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사람
피아골 에덴산장의 추억
19-20 OCT. 2002
1. 산아래 첫집
기억에 분명 담겨있는 풍경이 왠지 낯설게 느껴진다거나,
혹은 꿈속에서의 낯선 풍경들이 기억의 어디메쯤 자리하고 있을 것 같은 느낌은,
저에겐 대체로 불안을 예고합니다.
그날 하산길에 피아골을 막 벗어나면서 펼쳐진 직전마을 풍경이
저에게 가슴 덜컹거리는 불안을 안겨준 이유도 그 때문이었습니다.
숲에 가려 보이지 않는 직전마을은,
우측에 계곡을 끼고 내려가는 하산길 좌측에 가파른 산등성이 숲의 끝을 통과할 무렵,
갑자기 확 트이는 기분이 들면서 멀찌감치 길 모퉁이쯤 해서
좌측에는 자연석을 섞어 벽을 올린 아담한 <에덴산장>과
우측으로 나지막한 함석지붕의 식당이 깊게 떨어진 계곡 위에 걸린 듯 자리하고 있었지요,
저의 기억 속에는.
숲을 통과하자 마자 자동차출입금지 쇠사슬을 넘어서 바로 좌측에
새로 깨끗하게 들어선 <산아래첫집>의 낯선 풍경이 저의 기억을 가로막아 서며
까닭 모를 불안이 슬그머니 목덜미로 기어들어오며 흠칫 놀랍니다.
어리둥절한 시야의 끝 저만치 떨어진 길 모퉁이에 간판도 없어진 <에덴산장>과
그와 마주한 지붕낮은 집을 이내 발견하며 안도하기는 합니다만 그것도 잠시 뿐,
아담하면서도 당당히 산아래 첫 집으로서 저를 맞이해야 할 <에덴산장>의 초라해진 모습에
그 넘의 불안은 이제는 망설임 없이 등줄기를 타고 들어와 온 몸을 휘어감더군요.
새로 생긴 식당인 <산아래첫집>을 지나며 이런 저런 생각들로 마음이 바빠질 무렵,
언뜻 본 식당 앞 야외테이블에 일행들과 같이 앉아계시는 최화수 선생님을
몇 걸음 지나치고 난 후에야 뵌 기억을 수습하여 뒤 돌아가서 인사를 드렸습니다.
이날 아침 <이송>님으로부터
<지리산이야기>팀이 피아골산장에서 함태식 선생님의 말씀을 듣는 행사를 가지기로 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하산길 내내 만나 뵐 수 있을 지 눈 여겨 보았으나 만나뵙지 못했는데
그 곳에서 만나 뵐 수 있었지요.
“저-, 선생님, 저는 검은별홈피에서 놀고 있는 꼭댑니다.”
사무적인 일로 한차례 메일을 주고 받은 일이 있었을 뿐만 아니라
이 홈피를 아껴주시는 만큼 저의 유치한 글마저도 읽으신 까닭에
선생님께선 저를 반갑게 기억해 주셨고
자리를 내주시며 막걸리 한잔 하고 갈 것을 권하셨지요.
산행 중 낮 술은 가급적 삼가합니다만 하산길에 막걸리를 사양할 위인도 못되고
제가 십여년 전부터 존경해 마지않는 선생님을 만났는데 그런 좋은 기회가 없었으며
쉼 없이 내려와 이제 한숨을 돌릴 때도 되었습니다.
그러나, 서울가는 차편의 시간도 여유롭지는 않았으나 그 보다는,
하필 혼란스러운 기억이 펼쳐질 무렵 만나다 보니 차분히 앉아 있을 수 없었으며
<산아래첫집>을 지나면서부터 마음이 급해져
저의 의식과 무의식은 이미 반쯤은 뒤죽박죽이 되어있었고
빨리 그곳으로 가고싶은 생각 뿐이었습니다.
<에덴산장>이 아닌 <에덴동산>으로.
일행분들께도 목례로 인사를 드리고 재촉한 발걸음은, 그러나 <에덴산장>앞에 다다라 직면하고야 만 그 허망함이란!
까닭 모를 한줄기 불안은 어느새 <에덴산장> 낡은 유리창문에 비친 희미한 저의 잔영 속으로 덜컹 한덩이 불안이 되어 가슴을 덮쳐왔습니다.
