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사람

영원한 처사, 남명 조식

엉겅퀴 | 6095
지리99의 산꾼들에게 ‘산은 지리산’이라는 말은 두말하면 잔소리이듯이, 나에겐 지리산 하면 생각나는 인물이 있습니다. 바로 남명(南冥) 조식(曺植)선생입니다.
“하늘이 울어도 오히려 울지 않는(天鳴猶不鳴)” 지리산 천왕봉 같은 분. 가슴 속에 큰 산 하나 들어앉아 어떤 비바람에도 흔들리지 않았던 선비.
부귀도 그를 혼란스럽게 할 수 없고, 빈천도 그의 마음을 움직이게 할 수 없으며, 권력이나 위세도 그를 굴하게 할 수 없었던 진정한 대장부.(富貴不能淫 貧賤不能移 威武不能屈 此之謂大丈夫 - 孟子)

知天命의 나이에도 미혹됨이 많아 늘상 세파에 흔들리는 나는 언제쯤이면 선생의 꽁무니라도 쫓아갈 수 있을는지….

그건 그렇고 지리99에는 의외로 남명선생에 대한 자료가 드문 것 같습니다. 아마 너무 잘 알아서 그런 듯…. 다행히 나에게 십여년 전 회사산악회를 위해 짜깁기 해 놓은 자료가 있기에, 조금 손을 보아 (아는 내용에 재미도 없겠지만) 가입 신고식 겸해서 고수들께 조심스레 올립니다.

영원한 處士, 南冥 曺植

1. 생애

1501년(연산군 7년) 합천 삼가면 兎洞의 외가에서 아버지 조언형과 어머니 인천 이씨 사이에서 차남으로 태어났다.
본가는 삼가면 판교, 본관은 창녕, 자는 楗仲, 호는 南冥.
외가는 명당으로 닭의 해에 태어나는 아이는 커서 현인이 된다는 예언이 있었는데, 그의 외조부는 자기네 운이 조씨 문중으로 돌아갔다고 아쉬워했다 한다. 이해에 안동(예안)에서는 퇴계가 태어났다.

1504년 아버지가 문과에 급제하였고 이후 벼슬살이하는 아버지를 따라 주로 서울에서 살았다. 조언형은 이조전랑 홍문관 사간원 사헌부 등의 청요직을 두루 거쳤으나 23년 동안 벼슬이 승문원 판교(정3품)에 그쳤으니 세상에 영합하지 못했음을 알 수 있겠다. 남명의 의기가 아버지를 닮았음은 이미 그 당시에 이야기가 있었다.

남명도 몇 차례 과거에 응시하여 초시에는 합격하였으나 會試에서는 합격하지 못하였다. 과거공부에 전념한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 결과적으로 과거에 합격하여 벼슬길에 나섰다면 남명은 없었을 것이다. 스물다섯에 『성리대전』을 읽다가 크게 깨달아 대장부의 공부는 모름지기 聖賢이 되는 데 있다고 보고 이에 매진한다.

1526년 부친이 사망하자 고향에서 3년간 시묘살이를 하였고, 2년 정도 가까운 자굴산(의령)에 들어가 공부를 하였고, 30세에 어머니의 봉양을 위해 처가(남평조씨)가 있던 김해 炭洞(지금의 대동면 원동)으로 이사하였다. 당시에 재산은 남녀 균분상속이어서 처가나 외가 쪽에 터를 잡는 것은 흔한 일이었다.
거기서 공부할 집을 짓고 山海亭이라 이름하였다. 산해정은 “태산에 올라 바다를 굽어본다”는 뜻이라 한다. 지금도 그 자리에 서면 김해들판 건너 낙동강 하구 너머 바다가 보인다.
이때에 비로소 호를 南冥이라 하였는데, 본인이 남쪽 바닷가에 머물고 있다는 뜻도 되지만, 원래 莊子(逍遙遊篇)에 나오듯이 大鵬이 되어 남쪽바다(南冥)로 날아오르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45세에 어머니 상을 당하여 고향에서 시묘살이를 마친 후 토동에 돌아와 계부당(鷄伏堂)과 뇌룡정(雷龍亭)을 지어 강학하고 제자들이 거처할 곳을 마련하였다. 61세에 지리산 천왕봉이 보이는 곳에 山天齋를 지어 제자를 가르치면서 만년을 보냄. 1572년(72세) 별세.

