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사람
<서산>대사의 지리산 자취 - 8. 원대성 주변 암자와 <원효>대사 설화
<원효>대사(617-686년)는 신라시대 [교종(교종)]의 고승으로 그 당시 전해지던 모든 불교의 경전에 대하여 주석서를 만들어 오늘날까지 유효한 불교 사상을 정립한 우리나라 불교계 역사에 최고의 사상가로 꼽히는 분이다.
특히, [무애사상(無碍思想 – 아무 것에도 일체의 구애됨이 없는 사람은 나고 죽음에서 벗어난다]으로 무장되었던 <원효>대사가 세상을 하나의 진리로 묶으려 하지 않으며 인류의 본원적 고민을 철학적으로 성찰한 [대승철학]은 우리나라 불교사상계를 넘어 세계적인 철학으로 평가되고 있다.
<원효>대사는 661년 <의상>대사와 함께 당나라로 유학을 떠나는 도중 밤에 오래된 무덤에서 잠을 자다가 잠결에 해골에 괸 물을 마시고 [이 세상의 온갖 현상은 모두 마음에서 일어나며, 모든 법은 오직 인식일 뿐이다. 마음 밖에 법이 없는데, 어찌 따로 구할 필요가 있겠는가]라는 깨달음을 얻었다는 [토감우숙(土龕寓宿)]의 일화가 유명하다.
또한, <원효>대사가 승려의 몸으로 쉰이 넘어 무열왕의 딸인 <요석>공주를 만나 단 3일간 사랑을 나누고는 떠나가버린 후 평생을 비련으로 살아간 여인의 애절한 사랑 이야기가 극적인 흥미 덕분에 우리나라 많은 곳에 <원효>대사와 <요석>공주에 얽힌 사랑의 설화가 전해지고 있다.
경북 의성 빙계계곡의 빙산원 부근과 경남 양산 산막리에 전해지는 설화는 거의 유사하게 <원효>대사가 기도하러 떠나간 후 <요석>공주가 어린 아들 <설총>을 안고 <원효>대사를 만나기 위해 기다리면서 살았다는 이야기가 전하며, 서울과 가까운 소요산에도 유사한 이야기가 남겨놓은 [원효대], [요석궁], [공주봉]등이 전한다.
그런데, 이와 같은 <원효>대사와 <요석>공주의 설화가 지리산에도 전해진다는 사실은 뜻밖이며 놀라운 일이다.
수년전 어느 스님이 홀연히 원대성마을에 나타나 대승암 터와 주변의 암자터를 둘러보면서 전해준 설화는 간략하게 다음과 같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대승암터는 원대성 입구에 있는 암자터이며, 원대성 마을 우측 집 뒤에 있는 암자터는 <원효>대사가 기도하던 곳이며, 원대성 마을 채마밭에서 좌측으로 넘어 들어가 처음 만나는 암자터는 <요석>공주가 기다리면서 <원효>대사를 만나던 곳이라고 한다.
<원효>대사가 신라시대 삼국통일 전쟁이 한창인 시기에 백제 땅인 의신의 깊은 산골까지 왔다는 것은 역사적 사실로 보기는 어려울 것 같다.
다만, [진양지]에 전해지는 [대승암], [상대승암], [고대승암]과 같이 <원효>대사의 [대승철학]과 관련된 암자명이 집중하여 존재했던 사실과 뜻밖의 <원효>대사 설화가 원대성에 전해진다 것은 결코 우연은 아닐 것이며, 원대성 주변 암자를 통하여 <원효>대사의 법맥이 전해졌음을 말해주고 있다할 것이다.
그런데 흥미로운 점은, [진양지]에 의신 주변의 사찰을 나열하면서 같은 소 지역에 있는 암자들을 묶은 분류 원칙에 의하여 정리를 해 놓았는데 의신과 대성주막 부근에 있었던 암자들을 각각 별도로 분류해 놓은 다음, 다음과 같은 분류가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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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정대(隱靜臺), 대승암(大勝菴), 고대승(古大勝), 상대승(上大勝), 서대(西臺), 동암(東菴) : 모두 삼신동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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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대승]의 한자를 [大勝]으로 기록한 것은 [大乘]의 오기임을 앞서 검토한 바 있고, 삼신동은 [진양지] 곳곳에 신흥 주변으로 국한하여 지칭하고 있으며, 신흥 주변의 암자는 별도의 항목으로 나열해 놓았으므로 [대승암]과 함께 분류해 놓은 암자들이 삼신동(신흥)에 있었다는 것 또한 오기로 보인다.
교통과 통신이 원시수준을 벗어나지 못한 1600년대에 진주에 앉아 [진양지]를 만들면서 서쪽 끝 에 있던 화개현 오지 마을들의 사정을 기록하는데 따른 정확도의 한계를 감안하면 명백해 보이는 오기들은 이해 될 수 있을 것 같다.
아무튼, [대승]이 들어간 암자가 3개나 포함하여 별도로 분류해 놓은 암자들은 모두 원대성 주변에 있었던 암자를 묶어 놓은 것으로 볼 수 있다.
오늘날 원대성 주변에 남아있는 암자터는 [대승암]터를 제외하고 다음과 같다.
1. 원대성마을을 가로지르는 등산로를 따라 좌우에 있는 가옥을 지나 우측 가옥의 뒤에 있는 넓은 초지로, <원효>대사가 기도하던 곳으로 전해지는 곳이다.