일년 중 가장 대목이라 할 수 있는 단풍축제기간이기도 한 이 때에,
주위 식당이나 민박집들은 등산객들로 북적거리며 야단도 아닌데
한겨울 바닷가 민박 집처럼 <에덴산장>간판은 흔적도 없고
창문에 셀로판지로 오려 붙였던 <에덴식당> 글자마저 늘러 붙은 먼지로 흔적만 남은 채 이미 오래전 사라진 몰골이었습니다.
자연석을 섞어 멋스럽게 올린 외벽은
시멘트 기둥의 흰색 페인트칠이 낡아 세월을 말해줄 뿐
여전히 풍모를 잃지 않았는데
그 속은 이미 폐가가 되어있었습니다.
<에덴산장>의 추억처럼 쓸쓸히.
저는 놀라 혼자 중얼거립니다.
“그럼, 그 영감님은 어디로 가셨단 말인가!”
2. <에덴산장>의 추억
저의 개인사를 짤막하게 말씀드리면,
부산에서 공부를 하는둥 마는둥 놀다가 창원에서 식객생활을 약 10년 하는 동안
주말에 틈만 나면 지리산 언저리에서 맴돌곤 했지요.
산을 타거나 혹은 가족들과 차가 들어갈 수 있는 길이란 길은 그 끝을 보고 나서야 돌아오곤 하였습니다.
그러다가 직장관계로 창원을 떠나 충남 당진으로 옮기기 직전,
이젠 쉽게 찾을 수 없는 지리산을 한번 돌아볼 요량으로
예닐곱된 막내를 포함한 식구들과 피아골을 찾았습니다.
지금으로부터 약 12년 전의 이야깁니다.
그 해 가을에도 피아골 단풍은 고와 직전 마을은 산객들로 들끓고 있었고
저는 변함없이 차가 오를 수 있는 길 끝까지 올라갔습니다.
포장되기 전 직전마을까지 가는 도로는 차 한대 겨우 다닐 지경이라 주차할 곳 없어 애 먹고 있는데
그 길이 끝날 무렵 모퉁이를 돌아 멀리 피아골 입구의 지리산 깊은 숲만 세상을 집어삼킬 듯 입을 열고 있을 뿐,
더 이상 집이라곤 없는 마지막 집 뒤로 다행히 몇 대 주차할 공간이 있었고
우리는 그 마지막 집에서 하루 묵기로 합니다.
1층 식당에서 저녁을 먹고 길가로 놓인 평상에 앉아
주인 영감님께서 담아 놓으신 당귀주를 한 병 사서 영감님과 대작을 하게 되었지요.
<에덴산장> 간판아래에서.
그때 이미 저의 꿈은 지리산 자락에 집 지어 사는 것이었고,
그때만 해도 그 당시 지리산 산장처럼 자연석을 섞어 외벽을 지은 집이
참 멋스럽게 느껴져 그 집을 지어 살고 계시는 영감님이 많이도 부러웠지요.
그 영감님은 혈압이 높아 술을 많이는 못 드셨지만 제가 두병째를 비울 때 까지
자리를 함께 하시며 밤 깊은 줄 모르고 정담을 나누었지요.
지금 그 당시 나누었던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다 기억하지는 못합니다만,
아이들을 먼저 재우고 함께 자리했던 집사람마저 잠을 참지 못해
하품을 숨기며 잠자리로 들어가고도 한참을 지난 후에야 끝이 난 그날,
그 영감님의 고달팠던 삶과 마지막 꿈을 지켜본 <에덴산장>에서의 그 날밤 추억은
그 뒤 두고두고 저의 꿈으로 옮겨와 자리하게 됩니다.
그때 영감님의 나이는 60을 약간 넘었다고 기억되며 체구는 크셨지만 혈압이 높다 하시고
얼굴이 다소 푸석푸석해서 썩 건강하게는 보이지 않으셨지요.
한쪽 눈은 힘을 잃어 사팔뜨기로 돌아가 있었으나 서울 말씨의 음성만은 정정하셨고
백발아래 자리잡은 굵직굵직한 이목구비의 배열에서
젊은 날의 기풍을 엿볼 수 있는 위엄이 숨어있었습니다.