2. 학문

남명은 주자학 일변도가 아니라 원시유학을 포함한 유학전반, 老莊, 천문지리, 의학, 병법까지 경세제민의 학을 섭렵하였다. 또 당시 학풍과 달리 극기공부, 항시 깨어있는 수행공부에 주력하였다. 당시 성리학의 화두였던 理의 탐구에 대하여는 거의 말하지 않았고, 오히려 理氣논쟁을 탁상공론으로 못마땅하게 여겼다.
그리하여 당시의 학문풍토에서 방법론이 달라 ‘주자학의 정통에서 벗어났다’ ‘이단이다’ ‘노장에 병들었다’는 비판을 받았다.

남명은 당시의 형이상학적인 공리공론을 못마땅하게 여겨 퇴계에게 편지를 보낸다.
“요즘 공부하는 자들을 보건대 손으로 물 뿌리고 빗자루질 하는 절도도 모르면서 입으로는 천리를 말하여, 이름을 도둑질하고 세상을 속이려(盜名欺世) 합니다. …선생 같은 어른이 꾸짖어 그만두게 하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 십분 억제하고 타이르심이 어떻겠습니까?”
그에 대한 퇴계의 답변은 이렇다.
“배우는 사람들이 명성이나 도둑질하고 세상을 속이는 것에 대한 근심은 그대 혼자만의 근심이 아닙니다. … 본래부터 그런 것이야 말할 것도 없지만, 만약 세상에서 우려하는 바를 범했다는 이유로 꾸짖어 그만두게 한다면 이는 천하 사람들이 道를 지향하는 길을 끊어버리는 일이 될 것입니다.”

실천궁행을 중시한 결과, 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 활약한 제자들만 60여명이었다. 정인홍, 곽재우, 조종도, 김면, 이설학…등 경상우도 의병장의 대부분은 남명과 직․간접으로 연계되었다고 한다.
당시 남해안에 출몰하던 왜구들이 걱정되어 남명은 1569년 "왜적을 막을 방책이 없겠는가"하고 제자들에게 리포트(?)를 제출하게 한다. 이처럼 임란 때 그의 문하에서 의병장들이 대거 등장했던 것도 그냥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다.

남명 사상의 요체는 「敬․義」 두가지로 집약된다. 內明者敬 外斷者義(안으로 마음을 밝히는 것은 敬이요, 밖으로 행동을 결단하는 것은 義다) 敬이 수양론이라면 義는 실천론이다. 심성론인 敬을 用事와 治人의 영역인 義까지 확장한 것은 조선조 성리학에서 소홀히 한 남명의 독특한 공부론이다. 그는 그 두 가지를 상징하는 방울(惺惺子)과 劍을 차고 다녔다.

3. 出處

유학의 궁극적 목적은 修己와 治人이다. 자기 몸을 닦아 세상을 다스리는, 즉 修身齊家治國平天下야말로 모든 유학자들의 꿈이다. 그러나 통할 때는 나아가 세상을 구제하지만, 막히면 물러나 몸을 닦고 道를 보존하는 것이다.(孟子)
남명은 당시의 시류와 세태에 타협하지 않고 자기방식대로의 치열한 삶으로 처사의 전범이 되었다.
기묘사화에 숙부 조언경이 희생당하였고, 부친이 죽기 직전 관작을 몰수당한 점, 을사사화 때는 절친한 벗 성우․송인수 등이 처형당한 것도 그의 출처에 영향을 미쳤던 것으로 보인다.

임금이 여러 차례(12회) 불렀으나 벼슬에 나아가지 않았다. 시대가 배운 바를 행하기 어려웠고, 또 경륜을 펼칠 수 있는 자리도 아니었다. 현인을 우대한다는 명분을 쌓기 위한 형식적 조치였을 뿐인데, 남명은 그때마다 정색하고 거리낌 없이 바른말을 올린다.

