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사람
<서산>대사의 지리산 자취 – 7. 대성동 지명 어원이 되었던 [대승사(大乘寺)]
<서산>대사는 [원통암]에서 출가한 이후 [삼철굴암]에서 3년 동안 선(禪)사상을 정진한 후 대승암으로 옮겨 다시 2년을 정진하였다.
이쯤 해서, 우리나라 불교의 중요 종파라고 할 수 있는 [교종(敎宗)]과 [선종(禪宗)]에 대하여 간략하게 알아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두 종파에 대한 이해는 <서산>대사의 자취를 이해하는데 중요할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문화재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불교의 석조 예술을 이해하는데 꼭 필요한 기본적인 소양이기도 하다.
하여, 불교에 대하여 전혀 지식이 없는 일반인의 상식 수준으로 이해할 수 있을, 일반인의 교양으로 갖추어도 좋을 쉬운 글이 있어 옮겨 놓는다.
--------------------------------------------------------------------------------------------------------------
[교종]은 경전과 가르침을 중시하는 불교 교파인데 비하여, [선종]은 인간은 누구나 불심이 있어 깨달으면 부처에 도달할 수 있다고 보고, 부분적인 지식의 축적으로는 전체적인 깨달음을 이룰 수 없기에 이론이나 지식에만 집착하는 [교종]과는 다르게 진리는 단번에 깨우치는 것임을 강조하여 참선을 통하여 직접적으로 진리에 도달할 것을 중시하는 방법으로 [이심전심] 등을 종지로 삼고 있다.
예를 들어, 제자가 선사에게 부처님에 대하여 물었을 때, 부처님을 경전에 근거하여 설명하려 한다면 이것은 교종적 방법이다. 그러나 이에 대하여 제자의 머리를 내리치면서 [너는 누구냐?]고 반문한다면 이는 선종적 가르침이 우리에게 시사해주는 예라고 할 수 있다.
-[야후]의 어느 블로그에서 발췌 (불로거에 대한 정보가 없어 기록하지 못합니다.)
-------------------------------------------------------------------------------------------------------------
모든 종교의 종파가 다 그렇듯 성인이 남긴 말씀과 진리는 하나인데 어떻게 해석하느냐 혹은 진리를 어떻게 실천하느냐의 방법론을 달리하며 종파가 나누어지는 것과 같이 불교의 종파인 교종과 선종도 그와 같다.
보다 더 쉽게 구분을 하자면, [교종]은 이론불교이고 [선종]은 참선불교이다.
<서산>대사의 말을 빌리면, [교종]은 부처님 말씀이고 [선종]은 부처님 마음이다.
우리나라은 삼국시대에 초기 불교 경전(교종)과 더불어 불교가 전파 되었는데 그당시 아직까지 절대적인 왕권을 확립하지 못하고 있던 신라의 왕조가 왕권 강화의 이데올로기로 불교(교종)를 이용하면서 불교가 왕성하기도 했지만 [교종]이 왕권불교로 오해를 받게 된다.
신라의 [교종] 불교는 왕즉불(王即佛)의 엄격한 체제로 이루어져있어 왕은 곧 부처요 귀족은 보살이고 대중은 중생이니 부처님 세계의 논리와 위계질서는 곧 사회구성체의 지배와 피지배 논리와 절묘하게 일치하는 것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중국에서 <달마>대사가 개창한 [선종]이 통일신라 말에 들어오게 되는데, 인간의 본심에는 다 불성이 있고 누구나 깨달으면 부처가 될 수 있다고 하였으니, 신라의 왕조 말기에 왕권에 대항하여 세력을 키우던 지방호족들에게는 더 없는 이념이 될 수 있었다.
이리하여 하대 통일신라 시대인 820년 <도의>선사에 의해서 중국에서 유입된 [선종]이 지방 호족의 성원을 받아 각 지방으로 전파가 되는데 이것이 바로 실상사를 비롯한 구산선문(九山禪門)의 개창이다.
이후, 고려시대에는 조선시대 억불정책의 빌미가 될 정도로 교종과 선종의 이론 논쟁으로 격심하게 대립하다가 결국 조선시대 교종과 선종에 두루 정통한 <서산>대사에 이르러 [선교(禪敎)일치사상]으로 인하여 사실상 선종으로 통합이 이루어져 오늘날에 이르게 되었다.
우리나라에 불교가 전래된 이래 700년 가까이 대립해온 선종과 교종의 통합을 이룬 <서산>대사가 [선종]의 법맥을 이어온 <부용>대사의 가르침을 받고 불교에 귀의한 이후 [삼철굴암]에서 [선종]의 선(禪)사상을 본격적으로 공부하여 사상적 저변을 다지고 나서 [대승암]에서 2년 동안 [교종] 사상을 공부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왜나하면, [대승(大乘)]이란 <원효>대사의 [대승철학]에서 비롯된 불교용어인데, <원효>대사는 신라 불교의
또한, <원효>대사는 [교종]으로 입문한 [교종]의 고승으로 분류되기는 하지만 특정 종파나 이론에 얽매임 없이 자유롭게 사상의 경계를 넘나들며 부처와 중생을 둘로 보지 않음으로써 스스로 [선종]의 사상을 깨달아 중생의 벗이 되어 귀족 불교에 머물던 불교를 대중화하는데 크게 기여하면서 결국 교종과 선종의 통합을 추구하였다.