제가 다니던 회사의 윗분들 이름을 대시며 그분들과의 연고를 말씀하시는 것을 보면
서울에서 잘 나가시던 시절이 있었던 것 같았고,
서울에 본부인과 자식들이 있으나 공식적으로 이혼한 상태였고
일년에 한두번 서울가면 만나고 온다 하신 것을 보면
후년의 인생은 그리 순탄하지는 않으신 것 같았습니다.
어찌어찌 서울의 가족으로부터 떠날 수 밖에 없었던 영감님도
파란만장 했을 인생의 마지막 위안처로 지리산을 찾았으며
그 당시만 해도 산중의 산골짝 피아골의 산아래 첫 집을 멋스럽게 지어
마지막 꿈을 이룸으로써 구겨진 인생의 마지막을 위안받으려 하신 듯 하였습니다.
그 당시 초등학교 3학년인 딸이 있었는데
영감님의 인생에 덧붙은 애절한 사랑의 흔적이었지요.
지리산에 들어오시기 직전 나이어린 딸을 둔 젊은 과부를 만나 정을 나누게 되었으며
그녀는 영감님을 따라 지리산으로 들어와 같이 <에덴산장>을 지으며
아마도 새로운 인생을 에덴동산처럼 살아보리라 희망에 찼을 것이라 짐작되더군요.
1층 식당위로 2층을 객실로 꾸민 <에덴산장>에서
그녀는 식당을 운영하며 영감님과 살았습니다.
그 당시 그녀의 나이는 30대 초반으로 기억합니다만
데리고 온 딸을 친자식처럼 예뻐 해 주시는 영감님이 얼마나 큰 위안이 되었겠습니까.
그러나 그녀에게 <에덴동산>은 낙원이 될 수 없었습니다.
부산에서 살았던 그녀는 영감님만 바라보고 왔으나 마음속에 지리산은 없었으므로
산속 생활을 견디지 못하고 집을 지은 그 이듬해 딸을 영감님께 남겨두고 떠나게 됩니다.
그러니까 제가 <에덴산장>에 갔을 때 그녀는 이미 산장을 떠난 뒤였고
남겨진 그녀의 딸을 딸이라 하며 친딸 이상으로 그 아이에게 정을 붙이고 있었던 것을 생각하면
정 붙일 곳 없는 노년의 쓸쓸함을 보는 것 같아 마음이 저려왔습니다.
그러나 그날 밤 영감님은 유쾌하셨으며
지리산 별밭아래 저와 앉아 지나온 세월을 회상하시는데 들떠 있었으며
지리산에 들고자 한 꿈을 이룸으로써 망가졌을 속세에서의 젊은 날의 꿈을 보상 받았다는 듯
회한 없는 호탕한 웃음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다음날 아침 우리는 일찍 일어나 더없이 흐뭇하신 영감님의 배웅을 받으며
지리의 또 하나 입구인 피아골 계곡, 저의 꿈속으로 빨려 들어가게 됩니다.
영감님을 마지막 뵌 때이기도 합니다.
그 후 저는 지리와 떨어진 곳에서 고달픈 세상살이를 하면서도 항상 그 영감님을 잊지 않았지요.
[나 돌아갈 곳]으로 돌아가리라는 꿈은
먼저 이루신 영감님을 생각하면 자신이 있었고,
영감님이 얻으신 인생의 위안은 저의 위안이 되기도 하였습니다.
이때의 추억을 일 삼아 저는 가끔 마눌과 농을 자주 합니다.
언젠가 말씀드린 적이 있지요만 아래와 같이.
"그래, 후제 내가 [나 돌아갈 곳]으로 갈 때 당신도 데리고 가지.”
잔뜩 얼굴에 힘을 주고 눈을 지긋이 아래로 깐채 선심쓰듯 말을 할라치면,
“하이구! 무신 씰데엄시! 당신혼자 가이소 마! 나는 아-들하고 서울 있을 꺼니!”
쌍심지를 돋우며 저를 무안하게 하곤 하지요. 죄 없는 소주만 작살나고 맙니다.
그러면 저는 이렇게 대꾸하지요.
“머라! 그라믄 잘 되었네. 나도 그 영감님처럼 젊은 새악시 줄줄이 따라 올 것이니 잘 되았구면.”
하고 약을 올리곤 하였지요. 물론 마눌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눈도 꿈쩍 하지 않습니다만.
