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사람
<서산>대사의 지리산 자취 – 2. 낭만적인 출가를 감행한 [원통암(圓通菴)]
<서산(西山)>대사는 우리에게 임진왜란 때 승병을 일으킨 분으로 잘 알려진 분인데,
지리산으로 출가하여 오랜 시간을 지리산에서 보내면서 수행과 학덕을 쌓아 불교계에서 조선시대를 통틀어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로 주저 없이 꼽히는 대단한 분이다.
이와 같은 대선사께서 어찌 지리산에서 출가하게 되었는지 어찌 지리산 산중 암자에서 청장년 시기를 머물면서 오늘날까지도
이어오는 청허문중을 이루셨는지 오늘날 지리산에 입산하는 산꾼들이 새겨볼 일이다.
대사는 1520년 평안남도 묘향산 인근의 안주에서 태어났다.
아홉살과 열살 때 각각 부모님이 돌아가시는 바람에 어린 나이에 고아가 되었지만 훗날 지리산에 입산하게 되는 장면을 보면,
유년기에 보고 자란 낙천적이며 세상에 욕심 없는 부모의 성정을 물려받은 것 같다.
아버지는 술을 좋아하는 호인이었는데, 조그만 벼슬을 내려도 [정든 산, 희뿌연 달과 한 병의 막걸리, 아내의 즐거운 마음이면
나는 그 것으로 만족한다오.] 하며 거절하였다.
어머니도 항상 세독의 술을 빚어 아버지와 손님이 함께 취하지 않는 날이 없게 하면서 [다정한 친척이나 친한 벗을 보거든 행
여 집이 가난하다고 박정하지 마시오. 첩의 치마라도 잡혀 대접하리...] 하였다니
세상의 욕심에 초월한 부모님의 모습을 보고 자란 유년시절이 결국 대사가 지리산에 빠져 머물다가 속세의 미련을 버리고 출
가하게 된 근본 배경이 되었을 것이다.
부모가 모두 돌아가신 10살 때 안주 목사의 양자가 되었고 서울로 와서 공부를 하였다.
15살 때 과거에 응시했으나 낙방하고, 같이 공부하던 친구들과 호남의 고을 원으로 부임한 스승을 만나러 호남으로 떠났으나,
마침 스승이 모친상을 당하여 거꾸로 서울로 돌아가는 바람에 만나지 못하게 되었다.
곤란한 상황에 답답해하던 차에 한 소년이 [스승을 찾아 천리를 왔는데 일은 비록 틀렸지만 이런 명승지에 왔다가 빈손으로
돌아가겠는가. 천천히 이 남방 산천이나 구경하며 노는 것이 좋겠다.]하여 지리산으로 들어가 크고 작은 절들을 찾아 다니며
반년을 떠돌게 되면서 우연찮게 찾았던 지리산 깊은 산중에 빠지게 된 계기가 된 것이다.
그러다가 우연히 만난 <숭인>대사가 유독 대사에게 일컫기를
[자네를 보니 기골이 맑고 빼어나 절대 보통사람이 아니다.
마음을 돌려 심공급제(心空及第 -심공은 마음이 한없이 크고 넓어서 우주 만유를 다 포함하기 때문에 허공같이 어떠한 것에도
조금도 구애를 받지 않는 상태를 말하는데 사람의 마음이 심공의 상태가 된 것을 심공급제)하면 영원히 세상의 명리(名利 – 명
예와 이익)를 끊고 고통을 떠나 즐거움을 얻게 될 것이다.
서생들의 일이란 아무리 온종일 노력해도 백년동안의 소득은 다만 하나의 헛된 이름뿐이니 참으로 슬프지 아니하냐.]
하면서 은암(隱菴 – 지금의 연암)에 머물던 <부용>대사에게 소개하게 되고, <부용>대사를 스승으로 모시고 행자생활 6년 끝
에 21세 때인 1540년 지리산 의신에 있는 원통암에서 삭발 출가하게 되었다.
이때 얻은 법명(法名)이 <휴정(休靜)>이며, 후에 [내은적암]을 [청허원(淸虛院)]이라 명명하고 스스로 붙인 법호(法號)가 <청허(淸虛)>이며,
말년에 묘향산에 머물렀다 하여 <서산(西山)>이라 한다.
<서산>대사의 문집인 [청허당집]에는 주옥같은 시들이 실려 있는데, 이 중에 출가할 무렵 썼을 것으로 보이는 출가시(出家詩)
로 알려진 [화개동]이란 시를 통해서 장차 대선사가 될 21세 청년의 놀라운 각성과 감성을 짐작할 수 있을 것 같다.
화개동(花開洞)
화개동에 꽃이 지는데
청학의 둥우리에 학은 아니 돌아오고
잘 있거라, 홍류교 아래 흐르는 물이여
너는 바다로 돌아가고 나는 산으로 돌아 가려네
이리하여 우연히 나섰던 지리산 유람길에 지리산에 빠지게 되고 결국 속세를 떠나 출가하게 된 <서산>대사의 발자취를 살펴
보면 우연찮게 지리산행에 나섰다가 지리산 아흔아홉골을 떠돌게 된 지리산꾼도 이와 다를 바가 없다.
다만, 지리산행을 통해서 심공급제(心空及第)를 꿈꾸면서도 세상의 명리와 미련을 떨쳐버리지 못하는 업보를 받은 미련한 중
생들이라 시지프스처럼 지리산에 올랐다가 다시 내려오고를 끝없이 반복하고 있는 수련을 당하고 있는 지도 모를 일이다.
덕평능선 산행 들머리로 많이 이용되는 원통암에 가거든, 원통암에서 뒤돌아서서 본존불이 바라보는 시선으로 탁 트인 조망
을 바라보며, 15세에 지리산에 들어와 21세에 세상의 이치를 깨달아 출가를 감행한 <서산>대사의 생애를 떠올려보며 자신을
한번 되돌아 볼 일이다.
<서산>대사의 생애가 전해지는 문헌은 극히 미비한데, <서산>대사가 스스로 양력을 소개하고 있는 [완산 노 부윤에게 올리는 글]이 유일하다시피
했는데 여기에도 지리산에서 머리를 깎았다고 간략하게 서술할 뿐, 어느 암자에서 출가했는지 명확하게 나오지는 않는다.
그러다가, <서산>대사의 제자였던 <경헌>대사의 [제월당집]이 발견되면서 출가한 암자가 [원통암]으로 밝혀졌다.
**참고문헌
1. 화개면지편찬위원회 - [화개면지]
2. 하동군 - [서산대사 유적지 정비사업 계획서]
3. <서산대사> - [청허당집]
-본문의 많은 내용을 참고문헌에서 발췌하여 인용하였습니다.
*원통암 주변 지형도
붉은색선; 의신-원통암 산길
*원통암 (<청호>님 사진)
원통암은 오래전 폐사되었으나 1987년부터 1994년까지 복원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원통암에서 바라본 지리산 조망 (<청호>님 사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