"전하의 나라 일이 이미 잘못되어서 나라의 근본이 이미 망했고 하늘의 뜻이 가버렸으며 인심도 이미 떠났습니다. … 慈殿(문정왕후)께서는 생각이 깊으시기는 하나 깊숙한 궁중의 한 과부에 지나지 않고, 전하께서는 어리시어 다만 선왕의 외로운 후계자(孤嗣)이실 뿐이니, 천 가지 백 가지의 천재(天災)와 억만 갈래의 인심을 무엇으로 감당하며 무엇으로 수습하시겠습니까?” - 1555년(명종11년) 단성현감을 제수받은 후 올린 사직 상소문에서

신이 전날 상소 때 올렸던 ‘救急’ 두 글자에 대하여 전하께서 불속에서 사람을 끄집어내듯 물에 빠진 사람을 건져내듯 급히 서두르신다는 소문은 아직 듣지 못하였습니다. 전하께서는 ‘다만 늙은 선비가 강직한 체하려고 해보는 소리일 뿐이니 마음을 움직여볼 것도 없다’고 생각하고 계신 듯 합니다. - 1568년(선조1년) 사직소 중에서

엎드려 생각건대, 전하의 나랏일은 이미 결딴이 났는데도 여러 신하와 벼슬아치들은 둘러서서 보기만 할 뿐 손을 쓰지 못합니다. 이미 어찌할 수 없음을 알고서 어떻게 할까 어떻게 할까 하며 대책을 강구하지 않은지 오래되었습니다. 전하께서 보시고서도 모르신다면 전하의 눈이 가려진 것이요, 아시면서도 생각하지 않으신다면 나라에 주인이 없는 것입니다.
- 1571년 임금이 음식물을 내려준 은혜에 감사하는 상소문 중에서

1543년, 회재 이언적이 경상도 관찰사로 부임해 와 만나기를 청하니 “대감이 벼슬자리에서 물러난 뒤에 만나도 늦지 않을 것이오”하고 거절하였다.

1553년 퇴계가 남명에게 벼슬에 나아가기를 권유하는 편지를 보낸다. 대체로 이런 내용이다. 『이번에 품계를 뛰어넘어 6품직에 임명한 것은 전에 없던 대단한 일이고 임금이 어진 인재를 좋아한다는 증거다. 자꾸 벼슬을 사양하는 것은 군신간의 의리를 저버리는 일이다. 남들이 나를 알아주지 못하기 때문에 관직에 나아가지 않는 것이라면 깊이 숨어 있는데도 천거한 것이니 남들이 나를 알아주지 못한 것이라고 말할 수 없으며, 나아갈 시기가 아니기 때문에 나아가지 않는 것이라면 전하께서 현자를 목마른 듯 찾고 있으니 나아갈 시기가 아니라고 말할 수도 없다.』

이에 남명은 답변하기를,『나는 학문이나 덕행을 쌓은 것도 없는데 헛된 이름을 얻었으니 세상을 속이고 임금을 속인 꼴이 되었다. … 게다가 몇 년 동안 눈병을 앓아 사물을 잘 볼 수 없다. 그대에게 撥雲散(눈을 밝게 해주는 약)이 있다면 좀 구해 달라』고 하면서 어지러운 정치에(을사사화와 윤원형의 득세) 대해 현실인식을 달리하는 퇴계에게 풍자의 뜻을 나타낸다.

다음은 그의 친구 大谷 成運이 쓴 묘갈명에 나오는 구절이다.
『세상일을 잊지 못하였고 나랏일을 근심하고 백성들을 불쌍히 여겼다. 매양 달 밝은 밤이면 홀로 앉아 슬피 노래 하다가 노래가 끝나면 눈물을 흘렸지만 곁에 있던 사람들은 그 까닭을 알지 못하였다. ……
하늘이 덕(德)을 내려 어질고 곧았으니, 거두어 스스로 쓰고도 남았네. 은택이 널리 미치지 못했으니, 시세인가 운명인가. 우리 백성 복 없음이 슬플 뿐.』

성운이 남명에게 준 시의 일부분이다.
借問南歸何所樂 남쪽으로 돌아가면 무엇이 즐거운가 물으니
頭流山入眼中靑 두류산에 들어가면 눈이 푸르러진다 하네.

4. 남명이 제대로 평가받지 못한 이유

당시에 이미 “경상좌도에 퇴계가 있고 우도에 남명이 있다”는 말이 있었다. 그런데 남명 사후 지금까지 퇴계와 병칭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무엇 때문일까?

첫째, 그의 고제자인 정인홍이 인조반정 후 역적으로 몰려 죽자 남명까지 기피인물로 인식되었다. 본인도 평생 벼슬에 나가지 않았지만, 제자들도 당쟁에서 패배하여 권력에서 배제되다 보니 조정에서도 그를 변호해 줄 인물이 거의 없었다. 또 출처가 명확하지 못했다는 사유로 정인홍이 이언적과 이황의 문묘종사를 반대하는 상소를 올림으로써 동인(후에 남인)계열과도 사이가 틀어짐.