영감님이 이루신 <에덴>을 보고 싶었으며
세월을 묵힌 영감님의 인생을 들여다 보고싶어
영감님의 인생을 같이 이해하고 있는 마눌과 같이 발걸음을 한 이번 산행의 하산길을
기어코 피아골로 한 이유입니다.
3. <에덴산장>의 말로
쓸쓸함이 잔뜩 베어있는 텅 빈 <에덴산장>앞에서
망연자실 추억을 되 짚을 겨를도 없이 충격에 휩싸여 한참을 들여보다가
건너편 지붕 낮은 집 한 켠 가게로 들어가 죄없는 가게 주인 아주머니를 대상으로
<에덴산장>종말기에 대한 수사에 착수합니다.
제가 다녀가고 오래지 않아 영감님은 또 다른 여자와 정을 붙여봅니다만 뜨내기 사랑이었고
곧 병이 악화되어 산장을 처분하고 몇 군데를 더 전전하시다 양로원으로 들어가시고
얼마 못 가서 세상을 떠나셨다는 슬픈 소식을 듣게 됩니다.
<에덴산장>은 그 뒤에도 여러 차례 주인이 바뀝니다만 번번히 실패하고
지금은 어느 젊은 이가 아예 산장의 문을 걸어 잠근 채
뒷마당에 마련해둔 주차장만 운영하고 있다는군요.
이제 우리 마눌에게 걸던 그 농담도 더 이상 하지 못하겠습니다.
쓸쓸히 세상을 떠나고 만 영감님을 빌어 마눌이 되받아 칠 대꾸에
제가 마땅히 응할 말을 현재로선 찾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영감님의 죽음과 함께 저의 꿈도 잠시 타격을 받게 되는 대목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제가 누굽니까.
이제 다시 저의 꿈을 일찌기 실현하고 계시는,
지금쯤 <에덴>을 이루었을 지도 모를 분을 찾아 다앙장 지리로 떠나야겠습니다.
제가 계속 꿈꿀 수 있도록 말이지요.
그러다 제가 다른 이에게 그 꿈의 대상이 될 수 있다면 그지 없이 좋은 일 입니다만.....
1. 산아래 첫집
기억에 분명 담겨있는 풍경이 왠지 낯설게 느껴진다거나,
혹은 꿈속에서의 낯선 풍경들이 기억의 어디메쯤 자리하고 있을 것 같은 느낌은,
저에겐 대체로 불안을 예고합니다.
그날 하산길에 피아골을 막 벗어나면서 펼쳐진 직전마을 풍경이
저에게 가슴 덜컹거리는 불안을 안겨준 이유도 그 때문이었습니다.
숲에 가려 보이지 않는 직전마을은,
우측에 계곡을 끼고 내려가는 하산길 좌측에 가파른 산등성이 숲의 끝을 통과할 무렵,
갑자기 확 트이는 기분이 들면서 멀찌감치 길 모퉁이쯤 해서
좌측에는 자연석을 섞어 벽을 올린 아담한 <에덴산장>과
우측으로 나지막한 함석지붕의 식당이 깊게 떨어진 계곡 위에 걸린 듯 자리하고 있었지요,
저의 기억 속에는.
숲을 통과하자 마자 자동차출입금지 쇠사슬을 넘어서 바로 좌측에
새로 깨끗하게 들어선 <산아래첫집>의 낯선 풍경이 저의 기억을 가로막아 서며
까닭 모를 불안이 슬그머니 목덜미로 기어들어오며 흠칫 놀랍니다.
어리둥절한 시야의 끝 저만치 떨어진 길 모퉁이에 간판도 없어진 <에덴산장>과
그와 마주한 지붕낮은 집을 이내 발견하며 안도하기는 합니다만 그것도 잠시 뿐,
아담하면서도 당당히 산아래 첫 집으로서 저를 맞이해야 할 <에덴산장>의 초라해진 모습에
그 넘의 불안은 이제는 망설임 없이 등줄기를 타고 들어와 온 몸을 휘어감더군요.
새로 생긴 식당인 <산아래첫집>을 지나며 이런 저런 생각들로 마음이 바빠질 무렵,
언뜻 본 식당 앞 야외테이블에 일행들과 같이 앉아계시는 최화수 선생님을
몇 걸음 지나치고 난 후에야 뵌 기억을 수습하여 뒤 돌아가서 인사를 드렸습니다.