2. 원대성마을 삼거리에서 원대성 마을로 올라가면 좌측에 [대승암터]를 지나 좌측에 단정한 채마밭이 나오는데 채마밭 앞에서 좌측으로 올라가 낮은 고개를 넘어 산길을 따르면 곧 만나게 되는 움막이 있는 곳으로, <요석>공주가 <원효>대사를 기다리며 만나던 곳으로 전해지는 곳이다.
3. 그리고, 이곳에서 더 서쪽으로 진행하면 엄청난 바위 위에 얹어 놓은 듯 움막이 있는 곳이다.
[대승암]터를 제외하고는 구전(口傳)으로라도 암자명이 명확하게 전해지는 곳은 없으니 현재 남아 있는 암자터에 [진양지]에 나오는 암자이름을 연결하여 확정할 수는 없다.
다만, <원효>대사의 설화를 참고하여 추정을 해 본다면 원대성 위에 있는 암자터가 [대승사]의 가장 위에 있는 암자터이니 [상대승암(上大乘菴)]으로 추정해본다.
또한, <원효>대사와 <요석>공주가 기거했다는 옛이야기를 전하고 있는 암자터가 [고대승암(古大乘菴)]이 아니었을까 추정해본다.
여기서 서쪽으로 높고도 거대한 바위(臺)위에 있는 암자터가 [서대(西臺)]에 딱 맞아떨어지는 곳이다.
아마도 주변을 세밀하게 찾아본다면 나머지 [은정대]와 [동암]에 비정될 수 있는 암자터도 분명 있을 것이다.
(현재 남아 있는 두 민가는 주변의 지반과 기와 수습 상황을 보아 암자터는 아니지 않나 생각된다.)
여기서 한 가지 더 검토해볼 사항은, <서산>대사가 스스로의 약력을 간단하게 정리해 놓은 [완산 노 부윤에게 올리는 글]을 보면 유독 [대승암(大乘菴)]이 아닌 [대승사(大乘寺)]라 기록되어 있다.
말하자면, 단독 당우를 가지고 있는 암자 보다는 규모가 컸다는 뜻인데 [상대승암]과 [고대승암] 추정지를 비롯하여 원대성 전체가 [대승사]로 이루어졌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는데, <서산>대사가 지리산에서 활동한 때에서 100년도 지나지 않은 시기에 편찬한 [진양지]에 각 암자 이름이 독립적으로 거명된 점 및 그럴 경우 산중에 있는 사찰의 범주 치고는 너무 넓게 되고, <서산>대사 이외에 [대승사]를 언급한 문헌이 일체 보이지 않는 점을 고려한다면 선뜻 동의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아마도, [대승암]터 자체도 넓을 뿐만 아니라 바로 위 채마밭을 비롯하여 [대승암]터 부근에 두어 채 부속 당우가 더 있는 규모로서 시대별 상황에 따라 암자 이름이 암(菴)이 되었다가 사(寺)가 되기도 한 애매한 규모의 사찰이 아니었을까 짐작해본다.
[상대승암] 추정지에서 등산로를 따라 아래 쪽으로 많지는 않지만 기와 파편이 보이며, [고대성암]과 [서대]추정지에도 기와가 보인다.
암자터의 필수 조건으로 당연한 이야기이겠지만, [대승사]터를 비롯하여 원대성 부근에 있는 암자터([서대]터 제외)에는 한결같이 잘 축조해놓은 샘이 있다.
*[삳대승암]터 추정지에 있는 샘
*[상대승암] 추정지에서 흘러내렸을 기와파편
*채마밭 너머로 [고대승암] 추정지로 넘어가는 길이 보인다.
*[고대승암] 추정지에 있는 움막
*[고대승암] 추정지
*[고대승암] 추정지의 샘
*[고대승암] 추정에에 흔하게 볼 수 있는 기와파편
*엄청 큰 바위 위에 앉은 [서대] 추정지에 있는 움막 (주변에서 가장 기도빨이 좋은 곳이라 전하는데 전경이 예술이다.)
*[서대] 추정지 (이곳에는 샘을 보지 못했는데 가까운 곳에 계곡이 있다.)
*[서대] 추정지에 있는 기와파편
이와 같이, [선종]의 승려였던 <서산>대사가 [대승사]를 중심으로 원대성 일대에 산재해 있는 암자를 오가며 어느 종파에도 치우치지 않았던 <원효>대사의 가장 큰 가르침인 [무애사상]을 받아들여 하나의 진리에 머물지 않고 일체의 구애됨 없이 [교종(敎宗]]의 고승인 <원효>대사의 불교 사상을 비롯하여 다양한 사상을 아우르며 정진한 결과, 이때가 27세 전후였는데 5년 뒤 33세 때 조선초 억불정책으로 폐지했던 승과(僧科)가 부활하여 첫 시험에 응시하여 장원급제를 하게 되고, 그리고 3년 뒤 36세의 나이로 당시 불교의 [선종]과 [교종]을 총괄하는 승직의 최고직위인 선교양종판사(禪敎兩宗判事)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원대성을 지나거든 흩어진 기와 조각에서 이곳에서 하나의 진리에 얽매이지 않고 열린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보았던 <원효>대사와 <서산>대사의 지
리산에서의 흔적을 헤아려보며, 고정관념 혹은 아집에 빠져 진리에 눈뜨지 못하고 세속에 휩쓸려 허우적거리는 것은 아닌지 되돌아 보아야겠다.
**참고문헌
1. 화개면지편찬위원회 - [화개면지]
2. 하동군 - [서산대사 유적지 정비사업 계획서]
3. <서산대사> - [청허당집]
4. 하동문화원 - [하동군지명지]
5. 진주문화원 - [국역 진양지]
6. 동국대역경원 - [서산대사집]
7. <일연> - [삼국유사]