둘째, 저술이 별로 없다. 그의 학문경향이 실천궁행에 있다 보니 성리학의 이론화를 반대하고 저작하는 것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후세에는 오직 저술로 말할 뿐인데 정밀한 이론의 체계화가 없어 상대방의 공박에 대응할 방법이 없었다. 또 그나마 정인홍이 편찬한 문집도 그가 역적으로 처형된 뒤 많이 훼손되어 남명의 진면목을 알기 어려웠다. 요근래에 비로소 제대로 된 문집이 발굴되었다.
공자도 논어가 남아 있지 않았다면 그처럼 숭앙받지는 못했을 것이다.

셋째, 文廟(孔子 사당)에 배향되지 못하였다. 남명 본인이야 그런 것에 무관심했겠지만 문묘에 배향되면 나라에서 정책적으로 배려하고 백성들이 우러러 보기 마련인데, 그의 사후 40여 차례나 문묘종사 건의가 있었지만 조정에서 허락하지 않았다.
“대비를 과부, 왕을 고아”라고 표현한 상소문 등 역대 임금들의 역린을 거슬린 껄끄러운 인물로 기억되어 끝까지 용서받지 못했던 것이다.
조선조 문묘에는 18인이 배향되었는데 신라․고려조와 조선초기 五賢을 제외하면 인조 이후 배향된 9인은 권력을 독점한 西人계열의 인물들 뿐이다.

그에 대한 평가는 광해군 때 편찬된 선조실록에서는 비교적 공정하나, 인조반정 후에 편찬된 수정선조실록에는 꽤 치우쳐 있다.

조선후기 산림처사의 위상이 높아지고 儒者의 처세문제가 다시 부각되었을 때 남명에 대한 평가도 달라진 듯하다. 그래서 왕비를 배출한 집안보다 대제학을 배출한 집안이 낫고, 대제학을 배출한 집안보다 문묘배향자를 배출한 집안이 낫고, 문묘배향자를 배출한 집안보다 처사를 배출한 집안이 낫다는 말이 유행했다는데 남명이야말로 바로 그런 ‘처사’라 할 것이다.

5. 일화 몇 가지

『옛날 남명이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에 보은 사는 大谷 成運을 찾았더니 마침 東洲 成悌元이 그 고을 원님으로 성운의 집에 와 있더랍니다.
남명은 성제원과 초면이었으나 농담으로 “노형은 참으로 한 벼슬자리에 오래도 계시오그려!”라고 한 즉, 성제원은 성운을 가리키고 웃으면서 “이 늙은이에게 붙잡혀 그랬소만 금년 8월 보름날 내가 해인사에 가서 달이 떠오르는 것을 기다릴테니 노형도 그리로 오실 수 있겠소?”라고 말했습니다. 남명이 그러마고 대답했지요.
그 날짜가 되어 남명이 소를 타고 약속한 곳으로 가는 도중 큰비를 만나 겨우 앞내를 건너 절문에 들어서는데 성제원은 벌써 누다락에 올라가 막 도롱이를 벗고 있더랍니다.
아! 그때 남명은 처사의 몸이요, 성제원도 이미 벼슬자리를 떠났건만 밤새도록 두 분의 얘기는 백성들의 생활문제였답니다. 이 절의 중들이 지금까지 옛이야기로 전해오고 있습니다.』 - 박지원의 《海印寺唱酬詩書文》중에서

『십이월 십오일 아침. 인홍과 우옹을 불러 말씀하시기를, “내 오늘 정신이 전과 다르니 죽을 모양이다. 다시는 약을 올리지 마라”하시고, 손으로 두 눈을 부비고 눈동자를 열어보시더니 “자세하고 밝은 것이 평시와 다름이 없구나”하셨다.
또 창을 열게 하시더니, “하늘 해가 참 맑다” 하셨다. 이날로 선생은 약을 끊으시고, 미음조차 입에 대지 않으셨다. 종일 가만히 누워 계셨으나 조금도 자세를 흐트리지 않았다.』 - 정인홍이 기록한 《南冥先生考終記》중에서