이날 아침 <이송>님으로부터
<지리산이야기>팀이 피아골산장에서 함태식 선생님의 말씀을 듣는 행사를 가지기로 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하산길 내내 만나 뵐 수 있을 지 눈 여겨 보았으나 만나뵙지 못했는데
그 곳에서 만나 뵐 수 있었지요.
“저-, 선생님, 저는 검은별홈피에서 놀고 있는 꼭댑니다.”
사무적인 일로 한차례 메일을 주고 받은 일이 있었을 뿐만 아니라
이 홈피를 아껴주시는 만큼 저의 유치한 글마저도 읽으신 까닭에
선생님께선 저를 반갑게 기억해 주셨고
자리를 내주시며 막걸리 한잔 하고 갈 것을 권하셨지요.
산행 중 낮 술은 가급적 삼가합니다만 하산길에 막걸리를 사양할 위인도 못되고
제가 십여년 전부터 존경해 마지않는 선생님을 만났는데 그런 좋은 기회가 없었으며
쉼 없이 내려와 이제 한숨을 돌릴 때도 되었습니다.
그러나, 서울가는 차편의 시간도 여유롭지는 않았으나 그 보다는,
하필 혼란스러운 기억이 펼쳐질 무렵 만나다 보니 차분히 앉아 있을 수 없었으며
<산아래첫집>을 지나면서부터 마음이 급해져
저의 의식과 무의식은 이미 반쯤은 뒤죽박죽이 되어있었고
빨리 그곳으로 가고싶은 생각 뿐이었습니다.
<에덴산장>이 아닌 <에덴동산>으로.
일행분들께도 목례로 인사를 드리고 재촉한 발걸음은, 그러나 <에덴산장>앞에 다다라 직면하고야 만 그 허망함이란!
까닭 모를 한줄기 불안은 어느새 <에덴산장> 낡은 유리창문에 비친 희미한 저의 잔영 속으로 덜컹 한덩이 불안이 되어 가슴을 덮쳐왔습니다.
일년 중 가장 대목이라 할 수 있는 단풍축제기간이기도 한 이 때에,
주위 식당이나 민박집들은 등산객들로 북적거리며 야단도 아닌데
한겨울 바닷가 민박 집처럼 <에덴산장>간판은 흔적도 없고
창문에 셀로판지로 오려 붙였던 <에덴식당> 글자마저 늘러 붙은 먼지로 흔적만 남은 채 이미 오래전 사라진 몰골이었습니다.
자연석을 섞어 멋스럽게 올린 외벽은
시멘트 기둥의 흰색 페인트칠이 낡아 세월을 말해줄 뿐
여전히 풍모를 잃지 않았는데
그 속은 이미 폐가가 되어있었습니다.
<에덴산장>의 추억처럼 쓸쓸히.
저는 놀라 혼자 중얼거립니다.
“그럼, 그 영감님은 어디로 가셨단 말인가!”
2. <에덴산장>의 추억
저의 개인사를 짤막하게 말씀드리면,
부산에서 공부를 하는둥 마는둥 놀다가 창원에서 식객생활을 약 10년 하는 동안
주말에 틈만 나면 지리산 언저리에서 맴돌곤 했지요.
산을 타거나 혹은 가족들과 차가 들어갈 수 있는 길이란 길은 그 끝을 보고 나서야 돌아오곤 하였습니다.
그러다가 직장관계로 창원을 떠나 충남 당진으로 옮기기 직전,
이젠 쉽게 찾을 수 없는 지리산을 한번 돌아볼 요량으로
예닐곱된 막내를 포함한 식구들과 피아골을 찾았습니다.
지금으로부터 약 12년 전의 이야깁니다.
그 해 가을에도 피아골 단풍은 고와 직전 마을은 산객들로 들끓고 있었고
저는 변함없이 차가 오를 수 있는 길 끝까지 올라갔습니다.
포장되기 전 직전마을까지 가는 도로는 차 한대 겨우 다닐 지경이라 주차할 곳 없어 애 먹고 있는데
그 길이 끝날 무렵 모퉁이를 돌아 멀리 피아골 입구의 지리산 깊은 숲만 세상을 집어삼킬 듯 입을 열고 있을 뿐,
더 이상 집이라곤 없는 마지막 집 뒤로 다행히 몇 대 주차할 공간이 있었고
우리는 그 마지막 집에서 하루 묵기로 합니다.