조선말 마을과 지형을 알 수 있는 1918년도 지형도에 보면, 지금의 대성주막이 있는 곳에는 아무 표시가 없고 현재의 원대성에 [大成(대성)]으로 표기되어 있다.
즉, 대성마을의 원래 위치는 현재의 원대성이다. 그래서 [원]대성이라 부르고 있다.
[하동지명고]에 기록된 대성리의 유래는 다음과 같다.
------------------------------------------------------------------------------------------------
1914년 일제에 의해서 새로운 면리(面里) 제도가 공포되면서 진양지에 나오는 오리촌 지역을 [대성리]라 하였다.
[대성리]는 큰 도(도)를 이룬 분이 나와서 [대성(大成)]이라 했다 한다. 그러나 이는 일제가 행정구역을 통폐합하면서 모든 행정지명을 두자로 된 한문으로 바꾸면서 잘못된 것 같다. 지금의 원대성마을은 예부터 [대승암(大勝菴)]의 자리로 대성(大成)이 아니라 대승(大勝)이라야 옳다.
[진양지]의 기록에 보면 [대승암]뿐만 아니라 [고대승암], [상대승암]도 있었음을 알 수 있다.
------------------------------------------------------------------------------------------------------
말하자면, [대성]은 현재 원대성에 있었던 [대승암]을 어원으로 한 [대승]이 일제에 의하여 잘못 표기된 것이다.
어쨌든, <서산>대사가 2년동안 머물며 정진한 [대승암]은 현재의 원대성마을에 있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진양지]에 기록된 [대승암(大勝菴)]의 한자도 틀린 표기이다.
암자 이름에 큰 승리를 나타내는 아주 세속적인 단어인 [大勝]을 붙일 리도 없지만, [청허당집]에 수록된 [완산 노부윤에게 올리는 글]을 통하여 간략하게 <서산>대사가 직접 약력을 기록해 놓았는데 명확하게 [大乘寺(대승사)]라 표기되어 있다.
즉, [大成(대성)]도 [大勝(대승)]도 아닌 <원효>대사의 대승사상에서 따온 [大乘(대승)]이라는 것이다.
문서나 금석문으로 실증할 수 없는 경우, 옛 지명과 위치를 찾는데 가장 중요한 단서가 되는 것이 대대로 입으로 전해 내려오는 주민들의 구전(口傳)이다.
구전이라는 것이 경우에 따라 한줄기 연기와도 같이 사라질듯하면서도 이어가는 은은한 냄새와도 같이 오래 묵은 역사적인 사실을 전해 주거나 혹은 역사적 사실을 상징한 전설이나 설화로 전해주고 있는 것이다.
이번 탐구산행에서 지금까지 들어본 적이 없는 [원대성마을]과 관련된 비결서와 같은 바람처럼 떠도는 설화를 채집하게 되었다.
이 설화는 마을 주민들을 통해서가 아닌 승가(僧家)에서 은밀히 전해 내려오는 설화로 보이는데, <원효>대사가 <요석공주>와 [원대성마을]에 와서 기도를 하였다는 설화였다.
기도했다고 전해지는 곳 등을 살펴보며 떠났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원효>대사와 <요석>공주의 이야기는 역사적인 사실이라기보다는 의성의 빙혈을 비롯하여 우리나라 여러 곳에서 전해지고 바와 같이 설화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런데, <원효>대사의 설화가 [원대성]마을과 연관되어 전해진다는 것은 역사적 실마리의 단서가 될 것이다.
아마도, <원효>대사의 법문을 이은 승려가 그 곳에서 <원효>대사의 사상을 바탕으로 정진하였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며, 그러므로 <원효>대사의 대승사상을 상징하는 [대승사(大勝寺)]로 절 이름을 지어 <원효>대사의 사상을 전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교종]출신임에도 불구하고 [선종적] 사상을 스스로 깨우쳐 이상적인 철학을 정립하고자 했던 <원효>대사의 영향을 받아 <서산>대사가 훗날
700여년 치열하게 대립해온 선교 양종 일치를 추구하며 우리나라 불교계 역사상 대 업적을 이루게 된 것은 지리산이 천년의 역사와 사상을 아우르며 이어준 덕분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바로 지리산의 힘이며 의미이다.
의신에서 세석으로 가는 등산로를 따라 대성주막을 지나 원대성 갈림길에 다다르면 주변에 기와파편이 널려있다.
산중에 기와파편이 있다는 것은 바로 위에 암자터가 있다는 말이다.
삼거리에서 원대성 방향으로 10여미터 올라가면 등산로 바로 좌측에 잘 쌓아놓은 샘이 있고 그 안쪽으로 가운데 구들흔적이 남아 있는 곳이 <서
산>대사가 2년간 정진하였던 [대승암터] 추정지다.
*원대성 삼거리 주변에 널린 기와파편
*대승암터 석축
*대승암터 샘 (원대성 마을 부근에 있는 암자터는 한결같이 이와 같이 석축으로 잘 쌓은 샘을 가지고 있다.)
*암자터 가운데 있는 구덜흔적
*깊은 산중에서도 시원하게 전망이 트인 대승암터
**참고문헌
1. 화개면지편찬위원회 - [화개면지]
2. 하동군 - [서산대사 유적지 정비사업 계획서]
3. <서산대사> - [청허당집]
4. 하동문화원 - [하동군지명지]
5. 진주문화원 - [국역 진양지]
6. 동국대역경원 - [서산대사집]
7. 유홍준 - [나의 문화 유산 답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