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사람
<서산>대사의 지리산 자취 – 6. 선(禪)사상의 토양을 다진 [하철굴암(下鐵窟菴)]
지리산 골짝에 있었던 [철굴암]이 사료에 처음 등장하는 곳은 1531년도에 [철골암]에서 간행되었다는 사실을 기록한 [선문보장록(禪門寶藏錄)]인데, 현존하는 고간본으로는 1611년 능인암 간행본에 앞서 가장 오래된 것이다.
[선문보장록]이란 고려시대 선승이었던 <진정>대사가 1294년에 지은 책으로서, 석가 이래 중국의 선승들을 거쳐 선문(禪門)에 전해져 내려오는 여려가지 어록을 발췌한 것으로 선사상을 공부할 수 있는 주옥과 같은 글들을 모아 집대성한 책이라고 한다.
이 책이 [철굴암]에서 간행된 해가 1531년인데 1540년대 초 20대인 <서산>대사가 [삼철굴암]에서 3년간 공부를 하였으니 당연히 이 책이 <서
산>대사의 사상적 기반을 다지는데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하였을 것이다.
실제, 이후 <서산>대사의 많은 저술에 [선문보장록]의 내용이 많이 인용되기도 하거니와, <서산>대사의 대표적인 저서이며 동시에 15세에
지리산에 첫발을 디딘 이래 2차에 걸쳐 18년 동안 머문 지리산을 미련 없이 떠나 다시는 돌아오지 않은 계기가 된 숙명적인 책이 [삼가귀감(三家龜鑑)]인데, 기본적인 형식에 있어서는 [산문보장록]을 따라 선승들의 어록의 요체를 뽑아 저술한 책이었으니 20대 <서산>대사에게 체계적인 선사상의 토양을 공급하며 중요한 영향을 끼친 곳이 바로 [철굴암]이다.
[삼철굴암] 중에서 목판 인쇄를 할 여건을 고려한다면 경사 가파른 산길을 따라 깊은 산중으로 들어가야 하는 [상철굴암]과 [중철굴암]은 적절치 안아 보이고, 의신사에서 평지와 같은 길을 따라 가까이 있는 [하철굴암]에서 불경 간행 작업이 이루어졌을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 같다.
이와 같이 <서산>대사가 조선불교 선종(禪宗)의 법맥을 잇고 있는 <부용>대사 밑에서 불교에 입문한 후에 [삼철굴암]에 3년을 머무는 동안 많
은 불경들을 통하여 선사상을 정립하여 후일 대선사가 되면서 숭유억불 정책으로 고사직전에 있던 조선 불교를 지켜내고 일으킨 중흥조로서 숭
상되는 기반을 다진 곳이 바로 [하철굴암]이라 할 것이다.
[하철굴암]은 의신에서 삼정으로 가는 도중에 만나게 되는 암자인데, 국립지리원 지형도에 [철굴암]으로 표기된 곳이 [하철굴암터]다.
그런데 지금은 철문이 꽉 닫혀있고 아무 기척이 없다.
지형도에는 [철굴암]이라 표기되어 있지만 의신마을 사람들은 [용화정사]라 부르고 있고 입구에는 [지리산 용화정사 일명 철굴암]이라 새
겨진 낡은 표지석이 넝쿨에 반쯤 가려져 있다.
이것으로 미루어보아 구전되어 내려오는 이름을 따다 붙인 [철굴암]이란 암자가 오래 전에 있었고 다시 용화정사가 들어섰다가 몇 해전에 개인에게 양도하여 지금은 사찰하고는 전혀 관계없는 개인의 별장으로 사용 중이라 한다.
**참고문헌
1. 화개면지편찬위원회 - [화개면지]
2. 하동군 - [서산대사 유적지 정비사업 계획서]
3. <서산대사> - [청허당집]
4. 하동문화원 - [하동군지명지]
5. 진주문화원 - [국역 진양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