1층 식당에서 저녁을 먹고 길가로 놓인 평상에 앉아
주인 영감님께서 담아 놓으신 당귀주를 한 병 사서 영감님과 대작을 하게 되었지요.
<에덴산장> 간판아래에서.
그때 이미 저의 꿈은 지리산 자락에 집 지어 사는 것이었고,
그때만 해도 그 당시 지리산 산장처럼 자연석을 섞어 외벽을 지은 집이
참 멋스럽게 느껴져 그 집을 지어 살고 계시는 영감님이 많이도 부러웠지요.
그 영감님은 혈압이 높아 술을 많이는 못 드셨지만 제가 두병째를 비울 때 까지
자리를 함께 하시며 밤 깊은 줄 모르고 정담을 나누었지요.
지금 그 당시 나누었던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다 기억하지는 못합니다만,
아이들을 먼저 재우고 함께 자리했던 집사람마저 잠을 참지 못해
하품을 숨기며 잠자리로 들어가고도 한참을 지난 후에야 끝이 난 그날,
그 영감님의 고달팠던 삶과 마지막 꿈을 지켜본 <에덴산장>에서의 그 날밤 추억은
그 뒤 두고두고 저의 꿈으로 옮겨와 자리하게 됩니다.
그때 영감님의 나이는 60을 약간 넘었다고 기억되며 체구는 크셨지만 혈압이 높다 하시고
얼굴이 다소 푸석푸석해서 썩 건강하게는 보이지 않으셨지요.
한쪽 눈은 힘을 잃어 사팔뜨기로 돌아가 있었으나 서울 말씨의 음성만은 정정하셨고
백발아래 자리잡은 굵직굵직한 이목구비의 배열에서
젊은 날의 기풍을 엿볼 수 있는 위엄이 숨어있었습니다.
제가 다니던 회사의 윗분들 이름을 대시며 그분들과의 연고를 말씀하시는 것을 보면
서울에서 잘 나가시던 시절이 있었던 것 같았고,
서울에 본부인과 자식들이 있으나 공식적으로 이혼한 상태였고
일년에 한두번 서울가면 만나고 온다 하신 것을 보면
후년의 인생은 그리 순탄하지는 않으신 것 같았습니다.
어찌어찌 서울의 가족으로부터 떠날 수 밖에 없었던 영감님도
파란만장 했을 인생의 마지막 위안처로 지리산을 찾았으며
그 당시만 해도 산중의 산골짝 피아골의 산아래 첫 집을 멋스럽게 지어
마지막 꿈을 이룸으로써 구겨진 인생의 마지막을 위안받으려 하신 듯 하였습니다.
그 당시 초등학교 3학년인 딸이 있었는데
영감님의 인생에 덧붙은 애절한 사랑의 흔적이었지요.
지리산에 들어오시기 직전 나이어린 딸을 둔 젊은 과부를 만나 정을 나누게 되었으며
그녀는 영감님을 따라 지리산으로 들어와 같이 <에덴산장>을 지으며
아마도 새로운 인생을 에덴동산처럼 살아보리라 희망에 찼을 것이라 짐작되더군요.
1층 식당위로 2층을 객실로 꾸민 <에덴산장>에서
그녀는 식당을 운영하며 영감님과 살았습니다.
그 당시 그녀의 나이는 30대 초반으로 기억합니다만
데리고 온 딸을 친자식처럼 예뻐 해 주시는 영감님이 얼마나 큰 위안이 되었겠습니까.
그러나 그녀에게 <에덴동산>은 낙원이 될 수 없었습니다.
부산에서 살았던 그녀는 영감님만 바라보고 왔으나 마음속에 지리산은 없었으므로
산속 생활을 견디지 못하고 집을 지은 그 이듬해 딸을 영감님께 남겨두고 떠나게 됩니다.
그러니까 제가 <에덴산장>에 갔을 때 그녀는 이미 산장을 떠난 뒤였고
남겨진 그녀의 딸을 딸이라 하며 친딸 이상으로 그 아이에게 정을 붙이고 있었던 것을 생각하면
정 붙일 곳 없는 노년의 쓸쓸함을 보는 것 같아 마음이 저려왔습니다.
