 너무 하기에 내쫓아버린 독자도 있었다. 집에 찾아와 돌아가지 않는 여성 때문에 내가 다른 집에 가서 생활하기도 했다. 내 작품을 읽고 좋아하는 독자는 어딘가 세상과 어긋나 있는 사람인 경우가 많은 것 같다(웃음).”

노래도 잘 하고, 시화에도 능한 매력적인 남자 시인이기에 팬의 80%는 여성이라고 전해질 정도다. 하지만 박 시인이 사랑받는 가장 큰 이유는 가난하지만 여유롭게 사는 모습 덕분이다. 그의 글을 원하는 곳은 많지만, 그는 외고를 거의 쓰지 않는다. 한 달에 단 두 개의 외고만 쓴다. 그렇게 써서 받는 돈은 30만 원 정도다.

“따져보니까 내가 한 달에 15만 원 정도만 있으면 살아갈 수 있었다. 그리고 여러 사회단체에 도움을 주고, 후배들에게 술 한잔이라도 사주려면 한 달에 30만 원 정도만 벌면 되겠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생각한 후에는 외부 원고를 거의 쓰지 않고 있다.”

30만 원 중 생활비 15만 원을 제한 후에는 사회단체에 기부하고 있다. 상금을 받으면 이라크 난민 아이들 돕기 등에 사용하라고 전액 기부하기도 한다. 그의 통장에는 ‘관값’이라고 불리는 200만 원이 전부다. 혹여 통장에 200만 원 이상 들어 있으면 나머지 돈은 찾아서 또 기부한다. 그의 생활을 아는 팬들은 돈을 보내오기도 하고, 한 독자는 예금통장을 내놓기도 했다. 그 돈은 또 모두 사회단체에 기부했다. 그만큼 그는 아무것도 가지고 있지 않다. 그가 내는 건강보험료는 1만 원 정도다.

“언젠가 피붙이도 없는 할머니가 돌아가신 것을 보았다. 할머니 집 처마에 100만 원이 든 통장과 막도장이 걸려 있었다. 사람들은 그 돈으로 할머니 장례를 치러드렸다. 그 모습을 보고 내가 죽을 때 사람들이 고생하지 않도록 관값을 마련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요즘 친구들이 관값으로 100만 원만 더 올리라고 하는데 고민이다(웃음).”

박남준은 그렇다고 자연 속에만 머물러 있지 않는다. 도법 스님이 이끄는 생명평화탁발순례에 1년간 참여하기도 했고, 새만금 간척에 반대하는 삼보일배에 동참하기도 했다. FTA 반대운동에 참여하기도 하면서 사회운동에 관심의 끈을 놓지 않는다. 자연스럽게 이번 대선 결과에 대해서도 생각을 많이 한다. 개발 위주의 사회로 변해가지는 않을까 하는 우려가 많다.

그는 ‘나눔’의 정신을 강조한다. 지리산과 제주도, 경상도를 돌아다니면서 참여했던 생명평화탁발순례를 통해 나눔의 소중함을 알게 된 것이다. 주는 사람과 받는 사람 모두 행복하다는 것을 탁발을 하면서 느낀 것이다. 그는 사람들에게 자신처럼 버리면서 살아가라고 이야기하지 않는다. 다만 버리지 못한다면 나누면서 사는 것이 세상을 달라지게 할 것이라고 강조한다.
“동치미를 만들거나, 곶감을 만들 때, 그리고 채소의 씨를 뿌릴 때마다 내 주위 사람을 생각한다. 나 혼자 먹고살려면 이렇게 살지 못한다. 나를 아껴주고 사랑해주는 사람들과 함께 나눠서 먹는다고 생각하면 고된 일도 참아낼 수 있다. 물질이 행복의 전부는 아니다.”

그는 서울로 돌아갈 채비를 하는 기자에게 직접 만든 곶감을 집어 주었다. 그의 집에 찾아온 사람들을 위해서 감을 따서 햇볕에 말린 것이다. 집 뒤뜰에 묻어놓은 장독에는 시원한 동치미가 익어가고 있다. 그는 지인들에게 비싼 식사는 대접하지 못한다. 그 대신 정성과 사랑이 가득한 음식과 차를 내놓는다. 사람들은 그의 따뜻한 마음 씀씀이에 감동받고 행복해한다. 그게 박남준의 삶이다.FILE:1}

“평화롭게 산다는 것은 나를 온전히 비워 내는 것이네/ 생명평화세상으로 가는 길/ 나를 끊임없이 나누어 주는 것이네/ 아낌없는 것이네 고집하지 않는 것이네/ 내가 바로 서는 길이며/ 내가 바로 사는 일이네/ 그 길 즐겁고 행복한 일 결코 아니라네/ 더불어 함께 사는 일이란 고통스러운 일이네/ 내 이웃의 슬픔을, 그 흐르는 눈물을/ 이 땅과 나아가 세상의 절망을 나누어지겠다는 일이네”(‘생명평화세상을 위하여’ 중)

<글·최영진 기자 cyj@kyunghyang.com>
<사진·김세구 기자 k39@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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