『남명에게 두 외손녀가 있었는데, 동강(東岡) 김우옹과 망우당(忘憂堂) 곽재우에게 시집을 갔다. 그 둘은 남명이 사랑하는 제자였다. 이들이 장가들 때 동강과 망우당의 집안에서 남명에게 외손녀가 어떤 규수냐고 물었다. 이에 남명은 “군자의 배필이 될 만하다”고 대답했다. 두 집안에서는 흡족하여 서둘러 혼사를 맺었다. 그러나 막상 혼인을 하고 보니 두 손녀가 성격이든 살림살이든 영 아니었다.
화가 난 동강과 망우당이 스승에게 따져 물었다. “군자의 배필이 될 만하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러자 남명이 느긋하게 대답하였다.
“그러니까 내가 뭐라 했는가? 군자의 배필이 될 만하다고 말하지 않았던가? 그런 철부지를 군자가 아니고서야 어찌 하루인들 함께 살 수 있겠는가? 나는 자네들을 군자로 보고 권한 것이네. 그렇지 않았다면 권하기나 했겠는가?” 두 사람은 그만 할 말이 없어졌다고 한다.
그래서 “중매 설 때는 건중이도 거짓말을 한다”는 속담이 유행했다 한다.』

선생이 어느날 제자들과 덕천강변에서 꺽저기(꺽지)를 잡아 회식(?)을 하고 있었는데 국상 소식을 듣고는 입에 든 고기를 뱉었는데 지금도 덕천강 꺽지는 머리 부분에 남명의 이빨자국이 남아 있다나... 믿거나 말거나.

<참고>
한길역사기행1
칼을 찬 유학자 남명 조식
절망의 시대 선비는 무엇을 하는가
조선 유학의 학파들
남명문집
남명학연구원 사이트...외
5 Comments
꼭대 2009.07.08 16:45  
님, 반갑습니다. 선생과 지리산에 연관된 이야기는 님께서 정리해서 [지리칼럼]게시판에 올려져 있습니다만 선생의 연대기와 학문세계에 관하여 님께서 정리한 글을 보니 그 동안 단편적으로 듣던 내용들이 일목요연하게 정리가 됩니다. 올려주신 내용도 내용이거니와 산악회의 알찬 산행을 위하여 이와 같은 글을 준비하신 정성과 배려가 존경스럽습니다. 값진 자료를 앞세워 이렇게 인사를 하셨으니 이제 자주 출입을 하셔야겠습니다. 앞으로 좋은 지리산행 이야기 많이 들려주시기 바랍니다.
엉겅퀴 2009.07.10 14:01  
꼭대님, 객꾼님! 재미없는 글에 따뜻한 격려의 말씀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런 마음씀도 지리99를 이끌어가는 힘이 아닌가 싶네요. 언제 한번 뵐 수 있기를... 장마철 건강하십시오^*^
귀소본능 2009.07.11 07:50  
조식 남명선생! 시류에 편승하지 않은 채, 꿋꿋한 의지와 대의속에 살다 가신 당대의 비주류 지식인였음을 다시금 새깁니다. 님의 남명 선생의 재조명 감사히 읽었습니다.
덕불고 2009.07.13 11:39  
제가 다녔던 학교 내에서도 남명학연구소가 있었습니다. 그때까지만 하더라도 남명선생의 위대함을 전혀 모르고 있을때였었지요. 조금씩조금씩 신문지상을 통하여 그리고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를 통하여 선생의 참지식이었음을 어렴풋하게나마 알아가고 있는 즈음, 엉겅퀴님의 남명선생에 대한 여러 조사자료를 대하니 눈앞이 밝아지고 머리속이 선명해짐을 느낍니다. 앞으로도 남명선생에 대한 많은 정보 오려주시면 감사드리겠습니다.
등고자비 2014.07.24 15:47  
사람이 권세를 지니면 반드시 그것을 써보고자 하고.
일신의 영달과 안위를 지속적으로 누리고자 하는 것이 본성이거늘
남명은 그런 인간의 천박한 본성을 멀리하고자 성성자를 차고 깨어있고
천왕봉을 항상 바라보며 자신의 의식을 깨여 있도록 애썼다는 말을 들으니,
조선중기를  대표하는 행동하는 유학자의 표상입니다.
 
요즘같은 난세에 남명과 같은 물욕없이 깨어있는 지식인이 그립습니다.
 
방대한 자료와 선명한 남명선생의 행실이 너무 유익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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