그러나 그날 밤 영감님은 유쾌하셨으며
지리산 별밭아래 저와 앉아 지나온 세월을 회상하시는데 들떠 있었으며
지리산에 들고자 한 꿈을 이룸으로써 망가졌을 속세에서의 젊은 날의 꿈을 보상 받았다는 듯
회한 없는 호탕한 웃음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다음날 아침 우리는 일찍 일어나 더없이 흐뭇하신 영감님의 배웅을 받으며
지리의 또 하나 입구인 피아골 계곡, 저의 꿈속으로 빨려 들어가게 됩니다.
영감님을 마지막 뵌 때이기도 합니다.
그 후 저는 지리와 떨어진 곳에서 고달픈 세상살이를 하면서도 항상 그 영감님을 잊지 않았지요.
[나 돌아갈 곳]으로 돌아가리라는 꿈은
먼저 이루신 영감님을 생각하면 자신이 있었고,
영감님이 얻으신 인생의 위안은 저의 위안이 되기도 하였습니다.
이때의 추억을 일 삼아 저는 가끔 마눌과 농을 자주 합니다.
언젠가 말씀드린 적이 있지요만 아래와 같이.
"그래, 후제 내가 [나 돌아갈 곳]으로 갈 때 당신도 데리고 가지.”
잔뜩 얼굴에 힘을 주고 눈을 지긋이 아래로 깐채 선심쓰듯 말을 할라치면,
“하이구! 무신 씰데엄시! 당신혼자 가이소 마! 나는 아-들하고 서울 있을 꺼니!”
쌍심지를 돋우며 저를 무안하게 하곤 하지요. 죄 없는 소주만 작살나고 맙니다.
그러면 저는 이렇게 대꾸하지요.
“머라! 그라믄 잘 되었네. 나도 그 영감님처럼 젊은 새악시 줄줄이 따라 올 것이니 잘 되았구면.”
하고 약을 올리곤 하였지요. 물론 마눌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눈도 꿈쩍 하지 않습니다만.
영감님이 이루신 <에덴>을 보고 싶었으며
세월을 묵힌 영감님의 인생을 들여다 보고싶어
영감님의 인생을 같이 이해하고 있는 마눌과 같이 발걸음을 한 이번 산행의 하산길을
기어코 피아골로 한 이유입니다.
3. <에덴산장>의 말로
쓸쓸함이 잔뜩 베어있는 텅 빈 <에덴산장>앞에서
망연자실 추억을 되 짚을 겨를도 없이 충격에 휩싸여 한참을 들여보다가
건너편 지붕 낮은 집 한 켠 가게로 들어가 죄없는 가게 주인 아주머니를 대상으로
<에덴산장>종말기에 대한 수사에 착수합니다.
제가 다녀가고 오래지 않아 영감님은 또 다른 여자와 정을 붙여봅니다만 뜨내기 사랑이었고
곧 병이 악화되어 산장을 처분하고 몇 군데를 더 전전하시다 양로원으로 들어가시고
얼마 못 가서 세상을 떠나셨다는 슬픈 소식을 듣게 됩니다.
<에덴산장>은 그 뒤에도 여러 차례 주인이 바뀝니다만 번번히 실패하고
지금은 어느 젊은 이가 아예 산장의 문을 걸어 잠근 채
뒷마당에 마련해둔 주차장만 운영하고 있다는군요.
이제 우리 마눌에게 걸던 그 농담도 더 이상 하지 못하겠습니다.
쓸쓸히 세상을 떠나고 만 영감님을 빌어 마눌이 되받아 칠 대꾸에
제가 마땅히 응할 말을 현재로선 찾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영감님의 죽음과 함께 저의 꿈도 잠시 타격을 받게 되는 대목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제가 누굽니까.
이제 다시 저의 꿈을 일찌기 실현하고 계시는,
지금쯤 <에덴>을 이루었을 지도 모를 분을 찾아 다앙장 지리로 떠나야겠습니다.
제가 계속 꿈꿀 수 있도록 말이지요.
그러다 제가 다른 이에게 그 꿈의 대상이 될 수 있다면 그지 없이 좋은 일 입니다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